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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의 밤이 어찌나 길고 깊은지 이태껏 이러한 굴욕과 수난을 겪은 적이 없던 여의는 처음으로 몹시 피곤했다. 여의는 애당초 부드러운 베개를 베고 깊이 잠들려 했으나 창밖의 처량한 바람소리를 들으니 침전 밖에 걸려있는 암홍색 궁등 두 개가 바람에 마치 팔랑개비가 돌 듯 흔들리고 있었다. 여의는 창밖의 등불을 바라보니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하여 마치 천 갈래 만 갈래 뒤얽힌 마음이 한 가닥 한 가닥 팽팽하게 당겨져오는 것 같았다. 침대 아래에 있는 예심의 숨소리가 이미 평온하고 규칙적이어져 깊이 잠이 든 듯 보였다. 여의는 문득 한 조각 부러운 마음이 들어서 마치 예심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동틀 때까지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복이라고 생각했다. 여의는 돌아누워 얼굴을 꽃이 가득한 부드러운 비단 베개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의는 실상 거의 깊이 잠들지 못하고 반쯤 꿈을 꾸듯 반쯤은 깨어 있는 듯 흐리멍덩한 가운데, 창밖의 잔가지를 스치우는 바람 소리가 마치 귓가에 이는 듯 누군가가 밤새 목메어 낮게 우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깼을 때는 자정이 막 지나있을 때였다. 여의는 답답하고 목이 말라 참을 수 없어서 "예심"하고 부르자, 예심이 곧장 침대 밑에 깔아둔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소주, 목이 마르시옵니까?"

여의가 "응"이라고 말하자 예심이 옷을 걸치고 일어나 초에 불을 붙이고 뜨거운 차 한 잔을 여의의 손에 넘겨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주, 천천히 드세요."

여의는 차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더 달라고 말하자 에심이 대답하고는 손으로 여의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놀라서 외쳤다.
"소주의 이마가 몹시 뜨거우니 열이 나는 것 같사옵니다."

여의는 몸이 노곤노곤하여 힘이 조금도 없고 목과 속이 모두 버석버석 마르는 것 같아 마지못해 말했다.
"생강탕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결국 감기에 걸린 것 같구나."

예심이 말했다.
"지금은 밤이 깊어 태의를 다시 오라 청하기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내일 먼저 태의원의 처방을 한 첩 달여 마시옵소서."

여의가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본래 하던 방법이 있으니, 생강탕을 진하게 끓여오거라. 한 잔 더 마시고 땀을 내야겠다."

예심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그럼 소인이 작은 은탕관을 가져와 침전 앞에서 달일테니 언제든 드시고 싶으실 때 드실 수 있도록 하겠사옵니다. 소인이 깨어있으며 지켜보면 되옵니다." 

두 사람이 마침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안쪽 전각에서 갑자기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의는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무슨 소리냐?"

예심이 일어나서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 아닐까요?"

그 날카로운 소리는 바람에 섞여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여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서둘러 외투를 몸에 걸쳤다.
"아니다! 해란이야!"

밤늦게 급히 일어나서 여의는 바닥이 부드러운 신 두 짝을 꺾어 신고는 매우 서둘러서 밖으로 나왔다. 해란은 침전의 도화심목[각주:1]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침대는 본래 무척 크고 넓었는데 해란이 이불 안에서 웅크리고 있으니 더욱 더 작아 보였다. 엽심은 진즉에 놀라 침대 옆에 무릎꿇고 있었고, 해란을 모시는 말단 태감도 함께 열심히 애원하고 있었으나, 해란은 마치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오로지 이불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날카롭고 떨리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여의는 서둘러 손을 흔들며 뭇 사람들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을 나타내고는 비로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작은 목소리로 달랬다.
"해란, 나다. 내가 왔어."

