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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청앵은 자신의 궁으로 돌아와 쉬었지만, 기진맥진하여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실 기력도 없었다. 


예심이 분부하니 곧바로 어린 궁녀들이 올라와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주물렀다. 아약이 마침 따뜻한 물을 준비하여 청앵의 데인 손에 대령하자, 예심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음물로 바꿔와요.”


아약이 곧 물을 갈아오자, 예심이 벌써 노란 배꽃이 새겨진 은그릇에 차가운 고약 한덩이를 덜어내어 청앵이 손을 씻는 것을 시중들고 은젓가락을 사용하여 고약을 꺼내 조심조심 청앵의 열 손가락에 발랐다. 


아약은 청앵의 열 손가락에 선홍색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손을 데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도 모르게 버들잎 눈썹을 추켜세우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예심, 너는 소주와 함께 다녀왔으면서 어째서 소주의 손이 데여서 저렇게 빨간 것이냐? 너는 소주를 어떻게 모신 것이야!”


예심은 초초하여 얼굴이 새빨개져서 황급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약 언니, 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요……”


 말하자면 길다고……”

아약이 콧방귀를 뀌었다. 

 단지 네가 게으름을 피워 조심하지 못한 것이지, 아직도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소주를 친정에서부터 모신 시녀가 아니니 소주를 모실 줄 모르는구나!”


아약은 청앵이 혼수로 데려온 시녀이므로 그동안 제일 체면을 차렸으며, 더욱 교만하게 굴었던 것은 그녀가 청앵의 친정 사람이기 때문이었고, 일을 함에 있어서 각별히 좀 더 엄격하게 굴었다. 예심은 잠저에서 각 방의 복진과 격격들의 시중을 들며 그동안 모두 마음을 다해서 따랐고, 비록 어엿한 시녀이지만 결국은 아약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약이 하는 말에 예심은 감히 뭐라 따져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청앵이 듣자니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여 차갑게 말했다. 

 내가 태후마마를 잘 시중들지 못하여 스스로 이리 상처를 만든 것이고, 오후에 이미 약을 발라두었다.”
아약은 깜짝 놀라서 곧바로 입을 다물고 감히 여러 말을 하지 못했으며, 시중을 드는 동안에도 매우 조심스레 행동했다. 


청앵은 고약을 다 바르고 곧 예심이 손에 들고 있던 차를 한 잔 마셨다. 긴장이 좀 풀리자 아약이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국상의 마지막 날이옵니다. 내일은 황상께서 정식으로 등극하시는 날이니 마땅히 소주께서도 경사스러운 색으로 치장하셔야하옵니다.”


아약은 청앵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더욱 웃음을 띄우며, 

 소인이 듣기에, 황상의 연호가 건륭으로 먼저 정해졌다는데 참으로 번창하고 융성하여 기상있는 좋은 연호이옵니다. 소인들도 함께 기쁨에 젖어 황상께서 소주를 책봉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청앵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 어찌 되겠느냐?”


아약은 기쁨에 넘쳐 절을 올렸다.  

 소인은 마마께서 귀비로 책봉 되실 날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요 며칠 간 다른 소주들이 마마께 문안드리러 오셨는데 그분들을 모시는 노비들도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청앵은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다만 찻잔을 들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너는 내가 이런 복을 받을 거라고 보는구나. 그렇다면 아약, 내가 만일 답응에 봉해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 출궁하게 된다면 어떻겠느냐?”


아약은 대경실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어……어찌 그렇게 되겠사옵니까?”


청앵은 정색하고 말했다. 

 어찌 그리 되겠냐고? 네가 이리 허황한 말로 내 대신 화를 자초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이렇게 시비를 일으키니 내가 어찌 너와 연루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황상께서 누구를 책봉하고 누구를 강등하실지는 모두 황상의 뜻인데 너는 함부로 황상의 뜻을 헤아리려 하는구나. 네게 묻건대, 너는 대체 목숨줄이 몇 개인 것이냐?”


아약이 놀라 무릎을 꿇었다. 

 소주, 소인이 실언을 하였사옵니다. 소인도 소주를 생각한 것이옵니다.”


청앵이 차갑게 말했다. 

