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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는 예희를 데리고 함께 어화원에서 영화궁으로 돌아갔다. 큰 눈이 처음 멎었기 때문에 길에는 눈을 치우는 궁인들이 적지 않았고 두 사람을 보자 분주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러나 예희의 맞아서 상한 얼굴이 각별히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서 비록 궁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릴 때에도 훔쳐보는 눈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놀라고 의아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희는 마치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대했지만 망토에 달린 널찍한 모자로 덮어 상처를 덮었을 뿐만아니라 궁인들의 무례한 행동을 저지하지도 않고 그저 아무렇지 않게 걸어갈 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대는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궁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서둘러 맞이하며 여의와 예희의 망토와 모자를 받아들고 손난로를 새로 바꿔주었다. 시종들은 예희의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놀라고 의아했지만 차마 감히 묻지 못하고 그저 예희의 궁중의 지엄한 법도를 생각하여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한 마디도 물을 수 없었다. 여의는 사방을 훑어보고는 새롭게 꾸민 커다란 영화궁에 시중드는 궁인이 귀인인 황기운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숯불도 답응이라면 본래 사용할 수 없는 홍라탄이 궁중을 마치 봄같이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옆에서 시중드는 아약이 자기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여의가 알아차리고는 곧이어 말했다.

"아약, 가서 시비들에게 붓기를 가라앉히는 고약이 있는지 묻고, 만일 없다면 서둘러 사람을 보내 태의원에서 가져오게 하거라."

아약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자 마침 밖에 있던 말단 태감이 들어와 고하기를 내무부에서 새로 만든 편액을 정전에 걸러 왔다고 말했다. 예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어오라 해라."

내무부의 집사 태감이 공손하게 편액을 받쳐들고 들어오니, 커다란 금칠한 편액에 '의소숙신(仪昭淑慎)'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있었다.

여의는 곧바로 출처를 알아차리고서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매답응, 이것은 황상의 어필이 아닌가."

집사태감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한비마마께옵서 안목이 좋으시옵니다."

예희는 그 네 글자를 조용히 읽어보고는 말했다.
"이 몇글자는 제가 모두 아는 것인데 한데 모아놓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한비마마께서 아신다면 알려주시겠사옵니까."

여의가 가볍게 웃었다.
"<의례(仪礼)>에서 말하기를, '공경하면 위엄이 있고, 정숙하며 삼가면 덕이 있다'고 했네. 아녀자가 온화하고 선량하며 신중하면 예와 덕을 보존한다는 뜻이지."

예희는 살짝 비웃으며 조금 무시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럼 한비께서는 제가 이 네 글자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여의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황상께서 이 편액을 영화궁에 내리셨고 황상께서 자네를 영화궁에 거하라 허락하셨으니 당연히 자네가 이 네 글자를 짊어져야 하는 것일세."

예희의 시선이 편액 위에서 머뭇거리며 한 줄기 쌀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여기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할텐데,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이게 모두 제게 돌아오게 되었네요."


집사태감이 직무를 수행하려고 서둘러 예희의 지시를 구했다.
"매소주의 말씀은 이것을 곧바로 올려 걸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영예는 당연히 숨겨서는 아니되지. 어서 걸게."

집사태감이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적갈색 옷을 입은 말단 태감들을 몇 데려와 일을 시작했다. 집사태감이 아첨하는 얼굴로 말했다.
"한비마마, 매소주, 여기에 편액을 거느라 못 박는 소리가 너무 커서 두 분을 시끄럽게 할까 걱정이옵니다. 두 분 소주께서는 잠시 자리를 옮기시어 옆의 난각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소인들이 곧장 마치도록 하겠사옵니다."

예희가 말했다.
"나는 이 소리가 짜증스러우니 한비마마께서는 저와 함께 난각에 가서 잠시 앉아 계시지요."

여의는 여기에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으나 잠시 생각하고는 매답응과 함께 난각으로 들어갔다.

난각 안은 좀 더 조용했고 여의가 보니 시중드는 궁인들도 드나들지 않아서 이윽고 물었다.
"얼굴의 상처와 붓기가 심하구나. 아랫사람들을 불러 삶은 계란을 가져와 문지르게."

