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혜귀비는 장춘궁을 나와서 가마 위에 앉아 뺨을 고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말심, 너는 검은 여우 가죽을 가지고 먼저 궁으로 돌아가거라. 채주와 채월은 남아서 본궁이 양심전에 황상을 뵈러 가는데 따르거라."

말심이 "예"하고 대답하고는 채주와 채월에게 잘 모실 것을 당부하고 먼저 돌아갔다.

혜귀비는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운 것은 아랑곳않고 가마를 멘 태감들을 다그쳐서 길을 재촉하여 양심전으로 갔다. 막 양심전 문 밖에 도착하자 왕흠이 혜귀비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예를 올리며 맞이하고는 직접 혜귀비가 가마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며 말했다.
"귀비마마, 섬돌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고 소인의 손을 쓰시옵소서."
혜귀비가 배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왕 공공이 수고가 많소. 지금 황상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왕흠은 싱글싱글 웃었다.
"귀비마마께서 마침 딱 맞춰오셨사옵니다. 황상께서 낮잠을 주무시고 일어나 상소를 보시고 지금 막 쉬고 계시옵니다. 남부(南府)[각주:1] 악사들 몇명을 불러 마침 비파를 뜯고 있었사옵니다.

혜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고아한 흥취를 즐기고 계신데 본궁이 들어가 황상을 방해할까 걱정이야."

왕흠이 웃으며 말했다.
"이 궁 안에서 음률을 논하는데 누가 마마께 대적할 수 있겠사옵니까? 눈이 내려서 길이 미끄럽지 않았다면 황상께서 반드시 마마께 오시라 청했을 것이옵니다."

혜귀비가 그제서야 말했다.
"그럼 수고롭지만 공공이 들어가 고해주시게."

왕흠이 대답하고 들어갔다. 혜귀비가 복도에 잠시 서있으니 과연 비파 뜯는 소리가 들려와서 마침 넋을 잃고 있으니, 왕흠이 이미 나와서 혜귀비에게 들어올 것을 청하고 있었다.

황제가 음악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혜귀비는 전각에 들어갈 때 유달리 조용조용하게 들어갔고, 황제가 난각에 비스듬히 앉아서 눈을 감고 박자를 맞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보 밖에 앉아서 비파를 연주하는 기녀 서넛은 깃털처럼 얇고 가벼운 푸른 비단옷을 입었고, 손에 든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렸으며, 가느다란 열 손가락이 백옥으로 된 나비가 팔랑이는 것 같이 오르내렸다.

혜귀비는 황제가 자신이 들어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두 손을 드리우고 한쪽에 서서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한 곡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혜귀비가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그녀의 손을 이끌어 함께 앉게 하며 말했다.
"원래는 그대를 불러 함께 비파 소리를 들으려 했건만, 바깥 날씨가 몹시 춥고 그대가 추위를 많이 타서 걱정했구나."
황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짐이 제 태의에게 명해 그대의 몸을 돌보라 했는데 지금은 어떠한 것 같은가?"

혜귀비가 눈썹을 내리깔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신첩이 비록 몸이 허약하나 황상께서 보살펴주시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사옵니다. 그러니 오늘 특별히 양심전으로 걸음한 것이지요."

황제가 혜귀비의 손을 잡고 지긋이 바라보았다.
"손이 이렇게 차구나. 왕흠, 사람을 불러 화로 두 개를 더 갖다 놓아서 귀비가 춥지 않도록 신경쓰거라."

혜귀비는 본래 연약하여 바람에도 휘청이는 자태를 가졌는데, 황제가 이처럼 다정하게 관심을 가지니 여인의 교태가 더 많이 우러나왔다.
"황상의 기운이 왕성하시니, 신첩은 곁에만 있어도 아주 많은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미간과 눈가에 온화한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따뜻해지도록 잘 앉거라."
말을 마치고 몇몇 비파 뜯는 기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그대가 곁에서 듣기로 어떠한 것 같은가?"

혜귀비가 애교넘치게 말했다.
"지금 남부에는 손꼽히는 비파 연주자는 뜻밖에도 없는 것 같사옵니다? 이 몇몇이 와서 황상께 상을 청하기 전에 황상의 귀를 더럽힐 것을 걱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몇몇 비파를 뜯던 기녀들이 듣고는 허둥대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서둘러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기녀들에게 한쪽으로 물러나라는 뜻을 표시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비파 이야기가 나오니 말인데, 여기 나라에서 손꼽히는 연주자가 여기 있으니 짐이 아직도 다른 사람을 불러다 연주하는 것을 들어야겠는가? 그대가 여기 없었으니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을 몇곡 들으며 시간을 보낸 것일 뿐이다."

혜귀비가 방긋 웃으니 얼굴에 더욱 빛이 넘쳐흘러서, 방 안 가득 봄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혜귀비는 손 닿는대로 한 기녀가 사용하는 봉황머리 비파를 고르며 조금 의아해했다.
"지금의 남부는 어쩜 이리도 호화로운가? 평범한 비파 기녀가 쓰는 것도 이같이 상아를 박아넣은 봉황머리 비파를 쓰는가?"

황제의 입가의 미소가 조금 굳어지자, 뒤로 물러나 있던 비파 기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소인의 기교가 좋지 못하여 황상의 귀를 더럽히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가장 좋은 비파를 사용하는 것이옵니다."

혜귀비가 조금 깔보는 듯 그녀를 바라보니, 그 비파 기녀의 나이는 열 여덟을 넘지 않은 것 같았고, 용모는 비록 출중하지 않았지만 청아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이 조금 편치 않았다.
"만약 정말로 재주가 없었다면 설령 남당(南唐)과 대주(大周)의 소조(烧槽) 비파라 해도 하늘이 내린 물건을 마구 써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겠지."