해란은 놀라고 두려운 두 눈을 번쩍 뜨고 마치 사지에서 막 도망쳐나온 한 마리 작은 짐승처럼 무력하게 이불을 싸안고 자신을 숨기려는 듯 구석으로 물러났다. 침대 위에 있는 얇고 성긴 호수빛 장막은 해란이 극심히 몸을 떨자 호수의 표면을 긁는 거센 바람처럼 소리없이 출렁이며 불규칙적인 비단 물결을 만들어냈다. 해란은 극심한 자극을 받은 후의 의기소침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낮게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내 발을 때렸어! 그들이, 그들이 내 몸을 뒤졌어! 형님! 저는 참을 수 없어요, 저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감정이 격하게 오르내리는 와중에 해란의 두 발이 이불 밖으로 드러나자 칭칭 동여맨 흰 비단 위로 희미하게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여의가 가볍게 해란의 발을 동여맨 흰 비단을 쓰다듬으며 침대 위로 옮겨놓고 해란이 꼭 쥐고 있는 이불을 떼어놓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 말아라, 두려워 말아. 여기는 연희궁이다. 이제 내 곁에서 살게 된 것이야.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누구도 너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못한다."

해란은 여의의 품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며 흐느꼈다. 그 두려움에 떠는 낮은 소리가 그토록 기댈 곳 없고 밑도 끝도 없는 억울함과 두려움을 하나 하나 숨김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여의가 해란을 안으니 해란의 눈물이 데일 듯 뜨겁고 몸도 펄펄 끓었으나 이 뜨거운 가운데 해란의 마음은 바깥의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덩어리와 같이 극도로 차가웠다. 여의는 해란이 울고 있는 것도 마치 그녀의 눈물이 자신을 대신해 흐르는 것 같아, 뜨겁게 피부에 번지며 천천히 살결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 그토록 뜨거웠으며, 마치 근육과 피부가 화상을 입는 것 같으니, 마음도 잇달아 그처럼 뜨거워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란이 비로소 천천히 평온해졌다. 여의는 손을 뻗어 해란의 이마에 얹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가 나보다 더 뜨겁구나. 오늘은 추웠지? 괜찮다. 태의원의 약이 좋으니 마시면 곧 좋아질 게야."
여의는 마치 갓난아이를 달래듯 가볍게 해란의 어깨를 도닥였다.
"약은 병을 고치는 것이니 감기든 발의 상처든 모두 좋아질 것이야. 만약 마음이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다면 너는 항상 이곳이 그녀의 함복궁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연희궁이라는 것을 생각하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한 마디만 하거라. 내가 앞쪽 전각에서 모두 듣고 있을 것이야."

해란은 울먹이며 여의의 품에 파묻혔다.
"형님, 형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여의는 해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둥글게 감아 매듭지어 올리며 낮고 따뜻하게 말했다.
"내가 여기 있단다."

해란은 여의의 손목을 꼭 잡았다.
"형님, 저는 형님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만약 형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저는 분명 그들에게......"
해란은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여의는 비단 손수건을 쥐고 해란의 눈가에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너는 말할 것도 없이 나도 그녀를 꺼리니 원래 오늘 밤은 가지 않으려 했다. 허나, 내가 가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재촉하여 간 것이야. 잠저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년 동안 나도 오직 너와 순빈만 가까이 지냈지. 내가 가지 않았으면 어쩌면 그 뒤로 네가 어디있는지 모르게 되었겠지. 다행히, 다행히도 일이 모두 지나갔구나."
여의는 엽심을 바라보았다.
"태의가 지어준 약이 아직도 있느냐? 가져와서 너희 소주가 마시고 열을 내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탕약도 한 첩 더 달여오거라."

해란은 여의의 손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며 슬프게 말했다.
"형님, 가지 마세요."

여의는 손목의 아픔을 참으며 미소지었다.
"안 간다. 네가 잠드는 것을 보고 가마. 그럼 되었지?"
여의는 엽심이 달여온 약을 건네받았다.
"마시거라. 마셔야 병이 낫지."

