난각의 창 아래에는 앵두나무로 꽃무늬를 조각한 침상이 깔려 있었고, 청색과 금색으로 테를 두르고 밝은 황색으로 만복 무늬가 들어간 섬단(闪缎)으로 요를 만들어 깔아 놓았으며, 침상에는 백단목에 금으로 구름을 새기고 다리가 가느다란 작은 탁자를 하나 올려두었는데, 위에는 다과가 놓여있어서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이 마침 한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 같았다. 평소처럼 마주 앉았기 때문에 황후는 다만 단순하게 머리를 높이 틀어올리고 진주 꿰미로 장식된 비녀와 귀밑머리에는 비단으로 된 앵두꽃 조화를 꽂았으나 몇가닥 정교한 술이 달린 은비녀였을 뿐이고, 몸에는 자줏빛 작약과 장수문(长寿纹)을 비단실로 수놓은 저고리를 입었는데, 난각 안의 따뜻한 온기를 쬐니 얼굴의 홍조가 도드라졌다. 황후는 여의가 문안을 올리는 것을 보..
궁중의 밤이 어찌나 길고 깊은지 이태껏 이러한 굴욕과 수난을 겪은 적이 없던 여의는 처음으로 몹시 피곤했다. 여의는 애당초 부드러운 베개를 베고 깊이 잠들려 했으나 창밖의 처량한 바람소리를 들으니 침전 밖에 걸려있는 암홍색 궁등 두 개가 바람에 마치 팔랑개비가 돌 듯 흔들리고 있었다. 여의는 창밖의 등불을 바라보니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하여 마치 천 갈래 만 갈래 뒤얽힌 마음이 한 가닥 한 가닥 팽팽하게 당겨져오는 것 같았다. 침대 아래에 있는 예심의 숨소리가 이미 평온하고 규칙적이어져 깊이 잠이 든 듯 보였다. 여의는 문득 한 조각 부러운 마음이 들어서 마치 예심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동틀 때까지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복이라고 생각했다. 여의는 돌아누워 얼굴을 꽃이 가득한 부드러운 비단 ..
여의는 층계 아래로 끌어내려져 무릎 꿇려졌다. 눈발이 거칠게 얼굴을 때리니 살갗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처음에는 아프다고 느꼈으나 점점 감각이 없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자락 위에는 옅은 얼음이 얼었다. 여의는 해란이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일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마치 한 덩어리 들불이 속에서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아서 다시금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귀비마마, 마마께서 해상재를 호되게 꾸짖든 때리든 제가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허나, 해상재도 역시 황상의 비빈이니 마마께서 해상재에게 이렇게 치욕을 주실 수는 없사옵니다. 더욱이 노비들의 면전에서라뇨. 만일 정말로 해상재의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해야 한다면 마마께서는 해상재를 핍박하여 죽게 하시려는 것이옵니다!" 해란은 엉엉 울며 마치..
삼보의 말이 막 떨어지자 화로 안에서는 마침 숯이 놀란 사람처럼 불꽃 몇개를 터뜨리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의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찬찬히 말해보거라." 아약이 샐쭉거리며 말했다. "삼보가 갈 수록 꼴이 말이 아니옵니다. 호들갑을 떨면서 말도 똑바로 못하고. 혜귀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폭죽을 터뜨리며 슬쩍 즐거워할 것이고 해상재에게 일이 생긴 거라면 그건 문제될 것 없으니 느긋하게 말하면 그만이죠." 여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혜귀비라면 삼보가 이렇게 분별없이 굴겠느냐?" 삼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곧바로 말했다. "사달이 난 것은 해상재이옵니다. 두 시진 전에 혜귀비 궁에서 소란이 일어났사온데, 귀비가 쓰는 홍라탄을 다 썼다고 하..
여의는 예희를 데리고 함께 어화원에서 영화궁으로 돌아갔다. 큰 눈이 처음 멎었기 때문에 길에는 눈을 치우는 궁인들이 적지 않았고 두 사람을 보자 분주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러나 예희의 맞아서 상한 얼굴이 각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서 비록 궁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릴 때에도 훔쳐보는 눈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놀라고 의아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희는 마치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대했지만 망토에 달린 널찍한 모자로 덮어 상처를 덮었을 뿐만아니라 궁인들의 무례한 행동을 저지하지도 않고 그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대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궁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서둘러 맞이하며 여의와 예희의 망토와 모자를 받아들고 손난로를 새..
