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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가랑비가 내리고 저녁이 되어 날이 개자, 초승달에 낀 어슴푸레한 달무리가 하늘가에 걸려있으니, 어릿한 상이 마치 눈물에 잠긴 듯 축축한 안개가 뒤덮여있었다. 여의는 졸음을 참으며 은비녀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을 뒤적여 밝히고는 망사 창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생긴 어른어른한 그림자가 바닥에 흩어지는 것을 보니 떨어지는 맑은 물 같은 한 무리 유유하게 빛나는 그림자였다. 정원의 몇그루 복숭아나무는 점점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니 고개를 내밀고 싶지 않은 듯 곱고 가냘픈 모습이 온 궁중에 봄기운이 다가오는 기쁨을 물들였다.


아약은 하품을 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소주, 좀 더 기다려보셔요. 오늘 상소가 많아서 황상께서 조금 늦으시나보옵니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찬물을 가져오거라. 얼굴을 닦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마침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왕흠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왕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지으며 예를 올리고 말했다.
"한비마마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였사옵니다. 황상께서는 방금 양심전에서 나오시어 본래는 연희궁으로 오시려 하였으나, 어째 혜귀비의 몸이 불편하시어 황상께서 길을 돌려 함복궁으로 가셨사옵니다. 그렇지않아도 황상께서 소인을 시켜 고하게 하셨사옵니다."

아약은 곧장 좀 언짢아졌다.
"왕 공공, 수고하셨네요. 그런데 전할 말이 있으면 일찌감치 와서 전해야지 어째 이렇게 늦은 시각에 소란스럽게 하시는지요?"


왕흠은 마치 부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도 성내지 않았다.
"그렇지않아도 황상께서 함복궁에 머무시면서 소인이 경사방에 문서를 기록하게 하려 계속 왕래하다보니 소인의 다리가 두 짝 밖에 없어서 이리 늦은 것이옵니다."

여의가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
"황상께서 쉬신다면 되었네. 귀비께서 어가를 시중드느라 고생하시는군. 밤이 깊었으니 공공은 조심해서 가시게. 삼보, 왕 공공에게 등을 들어드리거라."

왕흠이 손을 내저었다.
"어찌 감히 수고를 끼치겠사옵니까. 소인이 알아서 가겠사옵니다."

아약은 왕흠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황상께서 이리 혜귀비에게 끌려가시니 어쩌면 좋사옵니까?"

"어쩌지?"
여의는 '온 세상에 봄이 만연한' 것을 조각한 길다란 창을 바라보며 그 주홍색 칸칸이 세밀한 격자가 사람의 마음에 사소한 실수들을 조각해 만든 것 같았다. 여의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
"나는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구나."

아약은 초조하여 얼굴마저 붉게 물들었다.
"지켜보는 궁중의 여인들이 갈수록 많아지니, 오늘 오후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황상께서 또 매답응을 상재로 올리셨다 하옵니다. 마마, 보세요. 후안무치한 남부의 가기도 품계가 오르는데......"

"입 다물어라!"
여의가 느닷없이 외치자 아약은 고개를 들어 여의의 콧망울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 원망하지 못하고 그저 억울하여 말했다.
"소인은 소주를 위해 원통해한 것이옵니다. 소주께서는 어떤 몸이시옵니까? 그렇게 요염하고 귀비도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황상을 모시는 일을 다투고 황상 곁으로 가서 소주의 좋은 시간을 빼앗아 가지 않사옵니까!"

여의는 마음이 번잡하여 냉담하게 말했다.
"네게 입 다물라고 소리쳤는데도 아직 할 말이 이리 많고, 매상재의 신분이 아무리 낮고 미미해도 그 역시 엄연한 소주가 아니냐. 그리고 귀비는 또 어떤 신분이더냐. 네가 마음대로 이러쿵 저러쿵 지껄일 수 있는 신분이더냐? 이 연희궁을 나가서 누구 하나라도 너의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그 즉시 너는 신형사에 끌려가 맞아 죽을 것이다."

아약은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여 오로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떨궜다. 여의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아약이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더 모질게 굴지 못하고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너는 내 친정 시녀이니, 매사 나를 걱정하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아약은 그 말을 듣고 작게 "예"라고 답했다.

