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찬바람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며 해란이 황제 앞에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황제의 다리에 매달렸다.

"황상, 모두 신첩이 질투한 것이옵니다. 신첩이 매답응이 총애받는 꼴을 보지 못하고 잠시 나쁜 마음이 들어 신첩이 매답응을 해친 것이옵니다! 형님과는 관계 없는 일이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어찌 왔느냐?"

밖에서 어린 태감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말했다.
"해상재가 온지 한참 되었사옵니다. 따라온 엽심이 말하기를, 한비마마께서 한참 동안이나 회궁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잠시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 하옵니다. 안에서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줄곧 전각 밖에 있으며 감히 들어오지 못했사옵니다."

황후가 해란의 모습을 보고 걱정하여 말했다.
"해상재는 발에 상처를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아 몸도 좋지 않은데 너희는 어찌하여 막지 않았느냐?"

어린 태감이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소인 참으로 막을 수 없었사옵니다!"

황후가 눈썹을 찡그리며 소심에게 해란을 떼어놓으라 눈짓하고는 말했다.
"해상재, 본궁은 자네가 한비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큰일은 누구도 대신 떠안을 수 없는 것이네. 자네는 자네가 백화단을 넣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본궁이 자네에게 하나 묻지. 자네는 언제 영화궁에 가서 언제 약을 넣었는가?"

해란은 잠시 말을 더듬다가 곧장 얼굴을 들고 두려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신첩이 약을 넣겠다 마음 먹었으면 언제 어느 때든 모두 가능하옵니다! 어쨌든 이 일은 한비가 한 일이 아니옵니다!"

황후의 표정이 숙연해지며 엄하게 말했다.
"해상재, 본궁은 자네와 한비가 자매 간의 정이 깊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어찌 자네가 한비 대신 뒤집어 쓸 수 있겠는가!"

해란은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곧장 고개를 들어 목을 꼿꼿이 세우고 완고한 어조로 말했다.
"신첩이 한비 형님 대신 뒤집어 쓰겠다는 것이 아니옵니다. 이 일은 분명 형님이 한 일이 아니지만, 만일 정말로 형님이 한 일이라고 여기신다면 그것은 곧 신첩이 한 일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해란은 그동안 줄곧 겁에 질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었는데, 불현듯 언사가 이리도 격하게 나오니 황제마저도 조금 믿고 말았다.
"그렇다면 해란, 그대는 어찌 한비가 한 일일 리가 없다고 믿는 것인가?"

해란이 여의의 단추에 달린 술이 달린 부용 향주머니를 움켜쥐자, 해란의 힘이 너무 세서 향주머니에 드리워져 있는 정교한 술도 같이 당겨져 몇가닥이 뜯겨져 나가 손끝에 감겼다.

해란은 힘주어 향주머니를 풀어 젖혔다.
"그것은 형님의 향주머니 안에는 처음부터 백화단이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백화단이 들어있지 않은데 형님이 어찌 그것을을 약에 넣을 수 있었겠사옵니까?"

향주머니 안에 있던 것이 해란의 손바닥에 쏟아지자 오로지 마른 잎 몇 장과 진홍색의 분말만이 보였다. 조 태의가 서둘러 가져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황상, 백화단 분말은 청백색이온데, 이 물건은 진홍색이니, 이는 백등나무로 만든 것이옵니다."

여의는 놀랍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여 하는 수 없이 말했다.
"신첩이 기억하기로, 그날 내무부에서 보내온 백화단 가루의 품질이 좋지 않았사온데, 본래대로라면 바꾸어야 했을 것이나, 나중에 해상재가 향주머니 솔기가 엉성한 것을 보고 연희궁의 것을 모두 가져다가 다시 꿰메었사옵니다. 헌데 안에 들어있던 백화단이 어째서 안 보이는지는......"

해란이 근심하고 걱정하여 말했다.
"신첩, 내무부가 한비 형님께 소홀하여 질이 좋지 않은 물건을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연희궁이 춥고 외지니 그 백화단 가루가 쓸모가 없을 것을 걱정하였사옵니다. 마침 신첩의 궁에 남는 백등 가루가 있는데, 이는 백화단과 마찬가지로 풍을 다스리고 습기로 인한 통증을 멈추게 하옵니다. 그런 까닭에 백화단 대신 최고급 백등 가루로 바꾸어 사용했사옵니다. 형님의 향주머니에 백화단이 없는데 어찌 사람을 해칠 수 있사옵니까?"

