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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귀비는 황제를 모시고 장춘궁의 대문을 나와, 황제의 의장이 줄이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잔뜩 성내며 말했다

 “황상께 그렇게 여러 번 부탁드려서 이제 성공이 눈앞에 있었는데, 한비가 맡게 될 줄이야!

 

말심이 서둘러 말렸다.
 
“소주, 고정하시옵소서.

 

혜귀비가 성내며 말했다.
 
“네가 황상께서 두 달 동안 한비를 본체만체 하셨다 하지 않았더냐. 어째서 오늘 한비를 떠올리고 불러들이신 것이야?

 

말심이 귀비의 손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아마도 지위가 높으면서 아이가 없는 분은 소주와 한비뿐이오니, 본래는 한비를 불러 모양새를 갖추시려 한 것이오나, 설마 대황자 그 박복한 아이가......
말심은 무심결에 말을 내뱉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혜귀비는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박복한 애 하나일 뿐이야. 본궁의 지위가 한비보다 높고 총애는 더욱더 많이 받는데, 그 아이는 저 추운 둥지만 좋아서 가겠다 하니 그럼 제멋대로 하라지!

 

말심은 황급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복이 없어 어미를 해친 아이일 뿐이니, 생모를 죽게 만들고 이제는 한비를 보내버리겠지요. 소주께서는 무엇이 급하시옵니까? 마마께서는 분명 고귀한 아기씨를 낳으실 것이니, 황후마마의 아기씨도 비할 바가 못 될 것이옵니다.

 

혜귀비는 끝없는 바람을 담아 자신의 여전히 평평한 아랫배에 손을 얹고는 약간은 기대하는 미소를 드러내니, 발걸음은 더욱 느긋해졌다.

 

황후는 뭇 사람들이 흩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가 한 쌍의 마노 팔찌가 자단목 탁자에 부딪혀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소심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제비집 한 그릇을 받쳐들고 황후의 손에 넘겨주며 조용히 말했다.
 
“마마, 이 제비집은 간에 쌓인 화를 풀어주는 것이오니, 조금 드셔보셔요.

 

황후가 습관적으로 제비집을 향해 손을 뻗자, 소심이 급히 말리며 외쳤다.
 
“마마, 손 데지 않게 조심하시옵소서.

 

황후는 차갑게 웃으며 소심이 제비집을 받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제비집 국물이 점점이 손에 떨어지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말했다.
 
“아가소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뺨을 매우 쳐라! 본궁이 분부한 일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 이런 사단이 벌어져 엉뚱한 사람이 이득을 보았지 않느냐!

 

소심이 황급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예. 저들이 대황자를 돌보지 않았으니 마마께서 화가 나시는 것도 있겠지요. 다만 마마, 화로 몸을 상하게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소인, 대황자를 돌보는 자들이 마음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감히 너무 성급했던 것임을 알고 있사옵니다. 감기를 두 번이나 앓고도 대황자의 몸이 저렇게 좋아질 줄 누가 알았겠사옵니까. 원래는......

 

황후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니 마치 꽁꽁 언 얼음과 서리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늦었다!

 

소심의 어조가 나지막하며 단호해졌다.
 
“늦지 않았사옵니다. 대황자를 모시는 사람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중요한 유모들은 따라갔사옵니다.

 

황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웃음기를 띠니, 마치 얼음판 위에 비치는 햇빛 같았다.
 
“그럼 소심, 네가 어찌해야 할지 잘 알겠지.

 

황후가 몸을 일으켜 침전으로 걸어가니, 오직 옷자락이 흔들리는 모양이 하늘가에 떠있는 오색구름이 광채를 남기는 것 같았다.

 

영황은 여의를 따라 연희궁에 도착했지만 아직도 조금 주눅들어 있었다. 여의는 주변에 예심만을 남기고는, 직접 깨끗한 의복 한 벌을 가져다 영황을 갈아 입히고, 물을 받아다 꼼꼼하게 얼굴과 손을 씻기고 나서야 따뜻한 목소리로 애틋하게 여기며 말했다.
 
“영황, 이제 연희궁에 도착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영황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소를 나올 수만 있으면 저는 두렵지 않사옵니다.

