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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하루, 뭇 사람들이 모두 황후의 장춘궁에 와서 문안을 올리자 부찰 씨가 아랫사람들에게 명하여 홍귤을 한 바구니를 상으로 내리며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황상께서 우리들 후궁을 생각하시어 강남에서 올린 홍귤을 먼저 한 바구니 골라 내리셨으니 마침 우리도 함께  맛보세나.”


뭇 사람들이 일어나 사은했다. 

 황후마마의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황후가 사람들에게 앉으라 명하고는 연심과 소심이 홍귤을 나누는 것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자매들은 모두 예전에 잠저에 있을 때 함께 황상을 모셨고, 서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지. 이제 자금성에 들어와 황상의 사람이 되었으니 첫째로는 궁중의 법도를 반드시 지켜야 하며, 둘째로 지난 날의 자매간의 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편이 좋을 것이야.”


희월이 일어나 만면에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예전에 신첩들의 형님이자 윗전이시었고, 이제는 더군다나 천하의 어머니이시옵니다. 신첩들이 어찌 감히 공경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황후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월 아우가 말씀이 과하시군. 본궁과 아우님들은 몇살 차이 나지 않으니 가르침을 내리는 것 외에도 아우님들을 잘 배려해야겠지.”


희월이 뭇 사람들을 데리고 일어나 말했다. 

 황후마마의 커다란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여의는 황후와 희월이 맞장구치는 것을 보며 그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홍귤을 까서 들고 감상하고 음미하며 얼굴에 한 가닥 웃음을 띄울 뿐, 담담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는 희월의 대답에 몹시 만족하여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님들은 앉아서 귤을 드시며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게. 본궁은 조금 피곤하여 먼저 침전에 돌아가 쉴 것이야.” 


황후는 잠시 멈추었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상께서 이미 아우님들의 지위를 정하시고 각각의 궁과 아우님들의 거처를 안배하셨네. 이제 황태후께서도 자녕궁으로 거처를 옮기셨네. 정오에 황상의 지의가 내려오거든, 각자 거처로 옮겨가도록 하게. 그동안 대행황제의 상례를 위해 한 곳에서 복작복작 지내느라 아우님들이 고생하셨네.”


뭇 사람들이 엄숙하게 말씀을 듣고 더 앉아있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곧 잇달아 인사하고 물러났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가 되자 황제의 책봉 지의가 육궁에 두루 내려왔다. 여의는 처마 밑에 서서 한 쌍의 푸른 앵무새에게 장난치며 아약이 손가락 발가락을 꼽으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듣고 있었다. 

 황후 책봉 대전이 있은 후, 황후는 이제 장춘궁에서 머무시지요. 장춘, 기나긴 봄이라니 정말 좋은 뜻이지만, 그저 황상의 총애가 오래도록 머물기를 기다릴 뿐이잖아요. 소 격격은 새로 삼황자를 낳고 순빈에 봉해져 종수궁에 머물어요. 황 격격은 이귀인에 봉해져서 경양궁에 살게 되었으니 꽤나 기뻐했어요. 당연히, 황상도 이귀인을 총애하지 않으시니 귀인으로 봉한 것은 괜찮지요. 김 격격은 가귀인으로 봉해져 태극전에 머무는데, 가귀인도 기쁘지는 않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태극전이 황상의 양심전과 너무 멀다고 원망하죠. 김 격격은 계속 자신의 조선 종실의 여식이라는 신분이 남보다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그저 일개 귀인에 불과하니 무슨 좋은 표정을 보이겠어요.”


여의는 새모이를 앵무새 주변에 뿌렸다. 

 네가 그리 이야기하지만, 뒤에서 남의 일을 논해서 무엇하느냐.”


아약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소인도 알고있사옵니다. 해란 격격만 예외이지요. 황상께서는 그녀를 상재에 봉하시고는 어느 궁에 거하게 할 지 말씀도 안하셨으니, 아마 신분이 높지 않아서 궁의 주인이 누구든 아무데나 머물게 되었겠지요. 오히려 우리와 고 복진에게는 아직 어떤 지의도 내리지 않았어요.”

아약이 애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문쪽으로 가서 내다보며 말했다. 

