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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밤은 섣달 초하루라 황제는 관례에 따라 황후의 궁에 머물었다. 여의는 끊임없이 눈이 내리는 창밖의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등불을 마주하고 고민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아약이 온몸에 쌓인 눈송이를 털며 들어와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소주."

여의는 주전자에 들어있던 잔을 잔에 따라 아약에게 주고 다시 난로를 쥐여주었다.
"먼저 따뜻한 차를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거라."


아약이 추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차를 받아서 단숨에 마셔버리니 비로소 따뜻해졌다.
"모두 자세히 물어보았사옵니다. 매답응은 확실히 우리 부 출신이옵고 경인궁 마마의 손에 들여보내졌사옵니다. 그 때 선제께옵서 남부의 악기를 골라 채우셨던 것에 불과하여, 각 부에서 모두 괜찮은 사람을 골라 들여 보낸 것이라 우리 집안에서만 보낸 것이 아니옵니다. 소인이 물어보니 매답응은 올해 열일곱이고, 열두 살에 보내져 들어왔다고 하옵니다."

화로 안에는 홍라탄이 활활 타고 있었고 수시로 새빨간 불똥이 튀어올랐다. 여의는 천천히 손톱을 고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설마 고모님은 그리 일찍부터 궁중에 사람을 안배해놓은 것인가?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는데도 고모님은 내게 한 마디도 언질을 주지 않으셨구나."

아약이 땋은 머리를 배배 꼬며 말했다.
"소인도 그리 생각했사옵니다. 그치만 마지막 몇년에는 경인궁 마마께서는 남 돌볼 겨를이 없으셨고 소주께서도 자주 왕래하지 않으셨으니 잊어버리셨겠지요."

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우리가 괜히 생각이 많은 걸지도 모르겠구나. 각 부에서 모두 사람을 들여보낸 것에 불과한데 우리도 때마침 한 명 보낸 것일 뿐이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내가 부추겨 황상께 보낸 것이라는 의심을 낳았구나."

아약이 말했다.
"왜 아니겠사옵니까? 무슨 난장판이건 모두 우리가 한 것이라 뒤집어 씌우니, 소주께서 어찌 이보다 더 성정이 좋으실 수 있겠사옵니까. 언제 한번 불시에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그들도 무서운 것을 알겠지요."

여의가 웃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네 입만큼 무서울까!"
여의는 쪼그리고 앉아 까맣고 묵직한 부젓가락을 들고 화로의 탄을 뒤적이자 아래에서 향기가 올라왔다. 아약은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는 기뻐했다.
"좋은 냄새! 군밤 냄새로군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네가 나가자마자 화로에 실한 알밤 몇개를 넣어두었다. 네가 부젓가락으로 집어서 꺼내고, 손을 데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아약이 부랴부랴 웃으며 대답하고는, 잘 구워져서 껍질이 터진 알밤을 뜨거운 것도 아랑곳 않고 껍질을 벗겨서 먹기 시작했다.

난각 안에는 등불이 환했고, 은은하게 밤의 감미롭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으며, 주인과 시종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비록 몇번 시침을 들었지만 필시 영화궁의 매답응이 총애를 받은 것은 한때의 추세였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 날 동안 함박눈이 내려 밖에 나가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황후도 아침 저녁 문안을 중지하였으니, 한동안 뭇 사람들은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매답응을 무척 궁금하게 생각했다.

대엿새가 지나서야 비로소 눈이 멎고 날이 맑게 개어서 마침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궁중에서 문안을 올리는 이 날, 사람들은 유난히 일찍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후의 곁에 앉아 몇마디 한담을 나누고 있으니 밖에서 태감이 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답응 들었사옵니다."

