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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앵이 전각에 들었을 , 태후는 마침 온돌에 앉아 시계꽃을 수놓은 베게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전각 안의 불빛은 조금 어두워서 상궁이 마침 등을 몇개 보태고 있었다. 창문턱 아래, 다섯 마리 박쥐가 배꽃을 받치고 있는 무늬가 새겨진 나무 탁자 위에는, 구리에 연꽃잎과 구슬을 새기고 은으로 상감한 향로 안에서 단향의 은은한 향기가 느릿느릿 흘러나와, 어둡고 조용한 가운데 은은하지만 끊임없이 흩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태후는 비취 구슬로 장식된 편방만을 사용하여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매듭짓고, 뒷머리에는 쌍의 점잖은 은비녀를 꽂았으며, 어떠한 진주나 비취로도 장식하지 않았다. 몸에는 둥근 () 문양이 있는 푸른 색의 비단 두루마기를 걸쳤고, 소매단에는 겹의 테를 두르고 드문드문 눈처럼 자귀나무 꽃을 수놓았으며, 담록색의 비단실과 밝은 비취로 수놓은 잎이 어우러져 맑고 시원한 가운데 화려하고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태후는 등을 곧게 펴고 목은 조금 뒤로 젖히고 권을 쥐고 마치 정신을 집중하여 청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 같았다. 


청앵은 태후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절하고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야심한 밤에 태후를 뵈러 , 쉬시는 마마를 놀라게 해드린 것은 신첩에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옵니다.”


내키는 대로 책장을 넘기는 태후의 안색이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 모호하고 혼탁하게 드러났다.

 반드시 일이 있어 것일테니 말해보거라.”


청앵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는 얼굴을 들어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께서는 용서해주시옵소서. 신 방금 경인궁에 들어가 이미 오라나랍 씨를 만나고 왔사옵니다.”


청앵은 눈을 들어 등을 놓고 있는 상궁의 떨리는 양손을 보았다. 촛불 하나가 살짝 기울어져 흐르는 촛농이 상궁의 손에 조금 떨어졌다. 태후는 오히려 담담하게 ‘오라고 말하며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갔다면 것이지. 친척이자 골육이고, 네가 궁에 들어왔으니 가서 만나보지 못할 없다. 일어나거라.”


청앵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매우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신첩은 감히 일어날 없사옵니다. 오라나랍 씨는 본래 선제께 죄를 지은 아내이고, 천첩이 아뢰지 않고 제멋대로 밤에 빠져나가 만나러 갔으니, 분명 죄가 있사옵니다.”


태후가 냉담하게 말했다. 

  것은 보고 죄를 청하러 오니 쓸데없는 짓은 아니더냐?”


태후의 목소리는 가벼웠고 속에는 깊고 찌르는 듯한 뜻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선선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유유히 불어왔고, 전각 밖의 나뭇잎이 바람소리에 따라 바스락대니, 어느덧 가을이 이미 소리없이 고요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청앵은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쓸데 없는 짓을 것은 아니옵니다. 이는 때를 막론하고 앞으로 후궁의 주인은 태후마마이시기 때문입니다.”


후궁의 주인이라?”

태후가 살짝 비웃고는, 수중의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애가는 늙었고, 황제에게는 황후가 있으니, 황후가 후궁의 주인이 아니더냐?”


청앵은 공허하게 대답했다. 

 태후께서는 황상의 어머니이시니, 후궁의 의심할 없는 웃어른이시옵니다.”


태후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애석하구나! 이곳으로 애가를 보러 왔으니 네가 곤란하게 되었구나. 이곳은 수강궁이다. 허나, 태후의 정식 거처는 자녕궁이 아니더냐.”


청앵은 곧장 알아챘다. 새로 개축한 자녕궁은 후궁의 정전이고, 수강궁은 모든 것이 적잖이 초라하고 보잘것 없었다. 청앵은 곧바로 말했다. 

 황상께서 이제 등극하시어 일이 아직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아, 살피지 못한 곳이 많게 마련이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사이가 멀고 가까운 것을 구별하게 되어 있고, 바깥 일을 주시하는 수많은 신하와 백성들의 눈이 있으니, 털끝만큼도 부주의한 점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므로 모두 서둘러 처리할 것이옵니다. 궁중에는 황상의 어머님의 일이 잠시 지체되고 있사오나, 황상의 효심만 있다면 태후께서 조금 너그러워지지 못할 것이 있겠사옵니까? 아무래도 친혈육인 것이옵니다!”


희미하게 빛나는 촛불에 비치는 가늘게 태후의 눈빛이 모호하지만 희미한 웃음기를 띠었다. 

 너의 말은 황제를 옹호할 뿐만 아니라 애가의 체면도 보전하는구나. 아무래도 너를 황제의 측복진으로 고른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다만 너의 말은 황제 자신의 뜻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것이 아니더냐?”


청앵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황상께서 조정의 일로 바쁘시어 잠시 돌보지 못하시는 것이라면, 이는 황후와 비빈들의 책임이며 응당 황상께 일깨워드려야 하는 일이옵니다.”


 “그건 그렇구나.”

태후가 청앵의 눈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설령 선제와 애가가 너를 황제의 측복진으로 내렸다 해도, 너의 출신이 귀하며, 잠저에서도 측복진 으뜸이었다. 삼황자를 낳은 씨에 비하면 나중에 격격으로 들어와 측복진이 씨도 존귀하고 영예롭다. 허나, 이제 결코 전과 같지 않구나…”


청앵은 더욱 머리를 숙이며 안색을 겸손하게 하였다. 