 해가 곧 산 너머로 지겠어요. 다른 소주들은 모두 새 거처로 갔는데 어째서 우리 쪽에는 아직도 지의가 오지 않는거죠?”


여의의 마음도 비록 조금 조급했지만, 아약의 앞에서 무심코 드러내기엔 마땅치 않아서, 그저 앵무새에게 모이를 주던 작은 국자를 가지고 물을 빙빙 휘저을 뿐이었다. 아약이 황급히 말했다. 

 소주, 우리 앵무새는 정말 깔끔해서 모이 주던 국자로 물을 휘저으시면 앵무새들이 그 물을 마시지 않을 거예요.”


여의는 마침 귀찮아하던 차에 황명을 받든 태감 왕흠이 대신 두 명과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왕흠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주께 아뢰옵니다. 성지가 내려왔사옵니다. 대학사 예부상서 삼태를 정사(正使)로 삼고, 내각학사 대기를 부사(副使)로 삼아 책봉례를 행하라.”


여의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꿇어 앉자,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뒤따라 여의의 뒤에 꿇어 앉았다. 


왕흠이 성지를 받아들고 큰 소리로 낭독했다. 

 짐이 황후와 후궁을 가르치고자 하니, 격식이 중하여 온순하고 훌륭함의 모범이 되고, 덕이 사방을 비추니, 이에 짐을 도와 보좌한 공이 있다. 음덕이 이에 훌륭하여 모범이 되니, 서비 나랍 씨는 몸을 낮추어 정숙하게 삼가할줄 할고, 천성이 평안하고 온화하며, 일찍이 법도와 예절을 드러내니, 늘 신중하고 공손하며 본분을 받들고 궁중의 규범을 부지런히 수양하며, 항상 겸허하고 속마음을 거스르지 않았다. 이제 황태후의 자애로운 뜻을 받들어 책과 인장으로써 그대를 한비(娴妃)에 봉하나니, 그대는 이를 공경하고 마음에 새겨 명을 받들고 법도로써 길하고 은혜로움을 받들라. 왕후의 덕을 격려하고 보필하며, 널리 번성하여 오래도록 아름다울지어다. 황제가 친히 이르노라.”


여의가 양손으로 성지를 받들었다. 

 신첩 황상의 커다란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여의가 눈짓을 하자 예심이 황급히 소매에서 세 통의 붉은 봉투를 꺼내 세 사람의 손에 하나하나 건네주었다. 


왕흠이 온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한비마마께서 상을 내리시니 망극하옵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길, 연희궁을 마마께 내리신다 하시옵니다. 마마께서는 곧바로 연희궁으로 옮기시옵소서.”


여의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공공. 아약, 공공과 두 분 대인께서 나가시는 길을 잘 배웅해드리거라.”


아약이 대답하자 왕흠이 두 손을 맞잡고 말했다. 

 소인은 황상께 보고하러 가보아야 하오니 마마께서는 내일 아침 일찍 길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장춘궁에 가셔서 황상과 황후마마께 사은하시는 것을 잊지마시옵소서.”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려주어 고맙소, 공공.”


전각 안의 사람들이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경하드리옵니다, 한비마마. 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여의가 말했다. 

 본궁은 피곤하구나. 아약이 너희에게 상금을 줄 것이니 기다렸다가 짐을 정리하여 연희궁으로 가거라.”


예심이 서둘러 여의를 따라 내전으로 들어갔다. 


여의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물었다. 

 월 복진쪽에서는 소식이 있더냐?”


예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 도착하였사옵니다. 월 복진은 혜귀비로 봉해졌다 하옵니다. 황상께서 구두로 명을 내리시기를, 귀비의 외척을 포의에서 빼내어 본래 만군기였던 것으로 하셨사옵니다. 생각한대로 만군 양황기로 올려 고가(高佳) 성을 하사하시고, 귀비도 함복궁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차갑게 웃고는, 다시 깨달아 더욱 번뇌하여 감당할 수 없었다. 

 함복궁? 복과 은혜를 전부 다 가졌지 않느냐?”


예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했다.  

 마마 괴로워하지 마시옵소서! 연희궁이 비록 외지긴 하지만, 비록……”

예심은 황제의 은혜와 마음에 차이가 있다고 여의를 위로하려 했지만, 실은 마음을 안심시킬 길이 없었다. 