매답응이 해란을 흘겨보다가 말했다.
"백등이 백화단과 효과가 같다면 독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황제가 조 태의를 보자 조 태의가 곧바로 말했다.
"황상, 백등은 독이 없사오니 절대로 답응 소주의 얼굴을 상하게 하지 못하옵니다."

여의는 긴장한 몸의 힘을 비로소 풀며 해란의 손을 꼭 잡고 뜨거운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여 말했다.
"해란, 내가 이 몸의 결백을 분명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네 덕분이다."

해란은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 없어요. 고마워하실 것은 형님을 업신여기고 홀대하여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생을 면하게 해준 내무부지요."

해란은 꼿꼿하게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황상께서 만약 믿지 못하신가면 낱낱히 조사해보시옵소서. 만일 아직도 누군가 이 일이 형님이 한 것이라 여긴다면 신첩을 신형사로 보내시옵소서."

황제는 손을 뻗어 해란과 여의를 부축하여 일으키고는 온화하게 말했다.
"좋다. 해란, 예전에 그대는 별로 말이 없었는데 알고보니 용기가 갸륵하구나."
황제의 손이 여의의 손등을 토닥이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대의 억울함은 짐이 모두 알고 있다. 이 일은 짐이 다시 조사할테니 그대는 마음 놓아라."

해란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신첩이 무슨 용기가 있사옵니까. 다만 형님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신첩의 결백을 지켜주었는데, 신첩도 어찌 형님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황제의 눈빛이 황후의 살짝 굳은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는 곧 웃으며 말했다.
"이리 말하는 것을 보니, 짐이 공연히 그대를 연희궁으로 보낸 것은 아니로군. 바람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서로 잘 돌보도록 하거라."

황후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는데 스산한 기운을 조금 품고 있었다.
"이 일은 신첩이 반드시 철저히 조사하겠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법도를 세울 수 없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귀비는 물론이고 하마터면 황후를 기만할 뻔 했을 뿐만 아니라 한비를 조사하러 보낼 뻔 했소. 후궁에 자질구레한 일이 매우 많고 새해가 다가왔으니, 황후는 안심하고 다른 일을 처리하시오."

황후의 몸이 조금 흔들려서 하마터면 서있지 못할 뻔했으나 얼굴에는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이전에 잠저에 있을 때, 한비가 일을 많이 도왔지요."

황제가 또 말했다.
"한비, 조사 결과가 어떠하든, 짐은 이 일을 그대가 처리하도록 맡기겠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조 태의에게 분부했다.
"조 태의, 너는 매답응을 잘 치료하거라. 흉터는 남지 않겠지?"

매답응은 이 말을 듣고 또 눈물을 흘렸지만 황제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억지로 꾹 참았다.

조 태의가 서둘러 말했다.
"다행히도 백화단 가루의 양이 많지 않으니, 소신이 세심히 치료하면 보름이 되기 전에 좋아질 것이며 어떤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됐다. 모두 물러가거라."
황제는 여의와 해란이 몸을 일으켜 물러가는 것을 보고 따뜻하게 분부했다.
"해상재, 그대는 그대의 몸을 잘 보살피고, 한비도 다시 풍한에 들지 않도록 하거라."

두 사람은 대답하고 물러갔다. 황제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황후가 귤 껍질을 벗겨서 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은 비록 귀비의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일어난 일이고, 매답응도 좀 까탈스럽게 굴었지. 허나 그대는 황후요. 일을 분명히 알아보지도 않고 한비를 의심하다니. 후궁의 일이 비록 많지만, 공명정대하여 의심할 바 없게 하는 것을 중히 여겨야 하오. 그대는 중궁이니 마음 역시 가운데에 두어야 하오."

황후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억지로 한가닥 미소를 지었다.
"신첩도 매답응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랐사옵고, 한비 또한 연이어 시비에 연루되니 조금 마음이 급했사옵니다."