예희가 피식 웃었다.
"이런 아랫사람들의 재주를 저는 그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사오니 마마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의는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자네가 총애받는 것을 보고 자네가 하는 말을 들으니 자네는 자네의 출신을 꽤나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네."

예희는 호갑을 들고 회양목 나무로 만든 작은 탁자 위를 긁으면서 차갑게 웃었다.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제가 처음 시침하고 답응으로 봉해졌을 때부터 모두가 까마귀가 닭보듯 저를 주시하면서 걸핏하면 제 출신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저를 집어삼키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지요."

여의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사람의 출신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니, 남과 비교하며 마음에 두면 다른 사람이 좋아할 일이야."

예희는 검고 차가운 눈동자로 여의의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본래 출신이 오라나랍 씨인 것은 한비마마께도 커다란 약점이지요."

여의는 예희의 말이 뜻밖에도 이렇게나 신랄해서 이윽고 고요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본궁이 이것을 아픈 곳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본궁을 아프게 할 수 없는 것이네."

여의의 시선이 떠돌았다.
"오히려 자네는 사람들에게 본궁과 같은 부류라고 여겨져서 적잖이 억울함을 당할 걸세. 사실 본궁도 알고 싶은 것이 있네만, 도대체 어쩌다가 하룻밤의 행운으로 단번에 지위가 오르게 된 것인가?"

예희의 호갑이 작은 탁자 위에서 '찍'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른사람들은 모두 빈첩이 오라나랍 관저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한비마마의 사주로 황상의 은혜를 입는 행운을 얻었다고 하지만, 이제보니 마마께서는 빈첩이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하시는군요."

매답응이 냉담하게 말했다.
"빈첩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면 다행이지요. 이 한평생은 모두 운명을 따르는 것이지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마마의 성정이 조금 안하무인이시기 때문에 비로소 마마와 몇마디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기왕 이리 되었으니 빈첩은 쉬어야겠습니다. 그만 가보시지요."

매답응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궁녀가 들어왔다.
"소주, 황후마마를 모시는 소심 마마님이 와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예희가 차갑게 말했다.
"무엇하러 왔다더냐?"

궁녀가 말했다.
"소주께 말씀 올리옵니다. 태의원에서 보낸 약을 가져왔다고 하옵니다."

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오라 해라."

여의가 일어나 나가려 하자 예희가 말했다.
"방금 한 말로 노여움을 샀사오나, 한비마마께서는 저 대신 한번 봐주시옵소서. 혹시 다른 뭔가를 보내온 것인지는 저도 모르옵니다."

여의가 어째서 황후가 분부하여 자신을 예희에게 보냈는지를 생각하고 있자니, 곧 소심이 들어왔다. 자신이 없으면 시비가 일어날까 걱정되어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심이 들어와 무릎을 굽혀 절하며 말했다.
"한비마마, 매답응, 소인 귀비마마의 명을 받잡아 특별히 태의원에서 가장 좋은 붓기 가라앉히는 고약을 받아와 매답응께 드리옵니다."

예희는 냉소했다.
"혜귀비께서는 참으로 마음이 고우시지! 방금 나를 때리시고는 곧바로 약을 보내오시니 병주고 약줘서 끝내시려는 것인가? 이 약은 내가 참으로 감히 쓰지 못하겠구나."

소심은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연고를 들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득이 여의를 보며 도움을 청했다.
"한비마마......"

여의가 소심에게 손을 뻗었다.
"어디 보자."

손에 넣은 것은 분청사기로 만든 둥근 사발로, 안에는 옅은 녹색의 반투명한 연고가 가득 들어있었고 코를 찌르는 청량한 향기에 은은하게 벌꿀과 박하, 진사 냄새가 났다. 여의가 조금 덜어 냄새를 맡아보자 확실히 늘상 사용하는 붓기 빼는 연고로 다른 것은 없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궁중에서 평소 사용하는 붓기 빼는 연고가 확실히 이런 종류야. 그밖에 얼음으로 문지르거나, 부드러운 달걀을 사용하거나, 고구마를 먹거나, 율무와 삼칠초 가루 모두 피를 돌게 하고 어혈을 푸는 효과가 있지."