 

 여의는 눈짓으로 예심에게 선반 위의 흰 가루약을 가져오게 하여 직접 영황의 상처 위에 가볍게 발랐다.
 
“가산에서 긁힌 상처가 아프지 않니?

 

영황이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 않사옵니다.

 

여의는 영황의 팔뚝을 문지르며 가볍게 호호 불었다.
 
“바보 같으니라구.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니?

 

영황은 개구진 웃음기를 드러냈다.
 
“제가 부딪힌 것이니 당연히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말하지 않으면 제가 찰과상을 입은 것을 누가 알겠사옵니까?” 

영황은 고개를 숙이고 조금 슬퍼했다.
 
“유모와 시종들은 모두 저를 신경쓰지 않아요.

 

여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들이 너를 돌보지 않으니 너는 스스로 챙겨야 한다. 한마마도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어서 예심을 시켜 이렇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야.

 

영황은 영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마께서 보내신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마마께서 예심을 시켜 제게 먹을 것을 보내주지 않으셨더라면, 저들이 제가 먹을 것을 너무 조금 주어서 저는 매일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팠을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저를 구하려고 하신 것, 저도 다 알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영황을 껴안고 자기도 모르게 슬픔어린 눈물을 보였다.
 
“착하구나. 네가 알고 있으니 내가 너를 더 아낄 수밖에 없구나. 네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매일매일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데, 너만 이런 것을 알아야 하니 나는 네가 참으로 안됐구나.

 

영황은 작은 손을 뻗어 곧 흐를 것 같은 여의의 눈물을 닦아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마마,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작은 손이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이 마치 모든 근심과 슬픔을 달래는 좋은 약과 같았다. 여의가 기뻐하며 말했다.
 
“영황, 네가 있으니 나는 더욱 기쁘구나.

 

영황은 웃으며 가지런하지 않은 이를 드러냈다.
 
“제가 여기 와서 마마께서 기쁘시고 저도 기쁘옵니다. 그래서 제가 혜마마를 따르지 않은 것이옵니다.

 

여의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어미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면 나를 한마마라고 불러도 된단다. 어차피 모두 같으니까. 네 친어미는 철비이지만, 나는 너를 친자식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야.

 

영황은 눈을 크게 뜨고 검고 둥근 눈동자로 여의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마, 제가 마마를 따른 것은 마마께서 제게 잘해주시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마마께서는 어째서 저를 선택하셨사옵니까?

 

여의가 조용히 영황을 바라보니, 자신을 감싸줄 어미를 잃고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이 아이의 천진난만함과 장난스러움 아래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사려깊음과 앞날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이 있었다. 여의 또한 영황을 속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없어 외롭고, 영황 너는 어미가 없어 외롭기 때문이지. 너와 내가 모두 외로우니 서로 함께 의지해야지. 마치 겨울날 추위에 떠는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따뜻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황은 어떤 생가게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있사옵니다. 저는 따뜻하고 포근한 것을 바라고 있고, 마마께서도 그러하시지요. 그래서 오늘 아바마마께서 제게 고르라 하셨을 때 제가 마마를 선택한 것이옵니다.” 영황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혜마마는 저를 무시하셨어요. 오늘 설령 혜마마께서 저를 데려가시려고 저를 좋아한다 말씀하셨지만, 저는 혜마마를 좋아하지 않아요.

 

여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착하기도 하지.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구나. 그러니 이제 더이상 두려워 말고 마음 놓고 내 곁에 있으면 되는 것이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약이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주, 해 상재께서 오셨사옵니다.

 

여의가 서둘러 해란을 들어오게 하자, 해란은 들어오자마자 방긋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형님께서 새로 아들을 얻으셨다고 하여 서둘러 보러 왔어요. 축하드려요, 형님.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대단히 기쁜 일이지. 황상께서 나를 갑자기 오라 부르신 것이 실은 이런 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줄이야.

 

해란은 엽심을 시켜 검은 비단 두 필을 안기며 말했다.
 
“제 처소에는 그렇게 좋은 물건은 없사옵고, 이 비단 두 필로 대황자께서 옷을 지어 입으셔요.

 

여의가 눈을 깜빡거리자 영황은 곧 알아들었다.
 