해란이 얌전히 한 모금씩 약을 마시자 여의가 입가를 닦아주고 침대에 눕도록 부축하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해란은 조용히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이튿날,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려서 더더욱 얼어붙자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 안에 침수향을 피우자 낮은 산등성이 같이 우아하고 옅은 나무 향기가 스며들었다. 여기에 더해 화로에서 나는 연기가 더욱이 답답하여 오직 청화로 휘감은 미인고(美人觚)[각주:2]에 꽂은 새로 핀 담홍색 옥접매(玉蝶梅) 몇 줄기와 그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채만이 사람의 마음을 조금 기쁘게 했다. 여의는 난각에 기대어 마음을 편안히 하고 심신의 피로를 풀다가 마침 눈을 가늘게 뜨자, 문득 발 아래에 궁중 의복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서있는 것이 보여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고 손짓하여 불렀다.
"날이 무척 추운데 자네가 어찌 왔는가?"

순빈이 환하게 웃으며 몸을 기울여 예를 올리고 앞으로 나아와 앉았다.
"원래 해상재를 보러 갈 생각이었사온데, 엽심이 어젯밤 내내 안신탕(安神)을 마시고 겨우 잠들었다 하여 먼저 마마를 뵈러 왔사옵니다."
순빈은 여의가 이마에 진홍색 비단에 털을 덧대고 작은 구슬을 박아넣은 띠를 두르고 온몸에 견사로 빽빽하게 꽃무늬를 넣은 두터운 비단 저고리를 입었으며, 청홍 구슬로 테를 두른 붉은 비단 이불로 빈틈없이 덮고 있는 것을 보고 친절하게 말했다.
"해란이 병이 났다더니, 형님도 별로 좋지 않아보이는 것이 이런 날씨에는 바람을 쐬어서는 안 되겠어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일찍이 황후 궁에서서 사람이 나와 분부하기를 이 며칠 나와 해상재의 문안을 면해주시고 쉬라 하셨네."

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요. 지금은 좀 좋아졌나요?"

여의는 찻잔을 들어올려 순빈에게 보여주었다.
"지금은 차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모두 생강차로 바꾸었다네. 어제부터 생강탕을 꽤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태의원의 약으로 땀을 내서 지금은 그냥 덥고 어수선할 뿐이야."

순빈은 여의의 비단 저고리를 매만지며 한숨쉬었다.
"어젯밤에 그리 소란이 났는데 저는 일찍 잠들어서 전혀 몰랐어요. 오늘 이른 아침에서야 듣고서도 저는 궁인들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인 줄 알았지요. 가귀인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순빈은 불경을 외며 말했다.
"아미타불, 복과 화가 서로 기울어지지 않는다더니, 그래도 해란이 함복궁에서 나오게 되어 공연히 고생하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말려들어가게 된 것이옵니까?"

여의는 이마에 두른 띠를 문지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묻고 싶은데, 자네는 해란이 도둑질 했다는 것을 믿는가?"[각주:3]

순빈은 조금 놀랐다가 확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상께서 그 홍라탄은 직접 몰래 상으로 내리신 것이라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여의는 손을 뻗어 병에 꽂힌 옥접매 가지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황상도 분쟁을 그치고 편안히 하기 위해 그리 하신 것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위로하신 것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저 그 한 마디만 했지. 해란이 도둑질을 하고 그 남은 백여 근의 탄을 어디에 보관할 수 있었겠나? 만약 이 일을 다시 조사한다면 누군들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나."

순빈이 멀리 구불구불한 봄날의 산처럼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저는 황상께서 형님과 해상재를 가엾이 여기시어 분쟁을 일으킨 향운을 때려죽이시고 입에 뜨거운 숯을 집어넣으셨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아침에 송장을 운반하는 수레가 신무문으로 나갈 때 문을 지키던 시위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향운의 입이 전부 불에 지져 흐물흐물해져서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해요. 이리 보니 황상께서 귀비의 체면을 지키면서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셨군요."

여의가 매화 가지를 손톱으로 꼬집으니 수액이 조금 배어나왔다.
"누가 알겠는가? 나는 오로지 내 어지럼증과 코막힌 것을 돌볼 뿐이지."