여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연희궁이 외졌다고 적막한 것은 아니다. 주변은 궁인들이 오가는 길이라 떠들썩하고 소란스럽지. 게다가 강희제 25년 이후로 삼십여 년간 한번도 보수하지 않았으니, 본래 육궁 중에서도 제일 쇠락한 궁이다.”

여의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설마 태후와 황상께서 내가 싫어서 피하느라 이곳에 보내신 걸까?”


예심이 말했다. 

 황상과 마마께서 오랫동안 정이 깊으셨는데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설령 태후가…… 태후께서도 마마를 책망하지 않겠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


여의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저리는 것 같았다.  

 입으로 말한 것은 다만 해본 소리에 지나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됐다. 이제 와서 나도 다투지 못할 것이 무엇겠느냐. 우선 짐을 챙겨서 연희궁으로 가자.”


연희궁으로 옮겨오자 이미 밤이 오고 있었다. 다행히 연희궁이 비록 궁인들이 드나드는 길과 가까웠지만, 대문을 닫으면 꽤 고요했다. 궁중은 비록 새로 보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전의 앞뒤로 각 다섯 칸의 뜰이 있고, 세 칸짜리 동서배전이 있어서 넓었다. 여의는 본래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궁인들이 세심하게 청소하고 나니 오히려 실내가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여의가 연희궁 안을 오가며 한 바퀴 돌아보고는 다행스러워했다. 

 너희가 세심하게 청소하여 대체로 아주 나쁘지는 않구나.”


아약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너무 자족하십니다. 동서 육궁에서 어느 곳이 연희궁에 비해 좋지 않사옵니까. 소인 승건궁, 익곤궁 모두 가보았지만, 하나 하나가 모두 지극히 좋고 풍경또한 아름다우며 황상의 양심전과도 가까웠사옵니다. 여기에 살면 황상께서 언제 한 번 오실지 모릅니다.”


여의가 아약을 흘끗 보고는 대들보에 새겨진 문양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예심이 웃으며 아약을 잡아당겼다. 

 아이참, 언니. 황상께서 오시고 싶다면 길이 멀다고 싫어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만약 오고싶지 않으시다면 양심전 뒤에 있는 방에 있다고 해도 안 오실거고요.” 


아약이 막 받아치려던 참에 여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고자 한다면 멀고 가까움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온마음의 생각이 반드시 입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 아약, 그렇지 않으냐?”


아약은 조금 낙심했지만 예예 하고 대답했다. 

 다행히 마마께서 옮겨오시고 나서 황상께서도 수많은 물건들을 상으로 내리시어 궁 안에 진열할 물건들을 보충하여 주셨으니, 황상의 마음 속에는 늘 마마가 계신 것이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상께서 오늘밤 장춘궁에서 주무시니 우리도 일찌감치 쉬자꾸나. 잠자리가 새로 바뀌어서 잠을 달게 잘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예심이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마마께서 잠자리가 바뀌어 푹 주무시지 못할까 걱정하실까봐 소인이 이미 침전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을 피워두었사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여 칭찬하자, 아약이 몰래 입을 삐죽거리며 두 손을 아래로 드리우고 뒤에 서 있었다. 


주인과 두 시종이 마침 침전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지키고 있던 어린 태감이 들어와 고했다. 

 마마께 고하옵니다. 해 상재가 마마께 문안올리러 왔사옵니다.”


여의는 의아해했다. 

 이 시각에 어찌 해란이 와서 안부를 묻는가? 어서 들라 하라.”


여의가 서난각으로 가서 앉자 해란이 이미 시종 엽심을 데리고 들어와있었다. 


여의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안부를 물으러 온겐가? 아무래도 긴 밤 잠 못 이루어 그런 것인가?”


해란은 이전과 다르게 무척 불안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예심이 차를 따라 올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해 상재께서는 차를 드시옵소서.”


해란은 차도 마시지 않고 그저 여의를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여의는 조금 놀라웠지만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이 내게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하시게. 맞다, 오늘 황상의 지의가 내려왔을 때 아우님이 머무는 궁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는데, 황후마마께서 안배해주셨겠지?”