 예심, 밖으로 데리고 나가거라. 아약은 언행에 실수가 있으니 다시 전각 안에서 시중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약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급히 청앵의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소주, 소주, 소인은 어릴 때부터 마마를 모신 마마의 혼수 시녀이옵니다. 부디 소인의 얼굴을 보아 불쌍히 여기시어 밖에서 시중들도록 쫓아내지 말아주시옵소서.”


청앵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는 누차 실언을 했으니 장차 황상 앞에서 내가 네 죄를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아약이 울며 말했다.

 소인이 소주를 모시며 줄곧 감히 조심하지 않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소주께서 뜨거운 물과 진한 차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소인 모두 마음 속에 뚜렷하게 새기고 한시도 감히 잊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소서.”


청앵은 자신이 잠저에 있던 시절 득의양양해왔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도 뒤따라 조심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세가 크게 변하여 평소와 같지 않으니 마음이 심란하고 고통스럽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마침 공교롭게도 자신의 혼수 시녀인 아약의 태도가 매우 방자하니 청앵 자신도 아약이 하는 일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청앵은 아약이 아직 바닥에 엎드려 목숨을 내걸고 간청하며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없는 답답함을 느껴 곧바로 고함쳤다. 

 아직도 물러가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에 분별이 없으면 즉시 사람을 불러 끌어내어 장을 치고 맞아 죽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아약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얼굴이 새하얘져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예심이 재빠르게 아약을 잡아 일으켜서 서둘러 사은하고 물러나게 했다. 


이리하여 궁중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청앵을 시중드는 사람들은 모두 아약의 신분을 알고 그녀가 총애받는 것에 익숙했는데 이와 같은 것을 보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청앵이 고개를 들자 예심이 곧 의중을 깨닫고 전각의 문을 열었다. 청앵이 천천히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이제 궁중에 있으니 너희들이 제멋대로 굴고,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고, 나오는 대로 거침없이 말하던 잠저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다만, 감히 주인의 이야기를 뒤에서 함부로 말하는 것을 내가 듣게 된다면, 즉시 신형사[각주:1]로 보내 때려 죽이고 결코 체면을 보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청앵의 이 말은 비록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식은 땀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일제히 대답하고 감히 시시비비를 논하지 못했다. 


청앵이 고개를 들자 뭇 사람들이 그 의중을 깨달아 즉시 모두 물러갔다. 예심은 전각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청앵이 장신구를 풀고 머리를 빗고 세수 하는 것을 시중들었다. 청앵은 예심이 매만지도록 맡겨두고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용모는 대단히 익숙해보였다. 그녀는 이제 19세 밖에 되지 않았고, 선제 황후의 친정 가문 출신이니 앞날이 순조로왔고, 항상 감싸고 보호 받았기 때문에 성격이 조금 버릇없게 마련이었다. 이 길이 순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일을 다 말할 가치가 없는 것은 그 역시 수년 전 과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출신이 고귀하여 청앵은 자신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일생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설령 수녀로 간택받아 입궁하여 비빈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에게 시집가야 했다. 제일 좋은 길은 물론 어느 황자의 적복진이 되어 왕부의 일을 주관하고 오라나랍 씨의 영광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선제의 성년이 된 아들은 삼황자 홍시, 사황자 홍력, 오황자 홍주 뿐이었다. 당시 청앵이 혼약해야 했던 상대는 삼황자 홍시였다. 그러나 홍시는 기어코 마음을 주지 않고 자신을 그의 복진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었는데 때마침 당시 희귀비였던 태후가 4황자의 아내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마침 대사면을 받은 듯이 사람들이 흠잡는 곤란한 상황에서 도망쳐 4황자의 측복진이 되었다. 