 신첩은 신첩이 오라나랍 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사오며, 경인궁 오라나랍 씨가 대죄를 지었고, 신첩이 때문에 수모를 겪었사오나외람되게도 황상의 곁에서 차를 올리는 자리에라도 있을 수만 있다면, 이미 하늘이 신첩을 특별히 보살피시는 것일 것이옵니다.”


태후가 고개를 들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잠시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가, 청앵을 부축하여 일어나 말하게 하라.”


상궁이 손을 뻗어 부축하려 하자 청앵은 황망히 바닥에 엎드렸다. 

 신첩 감히 그럴 없사옵니다. 신첩은 죄를 지은 몸이니 감히 일어나 태후의 말씀에 답할 없사옵니다.”


태후가 살짝 한숨을 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앵, 고모는 고모고 너는 너다. 비록 너희가 모두 오라나랍 가문의 사람이지만, 선제의 효경황후는 황후이고, 오라나랍 황후는 죄인이며, 너는 황제의 총비이니라. 각각의 관계를 분간하지 못할 만큼 애가는 어리석지 않다.”


청앵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조금 마음이 놓였다. 

 태후께서 가엾이 여겨주시니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태후가 살짝 웃었다. 

 그때는 애가가 선제께 너를 황제의 측복진으로 삼겠다 나서서 청하였으니, 당연히 이제 오라나랍 황후 때문에 아무 상관 없는 너에게 화풀이할 없다.” 

태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죽으면 죄업은 모두 흩어진다. 오라나랍 씨가 유폐 년이 지났으니 세상에 얼마 있지 못할 것이다. 애가는 나이까지 사람인데, 설마 정도도 간파하지 못하겠느냐?”


청앵은 마침내 용기내어 고개를 들고 재차 머리를 조아리며 뜨거운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태후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니 망극하옵니다.”


태후가 청앵을 흘끗 보았다. 

 아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냐? 네가 처음 궁중에 머물었는데 애가가 너를 오래 꿇게 하면 이유없이 넘겨짚는 사람들이 애가가 상관없는 네게 화풀이 한다 여길 것이 아니냐? 앞으로 네가 어찌 궁중에 발붙이고 살겠느냐?”


청앵은 멍하여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당시에는 머리에서 열이 나며 그저 죄를 청하여 혐의를 벗을 것만을 생각하고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청앵은 자리에서 굳어졌다. 태후의 눈빛은 그저 맑고 투명했고, 청앵은 스스로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상궁이 자신을 일으켜 자리에 앉히게 뿐이었다. 


태후의 눈빛이 청앵을 훑었다. 

 “새 황제의 잠저의 사람들은 너와 새 황후 부찰 그리고 격격 가리엽특 씨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한군기이지. 부찰 씨와 너의 출신은 고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구나. 허나 새 황제가 등극했고, 당연히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집안이니, 씨가 비록 잠저에서의 신분이 너에 비할 없었으나 이제 후궁에 들어왔으니 씨의 체면을 보아 많은 상을 내리지 않을 없다. 게다가 씨의 부친인 고빈은 황상이 믿고 신뢰하는 신하이다.”


청앵은 얼이 빠져있었으나 마음이 점점 명확해지자 즉시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신첩과 형님은 본래 친자매와 같고, 형님은 어질고 총명하며 단아하여 모든 면에서 신첩에게 가르침이 되니, 당연히 신첩의 위에 두셔야 것이옵니다.”


태후가 말했다.

 너를 가르치다니 억울한 일이로구나. 허나 조금 억울하더라도 네가 여기에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니된다. 어제 점심 수라에서 애가가 체면을 깎은 것은 때문이다. 앞으로 이러한 억울함은 설령 애가가 너를 억울하게 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적지 않을 것이다.”


청앵은 고개를 숙이고 간절하게 말했다. 

 태후께서 가르침을 내리시는데 신첩이 어찌 억울하겠사옵니까.”


태후가 웃는 마는 , 조금 믿지 않는 기색이 있는 같았다. 태후는 부드러운 베개에 기대어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초의 심지를 뒤적였다. 


청앵은 웃었지만 마음 속이 횅댕그렁하여 대범한 것도 아니고, 예의를 차리는 것도 아니고, 이러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마침내 어린 소녀같은 심경을 드러냈다. 

 태후마마. 신첩, 황상께서 난처해하시며, 후궁이 잠저와 같지 않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황상께서 분명 자신과 신첩에게 말씀하시어 태후께 신첩에게서 위로를 얻으시라 청한 것은, 물론 황상께서 신첩을 중시하시는 것이거니와, 신첩이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태후가 그제야 봄바람같이 따뜻하게 웃었다. 

 너는 고작 열여덟 살이다. 만약 매우 어질고 현명하다면 실제가 아니겠지.”

태후의 눈빛이 예리하게 쓸고 지나갔다. 

 너의 죄인 고모는 지나치게 어질고 현명했다.”


청앵은 오싹하여 소름이 돋는 같았다


태후가 말했다. 

 너희 젊은 부부가 마음인 것을 네가 알아준다면 제일 좋을 것이다. 당연히, 새 황제가 잠저에 있을 줄곧 너를 총애했고, 너의 다른 고모는 선제의 효경황후이다. 그러니 말이다, 애가와 황제도 너를 섭섭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청앵이 마음 속에 두고 말하지 못한 것은 감격하기도 했고 경외했기 때문이기도 하여 그저 태후를 바라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태후께서 이리 말씀해주시니, 신첩은 이미 억울하지 않사옵니다.”