해란이 눈가가 조금 붉어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빈첩의 지위가 낮아 그 의견도 가벼이 여겨지니, 당연히 황후께서 되는대로 어디라 배치해주시면 곧 그곳인 것이지요.:


여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느 곳이지? 혹시 좋지 않은 곳인가?”


엽심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혜귀비의 함복궁이 넓고 화려하니 소주께 함복궁으로 가라 지시하셨사옵니다. 이는 본래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함복궁의 그분은 본래 관대한 분이 아니신데 이제 대기까지 되셨으니 더욱 심해지셨사옵니다. 예를 들면, 이귀인은 이전에 황후마마를 시중들던 시녀였사온데, 혜귀비 쪽에서 이전에 자신이 황상을 모실 수 없을 때 황상을 모셨던 계집종이라며 방법을 강구하여 쫓아냈사옵니다.”


여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이는 예전의 일이지않나. 이제 그녀는 귀비이니 당연히 전보다는 좀 더 온유해지겠지.”


엽심이 분개하여 말했다. 

 저희 소주는 온화한 성격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옵니다. 함복궁에 도착하여 먼저 혜귀비의 가르침을 한바탕 듣고는, 또 서쪽에서 해가 드는 방 한 칸에 살라고 옮겨졌사옵니다.”


여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말을 들었다.  

그 어디가 사람이 살 곳인가. 여름에는 땡볕이 내리쬐고 겨울에는 얼음 창고처럼 추워서 시종들도 그런 곳에서 살지 않고 평상시에 쓰지 않는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에 지나지 않지 않는가. 혜귀비는 황상께서 보실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해란이 흐느껴 울었다. 

 황상께서 평소에 빈첩의 처소에 자주 오지 않으시니, 지금 혜귀비 눈에는 그것도 더욱 소용없지요. 오늘 혜귀비가 말하기를, 만약 황상이 정말로 물으신다면 빈첩이 스스로 좋아서 그곳에 사는 것이라 답하고 혜귀비는 그곳에 살지 말라 권했다고 말하라 했사옵니다. 빈첩은……사실 황상께서는 빈첩이 어디에 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여의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혜귀비가 자네를 이리 대할 뿐만 아니라, 자네도 이렇게 나오니, 혜귀비도 막을 수 없을 것이지 않나?”


해란이 흐느끼며 말했다. 

 혜귀비가 무엇인들 막지 못하겠사옵니까? 지금 함복궁이 얼마나 시끌벅적한지 모릅니다. 그녀가 귀비로 봉해지고 대기까지 하자 모든 사람들이 나아가 아첨하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해란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여의를 바라보았다. 

 빈첩은 다만 한비마마의 은혜를 바라옵고 왔사옵니다. 부디 마마의 궁에서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사옵니다.”


여의가 서둘러 말했다. 

 자네는 평소에 나를 형님이라 불렀으니 지금도 형님이라 부르게. 말끝마다 ‘마마’니 ‘빈첩’이니 소원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해란이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의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자네가 여기 와서 살고자 한다면 허락하지 못할 것은 없으나, 다만 내가 황후마마께 아뢰어야 한다……”


여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예심이 다가와 말했다. 

 마마, 차가 식었사옵니다. 소인이 다시 바꿔드리겠사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심이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어서 부득이 혼자 살며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가 여기 와서 살고자 하면 허락하지 못할 것은 없으나, 다만 내가 황후마마께 아뢰어야 하고, 그또한 아뢰면 그만이다. 다만,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나의 상황이 첫째로, 황후께 말을 꺼내 이것저것 부탁할 수 있었던 예전과는 같지 않으며, 둘째로는 내가 부탁한다 하더라도 황후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네가 성실히 본분을 지키지 못한다 책망하실까 두렵고, 만일 혜귀비가 이로 인하여 자네에게 화풀이를 한다면, 자네의 앞으로의 나날은 더욱 안좋아질 것일세.”


예심이 해란에게 차를 따르며 다른 뜻이 없는 듯이 말했다. 

 사실 해란소주께서 잠저에 계실 때 우리 마마 곁의 누각에서 지내셨으니, 만일 우리 마마와 함께 연희궁에서 거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경우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해란의 눈물어린 눈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어리석어서 어찌 이리도 형님을 곤란하게 했을까요.”