사황자에게 시집간 이후에는 순조로운 나날을 보냈다. 비록 선제 슬하에서 사황자는 줄곧 가장 총애받는 황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편안했고, 사황자를 모시며 보내는 나날은 보기에 마치 평화로웠지만, 세심하게 생각하고 지내야 하는 나날이었다. 다행히 집안은 평안했고, 왕부에서 그녀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적복진 부찰 씨 한 명 뿐이었으므로, 청앵은 한마음으로 사황자를 생각할 뿐이었고, 지위는 공고했으며, 그녀와 다투는 이는 적었다. 비록 최근 몇년 동안 사황자가 첩실 몇 명을 들였지만 여전히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비록 출가 전 청앵의 성정은 집안에서 오냐오냐 사랑받고 또 남편의 총애도 받아 조금 교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제의 마지막 몇 년에 그녀의 고모 오라나랍 황후가 총애를 잃으니 그녀도 감히 조금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선제가 붕어하고 자신의 남편이 어느날 제왕의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녀는 대단히 기쁘고 남편이 자랑스러워 마지 않았다. 궁중의 생활에서 이 며칠은 이미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고, 희월은 그녀의 자리를 넘보고, 황후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태후는 질타하니 그녀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몰라도 되었던 이전의 즐거웠던 세월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청앵은 조용히 앉아 거울 속에 비친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고독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제가 붕어하여 궁중은 비록 모든 것이 간소하였고 그녀들은 편전에 머물었지만 궁은 여전히 궁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금이 언덕을 이루고 옥으로 층계를 삼으며, 모든 것이 아름답고 화려한 비단으로 둘러싼 무성한 꽃과 같아 화려하고 눈부시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청앵만이, 그녀는 혼자였고, 거울 속에도 혼자였으며, 바닥에 떨어지는 그림자 조차 쌍을 이루지 못한 것이 비단 더미 속의 한 가닥 외로운 꽃술 같았다. 


청앵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 쥐었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음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오늘처럼 두렵고 당혹스러워 기댈 곳 없는 날도 없었다. 마치 모든 기운이 하루아침에 다해버린 것만 같았다. 


매우 두렵고 당혹스러운 와중에 밖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 소리가 시끄럽게 일어나 고독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던 청앵을 깨웠다. 청앵이 눈썹 머리를 찌푸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알아보려 하기도 전에 밖에서 지키고 있던 아약이 이미 문을 밀고 들어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소주, 소 격격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온 얼굴에 눈물 범벅이 되어 이리로 달려와서 소주를 꼭 뵈어야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사옵니다. 날이 이렇게 늦었사온데……”


아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록균이 이미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는지, 담청색 얇은 비단 장삼 치마로 된 평상복을 입었을 뿐이고, 겉에는 푸른 은빛의 물결 무늬를 이어서 짠 외투를 걸쳤고, 귀밑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이렇게 찬 밤이슬이 내리도록 추운 가을 밤에 록균은 뜻밖에 온 얼굴에 땀이 가득한 채 얼굴에는 눈물 범벅이 되어 달려와, 전날의 얌전하고 연약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청앵이 안색이 바뀌어 대경실색하여 말했다. 

 록균, 여기는 궁중일세. 무슨 짓인가?”


록균의 얼굴에는 혈색이라고는 없어 창백하기가 흰 도자기 같았고, 흐느껴 울 힘밖에 남지 않아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녀는 결국 ‘쿵’하고 청앵의 앞에 무릎을 꿇고 대성 통곡했다.  

 형님, 형님, 저 좀 살려주시어요! 윗전마마께오서 사람을 보내 영장을 데려갔습니다! 저의 영장을요, 저의 삼황자를요! 영장은 이제 막 삼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윗전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영장을 데려갔사옵니다!”


청앵은 즉각 알아차렸다. 황후가 태후의 곁에서 자기 소생인 이황자 영련이 이미 아가소에서 부양받고 있음을 말했으니, 일개 격격 소생의 삼황자는 더더욱 생모 곁에서 양육될 수 없는 이유였다. 


록균은 너무 울어서 머리가 모두 산발이 되었고 땀과 눈물이 백옥같은 얼굴 위에 뒤범벅되어 마치 큰 바람이 맹렬하게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록균은 바닥에 엎드려서 슬피 울며 말했다.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절 위해 윗전마마께 영장을 제게 돌려달라고 부탁해주세요. 제게 돌려줘요!”


청앵은 황급히 손을 내밀어 록균을 일으키려 했는데, 록균의 힘이 너무 세서 깜짝 놀랐다. 록균은 필사적으로 땅에 엎드려 머리를 계속 조아리며, 

 형님, 저는 지위가 낮아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으니 윗전마마께서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다르지요. 형님은 출신이 고귀한 측복진이시고 잠저에 있을 때 윗전마마께서도 형님의 몇 마디를 기꺼이 들으셨으니, 형님께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윗전마마께 말씀드려주세요!”