청앵이 살짝 고개 숙여 절하며 말했다. 

 신첩, 태후께 간청할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청앵이라는 이름은 본래 신첩이 어린 시절에 지은 것이옵니다. 신첩은…… 이름이 매우 시의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의 적절하지 않다?”


청앵이 조금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앵화[각주:1] 분홍색이온데, 신첩의 이름이 청앵이니 시의에 맞지 않사옵니다.” 

청앵은 살며시 태후의 안색을 엿보고는 용기를 냈다. 

 더구나……신첩은 오라나랍 가문의 여식이나, 애신각라의 며느리이니, 태후께서 신첩이 과거를 잘라내고 새로운 복을 얻도록 이름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하옵나이다.”


태후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네가 그 생각하느냐?”


청앵이 간절하게 태후를 바라보았다. 

 만약 태후께서 은총을 내려주신다면……”


태후가 잠시 뺨을 고이고 있다가 망설이며 말했다. 

 네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청앵이 잠시 멍하여 자기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정이 돈독하고 서로 간의 마음이 일평생을 가는 것이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태후가 조금 놀라 자못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옥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참 , 태후가 조용히 말했다. 

 여의가 어떠하냐?”


여의?” 

청앵이 천천히 생각하더니, 혀끝에 걸리는 말이 나무마다 꽃과 같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 고요한 이름이라 좋았다. 

 “‘모든 일마다 뜻대로 되라(事事如意)’ 뜻의 여의(如意)이옵니까?”


태후가 망설이는 청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여의(如意) 너무 평범하지. 애가가 고른 것은뛰어난 덕행(懿德)’이라 때의 아름다울 ()이니라. 뜻이 좋고 정숙하지. <후한서> 이르기를, ‘임처장[각주:2] 미덕은 예의에 어긋나는 곳에는 거하지 않는 것이다(林懿虑德,非礼不处).’ 사람의 그림자가 쌍을 이루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고요한 것만 못하고, 고요한 것만이 비로소 좋은 것이다.”


청앵은 기뻤다. 

 망극하옵니다. 태후마마.”

청앵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하온데 신첩 모르겠는 것이 있사옵니다. ()자가 매우 좋사오나 어찌하여 여의(如懿) 것이옵니까?”


깊이 생각에 잠긴 태후의 미간이 유리 기와의 금빛 꼭대기에 오랫동안 옅게 엉겨있는 흐린 먹구름과 같았으며조금 감개무량한 보였다. 

 너는 아직 젊으니, 세상에서 원만하여 아름다운 것은 무척 얻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아름다움과 같다(如懿)’ 괜찮은 이름이지.”


청앵은 마음에 조금 경외감이 들어서 마치 크나큰 깨우침을 얻은 같아 순간 정신이 또렷해졌다. 

 태후마마의 뜻은 완벽하면서도 구하기 어렵고, 차선을 찾을 없으니 더욱 만족하옵니다.” 

청앵은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마마의 가르침을 신첩 명심하겠나이다.”


태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옅은 미소를 띄었다. 

 그래. 밤이 깊으니 너도 어서 돌아가서 쉬거라. 오늘은 새 황제가 등극한 날이니, 선제를 위해 상심했던 나날들도 이제 천천히 새 황제와 너희들의 경사를 맞이해야겠지.”


청앵이 일어나 하직인사를 고했다. 태후는 청앵이 시녀의 손을 잡고 나가는 것을 보며 천천히 태연한 미소를 드러냈다. 상궁이 태후에게 수수한 비단 두루마기를 걸쳐주며 조용히 말했다. 

 궁을 옮기는 일은 태후께서 황후께 분부하시면 그만이고, 아니면 소주가 이제 황상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니 소주가 말씀 올리면 일이옵니다. 청앵 소주…… 아니, 여의 소주의 신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걸맞지 않사옵니다.”


태후는 책을 집으며 낮게 읊조렸. 

 너는 정녕 여의가 총명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이전에는 가세가 찬란하였고, 사랑받아 버릇이 없는 아가씨 성격이어서 삼갈 몰랐지. 오라나랍 씨가 연금되어 지금에 이르러 세태가 야박해지니 아이가 아직도 둥글어졌더냐? 설령 아이가 오늘 오라나랍 씨를 만나고 감히 애가에게 왔지만, 이는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지.”


상궁이 주저하며 말했다. 

 태후마마의 말씀은, 그분이 궁중에 사람의 눈이 많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일 훗날 경인궁에 것이 들통나 재난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여 태후께 죄를 청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태후가 말했다. 

 궁중에서 애가를 제외하고 누가 제일 오라나랍 씨를 염두에 두고 있겠느냐? 애가가 화를 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만인 것이지. 게다가 아이가 일일이 변명하고 애가에게 이름을 내려달라 칭하여 거듭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다만 애신각라의 며느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애가의 속의 뜻을 풀고, 더불어 아이 자신이 의탁할 자리를 찾고자 함이니라.”


상궁이 탄식하며 말했다. 

 당시 오라나랍 씨가 그토록 태후마마를 능욕했는데, 정도 속의 뜻을 잠시 풀지 못하고 있대도 어떻단 말이옵니까?”