순빈이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이왕 어지럽고 코 막히게 된 바에야 코를 뚫고 정신을 들게 하는 선향을 피워야지요. 이 침수향이 냄새가 좋긴 좋은 것이 무척 산뜻하네요. 온 궁에서 오직 형님만이 즐겨 쓸 뿐,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지요."

여의는 바닥에 있는 향이 맑은 물에 담긴 한 조각 깎아지른 듯한 산 형태의 나무 조각을 보며 고요하게 말했다.
"오히려 이 향을 위한 것 만은 아니야. 침향은 돌과 같이 안정되기 때문에 물 아래에 가라앉을 수 있어서 예로부터 침수향(沉水香)이라 부른다네. 나는 그저 마음을 침수향처럼 할 수 있다면 세상사가 아무리 난잡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네."

순빈이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여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막 형님을 알았을 때는 형님은 전혀 이런 성격이 아니셨어요."

여의의 웃음이 한 가닥 가벼운 연기같이 담담했다.
"예전에 매사 응석부리게 하고 지켜주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네."

순빈은 걱정거리를 건드린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은 오로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만 생각할 뿐, 혜귀비가 지금 감히 이렇게 날뛰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녀가 반드시 '그대가 침수향이라면 내가 박산향로가 되리다'[각주:4]같은 애정과 총애를 받기 때문이에요. 형님이 상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총애를 얻고 귀비와 새로 들어온 사람이 은총을 독차지 하지 못하게 해야 해요."

여의는 순빈이 말하는 바를 알고 되물었다.
"요 며칠동안 황상께서 매답응을 부르지 않으시던데 어찌된 일인가?"

순빈은 잠시 깊이 생각하다가 여의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형님이 말씀하지 않아도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요 며칠 황상께서 조정의 일로 바쁘다고는 말씀하시지만 황후를 부르신 어젯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녹두패를 뒤집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사실 이틀동안 황상께서 매답응을 불러 비파 연주를 들으시려 했다 하는데, 매답응이 몸이 불편하다고 사양하여 부름을 받잡지 않았다고 해요."

여의의 마음에 한 무리의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치에 따르면 매답응은 새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분명 온힘을 다해 총애를 굳건히 하려 할텐데 어찌 스스로 사양하는 것인가?"

순빈이 고개를 저었다.
"누가 알겠어요? 그저 제가 듣기로는 매답응의 얼굴이 그리 좋지 못다고 하던데, 설마 그날 귀비가 쌍희를 시켜 때린 것이 너무 심해서 어째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나봐요?"
순빈은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히 웃었다.
"됐어요. 이 일은 매답응 스스로 분기를 참고 피를 삼키며 귀비의 일로 들고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어쨌든 매답응이 황상 곁에서 시중들지 않고, 어젯밤 함복궁도 한증이 도졌다고 말했으니 오늘 황상께서 이미 명을 내리시어 점심 수라와 저녁 수라를 모두 함복궁에서 귀비와 함께 들겠다고 하신데다가 주변에 상을 내리시고 태의가 차례차례 함복궁으로 달려갔습니다."

여의는 마음이 구겨지고 찢어진 종이뭉치같았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항상 그녀를 좋아하셨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순빈은 몇마디 잡담과 함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슬퍼하다가 여의에게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예심은 약을 받쳐들고 들어와 여의가 마시는 것을 시중들며 맑은 물로 입을 헹구게 했고, 아약은 새콤한 매실 몇 알을 가지고 들어와 여의가 입가심을 하게 했다.

예심이 양칫물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소주, 방금 해상재가 깨어났고 열도 내렸다고 하옵니다."

여의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 참 잘 되었구나. 지금 예심 혼자서 시중 드는 것으로는 부족한데, 내무부에서 보내온 사람을 썼다가 향운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어쩌나?"

예심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소주, 안심하소서. 소인이 이미 우리 궁의 춘희를 보내었사옵니다. 그 아이가 매우 성실하고 말도 많지 않은데다 잠저에서부터 오래 일해왔던 아이이옵니다."