황제의 말투가 더욱더 차가워졌다.
"그런 시비는 한비가 스스로 불러 일으킨 것이오? 그대는 중궁이고, 짐의 황후요. 그대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성급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오직 신중해야 하는 자리란 말이오. 그리하여야 짐의 후궁이 비로소 안정될 수 있는 것이오."
황제는 말투를 조금 온화하게 바꾸었다.
"지금 궁중에 겨우 몇 사람 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니......"

황후는 이 말을 들으니 명치께가 쓰라려 아파오고 혀끝이 떫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신첩이 나이가 어려 진중함이 모자라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침착하지 못하니, 앞으로는 절대로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신첩, 각별히 주의하겠사옵니다."

황제는 "그래" 라고 말했다.
"그럼 짐은 귀비와 함께 저녁 수라를 들러 갈 것이니 그대도 일찌감치 돌아가보시오."

황후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자 바깥의 찬 바람이 예리한 칼날이 눈을 찌르는 듯 불어오니, 뜨거운 피가 스며나오는 것 같았다. 잠시, 눈 앞에 안개가 낀 듯 하얘지자, 황후는 고개를 젓고 다시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꽉 쥐면서 인내했다.

여의와 해란은 가마를 타고 한 명은 앞서고 한 명은 뒤따르며 연희궁으로 돌아갔다. 주홍색의 문지방을 밟았을 때, 여의는 비로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해란은 서둘러 여의를 부축하고 엽심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 들었다.

여의는 해란의 부축을 받으며 똑바로 서고는 꾸짖어 말했다.
"방금 이리도 당돌하게 들어오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냐? 참으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구나?"

해란이 섭섭해하며 말했다.
"제게는 형님밖에 없어요. 만약 형님이 그들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면 저는 누구를 의지하겠어요? 게다가 형님이 어젯밤에 어떻게 저를 구해주었는데, 저는 앞으로도 똑같이 형님을 구할 것이어요."

여의는 해란을 바라보니 마음 속에서부터 감동하여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다만 해란의 손을 꼭 잡고 서로의 온기로 서로를 따뜻하게 했다.
"나는 네가 그런 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뒤로는 감히 연희궁 밖으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

해란의 눈 속의 빛이 점점 더 밝게 빛났다.
"어제도 두려워했고, 오늘은 더 두려웠어요. 형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만약 계속 이렇게 두려워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하기 전에 제 자신이 먼저 저를 목졸라 죽였을 거예요."

여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허나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서로 보살피며 살고, 다시는 어제와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될 것이야."

두 사람은 우산을 받치고 처연하게 내리는 차가운 빗속을 걸어갔다. 여의가 해란의 팔을 바짝 잡아 당기자 서로의 그림자는 더욱 바짝 기대어졌다. 이렇게 해야만 이 깊은 궁중에서 어느 곳에도 없는 차가움과 음산하고 매서움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궁에 들어와서 여의는 먼저 해란을 데리고 뒷쪽 전각으로 가서 발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는 하늘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니, 예심이 몰래 이옥을 데리고 난각으로 들어왔다. 이옥이 문앞에서 잠시 머뭇거리자, 여의가 이옥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어찌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

이옥이 주저하며 말했다.
"소주, 소인이 마마께 골칫거리를 불러들였을까 두렵사옵니다."

여의는 손에 쑥잎을 들고 고르던 것을 멈추고 웃으며 말했다.
"본궁이 부족하여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 아니냐? 만일 귀찮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했으면 너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지금 왕흠은 함복궁에 계시는 황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으니 너를 신경 쓸 겨를이 없겠지."

예심이 이옥을 잡아당기자 이옥이 그제서야 다리를 절며 앉았다. 여의는 예심을 시켜 작은 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이옥을 앉히고, 예심이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이옥의 바지를 말아 올리자, 이옥이 황급히 가리는 것을 보고 예심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부끄러우면 직접 하세요."