이전, 이전 일은 너무 오래 된 일이었다. 그것은 서로 신분과 지위를 따지는 일이었지, 진심이 아니었다. 


청앵은 아약과 예심에게 눈짓하여 엎드려 있는 록균을 양쪽에서 힘껏 끌어 부축하여 일어나 앉게 했다. 청앵은 록균이 우느라 목이 쉬고 기진맥진한 것을 보고 마음이 쓰리고 아팠지만 록균을 타일렀다. 

 영장은 윗전마마께서 보낸 사람이 데려간 것이지만, 영장을 데려가게 한 것은 윗전마마가 아니라 황실의 법도 때문이다!”

청앵은 잠시 멈추었다가, 

 이 일은 태후도 알고 계신다.”


록균은 바로 넋이 빠져서 양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설령 황실의 법도라 해도 영장은 그렇게 어린데……”


청앵은 록균의 어깨를 도닥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영장은 아직 어리지. 하지만 자네가 궁중에서 영장을 낳았다면 영장이 뱃속에서 나온 그 순간 강보에 싸서 데려가버리고 자네는 기껏해야 한 번 보는 정도만 허락받았을 것이야.”

청앵은 천천히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더군다나 윗전마마께서 태후께 윗전마마의 소생의 이황자를 이미 아가소에 보냈다고 고하였으니, 윗전마마도 감히 황가의 법도를 어길 수 없는 것이지.” 


록균의 몸이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청앵은 서둘러 록균을 부축하며 그녀의 엄지와 검지 사이 범아귀를 호되게 꼬집었다. 청앵은 본래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는데, 록균을 깨우려 수차례 꼬집어도 그저 멍하니 넋이 나가 눈물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약은 서둘러 록균에게 뜨거운 차를 먹이고 말했다.  

 소주 이러지 마시어요, 정말로 깜짝 놀라실 분은 우리 소주셔요!”


청앵은 아약을 지긋이 누르며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이런 꼴이어서야. 나도 깜짝 놀랐지만. 궁중의 다른 사람들을 정말 놀라게 했으니 그들의 입을 하나하나 단속하려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자네 체면은 없어도 된다 해도, 삼황자도 체면이 있지 않은가.” 

청앵은 고개를 들어 예심에게 화장대 위에 있는 옥으로 된 빗을 가져오라 눈짓하고 조금씩 록균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말했다. 

 우리가 일단 궁중에 들어온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는 나도 어리석었지만 오늘에 이르니 좀 알 것 같구나. 자네는 나보다 좀 나은 것이, 자네는 아들이 있지 않은가. 나와 비교하지 않아도, 밖에서 보기에도 모자람이 없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자네의 영장은 아가소에서 양육하여 여덟 명의 유모가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유모들이 아이를 안고 와서 한 시진 정도 자네가 볼 수 있게 하니, 이는 모자 간에 너무 친밀해서 장래 외척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세. 이 일은 자네가 누구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소용 없는 일이니 그저 자네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네.”


청앵은 록균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화장이 뭉개지고 눈물은 몹시 뜨거워 사람을 태우는 듯 했다. 록균의 눈물이 손에 떨어지자 청앵은 자신의 양 손이 뜻밖에도 한 가닥 온기조차 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이 말은 청앵이 록균을 타이르는 말이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일이 눈앞에 닥쳐왔으니, 누구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다만 스스로 받아들여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아야 하는 것이었다.  


청앵은 그토록 많은 궁중의 이야기를 읽었지만 적막만이 흘렀고, 최후에 이르러서는 이 하나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록균의 눈물이 옷자락 위에 툭툭 떨어졌다. 록균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슬퍼하며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설마 앞으로 저는 그저 이럴 수밖에 없나요.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저와 떨어져야 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 


청앵은 록균의 머리를 알맞게 틀어 올리고 점점이 푸른 은으로 장식한 꽃을 한 송이 골라 꽂으니 입은 옷에 아주 적절하여 평소와 같이 유순하고 온화해보였다. 청앵은 고개를 들어 눈짓으로 예심에게 뜨거운 물수건을 꼭 짜서 가져오게 하여, 록균의 얼굴을 닦고 다시 치장해주었다. 청앵은 몸을 기울여 걸터 앉아 작게 말했다. 

