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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의 말이 막 떨어지자 화로 안에서는 마침 숯이 놀란 사람처럼 불꽃 몇개를 터뜨리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의는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찬찬히 말해보거라."

아약이 샐쭉거리며 말했다.
"삼보가 갈 수록 꼴이 말이 아니옵니다. 호들갑을 떨면서 말도 똑바로 못하고. 혜귀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폭죽을 터뜨리며 슬쩍 즐거워할 것이고 해상재에게 일이 생긴 거라면 그건 문제될 것 없으니 느긋하게 말하면 그만이죠."

여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혜귀비라면 삼보가 이렇게 분별없이 굴겠느냐?"

삼보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곧바로 말했다.
"사달이 난 것은 해상재이옵니다. 두 시진 전에 혜귀비 궁에서 소란이 일어났사온데, 귀비가 쓰는 홍라탄을 다 썼다고 하옵니다. 오늘은 아직 달이 반밖에 차지 않았는데 이치를 따지자면 벌써 다 썼을리가 없사옵니다. 귀비가 추위를 타는데다 질이 떨어지는 흑탄은 쓰지 않으려 해서 잠시 추위에 떨었더니 결국 한증(寒症)이 생겼다고 하옵니다."

여의는 매우 의외였다.
"한증이라고? 태의가 본 것이냐?"

"태의를 청했사옵니다.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나, 귀비를 모시는 말심이 따져보니 이 홍라탄의 수가 맞지 않아 궁중을 조사하고 다녔사온데, 알아 본 결과, 해상재 처소에서 나온 재에서 마땅찮은 것이 나왔다고 하옵니다. 흑탄의 재는 검은색이옵고, 홍라탄의 재는 흰색이오니, 말심이 해상재 처소에서 귀비가 쓰는 홍라탄을 훔쳤다며 난리를 피운 것이옵니다."

여의는 삼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엄숙하게 말했다.
"본궁이 기억하기로는 당초 네게 몰래 탄을 보내라고 명할 때 분부했던 것 같은데. 귀인 이하로는 홍라탄을 쓸 수 없으니 말썽이 생기지 않을 수 없구나. 너는 정말로 매번 착실히 흑탄을 보낸 것이냐?"

삼보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예예, 소주의 선견지명을 소인 단 한번도 감히 어긴 적이 없사옵니다."

여의는 마음이 불안하여 더더욱 해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됐다. 다른 것은 본궁이 감히 말할 수 없지만 해란은 그런 분수를 넘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니 감히 훔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약, 옷을 갈아입혀다오. 우리가 가서 보아야겠다."

여의가 갑자기 일어서자 아약이 황급히 여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주, 가시면 아니됩니다!"

아약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삼보를 향해 외쳤다.
"함복궁은 혼탁한 흙탕물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귀비의 지위가 소주보다 높은데 소주께서 어디 관여하실 수나 있겠사옵니까! 우리가 가면 안되고 간다면 황후께서 가야 할 일이옵니다!"

여의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곧장 물었다.
"황후는?"

삼보가 양심전 쪽을 향하여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밤 황상께서 황후마마의 패를 뒤집으셨사옵니다. 지금 시각이면 황후마마께서는 양심전에서 쉬고 계실 것이옵니다." 

여의는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황상께서 요 며칠 정무로 바쁘셨고 지금 황후께서 시침들고 계신데 누가 감히 가서 방해하겠는가!"

여의는 젖은 손바닥에 한줄기 한기가 스미는 것을 느꼈다.
"황후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궁중에서 귀비의 지위가 제일 높으니 이 일은 잘못하면 묻혀버리게 되겠구나."

아약이 급히 설득했다.
"함복궁에 일이 터졌으니 소주께서 서둘러 가신다고 해도, 문앞까지 가셨다고 해도, 거기서 무엇을 도우실 수 있겠사옵니까!"

삼보가 초초해하며 말했다.
"허나 소인이 소식을 들었을 때 해상재가 곧장 형벌에 처해진다 했사오니 지금 가시지 않으시면 무슨 일이 생기면......"

여의는 무척 크게 놀랐다.
"형벌을 가한다고? 무슨 형벌 말이냐?"

"장형이옵니다!"

삼보는 여의가 잠시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급히 설명했다.
"곤장으로 허벅지를 치는 것이 아니옵니다. 신발을 벗기고 회초리로 발바닥을 치는 것이라 하옵니다. 다리를 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사옵니다."