여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마음이 좋지 않으면 내 마음도 좋지 않다. 허나 사람이 마음이 불편하다 하여 자기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일단 내뱉어 버리면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상께서 아끼는 사람을 입에 올리면 그것은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는 일이 아니냐?"

아약은 마치 앵두알처럼 눈가가 붉어지며 고개를 들었다.
"소인도 소인의 성미가 급하고 입이 싸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소인이 어릴 때부터 소주를 모셔온 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말은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이 연희궁에서 감히 말씀 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인 뿐이옵니다."

여의는 본래부터 짜증이 났지만 아약이 어릴 때부터 자신을 모신 정을 스스로 말하는 것을 보고 더욱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으며 말했다.
"됐다. 네 마음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나가서 얼굴을 닦거라. 여기는 예심이 시중들면 된다."

아약은 무릎을 굽혀 절하고 전각 밖으로 나오자 마침 흐리멍덩한 달무리가 눈에 들어오니, 마치 여의에 대한 자신의 충심인 듯 느껴졌다. 언제나 꾸짖음을 들을 뿐이니 정말 억울함이 끝까지 치달았다. 아약은 눈물을 참으며 손수건을 내던지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쪽에 지키고 서있던 태감 소복자는 아약과 함께 잠저에서부터 모셔왔던 사람으로 '아약 누님'이라 부르며 웃으면서 다가왔다.
"소주께서 보내셨어요? 제가 차와 간식을 좀 준비해서 올릴까요?"

아약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너는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네가 마음 쓴다고 다른 사람이 네 마음을 꼭 알아주는 건 아니라고!"

소복자는 조금 놀랐다가 곧바로 알아들었다.
"소주께서 기분이 나쁘셔서 또 누님을 꾸짖으셨나요?"

아약이 듣고는 화내며 말했다.
"뭘 또 꾸짖어? 무슨 꾸짖을 일이 있다고! 내가 누구인지 안 보이니? 난 어릴 때부터 소주를 모시고, 친정 저택에서 잠저에 들어갈 때도, 궁에 들어올 때도 모신 사람이라고. 소주께서 뭐라 하셔도 그저 한 말씀 하신 것에 지나지 않아."

소복자가 서둘러 눈웃음치며 말했다.
"예예예. 그렇고말고요? 소주를 모시는 우리 시종들 중에서 누구도 누님만큼 소주와 가까운 사람은 없지요! 소주께서도 짜증이 나시니 뭐라 하신 것이지 조금 지나면 언제나 그렇듯이 누님을 예뻐하시지요. 게다가 누님의 아버님인 계탁 대인은 지방의 관리이시니, 앞으로 전도 유망할 것이고 소주께서는 더욱 누님을 아끼실 거예요."

아약은 이제서야 비로소 기분이 좋아져서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됐어. 안에선 예심이 시중들고 있으니 나는 먼저 가서 좀 쉴거야. 너는 소주께서 뭘 필요로 하시는지 부지런히 살피고 있어."

소복자가 굽실거리며 대답하고는 안쪽을 흘끗 보더니 소곤소곤 말했다.
"어째 또 예심이 시중 드는 거예요? 소주를 모시는 우리 몇몇 중에서 예심이 소주를 모실 때가 제일 많으니 마치 발바리 같네요. 사실 마음이 맞는 것도, 소주의 마음을 잘 아는 것도 누님에 비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아약은 입을 샐기죽거리며 하찮게 여기며 말했다.
"누가 알겠니? 평소엔 꽉 막힌 조롱박 같던 게 지금 혼자 소주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됐어. 아무튼 우리는 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소주를 몇년 모시지도 않은게 우리처럼 이렇게 오래 모신 사람들하고 비교나 되겠니?"

소복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러게요. 누님의 머리는 누구랑도 비교할 수 없죠."
소복자는 등롱을 켜서 아약의 발밑을 비춰주었다.
"누님, 조심하세요. 제가 길을 봐드릴께요. 조심, 발밑 조심하세요."

여의가 뺨을 괴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자, 예심이 팔보첨락(八宝甜酪)[각주:1] 그릇을 받쳐들고 앞으로 다가와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주께서 오래 생각하시느라 신경을 많이 쓰셨으니 달달한 탕으로 목을 축이시어요."

여의가 손을 내젓자 예심은 여의의 표정을 살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아약의 말도 틀리지는 않사옵니다. 아약이 너무 솔직하다보니 뭐든 곧장 입밖에 내어버리는 것이지요. 아약이 소주를 위해 걱정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옵니다."