“해 마마, 감사하옵니다.

 

해란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철이 다 드셨네요. 그러니 모두들 대황자를 좋아하지요.

 

여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아이를 좋아하니 어서 빨리 하나 낳아야지.

 

해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돌연 얼어붙으니, 마치 갑자기 된서리를 맞은 꽃봉오리 같았다. 해란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만일 제게 아이가 생긴다면 제가 직접 기르지 못할 거예요. 순빈처럼 저렇게 지위가 높아도 그런 고초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저는 어떻겠어요? 그렇게 모자가 생이별하게 된다면 혼자 조용히 사는 것만 못할 거예요.” 

해란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게다가 황상께서 지금 이러하신데, 제가 어디 회임할 가망이나 있겠어요.

 

여의는 해란의 말에 소리 없는 슬픔이 마음 속 깊이 스며들어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영황을 끌어안고 말했다.
 
“다행히 이제 영황이 있으니 앞으로는 좋아지겠지.

 

해란은 점차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그도 그래요. 황자가 하나 곁에 있으면 누구도 형님을 얕보고 멋대로 하려 들지 못할 거예요.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바깥이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여의는 장막 밖에서 새어 들어온 노을 빛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밖을 보니, 내무부의 주사 태감 진립이 유모 한 명과 여러 가지 물건을 받쳐들고 있는 태감 십여 명과 함께 들어왔다.

 

아약이 밖에서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진 공공이 오셨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물건을 가지고 뭘 하시려고?

 

진립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눈에서는 열심히 웃음기를 짜내면서 다가왔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비마마께서 대황자를 맡으셨으니 궁중에 물건을 추가로 더 들여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러지않아도, 내무부에서 서둘러 가장 좋은 물건을 골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진립은 고개를 내밀어 기웃거리며 말했다.
 
“한비마마와 대황자께는 내가 가서 문안을 올려야겠습니다.

 

아약은 손을 뻗어 막으며 불친절하게 말했다.
 
“허나 진 공공을 안으로 들이지는 못하겠네. 진 공공은 우리 연희궁에서 받을 빚이 있으니, 우리가 진 공공에게 빌려 쓴 것이 은자 천팔백 냥이나 되니 말야. 우리가 위패라도 떼다 바쳐야 하지 않겠어.

 

진립은 난감하여 머쓱하게 웃었다.
 
“아약 아씨, 그 날은 제가 취해서 헛소리를 했습니다. 누님께서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아약이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질렀다.
 
“누님? 누가 네 누님이야? 내가 네 고모할머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연희궁의 녹봉을 떼먹은 거냐! 우리는 이 물건들을 감히 받을 수 없으니 황상께 가서 말씀 올려라! 전부 진 공공에게 주어 빚을 갚아야지! 내가 내무부에 한번 가서 총관 대인을 찾아 차용증이 있는지 물어보고, 가져다 황상께 살펴보시라 해야겠다.

 

진립이 이 말을 듣더니 얼굴이 온통 창백해져서는 연신 몸을 굽신거리며 사죄했다.
 
“왕고모님, 아이고 우리 왕고모님, 저 좀 봐주세요. 제가 그것은 허튼 소리를 한 것입니다. 보세요, 이 두 달 동안 내무부가 연희궁에서 빌린 물건과 노비들을 제가 꼬박 두 배 더해서 가져왔습니다. 부디 왕고모님께서는 웃으며 받아주세요.

 

예심은 아약이 진립 일행을 난처하게 하는 것을 듣고 막 밖으로 나가 말리려 하니, 여의가 손을 내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무부에서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겼으니, 아약이 화를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들었을 때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돼.

 

해란이 웃으며 말했다.
 
“누가 아니래요. 지난 두 달 동안 우리가 정말 꽤 고생하긴 했지요.

 

진립이 한참을 용서를 구하고 나서야 아약은 조금 진정이 되었고, 진립은 가져온 물건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정성스럽게 옆에서 비위를 맞췄다.

 

진립이 말했다.
 