여의는 목이 메어 말했다.
"발바닥을 때린다고?"

삼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 소인들 중 허벅지를 때리면 살이 아플 뿐 힘줄도 다치지 않고 뼈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사옵니다. 허나 발은 훨씬 약해서 몇대만 때려도 몸이 상하옵니다."

여의는 마음을 좀 진정시켰다.
"황후와 귀비를 제외하면 궁중에서 나의 지위가 제일 높으니 내가 가지 않는다면 해란이 형벌을 받아도 상처가 어떤 꼴이 될지 모르는 것이 아니냐? 일이 지체되어서는 아니된다. 아약, 어서 옷을 갈아입혀라. 삼보, 가마를 대령해라."

아약이 다시 말려보았으나 여의는 초조한 나머지 너무도 단호하여 어쩔 수없이 대답하고 갔다. 밖에는 솜을 비벼놓은 것처럼 눈이 조금 내리고 있었다. 여의가 장막으로 가린 가마에 앉자 가마를 맨 태감들이 서두르면서도 침착하게 걸어가니 오로지 신발이 돌바닥에 스치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퍼질 뿐, 나는 듯이 함복궁을 항해 가고 있었다.

여의는 손에 든 손난로를 평소에는 따뜻하다고 여겼으나, 이때에는 타들어가는 심장처럼 데일 듯 뜨겁게 손을 찌르는 것 같았다. 여의가 수시로 발을 걷어 밖을 두리번거리자, 삼보는 잔달음을 치며 내내 따라오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주께서는 조급해하지 마시옵소서. 연희궁과 함복궁은 본래 멀리 떨어져 있사옵고 이미 무척 빨리 가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어찌 할 도리없이 발을 내리고 마음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을 때 삼보가 밖에서 말했다.
"도착했사옵니다, 도착했사옵니다!"

밤이 찾아온 함복궁에는 등불이 훤하게 켜져있었다. 여의는 아약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뜰 안에 들어섰다. 다만 태감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한비마마 듭시오——"

날카롭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공중에 나부끼며 길게 이어질 때, 여의와 사람들은 이미 복도에 와있었다. 함복궁 정전의 무늬를 새기고 주칠과 금칠을 한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니, 복도에서 층계까지 좌우에 두 줄로 온 궁의 궁인들이 한가득 서있었고 이들 하나하나는 두려움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복도에 꿇어있는 후궁의 복색을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혜귀비는 붉은 비단에 꽃과 새 문양을 수놓은 긴 적삼을 입고, 어깨에는 목 둘레에 검정담비가죽을 두른 여우털 외투(大氅)[각주:1]를 걸치고 정전 중앙에 놓여진 모란 무늬를 새긴 박달나무 의자에 앉아있었으며, 주변에는 일고여덟 개의 난로와 화로가 마치 별들이 달을 둘러싸듯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혜귀비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 혜귀비는 본래 작고 가냘픈 버들잎같은 몸매에 다분히 화를 내고 병까지 앓고 있는데다가, 금박 비단에 꽃무늬를 두르고 삵의 털을 박아넣은 긴 치마를 끊임없이 움켜쥐니 물결모양의 파문이 일어났다. 혜귀비는 평소처럼 흐리게 눈썹을 그리고 연지도 얇게 발랐으며, 병을 앓아 눈처럼 새하얀 얼굴에는 매우 좋은 장미 연지가 몽개몽개 떠올라 있었다. 여의는 혜귀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서둘러 몸을 굽히며 안부를 물었다.
"귀비마마께 문후 여쭈옵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만복을 누리시고 평안하시옵소서."

혜귀비는 의자에 꼼짝도 않고 앉아 그저 차갑게 웃었다.
"황상께서 육궁을 봉하신 이래로 한비는 함복궁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에 자네가 이리 놀라서 한밤중에 본궁의 궁으로 뛰어들어왔는가?"

여의는 혜귀비가 좌우의 태양혈에 새까만 고약을 붙이고 이마에는 짙은 자주색의 수달가죽에 진주를 박은 머리띠를 한 것이 참으로 초췌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워보였다.

여의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듣자니 귀비마마께서 한증이 생기셨다하여 밤이 깊었으나 살피러 왔사옵니다."

