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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밤은 유난히 깊은 했다. 여의는 왕부에 있을 때의 집도 저택이어서 복진과 시첩들도 각자 자신의 누각과 뜰이 있었고, 비록 그곳의 밤은 짧았지만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볼 있었음을 떠올렸다. 자신의 누각에 서서 몇개의 뜰을 지나면 홍력의 서재인지를 묵묵히 헤아렸다. 밤에 답답하여 밖으로 나와 걸음 걸으면 다른 첩실의 처소였다. 비록 만나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총애를 다투었지만, 이는 모두 감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숱한 것들 중에 찻물을 따르고, 점심을 들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은 몇몇 작은 것들이 외로움을 메웠다. 홍력이 누구의 누각으로 가면, 은총을 받은 사람의 누대의 촛불 역시 유난히 눈부셔서, 마음아픔과 질투를 모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궁중의 규범은 지엄하고 궁궐의 담장은 깊고 깊으며, 궁궐 붉은 벽의 그림자 아래에서 사람은 모두 하찮은 개미가 되었다. 거리는 깊숙하고 그윽하며, 설령 궁인들과 시비들이 가득히 시립하여 있더라도 두려울 정도로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몇번이나 여의는 난각[각주:1] 앉아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여기며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진흙으로 빚은 인형과 같이 전각 밖에도, 처마 아래에도, 궁궐의 안팎에도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나눌 없는 사람들이었다. 입궁한 무리의 비빈들 중에서, 그밖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 소록균과 가리엽특 해란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격이 온화한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성격은 이전에는 날카롭고 오만했고, 고희월과는 줄곧 서로 곱게 보아 넘기지 않았다. 고희월의 주변에는 황기운과 김옥연이 있었고, 부찰 랑화에게 찰싹 붙어있어서, 그녀도 그들과 냉담할 ,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소록균은 아들에게 빠져서 아가소에 가버리니 근심과 고뇌를 나눌 없고, 때에도 매번 그저 답답하고 즐겁지 않았다. 해란은, 하룻밤 시중들고 홍력의 뇌리에서 잊혀지고는 사람들의 무시와 비웃음을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여의는 비록 홍력이 새로 총애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두 해란을 얕보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때때로 홍력의 앞에서 말을 꺼내 해란의 신분을 마련해주고 왕부에 의탁할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연고로 해란도 그녀를 따르기를 좋아하면서도 쭈뼛쭈뼛하는 것이, 보살피고 도와줄 사람을 찾는 상처입은 작은 새처럼 애처롭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지금 해란과 희월이 같은 궁에 머물게 되니, 여의도 해란과 왕래하기 불편해지고, 희월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으려니 해란은 더더욱 곤란해졌다. 


상황이 이와 같으니, 여의는 더더욱 외롭다고 여겼다. 휑뎅그렁하니 타오르는 대전 안의 촛불과 같이, 그녀라는 촛불도 고독하게 활활 타올라 어쩌면 그저 자기 자신을 지지고 끓이며 불태우는 같았다. 


황제가 이제 등극하여 후궁에 들어온 날도 얼마 되지 않았다. 매일 경사방에서 늘어놓은 패를 올리면 기껏해야 삼사일에 패를 뒤집을 뿐이니, 우선은 황후, 다음은 혜귀비, 마치 지위 순인 같았다. 여의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손꼽아 바라고 기다렸지만, 황제는 오래도록 패를 뒤집지 않았다. 


점점 그녀는 외로움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궁중의 나날은 하루 하루가 점점 길어질 뿐이고, 겹겹이 늘어선 금색의 용마루는 궁녀들의 가득한 한과 그리움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던 , 연희궁 뜰에 색색의 국화도 꽃잎이 떨어져 도처에 수북이 쌓였다. 시월 중순을 지난 경성의 날씨는 하루가 수록 추워지고 있었다. 여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푸른 비단에 매화 다섯 송이를 수놓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적절한 농담으로 꽃무늬를 넣어 항주의 선춘 비단 위에 은실로 드문드문 진홍색 다섯 송이 매화 가지를 수놓고, 매화의 꽃술마다 새하얀 쌀알 크기의 진주를 꿰고, 덧대어 걷어올린 장식 사이에는 청록색 옥돌로 세공한 매화가 촛불에 반짝였다. 바닥에는 난로 개가 새로 더해졌고, 모두 고급 은설탄을 담아 연기가 솔가지 태운 연기처럼 깨끗했다. 