“전에 대황자를 모시던 사람들을 황상께서 모두 내치셨지만, 이쪽은 대황자께서 어릴 때부터 모셨던 유모 소 어멈이라 내쫓지 않고 연희궁에 따라와 대황자를 모실 것이옵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이 말은 별것 아니었으나, 대황자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여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여의는 곧 깨달았다.
 
“소 씨는 너의 유모인데도 너를 막 대했지, 그렇지 않느냐?

 

영황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사옵니다. 다른 노비들은 그렇다 쳐도 소 유모는 소자를 그렇게 오래 섬겼는데 왜 그렇게 소자를 대한 것이온지요? 소자를 굶기고 추위에 떨게 했사옵니다.

 

여의가 낮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이익을 위해 변하기 마련이니, 오직 혈육의 정만이 변하지 않는 것이란다.” 

여의는 영황의 손을 끌어 당겼다.
 
“가자. 나도 가서 보아야겠다. 네 유모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여의가 영황을 데리고 난각에서 정전으로 가서 앉자, 곧 서른 남짓한 부인이 무리 속에서 나오며 영황을 보고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손을 뻗어 달려왔다.
 
“우리 아기씨, 먼저 와계셨군요. 소인을 불러 찾으셨어야지요!

 

예심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미천한 노비가 한비마마를 뵙고도 이리 무엄하게 구느냐.

 

유모가 깜짝 놀라 여의를 살피고는 서둘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한비마마, 만복을 누리소서. 소인은 영황의 유모, 소 가라 하옵니다.

 

여의는 곧장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황의 이름이 네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이더냐? 위아래도 없는 것 같으니!

 

유모는 얼이 빠져 말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어 말했다.
 
“예, 예, 대황자님이시옵니다.

 

여의는 이리도 빨리 유모의 말투가 바뀌는 것을 듣고는 그럭저럭 됐다 여기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대황자를 오래 보살폈고 앞으로도 수고하겠구나.

 

소 어멈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황자께서 어릴 때는 소인의 젖이 많아서 뭐든 소인의 말을 들으셨지요. 앞으로 한비마마께서 대황자를 가르치실 일이 있을 때는 뭐든 소인에게 말씀하시면 되옵니다.

 

여의는 소 어멈이 영황의 유모이고 영황이 어릴 때부터 데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 소 어멈이 이토록 오만방자하고 늙은 티를 내며 거만하게 구는 것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대황자를 가르치고 보살폈다면 대황자의 옷과 음식이 부족할 리 없고 다친 것도 몰랐을 리 없다. 너는 본궁에게 상세히 고하거라. 작년 겨울에 대황자가 두 번이나 감기에 걸렸는데 왜 그런 것이냐? 그리고 어째서 두 달이 넘도록 낫질 않는 것이냐? 너희 노비들이 태만한 것이 아니라면 대황자가 이렇게 처량해졌겠느냐!

 

소 어멈은 자신의 신분에 기대어 굽히지 않고 고집스럽게 말했다.
 
“대황자께서 감기에 걸리신 것은 대황자께서노는데 열중하시어 옷을 많이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또 약을 잘 드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소인이 비록 측근에서 보살피더라도 어떻게 매시간 항상 돌볼 수 있겠사옵니까?

 

영황은 여의에게 기대어 고통스럽고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어머니, 저렇지 않았사옵니다.

 

여의가 문득 놀랐다.
 
“영황, 지금 나를 무어라 불렀니?

 

영황의 목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무척 확고했다. 영황은 여의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어머니.

 

여의는 마음이 뭉클해지니, 마치 갓난 아기의 손이 가볍고 부드럽게 심장을 어루만진듯 그렇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의는 영황의 손을 꼭 잡고, 그 누구도 여의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던, ‘어머니’라 부른 그 목소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여의는 할 수 있었다.

 

소 어멈이 고함쳤다.
 
“대황자님, 황자께서는 비록 윗전이시지만 이렇게 양심없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황자께서는 소인의 피를 마시고 소인의 살을 먹고 크셨사옵니다. 대황자께서는 뻔히 알면서 그런 거짓말을 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황자님은......

 

여의는 기분이 확 가라앉아 손에 든 찻잔을 던지듯 내려놓으니 벽록색 찻물이 곧장 주변으로 튀었다. 여의는 호되게 외쳤다.
 