여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걷어올려서 좀 보자꾸나. 본궁의 궁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냐? 이옥이 거북해하며 바짓단을 걷어올리자, 무릎이 붉은 가운데 푸른 붓기가 드문드문 섞여있는 것이 마치 물감을 칠해놓은 것 같았으며, 살갗이 뒤집어져 피가 스며있어서, 여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색이 변하며 물었다.
"얼마나 꿇어있었느냐?"

이옥은 꽤 상심하고 억울한 기색을 띠었다.
"한 시진 동안 깨진 기와 조각에 꿇어있었더니 기와조각이 모두 가루가 되어버려서, 다시 쇠사슬로 바꾸어 한 시진을 꿇어 앉아있었사옵니다."

여의가 조금 호기심에 차서 이옥을 훑어보았다.
"황상을 모시며 잠시 세심하지 못하여 벌을 받게 된 것이냐?"

이옥이 상심하여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공무 몇가지를 수행하면서 소인이 영민함을 조금 드러내었더니 황상께서 좋아하셨사옵니다. 허나 왕 부총관은 언짢아하며 무엇을 하든 모두 소인에게 트집을 잡사옵니다. 이는 오늘 하루 부총관에게 트집 잡혀서 호되게 벌받은 것이 아니옵니다."

여의가 한숨을 위며 손을 뻗어 자단목 선반 위에서 가루약을 한 병 꺼내 매우 조심스럽게 이옥의 상처에 뿌렸다. 이옥은 아파서 이를 드러냈다가 서둘러 감추고는 말했다.
"한비마마, 마마께서는 존귀한 몸이신데 어찌 소인의 이런 일로 마마를 귀찮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여의는 이옥의 손을 밀어냈다.
"이는 운남 검천에서 진상한 백약분이니, 삼칠초와 홍화를 곱게 갈아 섞은 것으로 피를 멎게 하고 어혈을 푸는데 제일 좋다. 내일도 어전에서 서서 시중을 들고 공무를 맡아 보려면 얌전히 앉아서 약을 바르거라."

예심이 웃으며 이옥의 이마를 쿡 찔렀다.
"너한테 이런 복이 다 있다니. 내가 마마를 모신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내가 화상을 입었을 때 딱 한번 소주께서 직접 약을 발라주셨다구."

이옥은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했다.
"망극하옵니다, 한비마마."

여의가 한숨 쉬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어젯밤 예심이 고하러 갔을 때, 네가 예심 대신 황상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면, 본궁은 어떤 처지에 굴러떨어졌을지 모른다."

이옥이 조금 정색했다.
"그것은 왕 부총관이 고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옵고, 또 예심과 소인은 일찍부터 안면이 있었사옵니다. 소인이 생각하기에, 좌우간 마마께서 함복궁에서 변고를 당하셔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 황상께서는 평소 연희궁에 그리 자주 머물지는 않으시지만, 분명 마음에 두고 계시옵니다."

여의는 조금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곧이어 말했다.
"이는 네가 왕흠보다 더 총명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왕흠은 경험이 풍부하고 지위가 높으니, 만일 너의 총명함을 마음 속에 잘 숨겨두지 않고 제멋대로 드러내면 자신을 해치게 될 것이야."

이옥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마마의 말씀은......"

여의는 예심이 넘겨주는 얇은 흰 비단을 가져다가 이옥의 무릎을 감쌌다.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때는 총명한 기색은 드러내서는 아니된다. 더욱이 상관이 다른 사람을 허용하지 않을 때는 말이지. 황상께서는 너의 총명함을 좋아하시지만 다른 사람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돌아갔을 때도 원망하는 기색은 절대 드러내지 말고, 왕흠의 명을 잘 받들어서, 어쨌든 왕흠의 아래에 있을 때에는 아랫사람 노릇을 잘 해야하느니라."

이옥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일어나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소인은 본래 어리석사옵니다. 마마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니 망극하옵니다."

여의는 약병을 이옥의 손에 쥐어주었다.
"약을 잘 챙겨두었다가 틈을 내어 잘 바르거라. 황상을 모실 때에는 좀 주의하고 기지를 십분 발휘해야 할 것이야."

이옥이 대답하고 돌아가자, 예심이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말했다.
"소주께서 결국 신경을 쓰셨군요."