여의는 <궁사(宫词)>[각주:2] 권을 들고 난각에 있는 길다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창밖으로 구슬프게 속삭이는 듯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눈에는 조금 피곤하며 귀찮은 빛이 어렸다. 여의가 몽롱하여 눈을 감자, 갑자기 손이 비어,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누가 빼내버린 같았다. 여의는 눈을 뜨는 것조차 귀찮아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약, 책은 내가 보는 것이다.”


얼굴에 누군가 입김을 부는 같은 느낌이 들자, 여의가 깜짝 놀라서 무심코 눈을 떴다. 황제가 싱긋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안의 책을 흔들며 말했다.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구나.”


여의가 서둘러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리고는 화내며 말했다.  

 황상께서 오셨는데 밖에서는 알리는 마디도 없고, 오로지 신첩의 우스운 모양을 보러 오셨군요.”


황제가 웃으면서 손을 비비며 길다란 침상 위에 앉아 작은 자단목 탁자 위의 차를 마셨다. 여의가 서둘러 말리며 말했다. 

  차는 식었사오니, 신첩 황상께 뜨거운 차로 바꿔 올리겠사옵니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짐은 본래 태후께 문안 올리러 자녕궁에 갔던 것이다. 내무부의 사람이 정오에 오가며 말하기를, 내일 매우 추울 같다 하여, 태후께서 나이가 많으시어 추위를 견디기 어려우시니 짐이 문안 올리러 김에 둘러보고 내무부에 명하여 서둘러 따뜻하게 하고 절대 태후께서 추위를 느끼시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녀오는 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가 있는 이곳에는 분명 따뜻한 차가 있을 거라 생각하여 마시러 것인데, 그대가 잔도 주지 않을 누가 알았겠는가.”


여의가 찻잔을 빼앗으며 엄포를 놓았다. 

 드릴 없사옵니다. 지금 차가운 것도 괜찮다고 마셔서 속이 불편해지면 신첩을 탓하시겠지요.”

여의가 고개를 돌려 방안의 궁인을 찾았으나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황제가 들어오면서 모두 물러가라 모양이었다. 여의가 창밖을 향하여아약이라 외치자, 아약이 대답하고는 금으로 새긴 푸른 연꽃모양의 찻잔에 뜨거운 차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황제가 손으로 찻잔을 들고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제운과편(齐云瓜片)이냐?”


아약이 곱게 웃으며 유창하게 말했다. 

 제운과편은 루안(六安)에서 나는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이옵지요. 지금 소인이 추측하건대, 황상께서 이제 저녁 수라를 드셨고, 날씨가 추워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드셨을테니, 느끼함을 몰아내고 소화를 돕는데는 차가 제일 좋사옵니다.”


황제가 여의를 바라보고 웃었다. 

 매우 총명하고 영리한데다, 마음씀씀이도 세세하니, 이는 그대가 가르친 것이군.”


아약이 볼에 보조개가 파이게 웃었다. 

 소인이 무엇을 알겠사옵니까? 이것은 모두 소주께서 평소 황상께서 무엇을 드시고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기억하셨다가 여러 차례 말씀하신 것이옵니다. 소인은 그저 귀에 익은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말씀 올린 것뿐이옵니다.”

아약은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물러갔다. 


황제가 여의의 손을 잡고 이끌어 함께 앉았다. 

 어쩐지 짐이 그대의 차가 떠오르더라니, 알고보니 그대도 짐을 생각하였구나.”


여의는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나무랐다.

 황상께서는 그저 차를 떠올리신 것이 아니옵니까. 내일 신첩이 차를 궁에 나누어 보내면 황상께서는 아무 궁에나 들리시면 되겠네요.”