소심이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한비마마의 말씀에 틀림이 없사옵니다. 붉은 팥과 율무를 끓인 탕도 붓기를 가라앉히옵니다. 사실 귀비마마께서 소주께 벌을 내리시고나서 스스로 많이 후회하셨고, 황후마마께도 한바탕 훈계를 들어서, 서둘러 분부하시어 황상께서 소주를 찾으실 때 시중드실 수 있도록 소인이 약을 가지고 온 것이옵니다. 소주께서는 안심하소서. 이 약을 바르기만 하면 사흘이면 모두 가라앉사옵니다."

"사흘이라고?"
예희가 비웃었다.
"자네는 이 사흘 동안 황상께서 나를 찾지 않으시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나?"

소심이 몸을 숙이며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황상께서 찾으시면 소주께서는 대세를 고려하시어 절대로 화를 내거나 떠들지 마시라 하셨사옵니다. 귀비께도 황후마마께서 이미 호되게 꾸지람을 내리셨사옵니다. 만일 또다시 분란이 생긴다면 소주께서도 오늘의 일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하실 것이옵니다!"

예희는 조금 말문이 막혔으나 곧 냉랭한 말투로 돌아왔다.
"그럼 나대신 황후와 귀비께 감사의 말씀을 올려주게. 이 얼굴을 없었던 일로 하자 하시니 이번 일은 내가 포기해야지."

소심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매답응께서는 새로이 총애를 받으시니 반드시 앞으로 걸음걸음 순조로우시고 매사 만족스럽게 되실 것이옵니다. 소주께서 이리도 총명하시고 큰 국면을 보실 줄 아시오니 반드시 그리 될 것이옵니다."

말을 마치자 소심은 곧 물러갔다. 여의는 조금 앉아있다가 일어나 작별을 고하고 떠나왔다.

혜귀비는 궁녀의 손을 잡고 긴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며 설경을 바라보니 안색도 평온해졌다. 막 건복문 복도를 지나는데 갑자기 앞에 녹색 옷을 입은 태감이 수상쩍게 굴며 두 사람을 데리고 함복궁 측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혜귀비는 잠시 멍해있다가 시중드는 궁녀 말심에게 말했다.
"가서 보고 오거라. 누가 이리도 수상쩍게 함복궁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것이냐."

말심이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 엄하게 외쳤다.
"거기 누구냐! 마마를 뵙고도 어찌 꿇지 않는 것이냐! 속히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그 녹색 옷을 입은 태감이 발을 동동거리다가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몸을 돌려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소인 혜귀비를 뵈옵니다. 귀비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평안이라?"
혜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너희들이 본궁을 보고서야 무릎을 꿇으니 본궁이 어찌 평안하겠느냐? 고개를 들어라!"

그 녹색 옷의 태감이 머뭇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말심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보성?"

혜귀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너는 연희궁의 사람이 아니냐. 본궁의 함복궁에 와서 무얼 하는 것이냐?"

보성이 눈치 빠르게 넙죽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모두 지난 날 내린 큰 눈 때문이옵니다. 소인이 지나다 얼어죽을 것 같아서 함복궁의 담장에 기대어 조금 몸을 녹이다 가려 하였사옵니다. 마마께서 오셔서 보실 줄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마마께서 꾸짖으실까 두려워 돌아서서 도망가려 하였사옵니다."

혜귀비가 눈살을 찌푸리니 믿는 것 같지 않은 기색이었다.
"함복궁은 동쪽 제일 끝에 있고 연희궁은 동쪽 제일 앞에 있는데 너는 몸을 녹이러 참으로 멀리까지 왔구나."
혜귀비는 보성이 엎드려 있는 눈밭 위에 양손에서 새까만 흔적이 번져나오는 것을 언뜻 보고 눈을 들어 말심에게 나아가 들여다 보라고 눈짓했다. 말심이 의중을 깨닫고 앞으로 몇걸음 나아가 보성을 잡아당기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함복궁까지 오는 것을 좋아한다니 어쩌겠나? 함복궁의 지기(地气)가 따뜻하여 황상께서도 즐겨 찾으시니 너라고 다르겠느냐."
말심은 고개를 돌려 혜귀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혜귀비가 뜻을 알아차리고 분위기를 바꾸어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별일 없다면 되었다. 너희 한비에게 가서 틈이 나면 함복궁에 자주 왕래하라 전하거라."