여의가 마침 말을 꺼내려 했는데 아약이 예심을 흘겨보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쓰면 무슨 소용이 있사옵니까? 소주, 소인의 생각으로는 해상재의 궁중에서 향운 한 사람 나온 것도 충분히 오싹한 일이온데, 만약 우리 궁에서 그런 노비가 나온다면 이는 정말 기가 막히게 운수 사나운 일일 것이옵니다."

여의가 칭찬하는 눈으로 아약을 바라보며 분부했다.
"너희 둘과 삼보를 제외하고 온 궁의 궁인들이 이렇게 녹흔처럼 세세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텐데. 향운은 평소에 말이 없는 것이 마치 주둥이가 없는 조롱박 같았는데, 일단 다른 사람이 거두어가니 비로소 입을 열어 자신의 주인을 물고는 죽으면서도 놓지 않지 않았더냐."
여의는 얼굴이 어두워지며 눈에 한 줄기 독기가 스쳤다.
"앞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뒷 수레가 교훈으로 삼아, 내 궁에서는 절대로 이런 사람이 나와서는 아니된다!"

예심과 아약이 서로 마주보더니 조금 엄숙해졌다.
"소인들이 꼼꼼히 살피고 막아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사옵니다."

여의는 한숨을 쉬고는 안쪽 전각을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가서 해란을 보아야겠다. 해란은 마음이 좀 나아졌더냐?"

예심이 깊은 수심에 잠겨 말했다.
"마음은 많이 좋아졌사옵니다. 허나 사람이 아직도 저러하여 사람을 만나려 하지도 않고 바깥에 나오려고도 하지 않사옵니다. 대낮에도 두텁게 장막을 내리고 이불 속에 묻혀서 일어나려 하지 않다니요."

여의는 귀밑머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내가 가서 보아야겠다."

안쪽 전각은 매우 고요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이 청동 화로에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으며, 투각한 뚜껑에서는 끊임없이 가느다랗고 하얀 연기가 한숨처럼 새어나왔다. 몽롱한 연무가 흩어진 솜처럼 고요한 방 안에 자욱하여 마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손처럼 따뜻하게 날리고 있었다.

해란의 정신은 많이 좋아졌지만 사람이 바싹 말라서 머리카락도 흐트러지고 오로지 어두운 동굴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만 커다랗게 뜨고 민감하게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첩첩이 드리워진 장막 사이로 보이는 해란은 나약하기가 한 줄기 가녀린 그림자 같았다. 여의가 막 들어서자 해란은 두려움에 재빨리 침대 모서리로 움츠러들며 이불을 가져다 자신을 가렸다가 들어온 사람이 여의인 것을 보고서야 가렸던 얼굴을 드러냈다. 여의는 마음이 슬프고 괴로웠다. 태의의 말은 사실 틀렸다. 해란의 발의 상처가 비록 중하여 심장과 신장의 혈까지 이르렀으나, 해란의 마음이 받은 굴욕은 더욱 지독했다. 어젯밤의 치욕은 이미 해란의 존엄과 의지를 철저히 손상시켰다.

빗속의 대나무 잎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니 가볍게 움직이는 대나무 풍경이 푸른 망사 창에 비추었다. 해란은 곧바로 놀라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고는 허둥대며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닫아라! 어서 발을 모두 쳐라!"

궁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해란은 놀라 당황한 눈으로 여의를 끌어당겨 앉게 했다.
"형님, 여기요, 여기 앉으세요. 어디에도 가지 말아요. 밖에는 모두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들이에요!"

여의는 해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겁내지 마라. 날이 벌써 밝았고 그 일도 이미 다 지나갔다. 황상께서 우리를 여전히 아끼셔서, 이리도 큰일이 폭로되었다고 하면 폭로된 것이지만 네가 내 궁에서 살게 되지 않았느냐. 이것은 네가 바라던 일이 아니냐?"