그 비파 기녀는 겁에 질려서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서있었다. 혜귀비는 한번 훑어보고는 비파 기녀들이 쓰는 악기 중에서 이 봉황머리 비파의 음색이 가장 맑아서 그 비파를 비스듬히 안고 가볍게 현을 조정했다. 음 하나 하나 시험하고 맞추고나서야 비로소 현을 가볍게 뜯고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하자 음률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이 마치 구슬같았고, 손가락이 스스로 이리저리 미끄러지며 드리우자 만개한 꽃과 잎 아래에 맺힌 맑은 이슬같았고, 꽃그림자 아래에 깃든 새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는 것 같았으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구성지다는 말로는 이루다 표현하지 못할, 마치 창밖의 추위를 단박에 몰아내고 한들한들한 봄빛만 오래도록 남겨두는 것 같았다.

한 곡이 끝나자 황제는 무척이나 심취한 표정으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비파에 대해서라면 궁중에는 참으로 희월 그대를 능가할 사람이 없도다."

혜귀비는 섬섬옥수를 들고 매우 아쉬워하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신첩 손이 시려서 조금 굳어있는데다가 다른 사람이 쓰던 비파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 곡이 평소만 못하니 황상께 웃음거리만 보여드렸사옵니다."

황제가 매우 칭찬했다.
"그만하면 무척 좋았다."
황제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바깥을 향해 말하며 왕흠을 불러 들였다.
"귀비가 손이 시리다 하는구나. 짐이 기억하기로 길림의 장군이 올해 바친 검은 여우 가죽이 모두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짐이 황후에게 주었지. 그리고 또 한 장이 있으니 이것은 귀비에게 주거라."
황제는 웃으며 희월을 향해 말했다.
"가볍고 따뜻하기로 치자면 이것이 검은 담비보다 좀 더 나으니 그대에게 주는 것이 제일 적합하겠다."

희월의 두 눈에 웃음이 넘쳐 흘렀다.
"마침 공교롭게 되었사옵니다. 방금 황후께서도 신첩에게 검은 여우 가죽을 상으로 내리셨사온데, 이 또한 길림의 장군이 진상한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보아하니 이리 좋은 물건이 모두 신첩의 궁중에 들어올 운명이었나봅니다."

황제의 눈빛에 기쁘고 안도하는 빛이 스쳤다.
"황후가 어질고 총명하며 대범하여 그대에게 몹시 잘해주었구나. 그렇다면 가죽 두 장을 모두 그대에게 주겠다. 허나 짐의 뜻이 황후보다 조금 더 크니, 왕흠, 너는 이것을 내무부에 가져가서 귀비의 의상을 만들고 완성되면 다시 함복궁으로 보내거라."

왕흠이 대답하고는 손짓하여 악사 무리를 이끌고 물러났다. 황제는 그 무리 중 한 명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그 하늘하늘한 푸른 비단옷을 입은 무리가 주홍색의 궁문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낮게 웃으며 말했다.
"어떠하냐?"

희월이 피식 웃으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무엇이 어떠하다는 말씀이옵니까? 황상께서 신첩을 아끼신다는 말은 거짓이옵고, 한비를 아끼신다는 것이 진실이지요."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짐이 어쩌다 한 번 한비를 보러 간 것인데 어찌 그대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냐?"

희월은 억울한 모양을 자못 드러내었다.
"신첩이 오늘 들었사온데, 황상께서 한비에게 특별히 어필을 내리셨고, 한비는 의기양양하여 내무부에 편액을 만들라 명하고 연희궁 정전에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신첩의 함복궁 안에 있는 어느 편액이나 모두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것이라 금분을 칠할 가치도 없사옵니다. 한비가 이런 영예를 누리는데 신첩은 바람은 모두 가망이 없사옵니다."

황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그대가 그것을 좋아하는군. 짐은 다만 한비가 머무는 연희궁이 그대의 함복궁만 못하니 남부끄러울까 염려되어 손가는대로 글 한 폭 써서 한비에게 준 것이야."

희월은 황제의 소매를 잡아끌며 애교를 부렸다.
"이왕 손가는대로 쓰신 참이니, 황상께서 신첩과 황후께도 한 폭씩 내려주시어요. 온 궁중에 한비만 가지고 있으니 신첩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사옵니다."

황제는 작고 아름다운 희월의 코를 톡 건드렸다.
"그대가 부러울 게 무엇이 있는가. 짐이 그대에게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꼭 똑같이 해야 그대가 기뻐할 것인가?"

희월은 억울함 반 애교 반 섞어 말했다.
"황상께서는 종일 조정의 일로 바쁘시고, 신첩은 후궁에서 밤낮으로 황상을 그리워하니, 글자를 사람이라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이옵니다."

황제는 살짝 주저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좋다. 어려울 게 무엇이 있겠느냐? 그대가 늘 황후를 마음에 두고 염려하니, 짐이 그대와 황후에게 하사할테니 그대들에게도 편액을 만들어서 정전 안에 거는 것을 허락하노라. 이제 만족스러우냐?"

희월은 그제서야 아리땁게 웃으며 온순하게 황제의 어깨에 기대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은 알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신첩을 제일 아끼신다는 것을요."

저녁 수라를 마친 후, 황제는 사람을 시켜 희월을 돌려보내고 서재에 남아 종이를 펼쳐놓고 물 흐르듯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왕흠은 황제가 금가루를 흩뿌린 새하얀 큰 종이 위에 열한 폭의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곁에서 먹을 갈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황상께서는 황후와 혜귀비에게 정말 각별한 은혜를 내리시는군요. 어리석은 소인이 생각해보건대, 황상의 글은 당연히 모두 좋은데다가, 본래 이 열한 폭 안에 황상께서 가장 좋은 상을 골라 넣으신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왕흠이 만면에 웃음을 띤 것을 보며 말이 없었다. 그저 붓을 들어 청옥 붓받침 위에 올려두고 미소를 지으며 한 장 한 장 바라보았다. 황제가 고개를 기울이자 서재 문간에서 시중들고 있는 이옥이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왕흠은 이런 생각이구나. 이옥, 너는 어찌 보느냐?"