혜귀비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본궁에게 한비 자네가 신경쓸 만한 가치가 뭐가 있겠나. 오히려 함복궁에 도둑이 들어 소란이 일어났으니, 한비 자네의 귀가 밝아 서둘러 구경거리를 보러 온 것이겠지."

여의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신첩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뒤에서 해란의 흐느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귀비마마, 빈첩.... 빈첩은 훔치지 않았사옵니다!"

혜귀비는 돌연 웃는 얼굴을 거두고는 음산하고 냉혹하게 말했다.
"아직도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게냐. 훔친 사람과 훔친 물건을 모두 잡았는데 아직도 우기는 것이야. 쌍희, 다시 매우 쳐라!"

여의는 방금 매우 급하게 전각으로 들어와서 감히 해란을 살피지 못했다. 이때 고개를 돌리자 해란이 신발과 버선이 벗겨진 채로 얼음같이 차가운 복도의 돌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고, 근처 층계의 벽돌 언저리에는 옅은 얼음이 얇게 깔려있어서 보기만 해도 한기가 들었다. 푸른 비단에 까치와 매화를 수놓은 화분혜는 층계 아래 눈밭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조금씩 내리는 눈에 점점 젖어들어가 그 주인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존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의는 조심스레 다가가 해란의 발을 보니 얼어서 새빨개진 맨발에는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해란은 여의가 살펴보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움츠리며 치맛단 아래로 발을 숨기자, 말심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곧장 해란의 치맛단을 걷어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상재께서 순순히 자백하지 않으시니 착실히 형벌을 받으시고, 소인이 치맛단을 들춰서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마소서. 소인들 앞에서 발을 드러내어 이미 제법 체면을 잃으셨으니 사람들이 상재의 아랫다리를 좀 더 보게 된들 이런 창피를 당하시는 것은 모두 자업자득이옵니다."

해란은 크게 놀라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숙여서 산발한 머리카락으로 부끄럽고 화가 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 아픔을 참으며 해명했다.
"귀비마마,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빈첩은 정말로 마마의 홍라탄을 훔치지 않았사옵니다!"

여의는 서둘러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귀비마마께서 한증이 도지시어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병중에는 본래 화를 내면 아니되는데 어째서 마마께서는 해상재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욱이 장형을 내려 해상재의 발을 치시는 것이옵니까?"

혜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가볍게 기침을 몇번 하자 채월과 채주가 서둘러 차례로 차를 올리고 등을 두들겼다. 말심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해상재가 귀비마마께서 쓰시는 홍라탄을 훔치는 하극상을 저질러서, 마마께서 숯이 모자라 한증이 도져서 봉체가 상하셨사옵니다. 이런 죄는 장형으로 다스려도 모자란 것이옵니다!"

여의가 급히 말했다.
"해상재는 항상 성실히 자기 본분을 지켰고, 귀인 이하로는 홍라탄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을 해상재도 처음 안 것이 아닌데 어찌 이리 했겠는가?"

말심이 깔보며 말했다.
"그건 해상재에게 물으셔야지요. 소인은 해상재의 처소에서 나온 재 속에서 홍라탄을 태운 회백색 재를 발견했사옵니다. 게다가 해상재 처소의 몇몇 노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해상재를 모시는 궁녀 향운이 이미 자백하기를, 해상재가 자신에게 사주하여 홍라탄을 훔치라 했다고 말했사옵니다."

여의는 층계 아래에 꿇어앉아 전전긍긍하고 있는 향운을 보고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갔다.
"향운, 말심이 말한 것이 사실이냐?"

향운은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방금 소인이 벌써 자백했사옵니다. 해상재께서 소인에게 시켜 홍라탄을 훔치라 하며, 귀비마마께서 좋은 물건을 쓰는 것이 아니꼽고 귀비마마께서 황상의 총애를 받으시는 것에 질투가 나니 귀비마마를 해치려 할 따름이라 했사옵니다."
향운은 죽기살기로 두 번 고개를 숙여 절하며 애원했다.
"귀비마마, 용서해주시옵소서. 소인 이미 잘못을 알고 있사옵니다. 다시는 감히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해란은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돌리지 않고 향운을 보며 말했다.
"향운, 네가 나를 따르는 이삼 년 동안 내가 너를 박하게 대하지 않았건만......"