황제가 여의의 손을 잡고 바싹 다가앉았다. 

 날이 이리 차니 손발도 차갑구나. 자기 병을 자기가 모르니 옷도 이리 얇게 입었고.”

황제는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져 있는 연두색 바탕에 등나무 꽃과 비파를 수놓은 마고자를 보고는 손을 뻗어 여의에게 걸쳐주고 연이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은 울컥하는구나.”

황제는 방금 여의가 보던 책을 펼치고 글자 글자 읽어내려갔다. 

 열두 누각 안에서 새벽 단장을 마치고 신선의 누각을 바라보며 군왕을 기다리노라. 주렴을 살짝 열어 멀리 정전을 엿보니, 두루마기와 넓은 바지를 입은 궁인이 임금의 침상을 쓸고 있구나.”[각주:3]


여의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져서 서둘러 책을 빼앗으려 했다. 

 읽지 마시어요. 구절은 봐서도 안되고 읽어서도 아니되어요.”


황제가 여의의 손에 닿지 않게 책을 들었다. 

 읽을 없는 것이지. 읽으면 마음이 쓰리니까.”


여의가 이상히 여기며 말했다. 

 궁사를 것은 여인이온데, 황상께서 무엇이 가슴 아프시단 말씀이옵니까?”


황제가 고요하게 말했다. 

 짐은 태화전에 앉아서 집무를 보고 건청궁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며, 양심전 서재에서 상소를 보지. 그대가 보기에 설마 짐이 그대를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그대가자물쇠를 물고 있는 금으로 만든 짐승이 내내 고요하고, 구리로 용이 떨구는 물방울이 내내 떨어지는 것을 때에 짐도 물시계 소리를 들으며 국사를 처리하고, 그대가구름같은 타래머리를 거울 앞에서 빗으며 하늘하늘한 비단옷에 새로이 향을 입힐때에는 짐도 그대의 연희궁에서의 나날이 어떠할지 생각하니, 모두 만족스럽게 뜻대로 되는 것이지 아니한가?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리며 여의는 황제의 어깨에 기대 그의 따뜻한 숨결을 느꼈다. 황제의 몸에서는 은은하게 향기가 났으니, 오로지 제왕가에서만 사용하는 용연향이었다. 향기는 침울한 가운데 희미한 맑고 쌉싸름했으나, 섬세하고 적당하여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했다. 난각 안에는 선학이 영지를 물고 있는 형상의 구리 촛대가 서있고, 위에는 붉은 초가 매미 날게 같은 우윳빛 가벼운 비단에 가려져 있었으며, 흘러나오는 불빛은 열여드레 아흐레 즈음의 달빛 같이 맑게 스며들며, 따뜻하게 어슴푸레했다. 황제가 빛을 등지고 서자, 뒤에는 무리의 빛이 어렸고, 여의는 그저 무척 편안하여 마음을 놓지 못할 일이라고는 없었다. 


한참동안 여의가 황제에게 기대어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이 처음 황상께 시집왔을 때는 사실 내심 마음이 불안하여, 신첩이 평생 의탁할 사람이 이런 남자일 몰랐사옵니다. 허나 혼례를 올리고 밤낮으로 마주하고 보니, 황상께서 세세한 것까지 돌보시니 신첩 감격하기 그지없었사옵니다. 이제 황상께옵서 천하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시오며, 비록 후궁의 정을 생각하시나 강산의 일이 막중하여 참고 인내하시니, 신첩은 대단히 탄복할 따름이옵니다.”

황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왔다. 

 짐이 참는 것은 때에 불과한 남녀의 사사로운 정이다. 그러니 그대도 짐과 마찬가지로 조금 억울한 일이 있어도 먼저 참거라. 짐은 입궁한 이래로 그대의 나날이 평탄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며, 앞으로도 평탄하지 않을 것이니, 짐을 생각하여 무엇이든 모두 참아야 것이다. 짐이 이제 등극하여 모든 일이 번잡하니, 그대도 후궁에서 짐을 난처하게 하지 말거라.”