이옥은 넋이 빠져있다가 대답했다.
"소인 우매하오나 황상의 은혜가 육궁에 널리 퍼져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연희궁은 이미 한 폭의 글씨를 가졌으니, 이 열한 폭에 자연히 육궁이 모두 은총을 입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손뼉치고 웃으며 말했다.
"좋다. 네가 영리한 것 같구나." 황제가 한 폭 한 폭 그림을 세세히 감상하더니 스스로도 꽤 만족하여 하나하나 생각하며 말했다.
"함복궁은 덕이 넘치고 아름다움에 부합하니 혜귀비의 복과 덕 두 가지 뜻을 칭찬하고, 황후의 장춘궁은 공손하고 수양하며 안사람의 모범이 되고, 황후가 왕실의 법도를 제일 공경하니, 이 글씨가 황후에게 가장 적합하다. 종수궁은 정숙하고 삼가할 줄 알며 온화하니, 순빈의 심성에 가장 합당하고, 친 자식을 곁에 두지 못하는 슬픔을 위로할 수 있겠지. 태극전은 곱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선량하니......"

왕흠이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가귀인의 미모가 후궁에서 제일이옵니다."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인궁은 편안하고 아름다우며 조용하다. 승건궁은 덕이 있고 유순하지. 영화궁은 예의바르고 얌전하여 삼갈줄 알며, 저수궁은 다채롭게 꾸미며 안을 다스리고, 익곤궁은 너그럽고 덕이 크다. 영수궁은 법도를 따르며 정숙하고 덕이 있으며, 경인궁은 조화로운 덕이 있고 땅의 근원이다."

왕흠이 이상히 여겨 말했다.
"경인궁도 있사옵니까?"

황제가 말했다.
"경인궁 황후는 이미 돌아갔으니, 너는 내무부에 말해 나중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잘 수리해두라 해라."

왕흠이 서둘러 대답하자, 황제는 옆에서 시중드는 이옥을 흘끔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방금 네가 아주 총명했으니, 짐이 열한 폭의 글자를 내무부에 보내 편액을 만들라 했던 일은 네가 맡거라."

이옥은 과분한 총애에 몸둘 바를 모르고 그저 영예롭다 여기며 황급히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황상의 상에 감읍하옵니다."

황제가 이상히 여겨 말했다.
"네가 무슨 일을 했길래 이것이 네 상인 것이냐?"

이옥은 기쁨이 가득하여 말했다.
"이 상은 황상께서 육궁의 소주마마께 내리시는 것이옵고, 소인은 운좋게 이 일을 접한 것이라 자연히 복을 옮겨 받은 것이니, 그래서 황상의 상에 감사를 올리는 것이옵니다."

황제가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말 잘 하는구나. 짐이 쓰고 남은 이 금을 뿌린 종이를 네게 상으로 내리마."

이옥이 기뻐서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일어나면서 왕흠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는 놀라서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하여 황급히 종이를 받쳐들고 물러났다.

황제는 조금 귀찮은 듯 물었다.
"지금 몇시진이더냐?"

왕흠이 재빨리 말했다.
"패를 뒤집으실 시간이옵니다. 황상, 경사방 태감이 이미 녹두패를 받쳐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잠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늘은 남부에서 와서 비파를 뜯었던 그 비파 기녀, 봉황목 비파를 안고 있던 그......"

왕흠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이 돌아왔다.
"남부 비파부의 악기(樂妓)인 예희라 하옵니다."

황제가 미간을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에 미소를 떠올리고는 짧게 말했다.
"데려오라."

왕흠은 머릿속이 멍해진 것 같아서 입으로는 감히 망설이지 못하고 황급히 대답하고 서둘러 처리하러 나갔다.

긴 거리에 쌓인 눈은 궁인들에 의해 깨끗하게 치워졌고, 석회암으로 된 무늬 벽돌 위를 천천히 걷노라니 양 옆에 쌓인 눈더미가 붉은 담장과 푸른 기와를 비추어 더욱 눈부신 것 같아 마치 대낮 같았다.

여의는 해심의 손에 기대어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앞서 가는 두 태감은 양의 뿔로 만든 궁등(경축일이나 축제때 추녀 끝에 걸어 두는 팔각형 또는 육각형의 등롱(燈籠). 각 면은 비단을 붙이거나 유리를 끼우고, 채색 그림을 그려 넣음. 원래 궁궐에서 전용한 데서 유래한 명칭)을 들고 있었고 찬 바람이 등에 불어오면 주마등처럼 어지러이 흔들리는 불빛만이 보일 뿐, 사방에는 음산한 한기가 붉은 담장에 들러붙어 날카롭고 긴 소리를 내며 바스라진 눈 부스러기를 흩날리게 할 뿐이었다. 해란은 조금 무서워져서 여의 곁으로 바싹 붙었다.

여의는 해란의 손을 도닥이는 듯 위로하며 미안해했다.
"이렇게 늦었는데 자네에게 나와 함께 보화전에 복을 빌러 가자고 했으니 참으로 자네가 난처하겠군."

여의 곁에 바짝 붙어 손을 맞잡소 천천히 걸어가는 해란의 눈에는 조금 기쁨이 어린 것 같았다.
"저 혼자 궁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답답해서 견디기 어렵고, 귀비도......"
해란은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다행히 형님과 함께 보화전에 가서 라마 법사의 독경을 들을 수 있으니 마음이 많이 안정되어요."