 “오해를 풀고 말고를 막론하고 아이가 구하고자 것은 안정이다. 궁중에 황후가 있고, 새로 총애받아 권력을 잡은 고희월이 있으니 아이의 나날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애가가 아이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정말로 걸음 걸음도 내딛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비로소 있는 방법 없는 방법을 다하여 황제 앞에서 궁을 옮기는 일을 꺼낼 것이고, 역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내며 실수를 용납치 않을 것이다. 황후는 이미 지위를 가지고 있고 황자도 있다. 고희월은 총애와 미모가 있으니, 그들은 무엇도 애가에게 구하여 얻을 것이 없으니 응당 애쓰지도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상궁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 

 그래서 태후께서 여의 소주께 관용을 베푸신 것이로군요.”


태후가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을 없지. 아이가 해결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야.”






둘째 새벽이 밝아오니 맑고 청명한 날씨였다. 부찰 씨가 모든 비빈들을 데리고 수강궁으로 문안을 청하러 왔다. 비록 아직 명분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부찰 씨가 황후라는 것은 절대 이견이 없는 것이었고, 모든 비빈들은 잠저에서의 신분에 따라 순서대로 줄지어 들어왔다. 


태후가 보니 날씨가 맑고 화창하며 공기가 상쾌하여, 기분도 좋아서 여러 태비들을 주변에 앉게 하고는 함께 한담을 나누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이전에는 우리가 비빈이어서 태후와 태비들께 문안을 올렸지. 깜짝할 사이에 우리가 태후와 태비가 되어 집안에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있으니 모두 가냘픈 꽃송이들 같구나.”


복진이 바른 말을 잘하여 먼저 웃으며 말을 꺼냈다. 

 태후께서는 제일 고운 모란꽃 같으시니, 저희 천방지축 젊은 것들은 것이 되옵니다.”


태비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전에는 복진이 제일 온유하고 얌전했는데, 이제 보니 활발하기도 하군.”


복진이 웃으며 살짝 고개 숙여 절했다. 

 이전에 왕부에서 시중들 때에는 밖에 나오는 일이 드물어 세상 물정에 견문이 적었사오니 자연히 조롱박과 같이 말솜씨가 없었사옵니다.”


태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디를 물었을 뿐인데 월복진은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니, 역시 태후께서 가르치셨구나.”


태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모두 앉거라.”


사람들이 지위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마침 사람들을 살뜰히 살피려 마디를 꺼내려는데, 태후의 심복 태감 공공이 들어와 멀리서 손을 아래로 드리우고 층계 아래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태후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어찌 그러냐?”


공공이 앞으로 나아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태후마마께 말씀 올리옵니다. 경인궁 마마께서 운명했사옵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여의는 마음이 떨려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기울어져 하마터면 엎지를뻔했다. 예심이 눈치채고 재빨리 여의를 대신하여 찻잔을 붙잡았다. 


여의 곁에 있던 희월이 곧바로 보고서는 손을 뻗어 귓가에 꽂은 진주로 휘감은 금비녀를 매만지며 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집안 사람이라 마음이 이어져 있는지, 청앵 아우님은 방금 말을 듣고 상심해버렸나보군.”


태후는 아랑곳 않고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언제 일인 것이냐?”


공공이 대답했다. 

 어젯밤 심장발작으로 죽었사옵니다. 궁녀가 들여보낸 아침식사가 그대로인 것을 보고, 일이 일어난 것을 발견했사옵니다. 보고하러 궁녀가 말하기를 경인궁 마마의 몸은 굳어졌지만 눈만은 크게 뜨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하옵니다.”


여의는 양손이 덜덜 떨려 꼼짝달싹 못하고 다만 비단 손수건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며, 온몸의 힘을 다해 사망 소식으로 인한 전율에 저항했다. 어젯밤이라면 여의가 다녀온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고모는 정말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고모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여의에게 보여주고 모든 것을 신신당부하며 부탁한 것이었다. 


태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혐오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정녕 운수 사납게!”


태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알아서 처리하거라. 황제가 등극했으니 이런 일은 크게 알릴 필요 없다.”

태후는 여의를 보았다. 

 마침 여의 너도 여기 있구나. 고모가 세상을 떠났으니 너도 경인궁에 가서 예를 올리거라.”


여의가 황급히 의자를 짚고 일어나 애써 꼿꼿이 서서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신첩은 수강궁만을 , 경인궁은 알지 못하옵니다. 오라나랍 씨가 비록 신첩의 고모이나, 무엇보다도 대청의 죄인이오니 신첩은 사사로운 일로 인하여 나라의 일을 잊을 없사옵니다. 하오니 예를 올리는 일에 있어 신첩이 명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태후가 크게 탄식했다. 

 네가 공과 사가 분명하구나. 됐다. 너는 황제 곁의 사람이고 이제 궁에 들어왔으니 이런 불길한 일에 가는 것은 적당하지 않겠구나.”


랑화가 말을 듣고 용기내어 말을 꺼냈다. 

 감히 어마마마께 여쭙사온대, 어마마마께서는 어찌 청앵 아우를 여의라 바꿔 부르시옵니까?”


태후가 살며시 웃었다. 

 그것은 애가가 어젯밤 새로 이름을 지어 내린 것이다. 오라나랍 여의, 모든 일이 고요하고 되란 뜻이다.”


랑화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태후께서 여의 아우를 몹시 아끼시는군요.”


태후가 살짝 태도를 바로잡으며 정색했다. 

