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는 연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비로소 연심의 세심하게 칠한 연지분 아래로 두 눈꺼풀이 살짝 부어 있는 것이 보였으니 울었던 것 같았다. 여의는 마음속으로 알아차렸다. 연심은 평소에 비록 좀 오만 방자했지만, 지금은 가련하여 자기도 모르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 “정말 고맙구나.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구나. 어서 돌아가 보아라.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 아약이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 “비 좀 맞으면 어떤가요. 이제 연심 언니와 우리는 같지 않은데요. 비 맞으면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어요.” 여의는 작은 소리로 꾸짖어 막았다. "아약, 궁으로 돌아가자." 아약이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려 방글방글 웃으며 연심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황제는 몸을 일으켜 동난각으로 갔다. "짐이 항상 보던 를 가지고 오거라. 가서 책을 잠깐 볼 것이다. 그대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오면 다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여의가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예.” 아약도 여의에게 뜨거운 물 한 대야를 따라주었다. 서난각의 등불이 환하여, 아약의 기쁨에 겨운 얼굴이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니 마치 복숭아 꽃 같았다. 여의가 웃으며 아약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얼른 희희낙락한 얼굴을 감추거라. 황상께서 보시면 네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덤벙댄다고 생각하실 게야.” 아약은 얼굴을 더듬으며 부끄러워했다. "안 숨겨져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하지만 기억하거라. 네 아비가 심혈을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전도유망할 것이고, 너도 ..
이날 밤 영화궁은 결코 평안하지 못했으니, 하룻밤을 꼬박 야단이 났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오로지 태의들이 들어가고 또 들어가는 것이 보일 뿐, 다시 나오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육궁의 뭇 사람들이 놀라 마지않았으니, 암암리에 캐물어 보았지만 어느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화궁의 등불이 하룻밤 내내 밝혀져 있었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벽이 밝아왔을 때도 여전히 영화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 여의는 장춘궁에 문안을 올리러 가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몸치장하고는 가마를 대령시켜 밖으로 향했다. 관례에 따르면 비빈들이 외출할 때에는 항상 가마를 대령해야 했으나, 지금은 초여름날의 이른 새..
영황이 온 이래로 여의는 점차 자신의 삶에서 차이를 맛보았다. 아이가 있으니 새로이 마음을 두고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었다. 이전에는 임금의 은혜가 오래 머물기만을 바랐다면, 이제는 오로지 영황에게 몰두하였고, 본래 조용했던 해란 역시 기꺼이 자주 와서 아이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영황은 매일 오경에 일어나 공부하러 갔고, 여의도 항상 궁문 밖까지 영황을 배웅했다. 저녁 식사 시간 무렵에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 아래에서 영황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매일 저녁 식사 후의 시간은 모자가 가장 화목하게 보내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해란도 와서 함께 꽃모양을 본떠서 자수를 놓고, 때로는 여의 혼자 책을 들고 읽기도 했으며, 영황도 못다한 말이 있으면 여의의 무릎에서 뒹굴며 하루 동안 보고 들은 일을 큰일이든 ..
혜귀비는 황제를 모시고 장춘궁의 대문을 나와, 황제의 의장이 줄이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잔뜩 성내며 말했다. “황상께 그렇게 여러 번 부탁드려서 이제 성공이 눈앞에 있었는데, 한비가 맡게 될 줄이야!” 말심이 서둘러 말렸다. “소주, 고정하시옵소서.” 혜귀비가 성내며 말했다. “네가 황상께서 두 달 동안 한비를 본체만체 하셨다 하지 않았더냐. 어째서 오늘 한비를 떠올리고 불러들이신 것이야?” 말심이 귀비의 손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아마도 지위가 높으면서 아이가 없는 분은 소주와 한비뿐이오니, 본래는 한비를 불러 모양새를 갖추시려 한 것이오나, 설마 대황자 그 박복한 아이가......” 말심은 무심결에 말을 내뱉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혜귀비는 입술을 삐죽이며 ..