여의가 말했다.
"불가의 교의는 본래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태도를 온화하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가서 법사들과 함께 열심히 경문을 외고 그동안 베껴 쓴 <법화경>을 태우고 내 마음 속의 바람을 기원할 것이다."

해란은 사방을 둘러보며 긴장하여 말했다.
"형님 말씀하지 마세요, 말씀하지 마세요."

여의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두려워 말아라, 자네만 알아준다면 되었다. 친족이 곁에 없으니 우리 속세의 사람은 그저 애도하는 마음을 다할 뿐이다."


해란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거리가 떠오르자 눈썹 꼬리가 축 처지며 비탄에 잠겼다.
"해란의 부모는 일찍 돌아가서 주변에는 오직 형님만이 있었고, 형님이 있어서 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어요."
해란은 말하면서 마치 꼭 그래야만 하는 듯 자신의 가냘픈 몸을 더욱 여의 곁으로 바싹 기대어 붙으며 도처에서 뼛속까지 스며드는 겨울날의 한기를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여의는 알았다는 듯 해란의 가녀린 손목을 꼭 잡으니, 마치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았다.
"자네가 평소 나를 보러 오는 것은 좋지만 귀비가 알게 된다면 또 자네를 괴롭힐까 걱정이야."

해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는 모두 다 익숙해졌어요."

두 사람이 한창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마차 바퀴가 청벽돌 위를 덜컹거리며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주하는 붉은 칠을 한 마차가 바로 코앞을 스쳐서 지나갔다. 여의는 해란을 자신의 뒤로 끌어 당기면서 스스로는 피할 새가 없어서 겉에 걸친 흰 바탕에 나뭇가지 문양을 새겨넣은 기러기 깃털 외투에 마차 바퀴에서 튄 진흙 얼룩이 조금 튀었다.

아직 맑고 차가운 공기 중에 약간의 향이 남아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해란이 이상히 여겨 말했다.
"저것은 비빈들이 시침들러 갈 때 타는 봉란춘은거(凤鸾春恩车)가 아닙니까!"

여의는 기러기 깃털 외투에 튄 진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놀라서 말했다.
"오늘밤에 황상께서 패를 뒤집으셨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저 봉래춘은거가 이리도 급하게 가다니 누가 새로 들어온 것인가?"

해란은 공기 중에 남은 달콤한 향을 냄새맡아보더니 역시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참으로 짙고 달콤한 향이네. 귀비는 이렇게 진한 향은 쓰지 않는데 그럼 누구일까요?"

마차가 덜컹거리며 멀어져가는 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이상하게 여기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소리는 두터운 눈 속으로 이어지며 두 바퀴가 깊이 남긴 흔적은 곧 마음 속에도 새겨져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이날 이른 아침, 비빈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일찌감치 황후의 궁에 모였다. 전각 안이 일순간에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목소리로 가득 차고, 진주와 비취가 가득 감돌며 훈향의 향기도 분냄새에 가려 옅게 느껴졌다.

황후는 안에서 치장하는 중이라 아직 나오지 않았다. 비빈들은 한가롭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느라 무척 시끌벅적했다. 이귀인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어젯밤에는 밤새 찬 바람이 불어서 바람소리가 대단했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어쩜 봉래춘은거 소리와 그리도 비슷하던지요?"

가귀인이 차갑게 웃으며 머리에 꽂아 비스듬히 떨어지는 순금 매미 장식을 어루만졌다. 장식에 드리워진 붉은 수정을 꿴 술이 분을 고르게 바른 이마 언저리에서 찰랑댔으며, 말할 때마다 흔들리며 빛나서 눈 앞에 붉은 별무리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가귀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것은 이귀인 자네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누구 귀가 틀림이 없는 것이지. 눈을 쓸어낸 청벽돌 바닥에 얼음이 얼어서 그 마차 바퀴 소리가 얼마나 울리던지 천둥치는 소리 같아서 듣지 못한 사람이 없었을 텐데?"

해란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형님들께서 들었다고 하실 게 아니라, 빈첩은 보화전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막 봉래춘은거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태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요즘 내내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던 순빈도 이상하게 여겨서 물었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기로는 어젯밤에는 황상께서 패를 뒤집지 않으셨는데 봉래춘은거는 누구를 데리러 간 것인가?"
말을 마치고나니 순빈도 의혹이 들어서 금귤을 까먹고 있는 혜귀비를 곁눈질했다.
"혹시 황상께서 늘 혜귀비를 생각하시니, 비록 패를 뒤집지는 않았어도 귀비마마를 모시러 간 것은 아니옵니까?"

혜귀비는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귤을 까서 먹으면서 차갑게 웃었다.
"누가 마차 안에 있었는지 본궁이 어찌 알겠는가? 이렇게 궁의 법도를 어기고 비밀리에 일어나는 일은 본궁 주변의 일이 아니면 그만이네."

여의는 찻잔을 받쳐들고 찻잔 뚜껑으로 천천히 차에 뜬 거품을 걷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누구든 간에, 모두들 그렇게 궁금하다면 왕흠을 불러다 물어보는 게 어떻겠어요. 왕흠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텐데 말이죠."

혜귀비가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뜨며 피식 웃었다.
"이런 건 감히 한비만이 말할 수 있고 한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한비 아우님이 수고롭겠지만 가서 왕흠에게 물어보시던가."

여의는 찻잔만 바라보며 혜귀비를 곁눈질하지도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제일 궁금한 사람이 가서 물어봐야지요. 금비녀가 우물에 빠져 있으면 보지 않아도 누군가 급히 건져내지, 어찌 아까워하지도 않고 안에 묻어버리겠습니까."

가귀인이 손수건으로 콧망울의 분을 누르며 웃었다.
"그렇네요, 어떤 좋은 물건도 숨길 수 없는 것이 문제죠. 지켜 보면 그만일 일이에요."