삼보는 이 말에 깜짝 놀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뜻밖에 이렇게 추켜들어주니 서둘러 사은하고 나왔다. 혜귀비는 이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바닥에 남은 여섯 개의 손바닥 자국을 보고는 비웃었다.
"본궁 앞에서 감히 영리한 척을 하다니. 말심,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

말심이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더니 이상히 여기며 말했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이 새카만 것은 숯을 태운 재인데 그 중에서도 흑탄의 재이옵니다."

혜귀비가 이상히 여겨 말했다.
"흑탄은 그리 좋은 물건도 아닌데 설마 연희궁에서 이게 모자라서 훔치러 왔을까?"
혜귀비는 생각이 어느 곳에 이르자 암암리에 이를 악물었다.
"아니다, 그녀가 해란에게 준 것이야!"

말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귀비는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하얀 얼굴이 자주빛으로 물들었다.
"보아하니 가리엽특 씨가 참으로 지독하구나. 본궁이 그녀의 탄을 조금 썼기로서니 감히 여기저기 가서 억울하다 울며 하소연하고 다녔구나! 주변에서 다른 사람이 와서 구제하게 하고 본궁이 각박하게 굴었다 하겠지!" 말심이 서둘러 말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후궁에서 검약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고, 해상재의 처소에는 사람이 몇 없으니 쓰면 얼마나 쓰겠사옵니까. 마마께서 대신 절약해주셨으면 된 것이지요. 해상재가 이리도 근검절약하지 못할 줄은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혜귀비는 새하얀 이를 악물며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
"해상재와 연희궁이 한 마음 한 뜻인 것을 본궁이 생생히 보았구나. 본궁의 도움을 받으면서 몰래 연희궁과 내통하는 못된 것 같으니라고......"
혜귀비는 입술을 오므리며 더 말하지 않았다.

말심은 한 줄기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숙이며 다가와 황급히 말했다.
"마마, 바깥은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혜귀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심의 부축을 받으며 궁으로 들어갔다. 마침 내무부의 집사 태감이 영화궁에서 나와서 함복궁에 편액을 거는 일을 마치고 손을 닦으며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 혜귀비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서둘러 얼굴에 미소를 띠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리고 아첨하자 혜귀비는 무척 기쁜 듯 궁중의 수령태감 쌍희에게 분부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편액을 걸러 오다니 본궁을 대신하여 크게 상을 내려라."

집사 태감은 기뻐하며 더더욱 아첨하는 말을 보탰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함복궁의 이 편액은 자덕합가(滋德合嘉)로 혜귀비마마께서 복과 덕을 더욱 갈고 닦으라는 뜻이라 하옵니다. 이 뜻은, 듣기로 황상께서 아주 오래 심사숙고하시어 결정하신 것이라 하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함복궁의 물건에는 함부로 붓을 댈 수 없으며 반드시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하셨사옵니다."

혜귀비는 흥미롭게 황상의 어필을 자세히 감상하며 봄꽃처럼 웃었다.
"황상의 어필은 참으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 이 편액은 본궁의 궁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황후의 궁중에도 있는 것인가?"

내무부 집사 태감이 얼이 빠져서 잠시 답을 올리지 못했다. 혜귀비는 집사 태감을 흘긋 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이 두려운 게냐? 황후마마의 궁중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설마 본궁이 황후께 질투라도 하겠느냐?"

집사 태감이 하는 수 없이 말했다.
"황후마마의 궁중 뿐만 아니라 황상의 분부에 따라 동서 육궁에 모두 있사옵니다."

혜귀비의 미소에 일순간 서리가 내린 것 같았으며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이미 노기가 어렸다. 혜귀비의 미소와 노한 표정은 모두 본래 무척 아름다웠지만 이때의 기이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표정은 보는 사람을 더더욱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럼 영화궁에도 있느냐?"

집사 태감은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저 전전긍긍하며 대답했다.
"예."

혜귀비가 매섭게 물었다.
"무슨 글자더냐?"

집사 태감이 말했다.
"의소숙신이옵니다."

혜귀비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어지며 호통쳤다.
"잘 어울리는구나!"

