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 하루, 뭇 사람들이 모두 황후의 장춘궁에 와서 문안을 올리자 부찰 씨가 아랫사람들에게 명하여 홍귤을 한 바구니를 상으로 내리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황상께서 우리들 후궁을 생각하시어 강남에서 올린 홍귤을 먼저 한 바구니 골라 내리셨으니 마침 우리도 함께 맛보세나.” 뭇 사람들이 일어나 사은했다. “황후마마의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황후가 사람들에게 앉으라 명하고는 연심과 소심이 홍귤을 나누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자매들은 모두 예전에 잠저에 있을 때 함께 황상을 모셨고, 서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지. 이제 자금성에 들어와 황상의 사람이 되었으니 첫째로는 궁중의 법도를 반드시 지켜야 하며, 둘째로 지난 날의 자매간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편이 좋을 것이야..
청앵이 전각에 들었을 때, 태후는 마침 온돌에 앉아 시계꽃을 수놓은 베게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전각 안의 불빛은 조금 어두워서 복 상궁이 마침 등을 몇개 보태고 있었다. 창문턱 아래, 다섯 마리 박쥐가 배꽃을 받치고 있는 무늬가 새겨진 나무 탁자 위에는, 구리에 연꽃잎과 구슬을 새기고 은으로 상감한 향로 안에서 단향의 은은한 향기가 느릿느릿 흘러나와,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 은은하지만 끊임없이 흩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태후는 비취 구슬로 장식된 편방만을 사용하여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매듭짓고, 뒷머리에는 한 쌍의 점잖은 은비녀를 꽂았으며, 어떠한 진주나 비취로도 장식하지 않았다. 몸에는 둥근 수(壽)자 문양이 있는 푸른 색의 비단 두루마기를 걸쳤고, 소매단에는 두 겹의 테를 두르고 드문드문 눈처럼..
옹정 13년 9월 을해일, 황상께서 태화전에서 즉위하시고 이듬해의 연호를 건륭 원년이라 하시었다. —— 수강궁은 아주 고요했다. 태비들은 수일을 곡하여 모두 지쳤고, 지난 날의 모든 호의와 은총에 따라 흘린 눈물도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남겨진 나날을 부귀의 그림자 속에서 살다가, 그런 후에 그것이 셀 수 없는 부귀였다는 것을 알고, 초목이 우거진 깊은 궁을 끝없이 바라보며 적막하고 외로울 뿐이었다. 선제의 비빈들이 사는 수강궁은 조용하여 마치 죽은 사람의 무덤에서 사는 것 같았다. 이제 갓 십 여 살, 스무 살이 된 선제의 남겨진 후궁들은 모두 먼지에 뒤덮여 한 가닥 활기조차 없었다. 이렇게 큰 자금성의 궁정에서 서쪽에 떨어져 있는 수강궁은 생동감 넘치는 동서 육궁과는 달랐다. 그곳은 다른 세계였고,..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청앵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쉬었지만, 기진맥진하여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실 기력도 없었다. 예심이 분부하니 곧바로 어린 궁녀들이 올라와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주물렀다. 아약이 마침 따뜻한 물을 준비하여 청앵의 데인 손에 대령하자, 예심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음물로 바꿔와요.” 아약이 곧 물을 갈아오자, 예심이 벌써 노란 배꽃이 새겨진 은그릇에 차가운 고약 한덩이를 덜어내어 청앵이 손을 씻는 것을 시중들고 은젓가락을 사용하여 고약을 꺼내 조심조심 청앵의 열 손가락에 발랐다. 아약은 청앵의 열 손가락에 선홍색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손을 데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도 모르게 버들잎 눈썹을 추켜세우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예심, 너는 소주와 함께 다녀왔으..
청앵은 이 날 새벽에 일어나 무척 서둘러 머리를 빗고 세수를 마친 후, 바로 부찰 씨의 궁으로 시중을 들러 갔다. 청앵이 갈 때쯤에 날이 막 밝아왔다. 여심은 청앵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발을 걷으며 웃었다. “소주께서는 일찍 오셨군요. 윗전마마께옵서는 이제 막 기침하셨사옵니다.” 청앵은 겸손하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윗전마마께서 기침하실 때 시중을 들려면 마땅히 일찍 와야 하지.”안쪽의 발이 걷히고 세수를 시중드는 궁녀가 수건을 들고 줄지어 나왔다. 청앵은 부찰 씨가 세수와 양치를 이미 끝냈고 이제 치장할 차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심이 안쪽을 향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마, 청복진 들었사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모시거라.” 양쪽의 시녀들이 두 손을 들어 장막을 걷..
밤이 깊었다. 전각 안에서는 부찰 씨가 마침 약을 마시고 있었고, 연심이 곁에서 시중들었다. 연심은 부찰 씨가 다 마신 약그릇을 받아들고 곧바로 입을 헹구도록 맑은 물을 건넸다. 부찰 씨가 양칫물을 뱉자 소심이 다시 꿀에 절인 과일을 올리며 말했다. “이것은 이번에 새로 절인 새콤달콤한 살구이옵니다. 마마께서는 하나 맛보시어 입 안의 쓴 맛을 털어내소서.” 부찰 씨가 한 알 먹고 바로 이불을 덮고 누우려는데, 갑자기 무언가를 들은 듯 놀라 몸을 일으키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영련이 우는 소리가 아니냐? 그렇지 않으냐?” 소심이 황급히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제이황자는 아가소에 계시옵고, 지금 시간이면 달게 주무시고 계실 때이옵니다.” 부찰 씨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바깥의 달빛은 이렇게나 어둡고 캄캄하여 실낱같은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청앵은 나지막히 말했다. “아무래도 비가 내릴 것 같구나.” 예심이 상냥하게 말했다. “소주께서는 처마 아래로 드시지요.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감기 드실까 걱정입니다.” 마침 소심이 태의와 함께 나왔다. 태의는 청앵을 보자 한쪽 무릎을 굽혀 절하며 말했다. “소주께 안부 여쭈옵니다.” 청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시오. 윗전마마의 봉체 무탈하신가?” 태의는 황급히 대답했다. “윗전마마께서는 아주 편안하십니다. 다만 연일 국상을 주관하시느라 고단하시고 또 너무나 상심하시어 이러하신 것입니다.” 청앵은 예의바르게 말했다. “태의가 수고가 많소.” 소심이 말했다. “태의는 서두르시지요. 마마께서 처방과 약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의가..
운판(雲版)을 두드리는 소리와 고개를 조아리라 외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통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으니, 마치 구름과 번개가 머리 위에서 먹먹하게 회오리치는 듯하여 사람을 숨막히게 하면서도 경외하게 했다. 나라에 큰 상이 있었으니, 천하가 알았다. 청앵은 뭇 사람들 사이에서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몸을 일으켰다가 엎드려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마치 영원히 말라붙지 않는 샘물처럼 눈에 맺힌 눈물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무감각하게 흘러내렸으니,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몹시 비통해했다. 금관 안에 누워 있는 이 사람은, 그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청앵에게 참으로 수많은 희비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청앵의 부군의 부친이자 왕조의 선제(先帝)일뿐만 아니라 그녀의 당고모를 내친 남자이기도 했다.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