해란은 멍하니 앉아 소리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형님, 제가 일어나면 수많은 눈이 저를 보고 있는 것만 같고, 제가 맨발로 형벌을 받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고, 제가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쓴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고, 하마터면 거의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당할 뻔한 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렇게나 많은 노비들이 보고 있었으니, 저는......"
해란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크게 숨을 몰아쉬고 놀라 두려워하며 불안한 표정이었다.

여의는 해란을 바싹 끌어안았다.
"아우님, 아우님이 놀랐다는 걸 알고 있네. 허나 우리가 잠저에서 이 몇년을 살고 지금은 후궁에 머물고 있으니 하루가 지나면 자네도 어느 날에는 응당 더 잘 알게 될 것이야."
해란은 초췌한 얼굴로 여의를 바라보며 두렵고 당혹한 기색을 드러내자 여의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오늘 더욱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살아있는 사람이 바람과 서리로 칼을 삼고 웃음 속에 칼을 품으며 무엇이든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엇이든 발휘하지 못하겠는가? 어제 찬물을 끼얹었을 때, 나는 참으로 서러웠다. 허나 서러운들 어디에 쓰겠느냐? 나는 오히려 허리를 곧게 펴고 계속되는 나날을 받아들여 보내며, 그러한 연후에 다시 날아올 이러한 공공연한 공격과 암암리의 중상모략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야."

해란은 멍하니 멈춰있다가 손을 뻗어 여의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여의의 눈가가 어떠한 눈물자국도 없이 이리도 메말라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란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형님, 형님이 억울하신 것이라면 한바탕 울면 그만이에요."

여의의 입가에 한가닥 웃음이 떠올랐다. 그 웃음은 갈 수록 깊어지며 천천히 얼굴에 차오르다가 눈가에 퍼져나가니 그 미소는 얼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울라고? 해란, 그들은 내가 울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내가 기어코 울지 않아야 내가 어젯밤 함복궁에서 굴욕을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다. 참지 못할 일은 이를 악물고 웃으며 참아 넘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운다고? 내가 울면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야."

해란은 두려워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형님, 안돼요, 저는 못해요, 저는 할 수 없어요! 그자가 제게 어떤 치욕을 주었는데, 그리고 향운은......"

여의는 해란이 똑바로 앉도록 부축했다.
"너를 모해한 향운은 몰매를 맞고 죽었다. 죽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입에 뜨거운 탄을 넣어 지져버렸지. 다른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만약 네가 자신을 부끄럽다고 여긴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두 너를 비웃으며 모욕할 것이야. 네 스스로 정신을 차려서 그 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사람들이 너를 비웃어도 그녀를 향해 오히려 웃으며 어떻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면 누구도 너를 다시는 비웃지 못할 것이야."

해란은 반쯤 정신이 나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형님,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저는 못해요......"

여의는 일어나서 엽심에게 물었다.
"소주가 오늘치 약을 모두 먹었느냐?"

엽심이 서둘러 말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셨사옵니다."

여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란, 약 먹고 천천히 병을 치료하자꾸나. 너의 마음의 병에 대해서는 치료할 방법을 내가 이미 말해주었지. 네가 만일 스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젯밤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한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번에는 그녀를 지켰지만 이 다음에는 절대로 그리하지 않을 것이야."

해란이 멍하니 듣고 있으니, 장막 위에 떠오른 해란의 그림자가 약해보이는 것이 마치 그림자극에서 불어서 튕기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종이인형같았다. 여의가 다시 재촉하자 삼보가 조용히 들어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주, 황상께서 즉시 양심전 난각으로 오시라 하시옵니다."

아약이 온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웃었다.
"소주께서 어젯밤에 수난을 당하셨으니 황상께서 분명히 마마를 부르시어 위로해주실 모양입니다."
아약은 고개를 돌려 낙심하여 머리를 숙이고 있는 해란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
"당연히 마마를 통해 해상재께 전할 말씀도 있겠지요."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 하더냐?"

삼보가 말했다.
"낯선 태감이 황명을 전하러 와서 말하기를 급한 일이라 하니 소주께서는 어서 가보시옵소서."