이 말을 듣자 여전히 웃고 떠들던 비빈들이 모두 조용해지며 자기도 모르게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전각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니, 붉은 실로 앵두를 수놓은 치자나무와 나비문양의 소주 비단으로 만든 치파오를 입은 고개를 숙이고 날렵하게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정교하게 쪽을 지고 금장식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푸른 옥돌로 만든 꽃송이를 흐드러지듯 단장하고 쪽진 머리 위에는 새하얀 구슬이 달린 비녀를 두 개 기울여 꽂았으며 말아올린 귀밑머리 가에는 한 알 한 알 빛나는 자석영 구슬을 박아넣었다. 가까이 걸어오자 비로소 그녀의 옷 위에 옅은 붉은 색의 치자 나무 꽃잎이 한 송이 한송이 수놓아진 것이 보이며 은실로 호남의 물빛 비취로 나비를 곁들였으며 세밀하게 수놓은 정교한 자수는 날렵하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으며 마치 입김을 불어넣어 꽃가지가 천지에 펼쳐지고 봄나비가 옷 위에서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혜귀비는 그녀가 일찍이 지난 날의 차림새가 아닌 것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
"요망한 것!"

매답응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비록 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가귀인은 이미 이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우리가 입은 겨울 옷은 두텁고 무거운데 어찌 그녀는 이리 가볍게 입었는지, 춥지도 않은가봐요?"

그녀의 곁에 앉아있던 순빈이 낮게 말했다.
"내무부의 말을 듣자하니 강녕(江宁)에서 직조하여 진상한 따뜻한 비단이라 비록 가볍고 얇지만 충분히 따뜻하지."

가귀인이 답답하여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상께서 등극하신 이래로 황후께서 명을 내리시어 순금 머리 장식과 금실로 짠 의복을 금하시고, 또 강남의 옷감을 쓰는 것을 금하시며 낭비라 하시었지요. 지금 그녀가 몸에 걸친 의상을 보니 소주(苏州)의 옷감이며 답응도 쓸 수 있는 은실 자수를 사용했고, 비록 금 자수를 놓지는 않았지만 저 벽새(碧玺) 장식은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순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귀인에게 입을 다물라는 뜻을 내비쳤다.

매답응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조금 숙이며 예를 표했다.
"신첩 영화궁 답응 백 씨가 황후마마와 여러 소주들을 뵈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만복과 평안을 누리시옵고, 여러 소주들께서는 매사 뜻대로 되시옵기를 바라옵니다."

황후가 한줄기 온화하고 점잖은 미소를 띠며 온화하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매 아우님이지. 본래는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네만. 큰 눈이 계속 내려서 오늘에서야 비로소 보게 되었구먼. 일어나게. 연심, 앉을 자리를 내거라."

매답응이 고개를 들자, 사람들은 그녀의 이토록 잘 차려입고 꾸민 모습을 보고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아름다운 미인이라 여겼으나, 고개를 드니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지나지 않아, 비록 충분히 수려하지만 중상 정도의 자태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이렇게 여기지 못한 것 같았으나, 가귀인은 먼저 무의식 중에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이고 자기 손목 위에 있는 은으로 상감한 비취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연심은 해상재 뒤에 의자를 하나 놓고 매답응을 청하여 앉게 하고 정성스럽게 차를 올렸다.

매답응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본래는 더 일찍 와서 황후마마를 뵈었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계속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 오늘에서야 오게 되었사옵니다."

황후는 입가에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고 안 오고는 모두 마음에 달린 것이지. 앞으로 아침 저녁으로 문안 올 때마다 자네는 여러 자매들과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치고는 연심을 통해 비빈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매답응을 이끌어 만나보게 했다.


가귀인이 작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낼 뿐만 아니라 황상께서도 아우님을 각별히 아끼시지. 아우님 몸에 걸친 옷감이 가볍고 따뜻한 강녕에서 진상한 비단이지 않은가."

매답응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귀인께서 안목이 있으시군요."

가귀인의 입가는 웃는 듯 마는 듯 했다.
"내 안목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아우님이 얇게 입어 추위를 탈까 걱정한 것이지. 알고보니 황상의 호의였군. 그런데 이 따뜻한 비단은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 황후 마마의 궁중에도 없고 나도 얼핏 지나가다 들은 것인데 말이지."

가귀인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사람들이 질투하게 마련이었지만, 매답응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렇사옵니까? 황상께서는 그저 제게 옷을 상으로 내리셨을 뿐이고 저는 많이 여쭙지 않았으니 전혀 몰랐사옵니다."