여의는 잠시 멍해 있다가 천천히 쑥잎을 골랐다.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연쇄적인 수법이 이렇게 차례차례 닥치니 하마터면 어찌 죽어도 아무도 모를 뻔했다! 왕흠은 어떤 사람이더냐? 황후가 일찍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오직 이옥만이 총명하고, 또 너와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믿을만한 사람이지."

예심이 조용히 말했다.
"듣자하니, 황후가 왕흠을 끌어들이기 위해 측근인 연심을 왕흠에게 대식(对食)[각주:1]으로 주려 한다고 하옵니다."

여의가 눈을 번쩍 떴다.
"정말이냐?"

"그렇고말고요! 왕흠이 연심에게 반한 지 한참 되었사옵니다. 허나 황후께서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아직 말씀이 없으십니다."

여의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
"황후도 가련하구나. 만인지상에게는 만인지상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으니, 탑 꼭대기에 서있으면 작은 바람도 큰 바람이 되어 불어오니 사람이 발붙이지 못하고 동요하는구나."

여의는 손에서 잘 골라놓은 쑥잎을 예심에게 건네주었다.
"됐다. 이 일은 생각하지 말자. 이 쑥잎을 가져다 해상재에게 주거라."

예심이 대답하고 해상재의 처소로 갔다. 여의는 멀어져가는 예심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 속으로 탄식했다. 이 궁에서 또 누가 수월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찮기로는 궁중의 노비부터, 고귀하기로는 만인지상의 황후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가 고독하고 두려운 가운데, 작은 일에도 신중하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 하지 않겠는가. 밤이 스며들듯 내리깔리니 밤늦게 돌아온 새가 처마 밑에서 빙빙 돌며 꾹꾹 소리를 내었다.
"황상께서...... 오늘밤 누구의 녹두패도 뒤집지 않으셨다 하옵니다."
여의는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번다하여 가볍게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밤이 깊어질 무렵 여의를 보러 왔다. 여의는 본래 황제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여 이미 침전에서 장신구를 풀고 장미꽃 즙을 짜넣은 따뜻한 물에 마침 손을 담그던 참이었다. 갑자기 삼보가 몹시 기뻐하며 밖에서 들어오니, 마치 은자를 주운 것 같은 기쁜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소주, 황상께서 오셨사옵니다! 황상께서...... 마마, 어서 어가를 맞이하시옵소서!"

여의가 손을 문질러 닦고 몸을 일으키니 황제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향이 아주 좋은 장미로구나.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을 잊을 뻔 했다."

여의는 망우초 무늬의 물빛 침의를 입었을 뿐, 홑옷을 걸칠 새도 없이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황제가 서둘러 여의를 부축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이나 억울함을 겪었는데 어서 앉지 않고."

여의가 미동 조차 없는 황제의 옷섶을 응시하니, 밝은 하늘색에 은백색 무늬 장식이 그토록 익숙하면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해 낯설기도 했다. 여의가 미동 조차 없는 황제의 옷섶을 응시하니, 밝은 하늘색에 은백색 무늬 장식이 그토록 익숙하면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해 낯설기도 했다. 뭇 사람들이 눈치채고 서둘러 물러나왔다.
황제가 손을 뻗어 여의의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대는 곧잘 우는 사람이 아니지. 이번에 우는 것을 보니 참으로 그대가 고생했구나."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다만 소리죽여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있었다.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차례로 뺨에서 미끄러져 옷섶에 떨어지니, 옷에 스며들어 얼룩덜룩한 눈물 자국이 마치 밤에 내린 서리와 이슬처럼 소리없이 옷 위의 꽃가지를 물들였다.

황제가 여의를 품에 안아 조용히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흐느끼며 말했다.
"짐이 한동안 그대를 냉담하게 대하면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대를 주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제는 여의를 다시 한번 꽉 끌어안았다.
"모두 짐이 소홀한 탓이다."

여의는 눈물을 꾹 참았다.
"황상께서 소홀하셨어요. 바깥이 이렇게 춥고, 밤은 깊은데 황상은 아직 오지 않으시고......"

황제는 여의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댔다.
"오지 않으니 이곳이 평온하지 않구나."