이 날 밤은 섣달 초하루라 황제는 관례에 따라 황후의 궁에 머물었다. 여의는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창밖의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등불을 마주하고 고민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아약이 온몸에 쌓인 눈송이를 털며 들어와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소주." 여의는 주전자에 들어있던 잔을 잔에 따라 아약에게 주고 다시 난로를 쥐여주었다. "먼저 따뜻한 차를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거라." 아약이 추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차를 받아서 단숨에 마셔버리니 비로소 따뜻해졌다. "모두 자세히 물어보았사옵니다. 매답응은 확실히 우리 부 출신이옵고 경인궁 마마의 손에 들여보내졌사옵니다. 그 때 선제께옵서 남부의 악기를 골라 채우셨던 것에 불과하여, 각 부에서 모두 괜찮은 사람을 골라 들여 보낸 것이라 우리 집안에서만..
혜귀비는 장춘궁을 나와서 가마 위에 앉아 뺨을 고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말심, 너는 검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 먼저 궁으로 돌아가거라. 채주와 채월은 남아서 본궁이 양심전에 황상을 뵈러 가는데 따르거라." 말심이 "예"하고 대답하고는 채주와 채월에게 잘 모실 것을 당부하고 먼저 돌아갔다. 혜귀비는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운 것은 아랑곳않고 가마를 멘 태감들을 다그쳐서 길을 재촉하여 양심전으로 갔다. 막 양심전 문 밖에 도착하자 왕흠이 혜귀비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예를 올리며 맞이하고는 직접 혜귀비가 가마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며 말했다. "귀비마마, 섬돌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고 소인의 손을 쓰시옵소서."혜귀비가 배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왕 공공이 수고가 많소. 지금 황상께서는 무엇을 하고 ..
황후가 마침 소심에게 명을 내리려 할 때, 밖에서 알림을 전하는 태감 특유의 날카롭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귀비 들었사옵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흰 등나무 사이로 꽃을 수놓은 비단 장막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밖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다. 한 미인이 날렵하게 걸어들어오자 소심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혜귀비께서는 만복과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혜귀비가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매일 보는데 그리 예의 차릴 것 까지야.” 혜귀비는 시녀 말심이 바람막이 망토를 풀도록 맡기며 말하고는, 날렵하게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마마께서는 만복과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황후가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앉게. 본궁도 자네의 그 말을 똑..
자금성의 밤은 유난히 깊은 듯 했다. 여의는 왕부에 있을 때의 집도 큰 저택이어서 복진과 시첩들도 각자 자신의 누각과 뜰이 있었고, 비록 그곳의 밤은 짧았지만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볼 수 있었음을 떠올렸다. 자신의 누각에 서서 몇개의 뜰을 지나면 홍력의 서재인지를 묵묵히 헤아렸다. 밤에 답답하여 밖으로 나와 몇 걸음 걸으면 곧 다른 첩실의 처소였다. 비록 만나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총애를 다투었지만, 이는 모두 눈 감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숱한 것들 중에 찻물을 따르고, 점심을 들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은 몇몇 작은 것들이 외로움을 메웠다. 홍력이 누구의 누각으로 가면, 그 은총을 받은 사람의 누대의 촛불 역시 유난히 좀 더 눈부셔서, 마음아픔과 질투를 모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
태후는 자녕궁 회랑에 서서 복 상궁이 궁인 몇 명을 지휘하여 화방에서 보내온 ‘황학령(黄鹤翎)’과 ‘자하배(紫霞杯)’ 화분 수십 개를 가지런히 진열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마침 해가 지며 노을이 하늘 가득 퍼져 마치 매우 좋은 비단 한 폭 같아서, 이 노란 국화와 자색 국화들을 비추니 휘황찬란했다. 복 상궁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자녕궁의 정원이 무척 널찍하고 탁 트였사옵니다. 만일 수강궁에 있었으면 이 국화 화분들을 둘 곳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복 상궁은 태후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덧붙였다. “이는 황상의 효심이오니, 그날 황후를 이끌고 친히 오셔서 마마께 궁을 옮기시라 청하셨죠. 이제 좋은 것은 모두 먼저 마마께서 쓰시도록 보내오시고요. 화방에서 피운 제일 좋은 자색 국화도 모두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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