이날 밤의 이변은 순식간에 궁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옥연은 해란을 보았을 때 참지못하고 속닥거리며 물었다. “어젯밤 황상께서 자네 처소에 오셨을 때 화가 많이 나셨든?” 해란은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가귀인도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황상을 뵈올 때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데 어디 감히 황상께서 어떤 표정이신지 보았겠어요?” 옥연이 수상쩍게 웃었다. “그럼 황상께서 자네와 이야기하면서 답답함을 푸셨는가? 자네도 괜찮은 셈이지. 연희궁에서 지내게 된 이래로 황상께서 한비를 보러 가시는 김에 몇번 자네를 보러 가시니.” 해란의 얼굴빛은 겸손하고 조심스러웠으니, 지난번 굴욕을 당한 후 두려워하며 불안하여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형님은 아직도 저를 모르시나요? 말주변이 서툴고 모자라니 황상께서도 저와 ..
해질 무렵 가랑비가 내리고 저녁이 되어 날이 개자, 초승달에 낀 어슴푸레한 달무리가 하늘가에 걸려있으니, 어릿한 상이 마치 눈물에 잠긴 듯 축축한 안개가 뒤덮여있었다. 여의는 졸음을 참으며 은비녀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을 뒤적여 밝히고는 망사 창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생긴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보니 떨어지는 맑은 물 같은 한 무리 유유하게 빛나는 그림자였다. 정원의 몇그루 복숭아나무는 점점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니 고개를 내밀고 싶지 않은 듯 곱고 가냘픈 모습이 온 궁중에 봄기운이 다가오는 기쁨을 물들였다. 아약은 하품을 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소주, 좀 더 기다려보셔요. 오늘 상소가 많아서 황상께서 조금 늦으시나보옵니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새해를 보내고 곧 정월 대보름이 되니, 이는 건륭 원년의 길일이므로 하루 하루 모두 떠들썩하게 보내며 갖가지 놀이와 곡예, 춤과 노래가 어느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다. 이어지는 청음각의 희곡(戏曲)도 흐르는 물과 같이 궁궐 후원의 붉은 담장 아래에서, 먹빛 벽돌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궁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뜰의 정자와 누각의 옥난간 위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때에야 비로소 궁중에서의 나날이, 황가의 부귀영화와 바깥의 사람들이 전해 듣던 겹겹이 쌓인 수놓은 비단과 황금빛과 푸른빛이 휘황찬란함 만이 아니라, 남송의 희곡과 가극에서 말하는 하늘 나라와 인간 세상의 흐르는 물과 떨어지는 꽃이 유유히 흐르는 것과 같이 평온하였다.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서 다음 날이 되어도 여전히 그 꽃더미와 비..
여의가 총애 받는 형세가 이번의 일로 다시 전화위복이 된 후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여, 귀비의 총애와 대우에 비교해도 훨씬 대단했으나 여의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황제는 비록 사나흘에 한번 여의를 보러 올 뿐이었으나, 그 또한 가늘게 흐르는 물이 오래오래 흐르는 극진한 대우였다. 연희궁의 궁인이 궁궐의 긴 길을 걸어갈 때에도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도 높이 치켜 들었으니, 이전의 눈썹과 눈을 낮게 내리깔던 모습이 아니었다. 여의는 궁인들의 이런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삼보, 아약, 그리고 예심에게 재차 삼차 당부하기를, 아랫사람들이 교만한 기색을 띠어서는 아니되며, 경망스럽게 굴어서도 안되고, 특히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며 함복궁과 분쟁을 일으켜서는 더더욱 아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당부하는 말이 많..
찬바람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며 해란이 황제 앞에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황제의 다리에 매달렸다. "황상, 모두 신첩이 질투한 것이옵니다. 신첩이 매답응이 총애받는 꼴을 보지 못하고 잠시 나쁜 마음이 들어 신첩이 매답응을 해친 것이옵니다! 형님과는 관계 없는 일이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어찌 왔느냐?" 밖에서 어린 태감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말했다. "해상재가 온지 한참 되었사옵니다. 따라온 엽심이 말하기를, 한비마마께서 한참 동안이나 회궁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잠시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 하옵니다. 안에서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줄곧 전각 밖에 있으며 감히 들어오지 못했사옵니다." 황후가 해란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여 말했다. "해상재는 발에 상처를 입은지 얼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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