사람들이 이야기하며 안에서 옥신각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한바탕 차가운 기운이 전해져 들어오자 황후가 나온 것을 알고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공손히 황후를 영접했다.

황후는 소심의 손을 잡고 진중하고 한가롭게 걸어와 안정된 표정으로 경솔하고 들뜬 전각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황후는 정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앉으라 분부하고는 비로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여러 아우님들이 신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드문드문 들었는데, 무슨 재미난 일이 있어서 여러 아우님들이 이리도 즐거워하시는가?"

사람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자, 마침내 가귀인이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신첩들이 방금 이야기하던 것은, 어젯밤 황상께서 패를 뒤집지 않으셨는데 봉래춘은거가 지나갔다 하여 어찌된 연고인가 했사옵니다."

황후는 담담하게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마치 가볍게 어른거리다가 이내 추위에 굳은 눈에 온기를 빼앗겨버리는 눈 내린 들판에 비치는 햇빛 같았다.
"무슨 연고가 있겠나? 우리 자매들의 복이자 함께 지낼 아우가 한 명 더 늘어난 것일 뿐이지."

"아우가 한 명 더 생겼다고요?"
가귀인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말씀은 곧......"

"날씨가 추우니 본궁이 자네들에게 일찍 와서 문안 올릴 필요 없다 분부했는데, 그래서 자네들이 모르는 것이네. 방금 자네들이 오기 전에 황상께서 이미 경사방에 구두로 명을 내리시어 남부의 백 씨를 매답응으로 봉하셨네. 본궁도 벌써 매답응이 지내도록 영화궁으로 보냈다네."

혜귀비가 손에 쥔 비단 손수건을 쥐어짜며 참지 못하고 낮게 외쳤다.
"남부라고요? 그렇다면......"

여의는 마음 속으로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고 참았다. 그저 해란과 시선을 교환하고 암암리에 생각하기를, 어쩐지 그리도 훈향의 향기가 진하더라니 역시 이런 미녀가 있었구나 싶었다.

황후의 얼굴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그저 눈꺼풀을 들어 혜귀비를 바라보았다.
"이치에 따르면 귀비는 벌써 보았을 것인데, 듣자하니 비파를 연주하는 악기(樂妓)라고 하더군."

혜귀비는 미간을 찌푸리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어제 본 몇몇 악기들 중에 용모가 가장 수려했던 한 명이 있었을 뿐,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으나 다른 사람은 없었다. 혜귀비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말했다.
"봉황머리 비파를 연주하던 악기가 한 명 있었사온데, 황상께서 그들이 연주를 못한다고 싫어하셨는데......"

순빈이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비파를 잘 뜯고 못 뜯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황상의 환심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무심히 들어 넘겼고, 비록 말하는 사람은 아무 뜻이 없지만, 희월에게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을 도려내어 견디다 못해 목구멍 속에서 핏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희월은 금귤을 너무 꼭 쥐고 있어서 스며 나오는 귤즙이 손을 흥건하게 물들이자 비로소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황급히 덮어 감추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귀인이 버들잎 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삐딱한 심사를 드러냈다.
"남부의 악기면 그게 무슨 신분이랍니까? 궁녀만도 못한데. 궁녀는 한 계급씩 진봉되고, 먼저 봉호도 품계도 없는 관여자에서 시작하는데 이 사람은 하룻밤 새에 답응이로군요."

황후가 상냥하게 말했다.
"악기가 비록 신분이 궁녀만 못하나, 신자고(辛者库)[각주:2]의 천한 노비보다는 낫지 않은가. 강희제의 양비는 신자고 출신이 아니던가? 그대로 황자를 낳고 비로 봉해져 일생으로 영화롭게 살았지. 그리고 궁녀가 아니라 악기이기 때문에 황상께서 특별히 좀 더 은혜와 상을 내리신 것이니 규범을 어겼다 할 수 없네."

가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털어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악기가 어떤 천한 신분이옵니까? 내일이면 여기서 우리가 한담을 나누던 남부의 그 광대가 우리와 대등하게 앉아있을텐데 재미있겠네요. 게다가 그 몸에 악기의 의상을 입고 비파를 뜯으면 아주 정신을 쏙 빼놓겠군요? 여기 이미 수방에 수놓던 해상재가 있으니 이제 더 재미있어지겠네요."

해란은 이 말을 듣고 침울해져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추풍낙엽의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됐다!"

가귀인은 깜짝 놀라 더 말하지 못했다. 황후는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어찌 말하든 간에, 매답응은 황상께서 등극하신 이후 제일 처음 들어온 새 사람이고 황상께서 좋아하시는데 누구도 쓸데없는 뒷공론을 해서는 아니될 것이야. 본궁은 딱 한 마디만 할 것이니, 육궁이 화목해야 비로소 자손이 창성하는 것일세. 누구든 질투하고 서로 헐뜯는 자가 있다면 본궁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

뭇 사람들이 예예 하고 대답했다. 일순간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순빈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황후마마, 신첩 무리한 청이 한 가지 있사온데, 실은......"

황후가 온화하게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말해도 괜찮네."

순빈이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마마, 어젯밤 내내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신첩 많이 무서웠습니다. 신첩의 삼황자가 아직 강보에 있으니 줄곧 추위를 타지 않을까 걱정되었사옵니다. 신첩의 마음에 근심이 있으니 신첩이 오늘 아가소에 가서 삼황자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황후마마께서 허락해주셨으면 하옵니다."

황후는 잠시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를 조금 마시다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본래 보름날이니 자네가 아가소에 가도 되는 날이네. 선조들의 규범이 있으니 반 시진이면 너희 모자가 정을 나누는데 충분할 것이야."