여의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헌데 황상께서는 무엇을 들으신 것이옵니까?”


황제가 말했다. 

 짐은 황제요, 귀는 모든 곳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귀에 들어오는 것이 반드시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다. 다만, 연희궁에 머무는 것이 그대에게 억울한 일이며, 그대에게 겨우 비의 지위만을 역시 그대에게 억울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의가 말했다. 

 연희궁은 창진문과 가까우니, 이곳은 궁녀와 태감들이 후궁을 오가는 유일한 문이옵니다. 출입하는 사람들로 번잡하여 엄밀히 단속할 없으니 자연히 그다지 좋지 않사옵니다. 다만 궁중에 어느 곳에 사람이 없겠사옵니까? 신첩은 다만 시끌벅적한 가운데 고요함을 유지할 있으면 되옵니다. 지위에 대해서는 황상께서 이리 말씀해주시니 신첩 억울할 것은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황제가 여의를 살며시 놓았다.

 그대가 이리 말해주니, 짐도 잘못 분부한 것이 아님을 알겠구나.”

황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밖을 향하여 외쳤다. 

 왕흠, 들어오너라.”


왕흠이 밖에서 대답하고는 어린 태감 둘을 데리고 두루마리 폭을 받쳐들고 들어와, 싱글싱글 웃으며 여의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한비마마께 문안 여쭈옵니다.”


여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시게.”


왕흠이 대답하고는 어린 태감을 시켜 두루마리를 열게 했다. 두루마리에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신찬휘음(赞徽音).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짐이 친히 그대를 위해 것이다. 어떠한가?”


여의는 가슴이 조금 뜨거워져 몸을 숙였다. 

 신첩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급히 여의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경에 말하기를태사에게 아름다운 뜻이 있으니, 많은 아들을 얻을 (姒嗣徽音,则百斯男)’[각주:4]이라 하였다. 아름다운 (徽音)이란 명성을 이야기하니, 삼갈 ()’ 자는 그대에게 오로지 언행이 신중하면 명예를 얻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앞으로 궁중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짐은 먼저 글자를 그대에게 주는 것이다.”


여의는 황제의 말속의 깊은 뜻을 알고 주저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신첩 내무부에 분부하여 황상의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어도 되겠사옵니까?”


황제가 여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와 짐의 뜻이 서로 분명하니, 그리하면 제일 좋겠구나.” 


이래로, 황제는 후궁들의 신분에 따라 궁에 모두 하룻밤씩 머물었다. 이는 이른바모두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었다. , 황제는 기분에 따라 패를 뒤집었지만, 세세하게 수를 헤아렸고, 언제나 혜귀비와 가귀인[각주:5] 양심전에 와서 시침하는 날이 가장 많았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을 제외하면, 황제도 황후의 궁중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기를 좋아했다. 여의의 잠저 시절의 은총은 되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순빈, 이귀인, 해상재와 마찬가지로 아무 소식이 없는 나날이 많았다. 


몇차례 눈발이 어지러이 날리고 나니 자금성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내무부는 궁의 일을 돌보느라 바빴고 연희궁의 일에는 점점 해이해졌다. 어느날 오후, 여의가 마침 해란과 함께 꽃을 모사하고 있을 , 아약이 발을 들추고 들어와 고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무부가 갈수록 방자하고 사람을 얕봅니다. 황후마마께서 오늘 향주머니를 만들라고 궁에 백화단과 해고등을 상으로 내리시며 말씀하시기를, 궁중에 습기가 가득하니 향주머니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 풍한을 예방하고 습기로 인한 통증을 멎게 있을 거라 하셨사옵니다. 그런데 소인이 열어보니 안에 있는 백화단 분말은 전부 2등품이어서 다시 내무부에 말하니, 태의원에서 보내온 것이 바로 이것이고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하옵니다. 소인이 생각하기에, 내무부 사람들이 혜귀비 궁에도 감히 이런 것을 보냈겠사옵니까? 향주머니의 솔기도 모두 느슨하고 엉망이어서 바늘땀이 모양도 나지 않사옵니다...”


