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황후가 마침 소심에게 명을 내리려 할 때, 밖에서 알림을 전하는 태감 특유의 날카롭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귀비 들었사옵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흰 등나무 사이로 꽃을 수놓은 비단 장막이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밖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다. 한 미인이 날렵하게 걸어들어오자 소심이 먼저 무릎을 꿇었다.

 “혜귀비께서는 만복과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혜귀비가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게. 매일 보는데 그리 예의 차릴 것 까지야.”
 
혜귀비는 시녀 말심이 바람막이 망토를 풀도록 맡기며 말하고는, 날렵하게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마마께서는 만복과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황후가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앉게. 본궁도 자네의 그 말을 똑같이 돌려줘야겠네. 매일 보는데 그리 예의차릴 것 없네.
 
혜귀비가 사은하고, 곧 이어 박쥐 문양과 배꽃을 새긴 의자에 앉자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막 낮잠을 자다 일어났는데 하루는 길고 별다른 일은 없으니 와서 마마와 이야기를 나누러 왔사옵니다. 마마를 귀찮게 한 것은 아니지요?”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막 자네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는데, 잘 왔네.”

황후가 혜귀비를 살펴보니, 날씨는 비록 추웠지만 혜귀비는 일찌감치 연분홍색 두터운 비단에 목란과 계수나무를 아름답게 섞어 수놓고 솜을 넣은 비단 두루마기를 걸치고, 아래에는 복숭아색 꽃가지를 수놓은 비단 치마를 드러내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복숭아빛 꽃가지가 만개한 봄처럼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겉에는 짙은 복숭아 색 꽃이 흩뿌려진, 진동에 족제비털을 댄 상의를 걸쳤고, 옷깃과 소매에는 모두 복()과 수()자를 새겨넣은 하얀 밍크 모피를 덧대었으며, 그 털이 곱고 보드랍게 얼굴에 스쳤다. 칠흑같이 검은 쪽머리에는 봉황이 양 날개를 펼치고 자수정으로 된 술을 드리우고 있는 순금 비녀를 꽂아서 마치 새로 피어난 복숭아꽃 같은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혜귀비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황후께서는 신첩의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사옵니까?”
 
황후가 소심이 차를 받쳐 올리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말했다.

 “몇차례 눈이 내리고 추워지니, 자네가 본래 추위를 많이 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네. 과연 지금 자네를 보니 바람을 막고 털을 덧댄 옷은 모두 입었군. 벌써 이러하면 정월에는 무엇을 입을 겐가?
 
혜귀비는 손 안에 든 작은 꽃무늬 구리 손난로를 들고 잠시라도 손에서 떼려하지 않았다.

 "황후마마께서는 제가 항상 기혈이 약하고 추위를 타서 겨울에는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네요. 온종일 몸에 추위가 스며서 있는대로 전부 입을 수밖에 없사와요."
 
말심이 웃으며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모르시옵니다. 비록 11월에도 지렁이가 올라온다고는 하지만, 저희 소주께서는 여전히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매일 손난로를 끼고 계시고 발 쬐는 화로도 떼어 놓을 줄을 모르십니다."
 
황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 아직 한창 젊으니 꼭 잘 보양해야 하네. 이제는 잠저에 있을 때와 같지 않으니, 어찌 좋은 태의가 없겠는가? 스스로 잘 돌보아야 하네. 몸조리를 잘해야 순빈처럼 황상께 아들을 낳아드릴 수 있지 않겠는가." 

아들 낳는 이야기를 하자 혜귀비는 조금 슬퍼져서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가 연심을 불러 말했다.

 "본궁이 기억하기에 장춘궁 창고에 황상께서 이전에 상으로 내리신 길림의 장군이 진상한 검은 여우가죽이 하나 있는데, 네가 가서 가져오너라." 

연심이 서둘러 물러나자, 황후는 좌우에 모두 심복들만이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진심을 털어놓았다.

 "사실 자네의 나이는 본궁보다 몇 살 많고 황상을 모신 나날도 오래되었지. 허물없이 하는 말이네만, 황상께서도 자네의 궁중에 제일 많이 머무셨는데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겐가?자네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네."
 
혜귀비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신첩의 마음이 아픕니다. 신첩도 모두 잘 알고 있사옵니다. 태의 또한 항상 잘 돌보고 있고, 황상께서 친히 지정하신 태의원 원판 제 대인도 애쓰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저 신첩이 복이 없을 따름이지요."
 
황후는 탄식하면서도 감동받았다.

 "황상 슬하에 황자가 셋이 있는데, 본궁의 이황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황자와 삼황자의 출신은 모두 엇비슷하니, 본궁은 자네가 황자를 낳기를 꽤나 기대하고 있다네. 총명하고 영리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황자도 형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진정한 친형제가 아니겠는가!"
 
혜귀비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얼른 무릎을 꿇고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항상 신첩을 보살펴주시는 것, 신첩 모두 다 알고있사옵니다. 마마의 이러한 마음을 보태는 말씀이 계시니, 신첩은 만 번 죽어도 마마의 총애에 보답할 길이 없사옵니다."
 