 오늘은 황제가 등극하고 너희 모두가 수강궁에 문안 첫날이다. 애가가 마침 몇가지 분부할 것이 있다. 황상은 젊고, 궁중의 비빈은 너희 몇몇뿐이다. 앞으로 사람이 얼마나 많건 적건 간에 애가는 더러운 것은 보지 못하니 너희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되,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사람들이 태후의 인자하고 선한 얼굴이 이토록 점잖고 엄숙하여 신신당부하는 것을 보고 감히 소홀히 여기지 못하여 황망히 일어나 공손히 대답했다. 

 태후마마의 가르침이 망극하옵니다. 신첩들은 삼가 명심하겠나이다.”


여의는 곧장 수강궁에서 나와 여전히 자신의 마음 속을 가득 채운 말할 없이 고통스러운 떨림을 느끼고는 죽을 힘을 다해 참지 않을 없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정원에 가득한 맑은 가을 빛의 국화가 오색 찬란하여 수놓은 비단같이 활짝 피어있고, 마치 가을 날의 석양 같은 붉은 단풍나무가 검붉게 비추니, 마치 일종의 아름다운 경치가 다시 내려온 같았다. 그러나 비단같이 아름다운 가을빛의 뒤에는 고모의 피눈물같은 인생의 뒤에 남겨진 창백한 죽음이 있었다. 


이별을 분명히 알면서도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을 제외하고 고모가 구중 궁궐 후궁에서 살았던 일생을 누가 기억하고 슬퍼해주겠는가. 깊은 궁중의 삶과 죽음은 가을 나뭇가지 끝에서 말라 비틀어져 떨어지는 낙엽 잎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일생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여의가 이렇게 생각하자 참지 못하고 소스라쳤다. 예심이 놀라서 서둘러 여의의 손을 붙잡았다. 

 소주, 제발 어떤 표정도 보여서는 아니되옵니다.”


여의가 예심의 손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온기에서 견딜 있는 약간의 용기를 얻으려는 것처럼 예심의 손을 살며시 잡고 작은 목소리로 명했다. 

 궁으로 돌아가자. 심아, 궁으로 돌아가야겠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희월의 목소리가 타는 듯이 붉은 단풍나무 뒤에서 돌아 들려와 귓전을 울렸다. 

 아우님은 독하기도 하지. 태후께 이름을 받고, 고모의 장례에도 예를 올리러 가지 않겠다 하니, 아우님은 깨끗이 내팽개쳐버리시는군.”


여의는 마음을 바늘로 찔리는 같았으나 억지로 참고 웃으며 뒤돌아보았다. 

 보아하니 형님께서 이리 마음을 써주시는군요. 형님께서 잠저에 시집오실 때에도 고모님을 알현하러 가지 않으셨나요. 이제 형님도 책임지고 결정할 있으니, 형님께서 저와 함께 경인궁에 가서 예를 올리고 효심을 다하시는 어떻겠어요.” 

말을 끝내고 여의는 손을 내밀어 희월을 잡아 끌었다. 


희월은 재빨리 손을 뿌리치며 냉소했다. 

 아우님의 당고모이니 아우님이나 생각하면 됐지. 구태여 나를 끌고 필요있나. 나는 황가의 며느리이지 오라나랍 가문의 여식이 아닐세.”


여의의 얼굴에 한줄기 고요한 웃음기가 어렸다. 

 그래요. 형님과 제가 언제 같은 적이 있었나요. 친정은 다르지만 황가의 며느리이죠. 여기서 살며 불길한 말을 하고, 훗날 세상을 떠나도 여기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일이니,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죠?”


희월이 날렵한 턱을 들어올렸다. 

 아우님도 약삭빠르게 계산했지. 다만 아우님도 기억해두시게. 아우님이 설령 모두 깨끗이 내버렸다고 해도 성은 오라나랍 씨가 아니던가. 이건 누구도 바꿀 없는 것이야. 태후께서 성씨를 들으시면 치가 떨리게 싫어하실텐데 깨끗이 없애지 못해 아쉽겠네.”


여의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형님이 이토록 태후의 뜻을 넘겨짚기 좋아하시니, 아우와 함께 수강궁에 다시 가서 태후의 뜻을 여쭤보는 어때요?”


희월이 능선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지금 윗전마마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러 가야 하니 자네와 잡담할 시간이 없네.”

희월은 시녀의 손을 잡았다. 

 말심, 가자!”


여의는 희월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다리에 힘이 조금 풀려 발바닥으로 화분 아래를 힘껏 디뎠으나 조금 불안정했다. 예심과 아약이 서둘러 근처의 징서정(澄瑞亭)으로 여의를 부축해 데려가 앉혔다. 여의가 푸른 빛의 난간에 기대자 눈물이 속눈썹에 맺혔다가 미끌어져 떨어졌다. 여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심, 고모께서 나를 책망하실까?”


예심이 여의의 등을 문지르며 작게 말했다. 

 소주께서 하신 일은 필시 경인궁 마마께서 생각하신 바이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소주께서 경인궁 마마의 마음을 저버리시는 것이옵니다.”


여의는 수많은 눈물이 앞을 가려 흐릿한 눈을 잠시 감고 고요하게 말했다.  

  말이 뜻과 같구나.”


아약은 옆에서 시중들며 여의가 예심에게 말하고 묻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몰래 이를 악물고 얼굴에 어떤 표정도 감히 떠올리지 못했다. 


여의가 손을 들어올렸다. 

 너희는 정자 밖에 있거라. 조용히 있고 싶구나.”