비빈들은 이런 매답응을 보고 그저 넋이 나가서 서로 어울리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혜귀비가 한 마디 했다.
"황상께서 등극하신 이후 황후마마께서 줄곧 후궁이 소박해야 한다 말씀하셨네. 아우님은 그저 보잘 것없는 답응인데 그 옷은 좀 사치스럽군."

매답응은 마지못해 눈을 들었다.
"그렇사옵니까? 황상께서 빈첩이 이리 입은 것을 좋아하셨을 뿐입니다."

혜귀비는 잠시 목이 턱 막히며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황후가 보고 전말을 알아차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됐네. 비록 밖에 눈은 그쳤지만 날은 춥고 바닥은 얼어서 길이 미끄러워 다니기 어려우니 모두들 일찌감치 돌아가보게. 곧 설이 다가오니 춥지 않게 잘 챙기고."

사람들이 대답하고 흩어져 각자의 가마를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아약은 여의에게 흰 바탕에 푸른 나뭇가지 무늬의 기러기 깃털을 댄 외투를 둘러주고 모피와 손난로를 쥐어주고는 여의의 손을 부축하여 밖으로 나갔다. 여의는 온 세상이 은빛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말했다.
"가마를 부르지 말거라. 설경이 이리도 아름다우니 어화원까지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자꾸나."

아약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좋지요. 며칠이나 밖에 나오질 못해서 답답해서 참기 어려웠사옵니다."

두 사람이 막 밖으로 나가려 발을 내딛는 참에, 별안간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비마마께서는 잠시 기다려주시옵소서."
여의가 고개를 돌리자 매답응이 궁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비마마께서는 고아한 흥취가 있으시군요. 빈첩 마침 어화원에 가서 눈을 감상하려 했는데, 혹시 마마께서는 신첩과 동행하시련지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이 원하신다면야. 혼자 가는 것보다야 길동무가 있는 것이 낫지."

두 사람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눈 내린 후의 햇빛은 비록 따뜻한 기운은 없지만 쌓인 눈에 비치는 빛이 더욱 밝게 드러났다. 여러 날 동안 쌓인 눈은 어화원을 더욱 희고 눈부시게 빛나게 하여, 마치 빛나고 투명한 유리 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때때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떨어지며 가볍게 바스러지는 소리를 낼 뿐, 주위는 매우 조용하여 인간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때 내리던 눈이 비로소 멎었고 드문드문한 몇그루 납매가 마침 만개해있었다. 그 납매는 노란 분으로 수수하게 단장하고 색은 밀랍과 같으며 황금빛 찬란한데다가 매화 가지 사이에 새로 내린 눈이 쌓여 숨쉴 때마다 짙고 깨끗한 향기가 느껴지며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여의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자 매답응이 알아채고는 미소를 지었다.
"한비마마께서는 매화를 좋아하십니까?"

여의가 손을 뻗어 얼어붙은 꿀같은 꽃가지를 붙들고 가볍게 냄새를 맡고는 몹시 심취하여 말했다.
"그래, 특히 녹매는 청아한 것이 마음에 든다. 평범하지 않지."

매답응이 말했다.
"마마께서는 녹매(绿梅)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아버님과 소주에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두 번 본 적이 있다네. 참으로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었지."

매답응은 희미하게 비웃으며 입가에 냉담한 기운을 띠었다.
"빈첩도 월금(月琴)을 타는데 능했기 때문에 소주(苏州)에서 팔려 온 것이고, 나중에서야 인연이 닿아 궁으로 들여보내진 것이옵니다.”

여의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듣자하니 매답응은 남부 비파부 출신인데 당연히 비파를 타는 것에 능하지 않은가?"

매답응은 먼곳을 응시하며 진회색의 비통한 눈동자가 낮게 흘렀다.
"빈첩이 본래 뛰어났던 것은 월금이온데, 남부에 들어오자 가르치는 사부가 말하기를 선제께서 비파를 좋아하신다 하여 다시 배운 것이옵니다."
그녀의 고독한 한숨이 눈깜짝할 사이에 찬바람 속으로 떨어졌다.
"뭐가 다르겠사옵니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마음에 들어하든 모두 남이 결정하는 것이지 눈꼽만큼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여의는 매답응의 신세 한탄을 듣고 떠보며 말했다.
"그 말은 그 때 자네를 남부로 들여보낸 오라나랍 부를 책망하는 것인가?"