 록균, 앞으로 자네가 얼마나 많은 아이를 가질지 모르지. 다만 이만한 아이가 있으니 자네는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고, 이 궁중에서 안정된 지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야. 만약 자네가 정말로 상심했더라도 자네 혼자만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네. 강희제의 덕비이자 선제의 생모 효공인황후는 선제를 낳을 을 때 자신의 신분이 비천하여 선제를 당시의 동 귀비에게 보내 키우게 할 수밖에 없었네. 하지만 이후 아주 많은 자녀를 낳아 키웠고 마지막에 태어난 십사왕야는 자신의 곁에 남았지. 이제 자네는 막 궁에 들어왔고, 우리 모두 함께 입궁하였으니 누구에게 아이를 보내 부양하게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아. 아가소에 보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 이후, 이후에 자네가 모든 일이 평안하고 순조롭게 되면 자네도 자기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을 것이야. 알겠는가?”


록균은 멍하니 앉아서 궁녀들이 그녀를 단장하여 울어서 붓고 붉어진 두 눈을 화장으로 덮어 간신히 숨기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형님, 그러면 저는 어떡하나요?”


청앵은 손수건을 쥐고 록균의 눈물을 닦았다. 

 참으시게. 자네 아이를 자네가 키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때까지 참게. 그래서 지금 자네는 잘못을 저질러서도 안되고 아주 사소한 실수도 저지르면 안되네.”

 청앵은 록균의 손을 이끌어 일으켰다. 

 자네는 지금 곱게 화장했으니 황후의 궁으로 가서 황후께 사은하고 자네를 대신해 아가소에서 삼황자를 보살피게 해주시어 감사하다고 하게. 자네가 방금 울며 내 궁으로 뛰어 들어들어온 것은 상심이 지나쳐 잠시 정신이 나갔기 때문인 것이야. 이제 이것이 은혜인 것을 깨달아 모두 받아들인 것일세.”


록균은 입술을 깨물며 애처롭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형님, 저는 말 못하겠어요. 저는 제가 말하는 내용이 두려워서 울고 말 거예요.”


청앵은 록균의 얇은 옷을 걸친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울지말게. 자네의 앞날을 생각하고, 삼황자의 앞날을 생각하고, 자네가 앞으로 가질 다른 아이를 생각하게. 눈물을 흘린다면 그들을 위해 흘리는 것이야. 울지 않도록 참는 것 또한 그들을 위해 참는 것이고.”


록균은 죽을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달빛이 어슴푸레하고, 나무 그림자는 푸른 벽돌 바닥 위에 엷고 어수선하게 흩어져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씩 잔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가늘고 조밀하여 무수히 많은 작은 벌레들이 무언가를 갉아먹고 있는 것처럼 고막을 뚫고 지끈지끈 쑤셔왔다. 청앵은 록균의 그림자가 땅 위에 끌리는 것을 바라보며, 연약한 모습이 어릴적 유모들과 함께 나가서 본 신기한 그림자 극에서 머리를 올린 종이 인형들이 손발이 매달려 매우 기뻐하는 듯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일거수 일투족이 조금도 사람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따름이었다는 것을. 


이 날 이 때의 청앵과 록균이 이와 무엇이 같지 않겠는가?


이 날 밤, 랑화는 본래 깊게 잠들지 못했으나, 임시 거처인 편전에서는 편안한 예전 침대에서 만큼 익숙하지 않고, 귓가에 영련의 익숙한 칭얼거림이 들리지 않으니, 랑화도 어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돌아눕자, 밤새 바닥에서 자며 곁을 지키던 시녀 여심이 곧장 듣고는 일어나 초에 불을 켰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탕을 따라 랑화에게 주고 자상하게 보살피며 말했다. 

벌써 삼경이옵니다. 마마께서는 어찌 아직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시옵니까?”


랑화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받치고 일어났다. 

 이황자가 곁에 없으니 내 마음이 줄곧 편치 않구나.”