혜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황후마마를 제외하고 후궁의 비빈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만 아가소를 방문할 수 있지만, 반 시진을 넘기면 아니되지. 황후마마께서 자주 가셔서 황자와 공주들을 돌보시니 본궁도 한번 같이 가보았는데 삼황자는 황후마마 소생의 이황자와 삼공주만큼이나 보살핌을 잘 받고 있던데 말이지. 풍족하기가 이와 같으니, 황후마마께서 거듭 당부하시기를, 삼황자가 어리고 약하니 만사 조심해야 한다 하셨네. 황후마마께서 이리 관심을 가져주시니, 순빈 자네는 부족할 것이 무엇이 있나? 설마 잠깐 잠깐 함께 있어준다고 자네의 삼황자가 겨울이 되면 추위를 안 타겠는가?"

순빈은 혜귀비에게 일장연설을 듣고는 말문이 막혀서 울적하게 눈망울을 드리울 뿐이었다.

황후가 너그럽고 온화하게 웃었다.
"됐네. 자네가 아들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본궁이 알고 있네. 다만 아가소의 일은 마음 놓아도 될 것이야. 계속 이리 온종일 아들 걱정만 한다면 어찌 황상을 잘 모실 수 있겠는가?"

혜귀비는 맨 마지막에 막 일어나서 가려던 참에 황후가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다시 계속 앉아서 금귤을 까먹었다.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황후는 그제서야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난각에 매우 좋은 박하 연고가 있으니 자네가 와서 본궁에게 발라주게."

혜귀비는 대답하고 황후와 함께 난각으로 갔다. 소심은 어두운 꽃무늬와 미인상이 그려진 작은 도자기 사발을 탁자 위에 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혜귀비가 의중을 깨닫고 열어서 냄새를 맡아보자 청량한 박하 향이 코를 씻어내며 서리와 눈이 몰아치는 것처럼 바로 정신이 맑아졌다. 혜귀비는 약지에 조금 찍어서 황후에게 가볍게 발라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이 속이 좁은 것이 아니오라, 황상께서 이런 사람을 받아 들이신 것이 솔직히......"

황후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신분이 낮고 천한 것은 상관없네만 성격이 온순하다면야 다행이지. 자네는 그녀의 내력을 모르겠지만......"

혜귀비는 더욱 놀라며 의아해했다.
"무슨 내력 말씀이옵니까?"

황후는 무척 머리가 아픈 듯 보였다.
"본궁은 그저 황상께서 비빈으로 봉하시는 사람을 받아들일 뿐,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는 않네. 조일태를 남부에 보내 자세하게 알아보게 했더니, 그 백 씨가 뜻밖에 그녀와 연관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혜귀비가 대경실색했다.
"마마의 말씀은...... 한비!"
혜귀비는 생각하면 할수록 심상치 않아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신첩은 황상께서 한비의 처소에 자주 가지 않으시니 한비가 본분을 지킨다고 여겼사옵니다. 이제 보니 자기가 총애를 다투고 과시할 수 없겠다 싶으니, 암암리에 철저히 계획하여 사람을 들여보낸 것이니 참으로 음험하고 악독하옵니다!"

황후는 손가락에 박하 연고를 조금 찍어서 코에 대고 잠시 가볍게 냄새를 맡더니, 그제서야 온몸이 많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악독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온종일 근심걱정이 없다 여기며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이네. 한 때의 소홀함이 매답응 한 명을 불러들였으니, 그녀 하나라면 다행이다만……"

혜귀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남부 출신으로 괜찮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사옵니까? 하나하나가 여우같이 주인을 홀리고 경박한 꼴입니다. 신첩 방금 생각났사온데, 어제 신첩이 본 비파 기녀들의 기예는 아름답지 못했고, 나오는 대로 한 마디 하니 간 큰 것 하나가 황상의 면전에서 신첩의 이야기에 대답을 했사옵니다. 한 명 두 명 모두 이리도 간덩이가 부었는데 어찌 좋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황후는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의아해했다.
"자네 앞에서 이리도 대범하게 구는 걸 보면 분명 분수를 아는 것은 아니겠군."

황후는 조금 우울해졌다.
"본궁이 후궁의 천갈래 만갈래로 얽힌 일을 돌보느라 살피지 못하는 곳이 생기네. 자네는 귀비이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으니, 자네가 본궁 대신 정신차리고 살펴봐야지. 언제 우리 자매가 다른 사람이 계획을 꾸미는데도 전혀 몰랐던가! 한비는 최근 총애를 받지 못하지만 이제 열아홉이니 앞날이 구만리같네......"

혜귀비는 조금 넋을 잃고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신첩은 벌써 스물 다섯이옵니다......"

황후는 혜귀비의 가느다랗고 하얀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도 스물 다섯이고 본궁도 이미 스물 다섯이네."
황후의 말투가 엄숙해지며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 다섯이면 또 어떠한가? 우리의 시선이 멀리까지 닿아 만사 세심하게 고려하고, 한 사람 눈으로는 모자라지만 다른 한 사람이 도와준다면 살피지 못하는 곳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여우같은 것들이 총애를 받아 알랑거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네. 그 날 본궁이 전각을 분배할 때에 일부러 해란을 자네 궁으로 보낸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자네는 아는가?"

혜귀비는 황후의 말투가 평온한 것을 듣고 마음에 조금 위안이 되어 황급히 말했다.
"잠저에 있을 때, 신첩과 한비, 가귀인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총애를 받는다 할 수는 없었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해란을 신첩의 궁중에 보내신 것이 그녀가 어느날 남몰래 황상을 꼬여내는 것을 막으려 하시기 때문이죠. 황후마마께서는 안심하시어요. 황상께서 곧 그녀가 누구였는지도 기억 못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황후의 눈빛이 가볍게 혜귀비의 얼굴을 훑으며 혜귀비가 매우 태연자약한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는 비록 그중 한 원인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네. 해란은 지금까지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상께 이미 잊혀진 사람이자, 동시에 매우 신선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꽤 있다는 것일세. 자네가 그동안 그녀를 잘 막아왔네만, 더 중요한 것은 한비와 해란이 친해지지 못하게 막는 것이야."