해란이 손을 멈추고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계시는 이곳도 모두 모양이니, 처소는 말할 것도 없겠군요.”


여의가 고개를 들어 아약을 보았다. 

 그리 바에야 쓰지 않는 것이 낫겠구나. 우선 내버려두거라.”


해란이 말했다. 

 그래도 밖에 눈이 내릴 같으니 왔다 갔다 고생하지 말아야죠. 이렇게 해요. 아약, 자네는 향주머니를 처소로 보내거라. 쓰면서 흩어져버리지 않도록 내가 바늘땀을 모두 이어놓겠다.”


여의가 말했다. 

 이런 사소한 일은 시종들을 가르쳐서 시키면 됐지 자네가 구태여 고생할 필요가 있겠는가.”


해란이 조용히 웃었다. 

 형님께서는 잊으셨나요. 제가 원래 한가해서 이런 일은 가장 잘하지요. 시간 때울 소일거리로 삼으면 그만입니다.”


이날 오전 내내 눈발이 휘날리자 황제 측근의 대전 태감 왕흠이 직접 왔다. 왕흠은 본래 선제가 살아계실 상소를 전하는 수령태감이었는데, 황제가 황자일 최선을 다해 정성스럽고 빈틈없이 시중을 들었기 때문에 황제가 등극하고나서 양심전 부총관 태감으로 곁에 두었다. 총관 태감 자리가 계속 비어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황제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었고, 그런 까닭에 황후를 비롯한 궁중의 사람들이 그를 각별히 예의를 차려 대했다. 


왕흠이 들어왔을 , 황후는 옅은 자주색 비단에 모란과 단수문을 수놓은 츤의에, 겉에는 유백색에 차분한 푸른 대나무 문양이 있는 직금 비단에 검은 담비털을 덧댄 조끼를 입고 있었고, 법랑에 꽃과 새를 그린 손난로를 끼고는 소심과 연심이 납매화를 잘라 병에 꽂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흠이 황후를 보고 서둘러 공손하계 예를 올렸다. 

 소인 왕흠, 황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황후가 미소를 머금고, 

 밖에 방금 눈이 내려서 바닥이 미끄러운데 황상께서 어찌 자네를 보내셨는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겐가?”

라고 말하고는, 연심에게 차를 올리고 앉을 자리를 내라 분부했다.


왕흠이 예예 하며 사은하고 말했다. 

 황후마마의 상에 감사하옵니다만, 소인 감히 분수를 넘을 없사옵니다. 말씀을 올리고 나면 다른 공무가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이어서 말했다. 

 황상께서 분부하시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황후마마의 장춘궁에서 저녁 수라를 드시고 장춘궁에 머무시겠다 하시옵니다. 마마께서는 어가를 영접할 준비를 하시옵소서.”


황후의 눈가에 웃음기가 살짝 어렸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알겠네. 밤이 되면 서리와 눈으로 발이 미끄러우니 자네는 가마를 메는 태감들에게 밑을 조심하라 이르게.”


왕흠이 서둘러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소인이 어찌 감히 조심하지 않을 있겠사옵니까.”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들고상을 내리거라라고 말했다. 연심이 금새 서랍에서 은자 냥을 꺼내 살짝 왕흠의 손에 쥐어주었다. 


왕흠은 은혜에 감사하다 말하며 눈으로 연심의 얼굴을 곁눈질하자, 연심의 얼굴이 붉어지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왕흠이 말했다. 

  아뢸 것이 가지 있사옵니다. 어젯밤 내내 눈이 내리니, 황상께서 작년 잠저에 묻은 대황자의 생모가안타깝다몇마디를 내리셨사옵니다

황후가 애석해하며 말했다. 

 제영은 본궁 부찰 가문의 자매이고, 황상을 오래 모셨지. 그렇게 병에 걸려서 결국 가버리고, 이렇게 궁중에서 복을 누리지 누가 알았겠는가.” 

말을 마치고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러 닦다가, 이어서 말했다. 