여심은 부드러운 거위 털을 채운 베개를 랑화의 허리에 받쳐주며 부드럽게 설득했다. 

 마마 안심하소서. 소인이 일찍 가서 물어봤사온데 세 분 황자 모두 아가소에 계시옵고, 그곳의 노비들은 모두 우리 이황자님께 제일 마음을 다하여, 보살피는데 조금이라도 미흡한 점이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사옵니다. 유모들의 젖도 먹이기에 풍족하고 번갈아가며 이황자께 먹이니,  유모들도 세심하게 시중들며 감히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사옵니다.”


랑화가 한숨을 쉬며 우울하게 말했다. 

 황실의 법도가 그곳에 있어 내가 자주 가서 볼 수 없으니 너는 반드시 나 대신 마음을 다해야 하느니라.”


여심이 황급히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황자께서는 천하에 존귀한 분이시고, 다른 황자들은 발가락의 때만큼도 따라오지 못하니 그 아래 그 누구도 감히 있는 힘과 성의를 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여심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삼황자도 소 격격 곁에서 떼어져 왔으니 소인은 이제야 기뻐했습니다. 어느 마마께옵서 황가의 법도를 지키고 계시온데, 기어코 소 격격 모자가 함께 있다면 소인은 반드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랑화가 여심의 손에서 받아 천천히 암홍색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탕을 홀짝이며 마시고는 아무 생각없이 말했다. 

 됐다. 그녀도 가엾지. 분명 그리 되어 상심했을 터인데도 훌륭하게 참고 내게 와서 사은했더구나. 듣자하니 소 격격이 울며 오라나랍 씨에게 달려갔지만, 오라나랍 씨도 감히 도와주지 못하고 서둘러 소 씨를 내보냈다지.”


여심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그렇사옵니다! 청복진은 소 소주를 도울 수도 있겠지만 소인은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청복진은 이제 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너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보존하기 어려운데, 오늘 점심 수라 때 태후께서 청복진에게 아주 제대로 창피를 주셨지요.”


 본래 오라나랍 씨는 태후께서 황상께 얻어주신 측복진이고, 또 선제의 경인궁 황후의 조카딸이니 내가 어찌 그녀를 나무랄 수 있었겠나. 이제 태후께서 이런 기색을 보이셨으니 궁안의 사람들도 이제 사정을 꿰뚫고 있겠지.” 


여심은 입꼬리를 올리며 몹시 기뻐했다. 

 궁중에서 태후를 제외하면 마마께서 유일한 윗전마마이시옵니다. 마마께서 그녀들을 어떻게 하시더라도 그녀들은 그저 어느 연극 무대 위의 그림자 인형 처럼 그대로 할 수 밖에 없지요. 모든 것은 마마의 손 안에 있는 것이옵니다.”


랑화는 가슴 위로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모두 내 손 안에 있지. 그러니 말이다, 예심. 내일 바로 아가소에 가서 반드시 삼황자를 잘 보살피고 우리 영련보다 더 잘, 더 세심하게 대하라고 분부하거라. 먹는 것은 규칙을 어겨서는 아니되고, 추위와 더위에 조심하고, 반드시 삼황자를 매우 아껴야 하며, 강보 안에서도 언제나 놀고, 항상 즐거워 하도록 해야 하느니라. 우리 황가의 아이들은 고생을 해서는 아니되며 일생 동안 사랑받아야 한다.”


여심은 비록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랑화가 이렇게 점잖고 엄숙하게 분부하는 것을 듣고 서둘러 대답하고는, 랑화가 다 마신 탕 그릇을 물리고 다시 얇은 진주 비단 장막을 늘어뜨렸다. 








  1. 신형사(慎刑司): 청나라 내무부 소속 기구. 초기 이름은 상방사(尚方司)였으나 순치 12년(1655)에 상방원이라 이름을 고쳤다. 강희 16년(1677)에 다시 신형사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범죄 사건을 수사하고, 모두 형부의 판례에 근거하나, 경위가 중대한 때에는 형조를 비롯한 세 개의 기관으로 옮겨 공동으로 심리했다. 태감의 형벌은 형사(刑司)에서 주로 처리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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