혜귀비가 곧 의중을 깨달았다.
"마마의 말씀은, 해란도 제2의 매답응이 될 거란 말씀이시지요."

황후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허나 매사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 궁의 사람이니 자네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야."

이곳 연희궁의 곁채는 조용하지 않아서 여의는 복도에 서서 내무부에서 겨울에 사용하도록 보내온 숯불을 보고 있었다. 어린 태감 보성이 몇몇을 데리고 수를 헤아리고는 나아와 말했다.
"마마, 모두 세보았습니다. 흑탄이 천이백 근, 홍라탄이 삼백 근, 모두 밖에 있사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해상재는 어떠하냐?"

보성이 말했다.
"상재 신분에 따라 홍라탄은 없고 단지 매일 흑탄 20근을 받는 것 같사옵니다. 다만 소인이 방금 내무부에 알아보니 하는 말이......"

여의가 눈썹을 찌푸렸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말하거라. 듣자하니 뭐라더냐......"

보성이 놀라서 혀를 날름 내밀고는 황급히 말했다. "듣기로 해상재의 궁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흑탄이 모자라는데 분량은 정해져있어서 어디서 좀 더 구해야 한다 하옵니다. 걱정되는 것은 해상재가 한창 추위를 겪고 있다는 것이옵니다."

아약은 여의에게 갓 불피운 손난로를 가져오며 세심하게 자주색 융으로 만든 손난로 덮개를 감싸서 여의의 손에 쥐여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깥에 바람이 많이 부니 소주께서는 풍한이 들지 않도록 머리를 잘 덮고 바람을 막으셔야 합니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방안에 있자니 답답하고 불편하여 여기서 바람을 피하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아약이 다시 말했다.
"보성의 말을 들으니 해상재는 항상 온순해서 만약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것 같지 않다면 내무부에 가서 탄을 더 달라 하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다만 그 궁에는 모두 그 두 사람 밖에 없는데 어찌 탄이 모자랄까요?"

여의가 탄식하여 말했다.
"그것이 바로 해상재의 곤란한 사정이다. 어젯밤에 나와 해상재가 함께 보화전에서 독경하고 복을 빌 때, 해상재의 손을 짚어보니 온기가 있을 뿐, 분명히 따뜻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상재를 시중드는 엽심과 향운이 그리 세심하지 않은 것 같아보이던데 그녀의 양눈이 모두 붉은 것을 누가 물어보기나 했으려나. 보내온 탄이 처음부터 모자란데다가 그녀가 있는 서쪽 방도 본래 추워서 평소 화로 하나로 간신히 버틴 것이니 어디 손난로와 각로를 살필 수나 있었겠나. 나도 이제야 알았으니 해상재의 나날이 뜻밖에도 이리도 어려웠구나."

아약이 몸에 걸친 어두운 자주색 의복을 정돈하며 위로했다.
"소주를 책망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귀비가 소주와 평소 화목했다면 소주께서도 당연히 함복궁에 가셔서 해상재를 보실수 있으셨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어떻게 돌보실 수 있겠사옵니까? 말하자면 이 또한 자기 궁중의 사람이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귀비가 매우 부주의한 것이옵니다."

여의는 마음이 괴롭고 치미는 화를 참았다.
"인정과 도리에 따르면 해란은 시녀 두 명, 태감 두 명만 둘 수 있고 물건도 당연히 충분하지 않다. 설령 그녀가 내게 말했듯 귀비가 추위를 타서 궁이 충분히 따뜻하지 않은 것을 싫어한다 하니 내무부에서 보낸 탄을 대부분 가로채서 그녀에게 보낸 것이야. 귀비 자신은 그렇다 쳐도, 시종들의 방도 지글지글 끓으니 해란은 감안하지도 않은 것이지."

아약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정월과 이월에는 심하게 얼어붙는데 해상재가 어떻게 견딘단 말이옵니까?"

여의가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화를 피하려다 이리 해상재를 억울하게 했구나. 만일 내가 좀 더 세심히 살펴서 일찍 발견했다면 그녀도 이리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됐을텐데."
여의는 보성을 불렀다.
"네가 세심하니 이 탄을 살짝 해상재 거처에 보내고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어서는 아니된다. 잊지 말거라, 흑탄만 보낼 수 있다. 해란의 신분은 홍라탄을 사용할 수 없으니 홍라탄을 태운 재는 은백색이어서 한눈에 다른 사람의 눈에 띄니 오히려 좋지 않다. 허나 흑탄은 보아서 많고 적음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보성이 대답하여 말했다.
"소인 잘 알겠사옵니다. 귀비가 문안을 올리러 간 틈을 타서 한 번 보내고, 많이 보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여의가 만족하여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어서 가보거라. 그리고 내무부에서 보낸 겨울옷 중에 괜찮은 것을 하나 골라서 살짝 같이 보내거라."

아약은 보성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소주께서 해상재를 많이 챙기시는군요. 날씨가 막 추워졌을 때 햇솜을 많이 보내시고, 지금은 옷을 보내주시네요."

여의는 심기가 꽤나 거슬렸다.
"이 궁중에 서로 어울리며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해란도 나와 마음이 맞는 것 같으니 서로 보살피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
여의는 아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너를 영화궁에 보내 매답응에게 선물을 조금 보내게 했는데 좀 알아본 것은 있느냐?"

아약은 사방을 둘러보며 서둘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소주의 명을 받들어 꽃무늬 비단 두 필을 보냈사온데 영화궁이 그리 북적일 줄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가귀인과 이귀인이 모두 선물을 보내오고, 뒤이어 혜귀비도 많은 물건을 상으로 내렸사옵니다."