여의가 미안해했다. 

 이전같았다면 내가 자네를 도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허나 지금, 자네가 이 곳 연희궁을 보면 알겠지만, 내가 실은 말을 꺼낼 여지가 없다네. 게다가 자네가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연희궁으로 옮겨오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야. 만일 나와 연루되어 황상의 은총을 잃게되면 더 나쁜 일이 아닌가.”


해란이 연희궁을 둘러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이 잠저에 계실 때에는 본래 측복진 중 제일이셨는데 어찌 이런 부당한 곳에 살게 되신 건지요.”


여의가 해란의 손을 토닥였다. 

 부당하고 아니고는 한 때의 일이 아니냐. 자네와 내가 모두 온전하니, 내일 좋지 아니할까 걱정하겠는가.”


해란이 손수건을 들어 눈물 자국을 닦고 얼굴을 활짝 폈다.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해란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제가 잠저의 수방에서 시녀였을 때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형님께서 때때로 보고 저를 걱정해주시고 분발하라 격려해주셨죠. 나중에 제가 수놓은 신발을 황상께 바치시어 황상께서 저를 총애하시고 명분을 주시게 해주셨어요. 형님께서 저를 도와주신 것을 저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의가 따뜻하게 말했다. 

 그래. 자네는 자네가 인내해야 할 것이 있고, 나는 내 몫이 있지. 우리가 모두 잘 견디면 다 지나갈 것이야.”


해란이 일어나 아쉬워하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아우는 먼저 물러가겠사옵니다. 형님께서도 일찍 쉬세요.”


여의가 처마 밑까지 배웅을 나오면서, 마음이 조금 불안했다. 

 혜귀비가 만약 자네를 정말로 괴롭힌다면, 꼭 내게 와서 말하게. 자네의 괴로움을 조금은 나누어 도울 수 있을 것이야.”


해란이 감격하여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잊지 않을게요.”


여의는 해란과 엽심이 나가는 것을 보며 정원에 푸른 서리같은 달빛이 가득 차서 청빈하고 적막한 정취를 더욱 더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예심이 망토를 가져와 여의의 어깨에 펼쳐 덮고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마마께서 한숨을 쉬시니, 아무래도 방금 소인이 마마를 말린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옵니까?”


여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한 것이 옳았다. 내 한몸도 보전하기 어려운데, 구태여 해란을 말려들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예심이 말했다. 

 예전에 잠저에 있을 때, 혜귀비의 성격이 이토록 거만하고 난폭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평소 온화한 사람이라 할 만했는데, 어찌 입궁하자마자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의는 정원의 푸른 벽돌 위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바라보니, 마음이 이토록 어수선하고 복잡함을 금할 수 없어서 그저 꾹 눌러 참을 뿐이었다. 

 뜻을 얻으면 거만하고 난폭한 것이고, 얻지 못하면 겸손해지는 것이 본래 인지상정이다. 만일 득의했을 때에도 겸허하고 온화하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따뜻하고 공손히 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수양한 것이지.”


예심이 주저하며 말했다. 

 황상께서 그동안 마마의 지혜로운 마음과 난초같은 성정을 칭찬하시고, 혜귀비가 얌전하고 부드러운 것을 칭찬하셨는데, 어찌 오늘에 이르니 마마의 봉호를 우아할 한(娴)으로 하시고 혜귀비에게는 반대로 슬기로울 혜(慧)로 정하셨을까요?”


여의가 망토를 여미며 담담하게 말했다. 

 황상께서 하신 일에 따로 깊은 뜻이 있으니 우리가 함부로 짐작해서는 아니된다.”


양심전 서재의 창호가 촘촘하고 조밀하여 바람 한 줄기도 스며들어오지 못하니, 오직 전각 밖의 나무 그림자만이 느릿느릿 창틀 위에 내리깔려서 마치 한 폭의 희미한 수묵화같이 적막하고 드문드문했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상소에 의견을 적고 있었고, 왕흠이 소리없이 탁자 위에 찻물을 더하고 황제를 위해 먹을 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께서 한 시진동안 상소를 보셨사오니 찻물로 목을 축이시며 잠시 쉬시지요.”