아약과 예심이 서둘러 물러나 정자 밖으로 수십 걸음 물러났다. 아약은 뒷쪽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통로 쪽으로 밀쳐졌다. 예심이 주의산만하여 하마터면 가의 꽃가지에 눈을 긁힐 하여 서둘러 멈추어 서서 말했다. 

 아약 언니.”


아약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가는 길을 조심하지 않았으면서 나를 책망하는 것이냐?”


예심이 급히 눈웃음치며 말했다. 

 어떻게 그러겠어요? 저는 그저 아침에 이슬이 내려서 길이 미끄러우니 언니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하려고 했죠.”


아약이 미간을 찌푸렸다. 

  행동이 굼뜬 것이지 너같은 아니?” 

아약은 모질게 바라보았다. 

 소주 앞에서 똑똑한 척은 했지만 어젯밤 소주를 모시고 경인궁에 가는 모험을 나라고. 소주께서 묻는 말씀마다 네게 물으시니, 이런 위험한 일은 네가 시중든 같구나.”


예심이 황급히 몸을 뻗으며 웃었다. 

 제가 소주를 모시는 것이 언니가 모시는 것만큼 가깝고 충직하지 못하니 소주께서 자꾸 제게 물으시는 거죠. 언니 생각해봐요, 언니는 소주 가까이에서 시중드는 사람이니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소주와 같아서 소주께서 구태여 다시 묻지 않으시는 거예요. 저는 굼뜨고 우둔하니 소주께서 일일이 물으시는거죠.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바깥의 사람들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 소주께서 비로소 마음을 놓으시는 것이고요.”


아약이 그제서야 조금 화를 풀고는 손을 들어 금실로 팔찌를 보여주었다. 

  팔찌 봐봐. 소주께서 내게 새로 상을 내리신 것이다. 네가 소주를 많이 모신다고 여기지 말거라. 사이가 가깝고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지.”


예심이 예예 하고 대답했다. 사람이 근처를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정자에 있던 여의가 일어서자 서둘러 돌아가 시중을 들었다. 


여의가 물었다. 

 지금 황상은 어디에 계시느냐?”


아약이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지금 황상께서는 조회를 마치시고 대신들의 알현 시간도 지나서, 아마도 양심전에서 책을 보고 계실 것이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점심을 준비하거라. 황상을 뵈러 가야겠다.”


양심전 안에 황제의 작은 서재는 서난각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청아하고 엄숙하며 경건하게 배치되어, 창은 밝고 책상은 깨끗했다. 안에는 선반을 가득 채운 책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책들은 모두 황제가 평소에 즐겨 읽는 것들이었다. 동쪽 벽에는 십여 개의 벽병()[각주:3] 시원시원하게 걸려있고, , 고사(高士)[각주:4], 팔선(八仙)[각주:5], 송죽매, 갈대와 기러기, 꽃과 과일이 있는 꺾은 나뭇가지, , 모란 등의 도안이 그려져 있었으며, 산뜻하고 고상하며 부드럽고 친근감이 드는 연두빛이 맑고 시원하여 눈길을 끌었다. 


황제 곁의 대전내관 왕흠이 발을 걷어 여의가 들어오게 했다. 이제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 달빛같이 실로 여덟 무리의 용을 수놓은 두루마기를 입은 황제는 한가하게 권을 손에 들고, 눈처럼 새하얀 종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맑고 깨끗한 옅은 금빛의 가을 햇빛을 온몸에 받고 있었다. 번지는 햇빛이 깨끗하고 따뜻하게 온몸의 윤곽을 드러냈다. 자주빛 구리로 상감한 용무늬 법랑 향로 안에서는 호박 같은 용연향이 타고 있었다. 정돈된 안에는 자욱하게 용연향의 깊고 편안하며 짙게 가라앉은 향이 유유하게 모락모락 피어올라 학자의 가풍이 흘러넘쳐서 마치 담백한 필치로 그린 폭의 사의(写意)화[각주:6] 같았다. 


황제는 여의가 달빛처럼 새하얀 비단에 수많은 꽃들로 날아드는 나비를 수놓은 적삼(衬衣)[각주:7] 입은 것을 보았다달빛처럼 수수한 꽃무늬 비단 위에 진홍색, 분홍색, 벽록색, 초록색, 주황색, 황토색, 옅은 진홍색, 남색,  진회색, 옅은 먹색, 유백색 등의 십여 색의 실로 화초와 나비 문양이 새겨져 수수하고 담백하면서도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황제가 몸을 일으켜 웃으며 맞이했다. 

 그대가 마침 짐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색을 입었구나.”


여의가 웃으며 예를 올렸다. 

 황상의 독서를 방해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 맞았네요.”


황제는 책을 내려놓고 여의를 향해 손짓했다. 

 와서 앉아라.”

여의가 침상 곁에 앉는 것을 보고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짐이 등극하여 조정의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그대들을 보러 시간이 계속 없었다. 지금 그대가 왔으니 오히려 좋구나.”

황제가 냄새를 맡으며 여의의 뒤에서 받쳐 들고 있는 붉은 찬합을 보았다. 

 무슨 맛있는 것을 가져왔느냐, 냄새가 좋구나!”


여의가 고개를 들고 성의를 보여 여러가지를 꺼낸 것은 당증소락(糖蒸酥酪)[각주:8], 송자양(松子穰)[각주:9], 연분계당고(藕粉桂糖)[각주:10] 장미산사나무 열매로 속을 채운 산약고(药糕)[각주:11], 가지 간식이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짐이 마침 조금 배가 고팠는데, 짐과 함께 조금 들자꾸나.”