황후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이런 말은 남같지 않은가. 본궁과 자네는 여러 해 동안 함께 살았고, 각별히 마음이 맞을 뿐만 아니라 자네를 자매와 마찬가지로 보고 있네." 

황후는 고개를 들어 연심이 그 검은 여우가죽을 받쳐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말심에게 건네주거라. 본궁이 혜귀비에게 상으로 내리는 것이니라."
 
혜귀비는 전부터 '일품은 검은 여우, 이품은 담비, 삼품은 여우담비'라는 가죽에 대한 말을 알고 있었다. 그 여우가죽의 털빛이 먹과 같이 깊은 검정색인 것을 보니 오직 최상의 은빛 가느다란 털이 밝게 빛나며, 통가죽이 반들반들 윤이 나며 매끄러웠다. 게다가 길림 장군의 진상품은 일년에 한두 개에 불과한 최고 중의 최고라는 것을 알기에 서둘러 사은하며 말했다.

 "이런 귀중한 물건을 신첩이 어찌 감히 쓰겠사옵니까? 그리고 황상께서 마마께 상으로 내리신 것이 아니옵니까."
 
황후가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황상께서 본궁에서 상으로 내리신 이상 본궁이 당연히 주인이지 않은가. 자네가 일단 받아두게. 내일 내무부에 명하여 따뜻한 옷을 짓게 하여 자기 몸을 따뜻하게 하고 다른 데 허비하지 말게."
 
혜귀비는 두세 차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서야 비로소 말심에게 주의하여 챙기게 했다. 황후는 맑고 깨끗한 아름다운 두 눈으로 그 여우가죽을 한번 훑어본 후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본궁이 자네에게 주는 물건은 아무리 좋아도 공물일 뿐이네.어쨌든 올해도 검은 여우는 없고, 내년, 내후년에도 내내 그러할 것이네. 궁중에 황상께서 친히 쓰시고 상으로 내린 편액이 걸려있는 다른 사람과 어디 비할 수나 있겠나."
 
혜귀비는 이해하지 못한듯 황망히 물었다.

 "무슨 편액 말씀이옵니까?"
 
황후는 대답하려다가 조금 생각해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됐네.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본궁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이야기일 뿐이야."
 
혜귀비는 황후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무마하는 것을 보고 더욱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았다.

 "마마께서는 무슨 말씀으로 신첩을 속이려 하시옵니까?"
 
소심이 혜귀비의 찻잔이 식어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차를 더 붓고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마마께서 어디 소주를 속이려 하시겠사옵니까? 그저, 말하기를 꺼리시는 것은 단지 화를 더하기 때문이니, 더더욱 허투루 말씀하시기를 꺼리시는 것이옵니다. 소인은 아무래도 속일 수가 없사옵니다. 오늘 아침에 내무부에서 아뢰기를, 황상께서 한 폭의 글을 친히 써서 한비의 연희궁에 내리셨고, 한비는 서둘러 내무부에 분부하여 금칠한 편액을 만들어 정전에 걸라고 했사옵니다. 사실 황상께서 누구에게 상을 내리고 안 내리시고 간에, 한비가 이렇게 눈치빠르게 잡아서 재빨리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 사람들이 못볼까봐 기어코 정전에 걸어두고 이리도 은총을 받는 것이라고 널리 알리려는 것이지 않사옵니까? 사실 소인이 보기에는, 설령 황상께서 글자를 내려 편액을 걸게 하셨더래도 황후마마와 소주의 궁중에 먼저 걸게 하셨어야지, 어디 한비가 먼저이옵니까?"
 
혜귀비가 이를 가볍게 악물며 차갑게 웃었다.

 "신첩은 여전히 황상께서 한비를 시침들라 부르지 않으신 줄 알았네요. 신첩은 믿지 않사옵니다. 황상의 어필일 뿐이고, 편액 하나일 뿐인데 이리 어려워서야." 

혜귀비는 말을 마치며 일어나 홀연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황후는 혜귀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담담하게 웃다가 말했다.

"본궁은 이황자가 보고싶으니, 너는 가서 본궁이 직접 만든 이황자의 그 옷을 가져오너라. 아가소에 다녀오자꾸나."
 
소심이 말했다.

 "오늘 오전에 내무부에서 수많은 옷을 보내지 않았사옵니까? 소인이 보니 모두 꽤 괜찮았사온데, 마마께서는 이황자에게 보낼 옷을 밤새 만드시니, 마마께서는 이제 막 좋아진 옥체를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황후는 그 알록달록한 한 무더기의 옷을 흘끗 바라보고는 차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이 보내온 물건은 아무리 좋아도, 본궁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구나. 차라리 내가 좀 고생을 하고 너희들을 손을 거치더라도 그게 좀 더 안심이 된다."
 
소심은 단호한 말을 듣고 대답하여 말했다.

 "소인 알겠사옵니다."





- - - - -

1. 좀 바쁜 시기가 또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다음 화는 분량이 많기도 해 평소보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