황제가 ‘오’하고 한마디 하고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왕흠이 다시 말했다. 

 황상, 장정옥 대인이 대전 밖에서 알현을 청하러 왔사옵니다.”


황제가 붓을 멈추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들라 하라.”


왕흠이 이 말을 듣고 황상이 장정옥을 후히 대접하는 것을 알고 서둘러 공손하고 정중하게 장정옥에게 들어오시라 청했다. 장정옥이 전각 문으로 들어와 멀리서부터 몸을 굽히고 서둘러 황제 앞으로 나아와 반듯하게 예를 올렸다. 

 소신, 황상께 문안 여쭈옵니다.”


황제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왕흠, 어서 장 대인을 부축하여 앉으시게 하라.”


왕흠이 장정옥을 부축해 일으키고 양심전 부총관 이옥이 배나무 의자를 가지고 오니 장정옥이 비로소 앉았다. 


황제가 친절하게 말했다. 

 정옥, 그대는 이미 환갑을 넘었고, 세 황제를 모신 노신이자, 선제의 유지를 받들어 짐을 위해 나라의 일을 맡았소. 그러니 짐 앞에서 이렇게 예를 올릴 필요 없소.”


장정옥이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께서 극진히 대우해주시니 소신 감히 백성과 신하의 예를 잃을 수 없사옵니다. 선제께서 신임하셨으니 소신 더욱 근면하게 받들어 모셔야 하며, 감히 선제께서 임종 시 맡기신 뜻을 저버릴 수 없사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시간에 그대는 어찌 궁에 들어와 짐을 알현하고자 했소?”


장정옥이 몸을 숙여 공경을 표하며 말했다. 

 “황상께서 혜귀비를 봉하여 대기하시고 성을 내리신 것은 커다란 영광이오니, 소신 방금 혜귀비 친정인 대학사 고빈의 관저에서 축하주를 마시고 돌아왔사옵니다.”


황제는 ‘오’ 하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는 혜귀비의 영광이고 고 씨 일가의 영광이오. 그대도 경사를 기뻐하니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갔겠군.”


장정옥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황상의 황은이 망극하니 고 씨 관저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사옵니다.”

장정옥이 황제의 표정을 살피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래 악이태와 소신이 농담하여 말하기를,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고부(高府)의 문지방을 밟아 망가질 지경이니, 생각건대 고 대학사는 상세히 숙고하고 박학다식하니 일찌감치 명하여 자단목으로 문지방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살짝 웃으며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것 같았다. 

 자단목이 비록 유명하고 진귀하나 희한한 물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장정옥이 더욱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소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다만, 오늘 내무부 주사랑대인과 한담을 나누었는데, 랑대인이 말하기를 요 몇년 간 자단이 모자라서 광동, 광서와 운남에서도 전혀 나지 않고 남양 소국에서 조금 진상하여 바다를 건너서 오는 것이라 만 냥보다 적게 들지 않는다 하옵니다. 더욱 얻기 어려운 것은, 고 대학사 관저에서 쓰는 자단은 물에 넣어도 가라않지 않는 것이라 고 대학사가 매우 뽐내며 백관을 초대하여 함께 감상하니, 신도 견문을 넓힐 수 있었사옵니다.”


황제가 웃으며 차를 한모금 마시고 왕흠을 불러 말앴다. 

 짐이 기억하기로, 고빈 관저에서 쓰는 자단이……”

황제가 깊이 생각하는 듯 왕흠을 바라보았다. 


왕흠이 깜짝 놀라며 대답하지 못하자, 전각 귀퉁이에서 시중들고 있던 태감 이옥이 앞다투어 말했다. 

 황상께 말씀 올리옵니다. 고 대인 관저에서 쓰는 자단은 며칠 전 황상께서 상으로 내리신 것으로, 일이 많으시어 황상께서 왕 공공에게 분부하시니, 왕 공공이 소인에게 내무부에 가서 처리하도록 분부했습니다.”


왕흠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황상, 소인의 이 기억력 좀 보십시오. 새까맣게 잊어버렸사옵니다.” 

왕흠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상께서 용서해주시길 청하옵니다.”


황제가 왕흠을 보지도 않은채 말했다. 