“삼보, 소복자! 저 주인을 업신여기는 교활한 노비를 끌어내어 즉시 장 30대를 치고, 다 때리거든 궁 밖으로 쫓아내라! 다시는 대황자를 시중드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삼보는 즉시 대답하고 잰 걸음으로 달려갔다.

 

여의가 또 말했다.
 
“형을 집행할 때, 모든 궁인들을 뜰에 불러서 주인을 배반하고 업신여기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게 해라!

 

소 어멈은 질질 끌려 나갈 때조차 함부로 소리를 질렀지만, 곤장을 몇 대 맞자 엉엉 울며 용서를 빌 뿐이었다. 여의는 영황의 손을 끌어당기며 처마 아래에 서서 새빨갛게 피에 물든 곤장이 한 대 한 대 내리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곤장이 가죽과 살에 맞으며 나는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여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황, 두려워하지 말거라! 보아라, 너를 업신여긴 사람이 네 수하에서 어떤 꼴을 당하는지. 저들은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받는 것이니라!

 

스무 대를 때렸을 때, 소 어멈은 점차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로지 낮게 흐느끼는 소리만 남길 뿐이었다. 핏자국이 소 어멈의 옷자락을 붉게 물들이니, 한 대씩 칠 때마다 선홍색 핏방울이 튀었다. 영황은 보고 있자니 조금 무서워져서 여의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어머니, 더 때려야 하나요?

 

여의의 평온한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영황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영황, 기억하거라.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면 반드시 그 결과도 책임져야 한단다. 저들이 너를 괴롭힐 때에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 지금 설령 소 어멈이 장을 견디지 못하고 맞아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업보인 것이다. 알겠느냐?

 

영황이 고개를 끄덕이니, 검은 동자에는 참착함과 의연함이 스쳤다. 영황은 묵묵히 여의의 곁에 서서 계속 형 집행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여의는 시종들이 소 어멈을 끌고 나가자 바닥에 암홍색 핏자국이 멀리가지 흥건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맑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모두 잘 기억해두거라. 대황자는 바로 지금부터 본궁의 양자이자, 본궁의 유일한 아들이다. 누구든 감히 대황자에게 오만불손하게 군다면, 그것은 곧 본궁에게 오만불손한 것이다. 소 어멈이 바로 그 본보기이다!

 

뭇 사람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진립은 무척 두려운 표정으로 한쪽에서 지키고 서있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한비마마, 살려주시옵소서. 한비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여의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의 하찮은 목숨 따위 본궁은 필요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진립이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엎으려 일어나지 못하고, 해란은 마음에 든다는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여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는 형님의 이런 모습이 제일 좋아요. 이런 형님을 보면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날 밤, 궁인들은 대황자가 묵을 수 있도록 동배전을 정돈했다. 여의가 직접 가서 살펴보니, 세 칸짜리 널찍한 방이 볕도 잘 들고 탁 트였으며, 건물의 앉음새 또한 좋았다. 남자 아이가 머물 곳이기 때문에 각별히 탁 트이게 정돈했다. 한 칸은 침실이고 다른 한 칸은 서재, 나머지 한 칸은 쉬고 놀 수 있는 곳이었다. 매일의 식사는 공부하는 서재에서 먹을 때가 아니면 여의와 함께 먹었다. 대황자를 모시는 사람들은 전부 새로 뽑아 올린 자들로, 여의가 하나 하나 세심하게 조사하여 배경이 깨끗한 사람들이어야만 비로소 대황자를 모실 수 있었다. 이렇게 한나절을 바삐 보내니, 온당치 못한 것이 없었다. 연희궁에서 새로 얻은 황자 한 명으로 인해 황제 역시 끊임없이 상을 내렸으니, 사람들이 때가 되어 좋은 운이 들어온 것을 알고 마치 명절처럼 기뻐했다.

 

밤이 되어 여의는 영황과 함께 저녁을 먹었으니, 모두 소주방에서 만든 계절 요리였다. 마침 영황의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날 때여서 각별히 연하고 부드럽게 쪄낸 것이었다. 또한 영황이 배불리 먹지 못한지 오래 되어, 항상 위를 보양하기 위해 아주 걸쭉하게 잘 끓인 좁쌀죽만 먹었다. 영황의 입맛이 아주 좋아서 배불리 먹으니, 여의는 예심을 시켜 의복의 치수를 쟀으며, 아무 조건 없이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직접 영황을 깨끗이 씻기고 토닥여 재웠다.