향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해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소주, 소주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셨든 이런 양심없는 일은 소인도 감히 하지 못하옵니다. 소인이 소주께 한 말씀 올리겠사옵니다. 도둑과 훔친 물건이 모두 발각되었으니 소주께서도 그만 인정하시지요."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이지. 그러니 향운, 본궁은 너를 처벌하지 않겠다. 허나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벌을 내려야겠지."
혜귀비는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변하며 차갑게 웃었다.
"이 궁에서 본궁이 추위를 타고 몸이 약해서 가장 금해야 하는 것이 찬바람 드는 것임을 누가 모르느냐. 해상재의 마음 씀씀이가 이리도 악독하구나! 쌍희, 다시 매우 쳐라!"

혜귀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쌍희는 벌써 옆에 둔 싸리나무로 만든 몽둥이를 가지고 "소주께 죄를 짓사옵니다"라고 한 마디 하고는 곧장 매를 내려쳤다. 여의가 자세히 보니 평범한 몽둥이가 아니라 두꺼운 싸리나무를 골라서 껍질을 벗기지도 않고 가시를 없애지도 않은 것이었다.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싸리나무 몽둥이에 돋아난 가시에는 새빨간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해란의 발바닥에 있는 핏방울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쌍희는 두말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해란의 발바닥을 수차례 맹렬히 때리니 해란이 비명을 지르며 하마터면 기절하여 쓰러질 뻔 했고, 발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하여 그야말로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여의는 너무 놀라고 걱정스러웠다. 발바닥을 때리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아프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해란이 이리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니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다급해지자 여의는 할 수 없이 팔을 뻗어 쌍희가 손에 쥔 몽둥이를 가로막고 외쳤다.
"멈추어라!"

해란은 아픔에 겨워 바닥에 엎으려 있었고, 혜귀비는 가늘고 기다란 눈매를 우아하게 들어올리며 외쳤다.
"말심——"

여의가 황급히 앞으로 나아가 해란을 부축하자 말심이 비웃으며 말했다.
"한비마마께서는 오시더니 우리 마마께는 관심도 안가지고 해상재만 서둘러 도우시니 이건 정말로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방금 해상재는 회초리 몇대 맞고서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리 바람에도 쓰러질 것 같이 쇠약해진 것인지. 보는 사람이 있으니 이렇게 앓는 시늉을 하는 것이지요."

해란은 여의의 품속으로 쓰러지며 온 얼굴이 축축하게 번들거리는 식은땀과 들러붙은 머리카락으로 범벅이 되어 궁지에 빠진 가운데에서도 웅얼웅얼 말했다.
"한비 형님, 빈첩은......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해란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통으로 정신을 잃었다.

여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해란을 감싸 안고 치맛자락으로 해란의 두 발을 덮으며 쥐어짜는 듯이 속이 쓰렸지만 그저 억지로 노기를 참으며 말했다.
"귀비마마께서는 숯과 향운의 자백으로 해란이 홍라탄을 훔쳐서 마마를 해치려 했다고 확신하고 계시지요. 허나 마마께서는 생각해보세요. 오늘은 섣달 스무날이고, 마마의 홍라탄은 내무부에서 매달 정해진 양에 따라 매일 열다섯 근, 한 달에 사백오십 근을 보내옵니다. 해란이 만일 정말로 모두 훔쳐서 마마께서 사용하실 홍라탄이 없다면, 못해도 열흘치인 홍라탄 백오십 근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해란의 처소가 얼마나 크다고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면 되지않사옵니까? 마마께서 찾아보시면 곧 아실 것입니다."

혜귀비는 살짝 안색이 변하며 말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말심은 여의의 품에서 해란을 빼앗아 손 가는 대로 처마 밑에 놓여진 얼음물이 담긴 구리 대야를 가져다가 얼굴 정면을 향하여 해란의 몸에 끼얹었다. 여의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휘몰아치며 고함쳤다.
"말심, 무슨 짓이냐?"

말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해상재가 고통으로 혼절했으니 물을 뿌려서 깨우지 않는다면 남은 홍라탄을 어디에 숨겨놓았는지 해상재에게 어떻게 물어보겠사옵니까!"

여의가 노기 어린 눈빛으로 말심을 쳐다보았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찬물을 뿌리겠다는 것은 해상재의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냐!"

말심은 해란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저 해상재를 깨우려는 것뿐이니 걱정할 필요 없사옵니다. 보시지요, 이게 효과가 없사옵니까?"