매답응이 차갑게 웃었다.
"빈첩을 보내든 다른 사람을 보내든 다 같은데 무엇을 책망하겠습니까? 빈첩을 남부로 보내지 않았다면 빈첩도 부의 일개 악기에 불과할 뿐,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녔을 것이옵니다. 어찌 금지옥엽 한비마마와 비할 수 있겠으며 좋아하는 꽃도 비범하고 청수하여 세상에 드문 녹매이니, 비교하자면 빈첩은 한낱 바람 속의 버들가지에 불과한 미천한 운명일 뿐이옵니다.

"애석하게도 이 녹매는 참으로 드문 것이지. 매사 너무 깨끗하고 진기하면 결국 세상에 오래 남을 수 없는 일이야. 한비, 아니 그러한가?"

한비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혜귀비가 사람들을 이끌고 멀지 않은 곳의 납매 나무 아래에 서서 손에는 납매 가지 두 줄기를 꺾어 들고 방글방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여의가 혜귀비를 보고는 매답응과 함께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귀비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혜귀비가 "일어나게" 라 말하고 웃었다.
"바람이 순하여 한비와 매답응이 한담하는 것을 들었는데 어째 매답응의 신세 한탄이 되었구먼."
혜귀비는 매답응을 흘끗 보았다.
"선비를 사흘만에 만나면 다른 사람이 된다던데, 매답응을 두고 하는 말이군."

매답응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 뵈니 귀비마마의 온화하고 고귀하며 품위있는 자태는 여전하시옵니다."

혜귀비는 매답응을 자세히 뜯어보다가 마지막에 시선이 그녀의 골풀같이 길고 가느다란 손끝에 머물었다.
"이리도 말솜씨가 좋으니 남부에서는 자네에게 노래를 시켰어야지 비파만 뜯게 했으니 아깝군. 아직 아우님에게 물어본 적이 없는데 이름이 무엇인가?"

매답응은 혜귀비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대답했다.
"빈첩의 성은 백이고 이름은 예희이옵니다."

혜귀비의 입가에는 달콤한 웃음기가 어려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기가 얼음과 다를 바 없었다.
"과연 좋은 이름이군. 천생 사람들이 즐기고 감상할 이름이야."

매답응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표정은 조용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황상께 한때나마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면 빈첩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복과 은혜이옵니다."

혜귀비는 웃음기를 거두고 차갑게 말했다.
"답응에 봉해졌다고 너에 대한 총애가 오래 갈 것이라 생각하지 말거라. 너의 그 비파 뜯는 재주는 황상께서 한가하실 때 웃음거리 삼아 듣는 참새 지저귀는 소리 같은 것이지 정말로 자신이 봉황의 맑은 울음소리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매답응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고 담담한 미소만 지을 뿐 여유롭게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빈첩의 비파 솜씨가 귀비마마께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사오며 용모 또한 귀비마마만 못하옵지요. 허나 마마께서는 어째서 황상께서 마마의 뛰어난 비파 연주는 듣지 않으시고 빈첩의 이런 사소하고 모자란 재주를 좋아하시는지 생각해본 적은 없으시옵니까?"

혜귀비는 표정이 얼어붙으며 무어라 대꾸하지도 했다. 매답응의 눈길이 유유히 그녀의 얼굴에 이르자 마음이 내키지 않은 듯 근처에 활짝 핀 납매 한 그루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니 사람에게 너그럽지 않구나!"

혜귀비는 얼굴빛이 확 바뀌어 화장한 얼굴이 잔가지 위에 쌓인 투명한 눈처럼 점차 창백해지며 발밑이 후들거리자 모시던 궁인이 서둘러 단단히 부축했다.

여의는 심상치않은 말을 듣고 곧 준엄하게 꾸짖었다.
"무엄하다! 귀비와 본궁 앞에서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여 함부로 대드는 것이냐!"