여의가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순빈은......"

"소인이 갔을 때는 순빈 궁에서는 아직 선물을 보내지 않았사옵니다."

여의는 알았다. 황후의 궁중에서 막 나온 순빈은 분명 길을 재촉하여 아들을 보러 아가소로 간 것이다. 설령 돌아왔다 하더라도 분명 아들을 곁에 둘 수 없음에 슬퍼하여, 잠시 신분에 맞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살피지 못한 것이리라. 여의가 이윽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다렸다가 나와 종수궁에 순빈을 보러 가자. 순빈도 가련한 사람이니."

아약이 또 말했다.
"소인 특별히 매답응을 찾아뵙고 왔사옵니다. 비록 답응이지만 영화궁에 안배된 것과 매답응의 치장은 모두 이귀인에 비해 존귀한 것이었사옵니다. 비록 아직 한 번밖에 시침들지 않았지만 황상께서 무척 좋아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사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귀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밖에서 전해져 들어왔다.
"황상이 어찌 매답응을 좋아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노래하고 비파 타고 갖가지 기예가 있는데 어찌 아니 좋아하시겠나? 집안에서 잘 교육시킨 것이 좋은 사람을 배출했구먼!"

여의는 눈을 살짝 들어 김옥연이 장미꽃과 수많은 자주색 나비가 꽃들을 지나다니는 무늬가 아로새겨진 털달린 망토를 입고 시녀 여심의 손을 잡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옥연은 여의를 바라보며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올렸다. 웃음소리는 차갑기가 처마 밑에 열린 고드름같았다.
"한비마마, 경하드리옵니다."

여의는 잠시 멍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가귀인이 영화궁의 매답응에게 할 말이 어쩌다 연희궁에 잘못 들어왔구나."

가귀인이 차갑게 웃었다.
"빈첩은 이리 좋은 재주가 없사와 꽃송이같은 사람을 갖가지 기예로 훈련하여 춤과 노래로 사람을 맞이하게 하질 못하옵니다. 마마의 손으로 이리 총애받는 사람을 키워내셨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여의는 마음이 움츠러들었지만,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김옥연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신을 향하는 것을 듣고 곧 표정과 말투를 감추지 않았다.
"가귀인은 성격이 호탕하여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니, 오늘 할 말도 차라리 기탄없이 말하게. 본궁이 귀를 씻고 공손하게 듣겠네."

"귀를 씻고 공손히 들으시겠다고요?"
가귀인이 한껏 웃었다. 그 웃음은 지금 날씨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한기를 품고 있었다.
"한비마마께서 비파 곡이 귀에 익은 것을 들으셨는데, 구태여 오늘 아침 우리와 함께 모르는 척 하며 매답응의 내력을 논할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여의는 가귀인이 꺼낸 "내력" 두 글자를 듣고 마음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김옥연의 표정이 천연덕스러운 것을 보니 뭐든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스스로 짐작하기보다 김옥연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나았다. 여의가 하는 수없이 말했다.
"가귀인이 무어라 말하든 매답응의 내력에 관해서는 본궁은 정말로 아는 것이 없네. 만약 가귀인이 연희궁에 헛걸음할 필요가 없었다고 여긴다면 본궁에게 분명히 말해주는 것은 어떠한가."

가귀인은 아름답고 길다란 눈썹을 들어올리며 의심스러워 하며 말했다.
"정말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모르는 척 하시는 겁니까?"

여의가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로 모르겠네."

가귀인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여의를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말했다.
"매답응은 마마의 친정 오라나랍 관저에서 남부로 들여보낸 것이 아니옵니까?"

여의와 아약은 눈을 마주치며 서로 놀랐다. 가귀인은 여의의 표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고 조금 믿는 눈치를 보였다.
"정말로 모르십니까?"

여의는 복도로 걸어가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 일은 본궁도 내막을 전혀 모르니 곧 아약을 보내 물어볼 참이네. 아우님이 정말로 알고 있다면 솔직히 말해도 괜찮네."

가귀인은 냉담하게 여의를 흘끗 바라보았다.
"매답응은 선제 옹정 8년에 마마의 친정 오라나랍 관저에서 들여보낸 사람입니다."

여의는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했다. "옹정 8년은 본궁이 열네 살일 때인데 어찌 이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가귀인이 손가락에 낀 뾰족한 호갑을 만지작거렸다.
"마마가 모른다고 당시의 경인궁 황후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혜귀비와 빈첩이 이미 알아보았는데, 그 때 매답응이 남부에 들어온 것은 경인궁 황후가 윤허한 것입니다. 마마가 그 때 잘 몰랐다고 설마 나중에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요? 하물며 매답응이 갑자기 총애를 얻는 것도 좀 많이 이상하죠. 그중에 내통한 것은 오직 마마 자신만이 아는 것이고요."

김옥연은 말을 마치고 여심의 손을 잡고 제 마음대로 자리를 떴다. 오직 여의만이 정원에 서서 처마 밑의 고드름이 얼음 녹은 물을 똑똑 떨어뜨리는 것을 바라보니,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의혹이 풀리지 않은 마음 위에 떨어졌다.









  1. [역자주] 남부(南府):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환관들을 가르치는 곳과 기예를 가르치는 남화원이 모두 내무부에 속해있었는데, 이를 서화문 안의 내무부와 구분하여 남부라 불렀다. [본문으로]
  2. [역자주] 신자고(辛者库): 신자고는 포의에 속하는 조직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노비들을 관리 감독하는 곳이다. 신자고에 있는 사람들은 본래 신자고 출신들과 죄를 지어 신자고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로 나뉘므로 신자고의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내무부, 제후의 관저, 능침과 행궁 등에서 강제 노역을 한다. [본문으로]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