여의는 얼른 비단 손수건으로 해란을 닦았고, 아약은 곁에서 멍하니 굳어져 있다가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여의와 함께 해란을 닦았다. 혜귀비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치켜들자 말심이 곧장 뜻을 알아차리고는 몸을 돌려 처마 밑에 물을 모아놓은 커다란 항아리에서 한 바가지를 퍼다가 아랑곳 않고 퍼붓자 여의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버렸다. 여의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온몸이 흠뻑 젖어 이미 물이 다 새어들어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어오는데다가 뜰 앞 복도에 찬바람까지 부는데 오래 눈밭에 서있었기 때문에 추위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심은 "아이고" 하고 외치더니 서둘러 말했다.
"한비마마,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그러게 누가 해상재와 그렇게 붙어있으라던가요? 소인은 원래 물 한 바가지로는 해상재를 깨우지 못할 것 같아서 한 바가지 더 뿌린 것이옵니다. 이걸 어쩌면 좋겠사옵니까......"

혜귀비는 가볍게 앉아 몸을 곧게 펴고 목소리를 길게 뽑아 말했다.
"말심, 너도 참 조심성이 없구나."
혜귀비는 앵두같은 입술을 내밀었다.
"채주, 채월, 화로 몇개 가져와서 한비와 해상재의 몸을 덥히지 않고 무엇 하느냐."

채월과 채주가 대답하고는 곧 불이 꺼질 것만 같은 화로를 몇개 골라와서 여의와 해란 옆에 놓았다. 그 불꽃이 너무나 약해서 사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여의는 주먹을 꼭 쥐어 손끝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며 자신이 참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고, 해란을 단단히 안아 부축하며 서로의 체온으로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기를 바랐다. 이렇게 추운 계절에 온몸이 흠뻑 젖어 한기가 뼈에 사무치니 참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귀비와 비의 자리는 한 단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지위는 오히려 천리나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희월, 그녀는 정당하게 총애받는 귀비이다. 자신은, 그저 오랫동안 황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후궁에 불과했다. 여의는 참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고, 오직 해란을 구출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여의가 고개를 숙이자 살을 에는 듯이 차가운 물방울이 마찬가지로 얼음같이 차가워서 마비된 얼굴에 굴러떨어졌다. 여의는 머리가 갈수록 무거워진다고 느꼈고 목소리도 조금 흐릿해졌다.
"귀비마마, 해상재가 이미 벌을 받았고 지금 온몸이 흠뻑 젖었사옵니다. 제가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도록 윤허해주실 수 있사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해상재의 몸이 견디지 못할 것이옵니다."

혜귀비는 가볍게 몇번 기침을 하며 손에 긴 순금에 법랑을 상감한 호갑을 따분한 듯 바라보며 거리낄 것 없어 편안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러나 혜귀비의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고 그 차가운 눈빛은 그녀의 새끼 손가락에서 빛나는 호갑의 광채만큼이나 날카롭고 차가웠다.
"방금 한비가 몇마디 한 말, 말 참 잘했네. 홍라탄 백오십 근 말일세. 짧은 시간에 다 썼을 리는 없고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은 어디에 뒀냐 하는 것이야. 이렇게 된 바에야 샅샅이 뒤져보아야 하지 않겠나."
혜귀비가 외쳤다.
"쌍희!"

쌍희가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나아와 대답했다.
"소인 여기 있사옵니다."

혜귀비가 피곤한 듯 말했다.
"해상재의 처소로 가서 방을 뒤지고 해상재의 침전은 특히 샅샅히 뒤져서 어느 것 하나 그냥 흘려보내지 마라. 그 홍라탄을 어디에 두었는지 꼼꼼히 조사하고 그들이 희망을 버리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의는 혜귀비가 단단히 이를 갈며 내뱉는 '그들' 두 글자를 듣고 적당히 넘어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 수색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도 알 수 없고 자신과 해란은 여기에서 얼어붙어서 참으로 살 방법을 찾으려 해도 구할 수 없고 죽고자 해도 그럴 수 없었다.

해란은 이미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울며 간청했다.
"마마 전각을 뒤지는 것은 맞지만 빈첩의 침전도 뒤져야 하는 것이옵니까? 빈첩은......"