매답응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웃자 웃음소리가 처마 밑의 풍경처럼 맑고 낭랑하게 눈덮인 궁중에 퍼져나갔다.
"한비마마께서는 개의치마소서. 마마께서는 빈첩보다 두 살 많으실 뿐이니 세월이 어찌 마마께 각박하겠사옵니까? 빈첩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그 사람이 제일 잘 알겠지요!"

여의는 본래 같은 오라나랍 씨 문하에서 나온 것을 생각하여 매답응이 원만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호의에서 한 것이었다. 예희가 조금도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더 혜귀비에게 트집을 잡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리 여의가 제삼자라고는 해도 듣자하니 그냥 수습할 수는 없었다.

혜귀비는 비로소 꼿꼿이 서서 이 말을 듣고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혜귀비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검과 같아서 매답응의 젊음이 충만한 얼굴을 피가 나도록 잔인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혜귀비의 입에서 두 마디 말이 튀어나왔다.
"따귀를 때려라!"

그 말소리가 울려 퍼지니 일언반구 반박을 용납하지 않았다. 혜귀비를 모시는 수령 태감 순성이 곧 매답응의 어깨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공교롭게도 매답응이 남부 출신이어서 몸놀림이 유연하여 가볍게 비틀자 곧 그대로 비틀어졌다. 순성이 체면을 보아 봐주는 일 없이 무릎 뒤를 걷어차자 매답응이 고통을 느끼며 눈밭에 무릎을 꿇었다. 순성이 따귀를 올려 치자 매답응은 무척 치욕스러워 고함쳤다.
"나는 황상께서 친히 봉하신 비빈인데 어찌 너와 같은 노비에게 능욕을 당해야 하느냐?"

순성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매답응의 어깨를 누르는 손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여의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서둘러 부탁했다.
"귀비마마, 예희는 이제 막 답응이 되어 궁중의 법도와 격식을 아직 다 익히지 못하였으니 귀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한 번만 봐주시옵소서."

혜귀비는 차갑게 웃으며 여의는 아랑곳 않고 매답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도 노비 무리에서 기어올라왔으면서 노비가 너를 치는 것은 싫더냐? 너는 황상께서 친히 봉하신 답응이고 본궁은 황상께서 친히 봉하신 귀비이니 신분이 구름과 진흙처럼 차이가 나는데 네가 감히 본궁에게 무례하게 구니 처벌받아 마땅하지 않으냐! 순성, 저 것의 뺨을 매우 쳐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매답응의 눈처럼 새하얗고 가녀린 뺨에 손바닥이 호되게 내리쳐졌다. 순성이 온 힘을 다해 내려치자 매답응의 왼쪽 뺨이 곧 부어 오르며 입가에 한 줄기 붉은 혈흔이 비쳤다. 매답응은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남들이야 노비라는 이 두 글자를 말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귀비마마는 자신도 포의 노비 출신이니 빈첩과 다른 것이 무엇이고 누가 누구보다 고귀하다고 하겠습니까?" 

혜귀비는 대기(抬旗)하여 고가씨가 된 이후로 평생 자신의 한군기 포의 출신을 들먹이며 억지로 여의에 비해 한 단계 낮다고 말하는 사람을 제일 증오했다. 이 때 마침 여의가 앞에 있으니 혜귀비는 더욱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매답응을 가리키며 준엄하게 외쳤다.
"순성, 저년이 이리도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니 사정 봐주지 말라! 호되게 치되 저것이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멈추지 말라!" 

이 말을 듣고 순성은 온 힘을 다해 두 뺨을 내리 갈겼다. 여의는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때리는 소리는 더욱 크게 귀에 들어와서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난데없이 귓가에 "멈추어라"라는 소리가 들리자 뭇 사람들이 말을 듣고 돌아보니 성대하게 기세 높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는데 앞에는 네 사람이 금봉황머리 향로를 들고 측근에서 모시는 태감이 꿩깃털 부채를 들고 뒤에 서있었으며 손에 들고 있는 오색구봉산은 화려한 색이 흰 눈 위에서 각별히 더 눈부셨다. 황후를 모시는 조일태가 앞으로 달려나오며 외쳤다.
"황후마마 듭시오!" 