집사 태감이 겁결에 쿵하고 무릎을 꿇으며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매답응도 자신에게 걸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특별히 한비에게 뜻을 물었고, 한비께서 말씀하시길 황상께서 영화궁에 주신 편액이고 매답응이 영화궁에 거하고 있으니 매답응이 떠안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사옵니다. 매답응은 그제서야 기뻐했사옵니다."

희월의 안색이 변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어두워져서 천천히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물러가보거라."

집사 태감은 이 한 마디를 듣자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나와서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혜귀비는 정전 문 앞까지 걸어가 바깥의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밝은 햇빛을 바라보았다. 해란이 거주하는 서쪽 전각에서는 엽심이 마침 화로를 들고 나와 다 타버린 검은 재를 담장 모퉁이에 던져놓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혜귀비의 눈빛은 바깥의 눈보다도 더욱 차가웠다.
"쌍희, 너는 해상재 처소를 잘 지켜보고 있다가 연희궁에서 사람이 얼마나 자주 몰래 오가는지 알아보거라."

쌍희는 혜귀비의 표정이 평소와 같지 않은 것을 보고 사안이 엄중하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대답했다.



이 며칠간 연말의 명절을 바쁘게 보내고 무인일(戊寅日)에 황제는 황태후에게 '숭경황태후'라는 칭호를 올리며 공손하게 예를 다했다. 뒤이어 준가르에서 사자가 화친을 청하러 오자 객이객 찰살극(喀尔喀扎萨克)[각주:1]에게 명하여 국경을 정하는 일을 맡기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이 날 밤은 밤새 눈송이가 창문에 닿는 소리를 내며 꽃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처럼 내렸다. 여의는 난각에 앉아 예심이 가져온 화로의 불꽃을 뒤적거리며 초겨울에 딴 솔방울과 측백나무 가지를 올려놓자 오래지않아 맑고 진한 송백향이 퍼져나갔다. 아약은 예심이 서둘러 방 안의 침대와 깔개를 정리하고 여의가 난각의 길고 낮은 침대에 기대어 책을 보는 것을 보고는 양가죽 담요를 안고 들어와 여의에게 덮어주고 발치의 난로에 불을 새로 갈아서 더욱 따뜻함을 더했다.

아약은 여의가 들고 있는 책에 푹 빠져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소주께서는 요 며칠동안 이 <수신전(搜神传)>[각주:2] 제일 즐겨 읽으셨는데 오늘은 어찌 별로 재미가 없으신 것 같사옵니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 신선과 귀신의 괴이한 것들의 이야기인데 자꾸 보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여기에 틀어박혀서 울적해지는구나."

아약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찌 아니 그러겠사옵니까? 소주께서 친정에 계실 때에 가장 좋아하셨던 것이 몰래 빠져나가 밖에서 말을 타시는 것이었지요. 지금 눈이 내려서 이렇게 안에만 틀어박혀계시니 소주께서 힘이 없으신 것도 당연하옵니다."

여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다시 물었다.
"황상께서는 며칠동안이나 시침들 사람을 부르지 않으셨지?"

아약이 차를 더 따르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듣자하니 준가르의 일로 계속 바쁘시어 끝도 없이 대신들을 만나시고 상소를 보셨다고 하옵니다. 경사방에서 녹두패를 보내와도 모두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왔다고 하며, 황상께서 보실 생각도 안하셨다고 하옵니다. "

여의는 잠시 생각했다.
"그것도 괜찮지. 요 사나흘 그 약을 썼으니 매답응의 얼굴도 많이 나았을 것이야."

아약이 가벼운 신음소리를 냈다.
"오히려 혜귀비만 좋게 됐네요!"
아약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하온데, 소주. 소인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황상께서는 도대체 매답응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용모도 남 앞에 내세울 정도는 아니고 성격도 그렇게 온순하지도 않고 출신은 말할 것도 없으며 완답응과도 비교가 되지 않사옵니다. 완답응은 어쨌건 예전에 잠저에서 황상을 시중들던 통방시녀(通房丫鬟)[각주:3]였으니까요."

여의는 아약을 흘끗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약, 정말이지 평소에는 네가 제일 영리하지. 허나 안좋은 점은 뒷이야기 하기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연희궁에서 하루 종일 함부로 지껄이기를 좋아한다고 여길 것이야."