여의는 자리를 뜨며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해란에게 당부햇다.
"내 말이 듣기 싫겠지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 하였으니 아우님 스스로 생각해보게."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려서 바닥은 축축하고 미끌미끌했고, 이렇게 눈비가 그치지 않는 날씨에 긴 거리의 벽돌에서 습한 곰팡내가 뿜어져 나왔으며, 암홍색의 궁궐 담은 습기에 허옇게 물들어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장엄함과 엄숙함을 잃어버리고 그저 위태롭게 억눌려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남아있었다. 

황제가 불렀기 때문에 가마는 빠르면서도 안전하게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양심전 앞에 도착했다. 예심이 막 우산을 받치고 가마에서 내리는 여의를 부축하자 백옥 층계 한쪽 아래에서 비에 흠뻑 젖어 무릎 꿇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여의는 고개를 들고 예심의 부축을 받으며 서둘러 걸어가 자세히 보니 이는 황제의 곁에서 시중드는 이옥이었다.

여의는 조금 깜짝 놀라서 급히 말했다.
"이옥, 어찌된 일인가?"

이옥이 여의를 보고 비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비마마, 묻지 말아주시옵소서. 단지 소인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여의가 시선을 조금 내리자 이옥이 벽돌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부서진 기왓조각 위에 무릎을 꿇은 것이 보였다. 여의는 조금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옥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어쨌든 왕 공공이 소인을 벌한 것일뿐이옵니다. 여기는 무척 추우니 마마께서는 어서 안으로 드소서."

여의는 다른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꿇고 있으면 무릎이 크게 상할테니 시간이 나면 연희궁으로 오거라. 본궁이 예심에게 약을 준비해놓으라 하겠다."
여의가 더 말하려 했으나 왕흠이 맞이하러 나오면서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한비마마 오셨사옵니까. 어찌 들어오지 않으시고 여기서 노비와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여의는 마치 마음에 두지 않은 듯 말했다.
"멀쩡하던 이옥이 어찌 여기 꿇어있는가?" 

왕흠이 냉소했다.
"시중들 때 조심하지 않고 황상께 무척 뜨거운 차를 건네드려 황상께서 데이셨으니 어찌 벌받아 마땅치 않겠사옵니까? 한비마마, 천한 것의 일에는 마음 쓰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여의가 막 난각으로 들어서자 황제와 황후가 모두 얼굴에는 한 점 웃음기 없이 옷깃을 여미고 엄숙하게 앉아있었다. 여의는 가슴이 철렁하여 나아가 가볍게 무릎을 굽히며 절했다.
"황상께서는 만복을 누리소서, 황후께서는 만복을 누리소서."








  1. [역자주] 마호가니 [본문으로]
  2. [역자주] 미인고(美人觚): 술잔/술병의 한 종류로, 표면에 미인이 그려져있는 것을 가리키거나, 기물의 형태가 가느다란 미인의 허리같이 생긴 것을 일컬음. [본문으로]
  3. 역자주: 원문에서는 이 단락에서 여의가 록균에게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뒤로 가면 록균이 여의에게 '아우님'이라고도 하며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만, 잠저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록균이 여의보다 지위도 낮고 가문도 좋지 않아서 여의를 형님이라 불렀는데 갑자기 이렇게 록균을 형님이라고 하게 되어버리면 여의가 존댓말을 해야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져서 지금까지의 흐름대로 여의가 록균에게 하대하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본문으로]
  4. 역자주: 남조시대 민가에 등장하는 성애의 즐거움을 노래한 구절로, '침수향'과 '박산향로'는 남녀의 성기를 함축하는 비유이다. 원문은 제나라 악부 <양반아 杨叛儿> -- 暫出白门前 그대가 백문을 나서서 이리 오시니 / 楊柳可藏烏 까마귀가 버드나무에 숨듯 / 欢作沉水香 당신이 침수향이라면 侬作博山炉 나는 박산로가 되어 서로 떨어짐 없이 한몸이 되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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