여의가 은젓가락을 꺼내 황제에게 건네며 웃었다. 

 신첩이 본래 가지 간식을 준비하려 했는데 궁중에서 이미 가지를 만들어 놓았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연분계당고는 태후께서 상으로 내리시며 황상께서 즐겨 드시던 것이라 말씀하셨사옵니다. 어제 오늘 수강궁에 가실 시간이 없으셔서 신첩에게 상으로 내리신 것이니 신첩이 마침 남의 것으로 인심을 쓰게 되었사옵니다.”


황제가 하나 집어서 천천히 맛을 보았다. 

 듣자하니 어마마마께서 그대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다지?”


여의라고 하옵니다. 태후께서 말씀하시기를 () 아름다우며 고요하다 하옵니다. ‘임처장은 덕이 있고 아름다운 곳에 거하며, 예의에 어긋난 곳에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여의라 하옵니다.”


황제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짐이 어마마마의 곁에 몇년이나 있었지만 어마마마의 성격은 아직도 모르겠다. 어마마마께서 그대의 이름을 바꿔주신 의미는 아마도 그대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일 것이다.”

황제는 여의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 아침에 짐이 경인궁 황후의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대가 가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태후가 민감하게 반응하실까 걱정되어 뭐라 말하지 않았지.”


여의가 일순 눈썹을 내리깔았다. 

 신첩 알고 있사옵고, 가지 않았사옵니다. 갔다면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었을 것이고, 신첩은 애신각라 가문의 사람이니 황상께 시비를 보태서는 아니되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친히 산약고를 여의에게 건넸다. 

  산약고가 새콤달콤한 것이 그대가 좋아할 맛이다.”


여의가 감사하다 말하고는 주위를 훑어보았다. 

 황상께서는 벽병을 좋아하시죠. 본래 사계절에 맞추어 꽃을 꽂고, 사람이 꽃의 짝을 이루어, 맑은 향을 침상에 가득 받아, 누우면 정신이 상쾌하고 기운이 빠르게 생동하옵니다. 다만, 지금 용연향을 피웠으니 반대로 향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화초를 꽂지 않는 것이 좋사옵니다.”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짐도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비워두고 한가하게 감상하며 노는 것도 좋지.”


여의가 일어나 그중 병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병의 도안이 매우 좋사옵니다. 다른 길상문양과 다르게 어떤 고사를 떠올리게 해요.”


 “노래자 채의오친(莱子彩衣娱亲). 노래자(莱子) 일흔에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려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그대도 이것을 잊었는가?”


여의가 서가를 잠시 바라보다가 서류를 올려놓는 황제의 탁자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또다시 웃었다. 

 황상께서 평소에 보시던 <이십사효(二十四孝)> 어찌하여 지금은 곁에 두지 않으시옵니까?”


황제가 얼떨결에 말했다. 

 아마 오가는 길에 어딘가 두었을 것인데, 조금 있다가 왕흠을 시켜 찾아보라 해야겠다.”


여의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했다. 

 황상, 신첩이 기억하기로 <이십사효> 1편이 민손(闵损) 홑옷을 입고서도 부모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던지요?”


황제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대 오늘 어찌된 것인가? <이십사효> 1편은 임금의 효가 하늘을 감동시킨 이야기이고, 2편이 민자(闵子) 홑옷을 입고 부모를 모신 이야기이지.”


여의가 태도를 바로잡고 말했다. 

 황상께서 효도를 마음 속에 품으셨으니, 당연히 아주 명확하게 기억하시고 계시옵지요. <이십사효> 1편은 임금의 효가 하늘을 감동시킨 것을 논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결국 모든 선행 중에서 효가 첫째이며, 또한 군왕이 중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일이 효를 널리 알리는 것이라는 것을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이제 등극하시어 모든 일이 어수선하니 후궁에 걸음하시어 돌볼 틈이 없으시지요.”

여의는 잠시 망설였다. 

 태후께서 아직 수강궁에 머물고 계시옵니다.”


황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어라? 내무부에서 어마마마께 자녕궁으로 옮기시라 재차 삼차 청하지 않았단 말이냐? 어째서 아직도 수강궁에 계시단 말이냐?”


여의가 살짝 미소지었다. 

 신첩이 보기에 내무부가 일처리에 소홀한 것이 아니오라, 태후께서 일부러 황상께 효도할 기회를 남겨두신 같사옵니다.”


황제는 잠시 말이 없다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약간 풀어진 기색이 비쳤다. 

 짐도 황태후를 자녕궁으로 옮기시게 생각이었다. 허나……”

여의가 황제의 의중을 깨닫고 안의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전각에 황제와 여의 사람만 남자,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마음 속에 아직 걸리는 것이 있다.” 

황제의 조금은 낙담한 듯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짐의 친어머님은……”


여의는 황제를 바라보다가 황제의 손을 붙잡고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결연히 말했다. 

 황상의 친어머님은 오직, 지금 수강궁에 계시며, 황상께서 자녕궁으로 옮기라 말씀하시길 기다리시는 태후뿐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은 깊은 물처럼 고요했다. 