여의는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럼 신첩이 양심전으로 가도 되어요."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여의의 이마에 입맞추고는 자신의 온기로 그동안 여의가 겪었던 놀람과 모욕을 위로했다. 황제의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지만 귓가에만 들리며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짐은 어제 그대가 함복궁에서 온몸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그대를 데려다 옷을 걸쳐주고 그렇게 그대를 업신여긴 사람들을 호되게 벌하고 싶었다. 허나 여의, 짐은 그리 할 수 없다. 그 짧은 시간에도 짐은 짐이 사람들 앞에서 그대를 아끼고 지키고자 하면 그것이 오히려 그대를 해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의, 다시 오늘의 일이 생기고 나서야 짐은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짐이 그대에게 냉담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대가 총애를 잃었다 여겨서 더욱더 득의양양하여 감히 그대를 얕보고 모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안심하거라. 짐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야."

여의는 황제에게 다정하게 기대어 있으며 황제의 몸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그녀가 환난을 당하던 와중에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여의가 부드럽게 말했다.
"신첩은 황상께서 그 말씀을 해주셨을 때 가장 기뻤나이다."

"무슨 말 말이냐?"

"마음 놓거라. 그 말씀이 있어서, 설령 신첩이 지금 당장 신형사에 가게 되었어도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사옵니다."

황제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로구나, 그대가 이해해서."

여의는 황제의 목을 끌어당겨 이마가 황제의 턱에 닿게 했다.
"신첩 알고 있사옵니다. 신첩이 처음 시집 온 그 날 밤, 황상께서 신첩을 보시고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바로 '안심하거라'였지요. 신첩 한평생 마음을 놓은 것이 바로 그날 시작된 것이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숙여 여의에게 입맞추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대가 이해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여의는 이해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 오랫동안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니, 설령 그녀가 이 며칠 적막함과 냉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런 애정을 느꼈으며, 말없이 은근히 굽이치는 감정이 두 사람의 마음 속에 있었다. 꽃무늬가 서린 적동 촛대가 하나하나 빛나고 붉은 촛농이 촛대 위에 방울방울 떨어지며 겹겹이 늘어진 짙은 주홍빛과 옅은 자주색의 비단 망사 장막을 비추었으며, 안신향의 담담한 향기와 뒤섞이며 깊고 그윽한 연기가 가득 퍼져 방 한 가득 온화한 기운이 있었다.

다음 날에는 각별히 날씨가 좋아서 갓 떠오른 태양빛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잠에서 깨어 하늘이 밝아져오는 것을 보고 있으니, 겨우내 한번 보기 어려운 태양이 옅은 금가루같은 찬란한 빛을 내리쬐어 기다란 창에 투각된 천지 사방에 봄이 가득함을 뜻하는 꽃무늬를 투과하여 방 한 가득 담담한 수묵화처럼 비추었다. 여의가 잠에서 깼을 때 황제는 막 일어나 용포를 입고 있었고, 왕흠과 궁녀 몇이 바쁘게 시중들고 있었다. 여의가 막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황제가 서둘러 여의를 붙잡아 놓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피곤했을 테니 좀 더 자두거라. 짐 먼저 가보겠다."

여의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제에게 화를 내는 듯 흘겨봤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황제가 떠나자마자 온 궁의 궁인들이 모두 매우 기쁨에 겨워 마치 명절을 맞은 듯 했으며, 아약이 웃으며 들어와 말했다.
"소주, 황상께서 문을 나서시며 무어라 하셨는지 아시옵니까?"

여의는 아약을 흘끗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대단한 말씀을 하셨다고 네가 이리 호들갑인 게야?"

아약은 말을 질질 끌며 황제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약, 너희 소주를 잘 보살피거라. 짐이 저녁에 다시 너희 소주를 보러 올 것이다."

여의는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건 그냥 네게 말씀하신 것이고 너는 그냥 듣기만 한 것이다."

아약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의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시(巳时)[각주:2] 일각[각주:3]이었으니, 마음 속에 걸리는 것 없이 근심 걱정이 없었고 지극히 편안하게 잤다. 일어나 몸치장을 하고 춘련(春联)[각주:4]을 몇장 쓰고 궁인들을 불러 붙이게 하고는 해란에게 함께 와서 아침식사를 하자고 불렀다. 