여의는 매우 놀라서 안색이 바뀌었고 미간에는 분노가 떠올랐으나 불길같은 노여움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귀비의 말씀은 즉 궁을 뒤지겠다는 것이옵니까? 해상재의 체면은 눈꼽만큼도 남겨주지 않으시는군요! 이 일이 밖으로 전해져 나가면 해상재는 어찌 계속 후궁에 발붙이고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말심은 환하게 웃으며 해란 쪽으로 손을 뻗어 곧장 해란의 축축하게 젖은 옷을 풀어헤칠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해상재의 침전 뿐만 아니라 해상재의 몸도 소인은 뒤져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해란은 말심의 손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감히 반항하지도 못하고 기를 쓰고 여의의 품속으로 움츠러들었다. 여의는 더이상은 참을 수 없어 한 손으로는 해란을 감싸며 다른 한 손으로 말심의 뺨을 내려치며 격노했다.
"무엄하다! 소주의 몸에 네가 어찌 함부로 들부딪힐 수 있단 말이냐!"

말심은 세게 얻어맞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말심은 희월 곁에서 가장 신임받는 시녀이고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서 스스로도 제법 귀여움을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희월에게서 심한 말 한마디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일찍이 어떻게 이런 수모를 받을 줄 알았겠는가? 말심은 맞은 충격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혜귀비는 이미 노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세 치 길이의 호갑으로 주머니난로를 두들기자 그 소리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혜귀비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고요한 밤중에 울려퍼졌다.

혜귀비가 외쳤다.
"여봐라, 가리엽특 씨의 침전을 샅샅이 뒤져라! 옷궤 안의 옷이건 터럭 하나 놓쳐서는 아니된다! 한비는 야심한 밤에 함복궁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니 뜰에 꿇어앉아 반성하라. 본궁의 명령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해란의 표정이 참담해지며 여의를 잠시 바라보더니 결국 바닥에 엎으려 머리를 조아리며 흐느껴 울었다.
"귀비마마, 모두 빈첩의 잘못이옵니다. 빈첩이 고의로 훔친 것은 아니옵니다."

여의는 해란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결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못이 없는데 죄를 인정할 수는 없다!"

해란의 온 얼굴에 범벅된 눈물이 그녀의 차가운 얼굴 위에서 얕고 하얗게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다.
"한비 형님, 제가 이미 형님을 연루시켰는데 더욱이 눈밭에 꿇어서 온몸이 젖어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해란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는 가느다란 눈발이 날리는 밤중에 주르륵 주르륵 떨어져 더더욱 처량했다. 여의는 무력하게 해란을 감싸안으며 몸 뒤에서 거대한 힘이 자신을 끌어당겨 복도로 집어던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약이 매우 두려워 울며 귀비에게 읍소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귀비마마, 귀비마마, 소인이 간청하옵니다. 꿇어앉히시려면 우리 소주가 먼저 옷이라도 바꿔 입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동상에 걸릴 것이옵니다, 귀비마마!"

혜귀비는 전각의 높은 자리에 서서 마치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같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뚫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뭇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해란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마치 보잘것없는 개미같았다. 혜귀비의 말투에는 어떠한 온기도 없었다.
"말심, 너는 가리엽특 씨의 겉옷을 벗기고 조금이라도 숨긴 것이 없는지 실밥 하나하나 샅샅이 뒤져라!"

말심은 크고 낭랑하게 대답하고는 매섭게 이를 갈며 손을 뻗어 잡아당겼다. 해란은 자신의 옷자락을 감싸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고, 무력감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밤하늘로 퍼져나가니 의지할 데 없는 한 줄기 외로운 넋과 같았으며 끊임없이 날리는 눈발에 점점 묻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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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디어 1권의 절반입니다. 앞서 옮겨놓은 글을 대충 훑어봤는데도 오탈자가 난무하더군요. 1권을 마치면 1장부터 쭉 수정할까 하니 거슬리시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






  1. 외투(大氅): 펼쳐서 입는 겉옷으로 '피풍(披风, 망토, 케이프)'이라고도 한다. 소매가 없고 목부분에 묶는 끈이 있으며 어깨에 걸쳐서 바람과 추위를 막는데 쓴다. 짧은 것은 어깨걸이(帔, 숄)라고 부르고 긴 것은 망토(斗篷)라고 부르는데, 망토는 일반적으로 모자가 달려있다. 피풍은 대부분 한 장으로 이루어져있고 북방 사람들과 아이들이 겨울에 많이 입었다. 나중에는 일반적으로 망토를 가리키게 되었다. 중국 고대에는 장식용 소매가 달려있는 긴 피풍이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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