 

예심은 곁에서 영황의 의복을 만들 옷감을 고르고 있었고, 여의는 영황을 가볍게 손으로 토닥이며 한 필 한 필 들춰보니 예심이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소주, 소주께서는 직접 쓰실 옷감을 고를 때도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셨어요.

 

여의는 사랑스러워 마지 않는 눈길로 영황을 바라보았다.
 
“본래 이 한 몸 의지할 곳을 찾으려 했었지. 허나 이 아이가 나를 어머니라 불렀을 때, 내 마음은 녹아내렸지. 마치 이 아이가 내 아이인 것처럼 내 마음 속에서는......

 

예심도 옷감 한 필을 골라 여의가 보도록 건네주며 조용히 말했다.
 
“대황자님을 위해 소주께서 몇달 동안 마음쓰셨지요. 소인을 몰래 보내시어 대황자를 돌보시고, 아가소 사람이 어떻게 대황자를 대하는지 이옥의 입으로 황상께 전해 드리게 하고, 황상을 모시고 가서 보시게 하셨지요. 소인은 본래 황상께서 대황자를 마음에 두지 않으셔서 비록 언제나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여의는 영황의 곤히 잠든 얼굴을 보며 조용조용 말했다.
 
“비록 철비는 이제 없지만, 황상께서 아무래도 철비에게 정이 있으셨고, 그리고 친자식도 있었지.

 

예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주께도 대황자가 계시니 위안이 되시겠지요.

 

여의는 몸을 돌려서 비단 몇 필을 골랐다.
 
“날이 곧 더워지니, 통풍이 잘 되고 답답하지 않은 것으로 골라서 대황자에게 여름 옷 몇 벌을 지어줘야겠다. 경성의 여름은 짧아서 순식간에 가을이 오니, 가을 옷을 잘 준비해야하고. 그리고 겨울 옷은, 황자의 작년 겨울 옷은 모두 구할 수가 없어서 새 목화솜을 두툼하게 틀어서 두 벌을 만들려무나. , 유모들이 새로 왔으니 영황의 음식과 잠자리는 네가 꼼꼼히 살펴서 차질이 없도록 하거라.

 

한창 여의가 말하고 있을 때, 문득 바닥에 늘씬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발견하고 돌아보니, 황제가 마치 옅은 산안개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장막 아래에 서서 여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의는 갑자기 황제가 온 것을 보고 막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조금 어려 있었고, 행동도 굼떴다. 여의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황제가 다가가 말렸다.
 
“짐이 방금 들어와 그대가 예심에게 분부한 말을 들으니, 정말 자애로운 어머니 같더군.

 

여의는 조금 창피했다.
 
“신첩, 어미가 되어본 적이 없어서 잔소리를 했사옵니다. 황상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사옵니다.

 

예심은 황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나왔다. 황제는 여의의 손가락을 하나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이렇게나 오래 보러오지 않았으니, 그대가 섭섭했겠군.

 

여의는 자기도 모르게 괴로움에 눈가가 촉촉해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께서 알고계셨군요. 신첩이 제멋대로 정해버리고 스스로 옳다 여기니 황상께서 원망하시는 것, 잘 알고 있사옵니다.

 

황제의 또렷하고 수려한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오르니, 그 미소는 본래 따뜻한 것이어야 하나 어렴풋한 근심을 띠고 있었으니, 마치 가을날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寒露)에 갑자기 내린 옅은 서리와도 같았다.
 
“본래 그 날 그대가 한 말이 짐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 있었으나, 짐은 상관하지 않으려 했지. 허나 어째서인지 모르게, 나중에 생각이 나서 짐도 모르게 이렇게 해버렸구나. 이렇게 이 씨에게 명분을 주고 존귀함과 영예를 주고 나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어도 밤에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여의의 눈을 바라보며 비 갠 뒤 바깥에 내려앉은 촉촉한 수증기처럼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짐이 이 말을 지난 며칠 동안 참았다가 이제서야 그대에게 말하니, 그대는 짐이 너무 미련하다 생각하지 않느냐?