소주방의 요리가 본래부터 정갈하고 산뜻하니 해란 또한 가리지 않아 두 사람은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적잖이 먹었다. 마침 식사하고 있는데 삼보가 갑자기 들어와 문 옆에 서서 두 손을 드리우고 조용히 서있었다. 여의는 삼보가 중요한 일로 온 것을 알고는, 닭고기 죽순 탕을 그릇에 가득 담고 호로록 한 입 마셔보니 맛이 나쁘지 않아 해란에게도 한 그릇 넘겨주고나서야 비로소 말했다.
"무슨 일이냐?"

삼보의 눈이 오직 바닥만을 바라보며 "예"하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여의는 손을 흔들며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물러나라는 뜻을 내비쳤다.
"말해보거라."

삼보가 말했다.
"신형사에서 막 들은 이야기이온데, 태의원에서 약재를 취급하는 소태감이 자백했다 하옵니다."

여의는 잠시 멍해졌다.
"무엇을 자백했느냐?"

"말하기를 매답응이 쓰는 얼굴에 바르는 연고에 그 태감이 약을 조제할 때 주의하지 않아서 둥근 사발 안에 남아있던 백화단 가루가 들어가 이런 큰 화를 일으킨 것이라 하옵니다."

해란은 그릇을 받쳐들고 탕을 마시던 것을 멈추고 말했다.
"그럴리가. 사발 안에 남아있는 이상, 어떻게 소심이 쓰고도 아무 일이 없는데 매답응에게만 탈이 날 수가 있나?"

삼보가 피식 웃었다.
"그것이 말하기를, 소심은 윗쪽에 있는 것을 써서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옵니다. 매답응은 많이 사용해서 묻어났다 하옵고요."

여의가 말했다.
"그럼 신형사에서는 어찌한다 하더냐?"

삼보가 말했다.
"이미 고문을 당하며 이 두 마디만을 뱉어냈다 하옵니다. 그래서 마마의 뜻을 여쭈러 온 것이옵니다."

해란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형님은 믿으셔요?"

여의가 웃었다.
"그러면 너는 믿느냐?"

해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여의가 담담하게 웃었다.
"삼보, 가서 신형사에 말리거라. 본궁은 그 태감이 속에 있는 말을 다 토해내어 황상께 아뢸만한 결과만 알면 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일이다."

"허나 만일 호되게 문초해도 나오는 것이 없다면......"

"만일 이미 다 토설한 것이라면 곤장 오십 대를 치고 신자고로 내쫓아 복역하게 하면 마무리가 될 것이다."

삼보가 대답하고 물러갔다. 해란이 여의를 보며 말했다.
"형님께서는 더 자세하고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 일에는 일찍이 사전 모의가 있었고 고의로 형님을 해하려 한 것인데, 만약 조사하지 않으면......"

여의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탕을 마저 다 마시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사할 수 없다."
여의는 해란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더 조사하면 그 하나 남은 사람은 벌이 두려워 자진할 것이야. 혜귀비는 일을 여지를 남기지 않고 처리해버릴 수 있으니, 향운을 때려 죽인 데다가 입에 탄까지 집어넣어버리지 않았느냐.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되지."

해란이 말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커졌는데다가 귀비와 황후 모두 연루되었잖아요."

여의는 젓가락에 달린 가느다란 은사슬을 만지작거렸다.
"바로 귀비와 황후가 모두 연루되었기 때문에 더 조사해서는 안되는 것이야. 네가 누명을 쓴 그날 밤부터 필시 알았을 것이다. 그 홍라탄 사건은 조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황상께서 조사하기를 원하시지 않았던 것이지. 황상께서 이제 막 등극하시어 후궁은 조용하고 평화로워야 하니 그렇게 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 황상의 뜻이 이미 이러하니 나 또한 구태여 끝까지 따져들 필요가 있겠느냐?"