 황태후는 오랫동안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조정에서도 궁중에서도 모두 권세를 독차지 했다. 만약 황태후가 정궁인 자녕궁에 있게 된다면, 짐은 황태후가 혹시라도……”


 “설령 그렇게 되고 아니고는, 자녕궁으로 가고 안가고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황상의 기백과 능력에 좌우되는 것이옵니다. 황상께서는 마음 속에 천하를 품고 계시옵고, 가슴 속에는 수천 수만의 책략을 가지고 계시온대, 어찌 보잘것 없는 여인 하나를 두려워하시옵니까.”

여의는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녕궁, 그곳은 단지 황태후의 정식 거처 곳일 뿐이옵니다.” 

여의는 황제의 손을 다시 잡았다. 차가운 여의의 손바닥이 뜨겁고 축축한 황제의 손바닥을 위로했다. 

 황상, 태후의 거처를 부당하게 하옵시면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이 황상을 손가락질 것이옵니다. 태후를 자녕궁으로 들여보내시면, 황상께서 천하로 하여금 태후를 모시며 편안히 천수를 누리시라 청하는 것이라 천하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가 잠시 , 다시 웃음기를 띠었다. 

 그렇다면 짐은 그대가 말한 것처럼, 마음을 다해 섬기고 공경하여 태후께서 몸과 마음을 보양하여 천수를 누리고 편안히 쉬시도록 청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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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 이제 (벌써) 제 밑천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가는 임기응변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단 한 장의 분량이 길어지기 시작했고요, 수많은 성어와 고사들이 등장하는데 불행히도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겠죠. 여의전은 견환전보다는 한시나 고사가 적다는데도요... ㅇ<-< 

2. 앞서 올린 글에 오타/오역/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게 좀 있는데 아직 5-6장은 수정을 못하고 있습니다만, 짬내서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3. 업데이트를 목이 긴 동물처럼 (저도...) 기다리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1주 1장' 등의 업로드 약속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따로 본업이 있는 닝겐이기도 하고, 제가 약속을 해서 추진력(?)을 얻기보다는 의무감을 더 많이 가지는 타입이라 즐겁게 오래 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즐겨 봐주시는 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완주해보려 합니다.  

4. 음식 이름 같은 것은 한자를 긁어서 구글에 돌려보시면 대강 이미지가 나옵니다. 반도의 떡이 대륙의 떡이 아니고, 대륙의 죽이 반도의 죽이 아니니, 부디 상상에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5. 오늘 <여의전> 티저를 보았습니다. 저우쉰 황후께서 "본궁은 황상께서 친히 책봉하신 황후니라! (本宫是皇上亲封皇后!)"라고 일갈하시는데 크으— 덜덜 떨리네요. 어느 귀비마마께서 개기셨는지, 뼈도 못 추릴 것 같은데...... 본방송 방영일이 한 달 남짓 남은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합니다. 음- 지금까지 번역 올린 것은 한- 방송 2회 분량이나 되려나요ㅎㅎ 







  1. [역자주] 벚꽃. [본문으로]
  2. [역자주] (시간 상 일일이 말의 유래를 찾아 싣지 못했습니다만, 임처장은 (옛날)사람 이름이라 보시면 이해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문으로]
  3. [역자주] 벽병(壁瓶)은 명대 만력제 때 고안된 반쪽짜리 호리병 모양의 병으로, 한쪽 면이 평평하게 잘려있고 대부분 구멍이 있어서 벽이나 가마에 걸어둘 수 있다. [본문으로]
  4. [역자주] 뜻이 크고 인격이 높은 선비. [본문으로]
  5. [역자주] 중국 고대 신화에 나오는 여덟 신선. [본문으로]
  6. [역자주] 중국화의 전통 화법 중 하나로, 정교함을 추구하기보다 간단한 선과 먹색, 또는 간단한 채색으로 사람의 표정이나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본문으로]
  7. 적삼/츤의(衬衣): 청대 여성용 츤의는 둥근 깃, 오른쪽으로 여미는 옷깃, 꼰 옷섶(坎肩: 일종의 조끼 같은 것이라 설명하는 곳도 있습니다만 잘 모르겠네요…), 곧은 몸판, 넓은 소매, (옆)트임없음(아마도…;;;;), 다섯개의 단추가 달린 긴 적삼 형태의 옷으로, 소매의 형태는 펼쳐진 형태(아마도;;;)(소매 길이는 팔목까지), 넓은 반소매 (짧고 널찍한 소매에 두 겹의 소맷동을 닮) 두 종류이며, 소맷단 안에는 별도의 장식용 소맷동을 달았다. 츤의는 부녀자들이 일상적으로 입었던 일종의 평상복이다. 융수, 납사, 평금(모두 중국 전통 자수 기법의 일종), 문직(꽃무늬를 넣어 짜는 옷감) 등으로 만들었다. 전신에 테두리 장식을 둘렀으며, 청대 말기에는 테두리 장식이 점점 더 늘어났다. 보통 때에는 츤의에 조끼를 겹쳐 입었고, 가을, 겨울에는 가죽이나 솜으로 된 것을 덧입었다. (각주 번역이 부실해서 죄송합니다. 이정도가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네요;;;) [본문으로]
  8. [역자주] 우유와 설탕을 끓여 만든 연유 푸딩 비슷한 것으로 추정. [본문으로]
  9. [역자주] 잣을 주재료로 사용한 과자로 추정. [본문으로]
  10. [역자주] 연근가루에 설탕과 계피를 넣어 만든 떡. [본문으로]
  11. [역자주]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장미산사나무 열매로 속을 채운 고구마 떡.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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