뭇 사람들이 정신이 들어 서둘러 일제히 몸을 굽히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마마 만복과 평안을 누리소서."

황후의 표정은 매우 좋지 않았으며 잠시 "일어나라"라고 말하지도 않은채 높은 곳에서 뭇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본궁은 본래 아가소에 공주와 황자들을 살피러 가던 길인데 예서 자네들이 떠들썩하게 큰소리로 다투는 것을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처신사납게!" 
황후의 시선이 귀비에서 한비, 매답응을 천천히 훑으며 침착하고 엄숙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은 궁중 어원이지 자네들 궁중의 형장이 아니야. 자네들이 여기서 황실의 체통을 잃어도 되는 것인가!" 

혜귀비는 매답응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힘겹게 미소를 끌어내어 지으며 아뢰었다.
"황후마마께서는 화를 거두소서. 마마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시니, 매답응이 안하무인격으로 말하고 함부로 윗사람에게 대들며 신첩이 포의 출신이라는 것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인로주황(人老珠黄)[각주:1]이라 신첩을 조롱하여......"


매답응이 조금도 뒤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입가에 흐르는 두 줄기 혈흔과 하얀 얼굴에 드러난 처절하고 끔찍한 흔적을 드러냈다.
"황후마마께서는 밝게 살펴주시옵소서. 신첩은 혜귀비가 포의 출신이라 말했지만 귀비의 출신이 포의인 까닭에 오늘날의 영총이 있는 것이니 이 말은 틀린 것이 없사옵니다. 허나 귀비마마께서 말씀하신 '인로주황'이라는 말은, 신첩은 절대로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단지 세월이 무심하게 흐르는 것을 탄식했을 뿐이옵니다."
매답응은 고개를 돌려 여의를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한비마마께 한 번 물어보시옵소서."

여의는 매답응의 반박하는 말을 듣고 비록 그 뜻이 인로주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절대로 그 네 글자를 입에 올린 적은 없었으므로 부득이 대답했다.
"방금 매답응이 분명 불경한 말을 입에 담았으나 인로주황 네 글자는 확실히 말한 적이 없사옵니다."

혜귀비는 더욱 화를 참지 못했다.
"매답응이 비록 저 네 글자를 말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저 뜻을 의미한 것이다. 한비 자네가 이처럼 감싸주고 눈감아주니 매답응과 결코 내통한 것은 아닌지 본궁은 확실히 믿지 못하겠다!"

여의는 내심 깜짝 놀라 변명할까 생각했었지만 혜귀비가 이리도 굳게 믿고 있으니 다시 말해봤자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외면하고 다시 상관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황후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외쳤다.
"됐다. 각자 자기 생각이 있는 것이니 한때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
황후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매답응은 새로 들어온 비빈이니 당연히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겠지. 자네는 본궁에 버금가는 귀비이니 잘 가르치고 단속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뺨을 때리게 될 바에야 때리는 것이지만 얼굴이 이런 꼴이 되었으니 되었다. 모두 일어나거라."

뭇 사람들이 사은하며 일어나자 매답응이 고집을 꺾지 않고 말했다.
"황후마마, 신첩의 말에 분명 과오가 있사오나 귀비마마께서 격분하여 따귀를 때리라 하셨사옵니다. 신첩은 새로이 황상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리 얼굴이 상하게 되었으니 만일 황상께서 물으시면 신첩은 감히 답하지 못하나이다."

황후는 매답응의 눈빛에 어떠한 온정도 담기지 않은 것을 보았다.
"황상께서 만일 자네에게 물으시면, 자네들은 각자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맞섰으니 황상께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본궁도 공평하고 솔직하게 말할 뿐이다. 자네의 잘못은 윗사람에게 말로 대든 것이고, 귀비가 자네에게 벌을 내린 것은 틀리지 않았으나 다만 자네의 아랫사람을 벌하면 되었을 일이다. 자네가 다시 본분을 지키려 하지않고 빈번히 일을 만들면 본궁도 자네를 너그러이 용서할 수 없을 것이야!"