해란의 입가에 파문이 일며 한 가닥 웃음기를 띠었다.
"결국 이 일은 귀비가 일으킨 것이고, 황후가 매답응에게 형님에 대한 혐의를 몇 마디 일러주었으니 황상께서도 꺼리시는 것이군요. 매답응은 위로를 받았고 형님의 누명도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분란을 일으킨 황후와 귀비는 둘 다 모두 손해를 입었고 매답응은 공로도 없고 과실도 없게 되었지만, 형님은 오히려 황상의 관심을 다시 얻게 되었고요."

여의는 웃으며 해란을 추켜올렸다.
"당찮은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일이 이미 이렇게 됐으니 더 조사하는 것은 체면을 깎는 일이 될테니 이대로 두도록 하자."

밤이 되어 황제가 찾아왔을 때, 여의는 황제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이야기 했다. 황제는 밝은 황색의 침의로 갈아입고 드러누워 여의가 베개 옆에 엎드려 말하는 것을 끝까지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대는 이렇게 마무리하길 원하는가?"

여의는 손을 뻗어 황제의 코를 손가락으로 집으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황상의 말씀은 마치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시는 것 같사옵니다."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여의를 끌어안았다.
"짐이 무엇을 믿고 말고 하겠느냐. 궁 안이 온통 지저분한 것 투성이이니 후궁은 더욱 이러하지. 짐이 아직 황자이던 시절에 선황의 몇 안되는 후궁을 보니 어마마마와 제비 그들이 싸우는 것이 그렇게 매서웠지. 수많은 일이 다시 조사하면 할수록 끝없이 깊은 동굴 같았다. 그대는 적당한 시기를 봐서 기꺼이 물러나려 하니 그것은 몹시 훌륭한 일이다."

여의가 한바탕 웃다가 조용해지며 말했다.
"황상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바로 신첩이 생각하는 것이옵니다. 매사 다른 사람에게 여지를 남겨두면 자기에게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매답응은 확실히 억울할 것이어요."

황제가 한숨 쉬며 말했다.
"억울하다 하니 말인데,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느냐? 귀비는 자신이 억울하다 여길 것이고, 매답응도 억울하고, 그대와 해란은 언제 억울하지 않은 적이 있었느냐? 짐도 족히 억울하다. 조정의 일을 끝낼 겨를이 없는데 후궁은 또 계속해서 편안하지 않지 않느냐."

여의는 황제의 어깨 위로 엎드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들이 평온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일이옵고, 신첩은 평온하오니 황상께서도 평온하셔야 하옵니다."

황제가 웃으며 여의의 이마에 입을 맞추니, 서쪽 창 아래 붉은 초 한 쌍이 마치 밝은 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천지가 고요하고 어두워진 가운데, 두 사람은 처마 밑에서 얼음이 녹아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자연히 마음 속에서 평온함이 저절로 솟아났다.




- - - - -

1. 19장의 제목은 본래 '两败(양패, 쌍방이 모두 패배하다)'로, '两败俱伤(양패구상)'이라는 성어의 준말 입니다. '两败俱伤'은 '싸운 쌍방이 모두 손상/손실을 입다', '양쪽이 함께 망하다'라는 뜻으로, 장 끝부분의 해란과 여의의 대화에서 해란이 '황후와 귀비는 둘 다 모두 손해를 입었고'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직접 언급됩니다. 이 말 자체가 '쌍방과실'의 의미로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하고, 위의 뜻을 모두 포함하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해 '쌍방과실'이라 제목을 달았습니다만, 제목만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덧붙입니다.







  1. [역자주] 대식(对食): 본래는 동료가 되어 함께 밥을 먹는다는 뜻. 이후에 뜻이 변하여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궁녀들의 동성애를 의미하며, 제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궁중의 여인들이 이성과 접촉할 기회가 없어 여인들 간의 동성애를 가지는 것. 다른 하나는 궁녀와 태감이 부부의 연을 맺는 것. [본문으로]
  2. [역자주] 사시(巳时): 오전 9시-11시 [본문으로]
  3. [역자주] 일각(一刻): 15분. [본문으로]
  4. [역자주] 춘련(春联): 신년에 문이나 기둥 등에 써붙이는 주련 또는 대련 [본문으로]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