 제영은 대황자의 생모이고, 당시 잠저의 격격 하나라 신분은 그리 높지 않았네. 이제 제영은 비록 복이 없어서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황상도 그녀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으실 없으니, 명분을 정하여 귀인이나 빈의 지위를 내려서 대황자의 체면을 살펴야겠지.”


왕흠이 정중히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자애로우시옵니다. 황상께서 어젯밤에 말씀하시기를, 철비(哲妃) 추존하여 봉하고 이틀에 걸쳐 추봉(追封) 예를 행하며, 보화전에서 대법회를 거행하고, 황후마마께서 이를 맡아 처리하시라 말씀하셨사옵니다.”


황후는 조금 넑을 잃었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황상께서 면밀히 고려하시어 먼저 생각하셨구나. 자네는 황상께 돌아가 고하시게. 철비와 본궁은 자매지간이나 마찬가지이고, 본궁의 친족이니, 철비의 추봉의 예식은 본궁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주관하도록 하겠네.”


왕흠이 웃으며 말했다. 

 . 그러면 소인은 먼저 물러가겠사옵니다.”


황후는 왕흠이 나가는 것을 보자 웃는 얼굴이 마치 송이 서리꽃과 같이 천천히 입가에 모여 은은하게 한기를 내뿜었다. 


소심이 곧바로 황후의 뜻을 알아채고 서둘러 잔을 받쳐 올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날이 차니 화도 커지기 마련이옵니다. 강남에서 진상한 국화차는 황상께서 전에 상으로 내리신 것으로, 열을 내리고 화를 내보내는데 가장 좋다 하옵니다. 마마, 보시어요.”


황후는 찻잔을 받아들었지만 마시지 않고 느릿느릿 말했다. 

 본궁은 황후이자 육궁의 주인인데 화낼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


소심이 황후를 흘끗 보고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사실 황상께서 철비의 체면을 세워주신 것이고, 황후마마의 친정 가문을 보면 철비와 마마께서는 집안이시고 모두 부찰 씨의 여식인데다, 비록 철비가 대황자를 낳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사옵니까? 순빈은 삼황자를 낳았지만 순빈에게는 빈의 자리를 주지 않았사옵니까?”


황후가 담담하게 웃었다. 

 철비는 본궁과 같은 집안이고, 일찍이 황상을 모셔서 어쨌든 황상과 정이 들었으니, 그녀가 먼저 대황자를 낳았던 것이지.”


황후는 답답하여 한숨을 쉬고는, 내무부에서 보낸 정성껏 수를 놓은 유아용 옷이 침상위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본궁은 일이 조금 마음이 쓰리구나. 그때 본궁은 황상의 적복진으로 시집왔지만, 황상은 항상 여의와 희월의 방에만 자주 가시고 오랫동안 오지 않으시니, 본궁은 은혜는 희박하여 슬하에 자식을 가망이 없었다. 본궁은 조급하지 않았으나, 본궁의 친정에서 조급해하여 억지로 제영을 들이 밀었지. 본궁의 친정 사람들이 말하기를 , 제영이 만일 다행히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는 본궁의 아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소심이 탄식하며 말했다. 

  일로 마마께서 억울함을 당하셨군요.”


 “결국 제영이 왕부에 들어오고 지나지 않아 대황자를 가지게 되니, 본궁의 마음은 비록 기쁘고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다. 다행히 후로 하늘이 굽어 살피시어 황상께서 본궁에게 나날이 관심을 가지시니 그렇게 이황자를 갖게 것이지.”

황후는 소중하게 유아용 의복을 쓰다듬으며 비통하게 말했다. 

 적자이나 장자가 아니니, 본래는 본궁의 체면을 잃는 일이었지.”


소심이 말했다. 

 비록 모두 부찰 씨이나, 철비의 신분은 결코 마마와 어깨를 나란히 없는 것이옵니다. 어쨌든, 잠저에 있을 때는 그저 격격에 지나지 않았사옵니다.”