아약은 예심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소인도 소주 앞에서만 이러는 것이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혀를 깨무는 한이 있어도 남을 씹는 소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사옵니다."
아약은 머리 끝에 붉은 끈으로 매단 방울을 배배 꼬았다.
"소인은 그냥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옵니다."

여의는 병에 꽂혀있는 금빛 구슬 꿰미 같은 납매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계절 중에 좋지 않은 꽃이 뭐가 있길래 어찌 기어코 납매를 잘라 왔느냐?"

아약이 깜짝 놀랐다.
"소주께서는 농담이시지요? 겨울철에는 다른 꽃은 없사옵고 몇 줄기 부러진 매화만이 있사옵니다."

여의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
"그래. 다른 사람이 없고 오직 매답응밖에 없으니 당연히 좋은 것이다. 너는 이 궁중에 얼마 없는 이 사람들을 보아라. 황후는 평온하며 단정하고 장중하며, 귀비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눈부시게 아름답다. 순빈은 소박하고 정직하며 조용하고, 가귀인은 가장 곱고 아름답다. 이귀인과 해상재는 한 마디도 넘치게 말하지 않으며 완답응은 더더욱 주둥이가 없는 조롱박같지. 허나 뭐라 하든 간에 우리는 모두 적잖이 신분이 있는 사람들이고 대부분이 황상을 모시고 있느니라. 황상께서 우리들에게 익숙하시어 때때로 신분이 낮거나 성질도 좀 있고 용모도 속되지 않고 수려한 사람을 얻으시기도 하나, 어찌 아끼고 총애하시는 마음이 없으시겠느냐. 하물며 이런 신분인 사람을 총애하시며 스스로도 만족하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약은 잠시 넋이 나가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소인, 소주의 뜻을 알아들었사옵니다. 남자가 신분이 낮은 여자를 총애하여 그녀에게 존귀와 영예를 주고 그녀를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만나본 적 있고 알고 있는 여인을 총애하는 것보다 성취감이 더 크단 말씀이시지요."

여의는 말아쥔 책을 비스듬히 들고있다가 흥취가 떨어져버렸다.
"그녀들이 일찍이 손에 넣었던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뭘 좀 얻게 되면 유난히 기뻐서 날뛰는 것이지.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확실히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약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럼 단지 그렇기 때문에 황상께서 계속 그녀를 총애하시겠군요?"

숯불이 타닥타닥 가볍게 튀는 소리를 내며 향내가 온 전각 안에 깊게 퍼지며 맑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여의가 말했다.
"그건......그녀의 능력에 달려있지."

일순간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아약이 조용히 말했다.
"본래 한 남자가 한 여인을 사랑하는데에는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군요."

여의는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귀찮은 듯하여, 밤바람에 시드는 꽃송이같았다. 예심이 장막을 내리고 조용히 말했다.
"강희제께서는 신자고 출신인 양비를 좋아하셨지만 비의 자리 밖에 오르지 못했지않사옵니까? 기실 좋아하고 말고 할 이유가 얼마나 많든 찰나의 성쇠와 영욕에 불과하옵지요."

한창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삼보가 부리나케 달려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올리고는 쩔쩔매며 말했다.
"마마, 함복궁에 변고가 났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어서 가보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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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란이 곧 이사오려나 봅니다...
2. 답글은 달지 못하고 있지만 댓글 하나 하나 모두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



  1. [역자주] 객이객 찰살극: 간단히 찾아본 바로는 강희제의 6공주의 부마인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2. [역자주] 수신기(搜神記): 중국 진(晉)나라 간보(干寶)가 지은 괴기 소설. 신기(神祇)ㆍ영이(靈異)ㆍ인물(人物) 변화(變化)ㆍ신선(神仙)ㆍ오행(五行)의 일을 실었음. 총 20권(본래는 30권) [본문으로]
  3. [역자주] 통방시녀(通房丫鬟): 주인 부부가 잠자리를 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고 때때로 불러들여 같이(;;;) 잠자리를 하던 시녀. 통방시녀의 방과 주인의 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통방(通房)시녀라 불리우며 시녀들 중에서는 가장 지위가 높고 명분상으로는 여주인이 혼례를 올릴 때 시가로 데려온 하녀이나 실제로는 첩이나 마찬가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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