황후가 이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드물어서 여의는 이 말의 준엄함을 알고 서둘러 뒤에서 살짝 매답응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매답응은 황후가 이같은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잠시나마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황후는 사람들이 모두 말없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여의를 향해 온화하게 말했다.
"한비, 이 일은 자네가 많이 엮인 일이 아니지. 이렇게 하세. 자네가 매답응을 돌려보내면서 잘 타이르게."

여의는 본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예희와 정말로 결탁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필 방금과 같은 말을 들으니 이왕 이렇게 의혹을 받게 된 바에야 피할 수도 없어서 대답하고 말았다.

혜귀비는 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너그럽고 인자하시지만 이런 미천한 노비 출신이 경망스럽고 거만하니 제대로 법도를 가르치지 않으면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하늘을 뒤집으려 들 것이옵니다."

황후는 냉담하게 혜귀비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때렸고, 자네가 눈밭에 무릎꿇렸지. 아직도 더 어찌하려고? 정말로 때려서 얼굴을 망가뜨리고 꿇려서 무릎이 상하면 황상께서 죄를 물으실텐데 자네는 어찌 대답하려고?"

혜귀비가 울컥하여 말했다.
"신첩은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면 그만이옵니다. 어쨌든 매답응이 먼저 잘못한 일이옵니다."

황후는 혜귀비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매답응이 확실히 잘못하기는 했지만, 자네는 귀비이고 윗사람이니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어야지. 이렇게 성질부리면서 소란을 피우면 몇마디 입씨름하던 것이 설령 정말로 매답응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황상께서도 반드시 자네의 속좁음을 꾸짖으실 것이야."
황후는 계속 진심으로 타일러 말했다.
"우리 아우님, 본궁이 자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매답응은 황상께서 새로이 총애하시는 사람이고 어찌됐건 자네도 반드시 한때의 화를 눌러 참을 줄 알아야 하네. 시일을 기다려 황상께서 냉담해지시면 그때 자네가 때리든 벌하든 황상께서는 가슴 아파하지 않으실 것이고 오히려 자네가 옳다고 여기실 것이야. 알겠는가?"

혜귀비는 이제서야 조금 풀이 죽은 눈치였다.
"신첩 이미 매답응의 얼굴을 때려 그 꼴로 만들어놓았는데 황상께서 신첩을 책망하실까요?"

황후가 가볍게 탄식했다. "아우님! 그래, 이 일은 황상께서 정말로 물으신다면 본궁이 자네를 대신하여 원만하게 넘기겠네. 별도로, 본궁이 사람을 시켜 태의원에서 시원하고 붓기를 가라 앉히는 고약을 받아다 자네 대신 보내겠네. 이 일은 결국 매답응에게도 잘못이 있으니 매답응이 그중에 준엄함을 알았다면 감히 황상께 울며 하소연하지 못할 것이야."

혜귀비가 그제서야 비로소 조금 마음을 놓고 내심 깊이 탄복했다.
"황후마마께서 주인으로 계시니 신첩이 비로소 안심할 수 있사옵니다."

황후가 고개를 돌려 분부했다.
"소심, 너는 곧장 태의원으로 가서 고약을 받아다 영화궁으로 보내거라. 지체해서는 아니된다."

소심이 대답하고 물러갔다. 혜귀비가 감격하여 말했다.
"신첩, 황후마마께 감읍하옵니다."

황후는 기쁘고 안심이 되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 별일 없으면 본궁과 함께 아가소에 가세."

혜귀비가 서둘러 황후의 손을 부축하여,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눈 위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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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 기다리셨죠, 너무 오랜만에 올립니다. 폭풍우같던 2017 연말을 해치우느라...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여의전 방송은 기약이 없는 걸까요 ;ㅁ; 웨이보에 올라온 동지 짤은 딱 봐도 10장 초반부던데요ㅎㅎ




  1. 인로주황(人老珠黄): 사람은 늙으면 쓸모가 없어지고 옥구슬은 누렇게 퇴색하면 가치가 없어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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