황후는 고개를 흔들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의 신분은 어찌되었든, 황상께서 이제 그녀를 비로 추봉하셨으니 조심하지 않을 없구나. 아들이 귀해지면 어미도 따라 귀해지고, 어미가 귀해지면 아들도 따라 귀해지는 것이 조상들의 법도이니라. 지금 혜귀비와 한비 모두 자식이 없고, 순빈의 신분은 조금 낮다. 본궁의 이황자를 제외하면 대황자의 신분이 제일 존귀하지. 예로부터 지금까지 태자를 세울 , 적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세웠다. 만약 영련이 적장자면 한결 나을텐데.”


소심이 서둘러 위로하며 말했다. 

 어떻든 간에 철비는 이미 세상에 없사옵니다. 대황자가 설령 지지 않으려 애쓴다 하더라도 어미 없는 아이가 무엇을 뒤집을 있겠사옵니까? 그리고 마마께서는 정궁 황후이시고요.”


황후가 차를 모금 마시고 낮게 읊조렸다. 

 어떤 일이든 그저 만전을 기해야지. 본궁은 철비의 복이 없다 있겠지만, 대황자도 복이 없다고는 없구나.”


소심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마? 삼황자와 마찬가지로 후하게 대하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황후가 살며시 웃으며 안색을 고쳤다. 

 태후와 황상께서 평소 본궁을 어진 황후라 칭찬하시니, 본궁도 당연히 말에 부합해야 하지. 비록 삼황자가 아직 어리나, 강보에서부터 사랑을 받으면 자연히 성격에도 영향을 미칠 . 대황자는 비록 장성했고, 앞서 잠저에 있을 황상께서 직접 가르치셨지만, 이제 사랑받고 보호받으며 장난기를 내버려둔다면 어찌 황상의 뜻을 어기지 아니하겠는가. 복없는 어미는 복없는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제일 높지. 비록 많은 사람들이 돌봐준다 하더라도 역시 좋지 않은 일이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갈팡질팡하여 두서가 없기 마련이지.”


소심이 의중을 깨닫고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소인 알겠사옵니다.”








  1. [역자주] 난방 설비를 하여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 [본문으로]
  2. [역자주] 궁사(宫词): 궁궐의 여인들의 마음을 노래한 시. 임금을 향한 그리움, 애틋한 마음, 원망 등이 주된 주제이며, 당, 명 등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난다. [본문으로]
  3. 출전은 설봉의 <궁사>. 궁중의 원망은 당나라 시에서 많이 발견되는 주제이다. 설봉의 이 <궁사>는 궁중의 비빈들이 군왕의 은혜를 바라면서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심리를 완곡하게 표현하여 남다른 작풍을 보여준다. 전체 시구는 다음과 같다: 궁궐의 열두 겹 누각 안에서 새벽 단장을 마치고 十二楼中尽晓妆 / 신선의 누각을 바라보며 군왕을 기다리노라 望仙楼上望君王 // 자물쇠를 물고있는 금으로 만든 짐승(궁궐문의 문고리를 말함)은 잇달아 차갑고 锁衔金兽连环冷 / 구리로 된 용(물시계)이 떨구는 물방울이 낮 내내 떨어지니 水滴铜龙昼漏长 // 구름같은 타래머리를 거울 앞에서 빗으며 云髻罢梳还对镜 / 하늘하늘한 비단옷에 새로 향을 입히노라 罗衣欲换更添香 // 주렴을 살짝 열어 멀리 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遥窥正殿帘开处 / 두루마기와 넓은 바지 입은 궁인이 임금의 침상을 쓸고 있구나 袍袴宫人扫御床. [본문으로]
  4. [역자주] 태사(太姒): 주 문왕의 정비이자 주 무왕의 모후로 10명의 자녀가 있었다. 주 문왕의 조모 태강(太姜), 모후 태임(太任)과 더불어 주나라의 세 모후로 <열녀전>, <모의전(母仪传)> 등에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본문으로]
  5. (원문에는 가빈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가귀인이 가빈이 되는 것은 아들을 낳은 이후이고, 소설 상 단 한 줄만에 귀인이 빈이 되는 것이 이상하다 싶어 일단 귀인으로 옮깁니다. 뒷내용을 보고 수정하겠습니다 :^)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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