 

여의는 다 이해한다는 듯 황제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신첩이 황상께서 난처하실 일을 말하여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감돌았다.
 
“허나 이런 곤란한 일을 오직 그대만이 짐에게 이야기해주는구나. 그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

 

여의는 제법 미안해했다.
 
“그날은 신첩이 경솔했사옵니다.” 

여의의 마음 속에는 온유한 애정이 파도처럼 끝없이 부드럽게 물결쳤다.
 
“하지만 신첩이 생각하기에, 황상께서는 세상 만물을 가지셨으니 모쪼록 어떤 유감도 남기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원만한 가운데 한 가지라도 모자란 것이 있으면 큰 결점이 되기 때문이옵니다.

 

황제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지니, 한참을 바라보면 그 눈동자 속에 여의의 또렷한 얼굴이 비쳐보일 것 같았다.
 
“짐은 그대가 짐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짐은 언제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를 보러 오지 못했지. 옛 사람의 말처럼, 오랫동안 소식 없이 집 떠났던 나그네가 고향에 가까워질수록 무슨 일이 있을까 마음이 불안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황제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의는 마치 따뜻하고 촉촉한 바람 속에 드문드문 핀 새하얀 치자나무 꽃처럼 방긋 웃었다.
 
“신첩이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내기 때문에 대황자를 양육할 수 있기 때문이옵지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알고보니 짐의 말을 그대가 기억하고 있었구나. 짐이 생각해보니 그대도 모자란 것이 없으나 자손에 관한 일은 인연을 따라야 하니, 짐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오직 양자를 하나 들여 임시로 그대의 모자란 점을 채우는 것뿐이지.

 

여의는 감격 반 기대 반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첩도 신첩의 아이를 가지고 싶사옵니다. 그러나 지금 영황을 데리고 있으니 그것도 아주 좋사옵니다.

 

황제는 여의의 어깨를 감싸 안고 미소를 지으며 깊이 잠든 영황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그대 곁에서 아주 달게 자는구나.

 

여의는 손을 뻗어 영황의 이불을 잘 여며주고는 멍하니 미소를 지은 채 손바닥을 뒤집어 황제의 손을 잡았다.
 
“신첩, 꿈 속에서 우리에게 아이가 생겨서 세 식구가 되고, 이렇게 함께 고요하게 곁에서 돌보게 되기를 수없이 바라고 또 바랐사옵니다.

 

황제가 웃으며 여의에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될 것이니, 그대는 마음 놓아라.

 

붉은 초가 밝게 빛나고 빛무리가 생사로 짠 금빛 장막에 어른거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 한 쌍을 비추었다. 여의는 무한한 애정이 샘솟아 고개를 돌려 미소 지으니, 마치 한평생의 염원을 찾아낸 듯,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황제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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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도 더운데 오래 기다리셨죠ㅠㅠ 저는 겨울 사람인데(...) 더위를 배가 터지게 먹은 것 같습니다ㅎㅎ
2. 주석이 없으면 역자는 행복합니다 ;ㅂ;
3. 여의전보다 연희공략이 먼저 방영을 시작했더군요. 연희공략의 위 씨 캐릭터가 제 취향이 아니라서 나올 때마다 괴롭지만, 부찰 황후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진람 배우 목소리도 아름다우시죠) 황후마마 나오는 씬만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여의전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아쉬운대로 영상화 된 것을 마음 속에서 여의전에 대입해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건륭 6년 연간인 것 같은데 고 귀비(여의전 혜귀비죠. 어째서 귀비까지 올랐는데 봉호가 없으실까요ㅎㅎ)와 한비가 너무 노안이셔서 괴롭습니ㄷ...... 

4. 저... 블로그에 광고 좀 걸어도 될까요? 원래 어지럽게 광고 뜨는 걸 무척 싫어하는데 번역하며 마실 커피 값이라도 보태볼까 하여... (굽신굽신)

5. 다음 장은 이것보다는 좀 짧으니 일찍 땡겨(!)볼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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