 네가 처음 궁에 들어와 일을 하니, 대행 황제의 뒤에 남겨진 일이 많아 잊어버린 것도 있지. 일어나거라.”


왕흠이 한시름 놓으며 서둘러 사은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장정옥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 황상께서 상으로 내리신 것이니 이는 하늘만큼 큰 은혜로 당연히 백관이 모여서 함께 축하해야 할 일이옵니다.”

장정옥이 잠시 생각했다. 

 황후 책봉 이후, 신이 지금까지 황후께 문안 여쭙지 못하여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설을 앞두고 백관이 입궁하여 경하드릴 때 직접 황후마마께 문후를 여쭙고자 하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게 뭐 그리 어렵겠소? 때가 되면 짐이 그대가 황후에게 문안하도록 허락하면 될 일이오.”


장정옥이 다시금 몸을 숙여 예를 표했다. 

 신 황상의 깊은 은혜에 감사하옵니다. 황후마마는 선제께서 친히 황상의 적복진으로 내리신 분이고, 황후마마의 출신 역시 명문 관리의 집안이며 여러 대에 걸쳐 높은 벼슬을 지냈사옵니다. 부찰 씨도 또한 대청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우리 만주 팔대 성씨 중 하나이옵니다. 신이 마마의 인자하시고 관대하시며 재덕이 출중하심을 흠모하여, 황상께서 직접 마마께 문안 올리는 것을 허락해주시니, 이는 신에게 최고의 영예이옵니다.”


황제가 조금 정색했다. 

 대인의 뜻은 짐도 잘 알고 있소. 황후는 후궁의 주인이며 봉황 인장을 관리하니, 짐도 당연히 황후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사사로이 편애하지 않을 것이오.”


장정옥이 공손하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 유사 이래 후궁에 분란이 끊인 적이 없고, 총애받는 첩이 윗전을 범하는 일은 수없이 있었사옵니다. 후궁에 규율이 없는 것은 조정의 안정에 영향을 끼치옵니다.”

장정옥이 황제의 탁자에 수북이 쌓인 상소를 바라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고, 매일 일곱 시진 이상 상소를 보셨사옵니다. 황상께서는 선제의 면모를 이어받으시고, 설령 조정의 일이 급박하더라도 황상께서는 반드시 옥체를 보양하시어 절대 몸을 상하게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황제가 조금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장 대인은 짐에게 신하이자 스승이오. 훗날 짐의 황자에게도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니, 정성을 들여 가르쳐주시오.”


장정위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소신, 황상의 특별한 총애에 망극하옵니다. 시간이 늦었사오니 신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황제가 말했다. 

 이옥, 장 대인을 잘 배웅해드리거라.”


이옥이 황급히 장정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황제의 입가에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걸려서 꽤나 온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고, 붓에 먹물을 가득 묻히며 말했다. 

 왕흠, 너는 짐의 가장 가까운 총관 태감이다. 일이 크건 작건 모두 분명히 돌보며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좀 쓸모 없다 싶으면 네 일은 바로 이옥에게 넘겨버릴 것이다.”


왕흠은 심중이 서늘해져서 무릎이 조금 후들거리는 것을 애써 가누며 대답했다. 

 소인 명 받잡겠사옵니다.”


황제가 책에 집중하며 말했다. 

 가보거라. 짐의 곁에 있을 필요 없다.”


왕흠이 예예 하며 황제를 방해할까 걱정하여 발자국 소리도 나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나왔다. 양심전에서 나오자 왕흠은 목덜미가 전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리가 풀려 흰 대리석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문 앞에서 어린 태감이 황급히 달려와 부축하며 말했다. 

 총관, 어서 일어나세요. 가을 밤의 돌은 무척 차갑습니다. 그리고 낙담하시는 것도 죄가 됩니다.”


왕흠이 완강하게 어린 태감의 손을 뿌리치고 멀리서 이옥이 왕정옥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며 욕하며 어린 태감에게 말했다. 

 개자식, 감히 내 앞에서 약삭빠르게 나를 가지고 놀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황제의 목소리가 안에서 전해져 나왔다. 

 장춘궁으로 가자.”


왕흠은 후다닥 일어나 목구멍의 온 힘을 다 끌어내어 큰 소리로 외쳤다. 

 어가 행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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