여의는 걱정스러워 손수건을 꽉 쥐며 말했다.
"아약의 말이 틀리지는 않지. 허나 황상께서는 대부분 조정에 계시고, 후궁에 돌아오셔도 각 궁을 모두 돌아보시니 연희궁에 황상의 발걸음이 한동안 뜸해지는 것을 면하기 어렵구나."

예심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하옵니다. 궁중의 여인은 많으니 황상께서는 하나하나 보살피셔야 하나, 사실은 하나하나 냉대하시는 것이지요. 소인의 생각엔......"
예심은 슬쩍 여의를 보았다.
"마마께서는 방법을 생각하셔서 황상의 마음을 끄셔야 할 것이옵니다."

"황상의 마음을 끈다라?"
여의의 미간에 서린 근심이 마치 달빛을 가린 새카만 구름처럼 점점 더 짙게 드리워졌다.
"황후는 중궁이고 공주와 황자도 있지. 혜귀비는 신분이 높고, 순빈은 셋째 황자가 있고, 가귀인마저도 조선 종실의 여식이라는 신분이 있구나. 내게 당장의 황상의 은총을 제외하면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먼젓번 함복궁의 일이 있은 이래로 해란은 줄곧 두려워하고 있고, 실은 나도 두렵다. 의지할 곳은 없고, 은총 또한 오늘은 왔으나 내일은 가버리는 것이니 믿음직스럽지 않구나."

예심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그렇사옵니다. 게다가 태후, 태후께서는 소주께 항상 냉담하시니......"

여의의 눈빛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밝게 빛났다.
"태후......"

예심은 조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태후가 왜요?"

여의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어떤 생각이 은밀하게 마음 속에 떠오르자 문득 물었다.
"지금 황후는 어디에 있지?"

예심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 시각이면 분명 막 아가소에 둘째 황자를 보러 갔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나면 곧장 태후전으로 가서 문안을 올리시지요."

여의가 살짝 웃었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올리니 황후는 참으로 훌륭한 며느리로구나. 내가 어찌 황후를 본받아 황상의 어머님께 효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예심은 아연해져서 말했다.
"소주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소인은 하나도 모르겠사옵니다." 

여의는 아무 말 없이 정신을 놓고 팔보첨락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천천히 손짓했다.
"예심, 네가 보기엔 황상께 무엇이 가장 부족한 것 같으냐?" 

예심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황상께는 공주도 있으시고, 황자도 있으시고, 황후도 있으시고, 비빈들도 있으시고, 형제자매도 있으시옵니다. 조정에는 장정옥 대인과 고빈 대인이 보좌하고 있고, 후궁은 태후와 황후가 주관하고 계시지요. 천하가 태평하고, 황상께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으시니,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사옵니다." 

여의는 손가락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 황상께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예?" 

여의는 극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궁중에서 비록 깊이 숨기고 누설하지 않고 있지만, 너도 분명히 알 것이다. 황상께서는 결코 태후의 친아드님이 아니시지."  

예심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곧장 창가로 달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쓱 살펴보고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궁인들이 모두 멀리 떨어져 서있는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비로소 창문을 닫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사옵니다. 황상의 생모는 이전에 열하행궁에서 시중들던 궁녀, 이금계이지요. 우연히 실수로 선제의 총애를 받아 황상을 가지셨지만 한평생 제일 낮고 천한 궁녀에 지나지 않았지요. 듣기로 황상을 낳으실 때 난산으로 죽었지만 선제께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선제께서 일체 관여하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덮어버렸지. 그래서 황상은 어린 시절에 원명원에서 자랐고, 황상의 생모 이금계는 지금까지도 명분도 지위도 없고, 묻힌 곳도 어디인지 모른다." 

예심은 무척 놀랐다.
"소주의 말씀은......" 

여의는 손수건을 구기고 매듭을 비틀며 느릿느릿 말했다.
"황상께서 말씀은 아니하시지만 어쨌든 누군가는 말을 꺼내야지." 

예심은 대경실색하여 황망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주, 아니되옵니다. 이건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옵니다. 황상께서 동의하실지 아닐지는 물론이고, 태후께 그것은 약점이옵니다.  그 어르신은 이미 마마께 무심하고 냉담하신데, 생모의 그 일을 다시 들춘다면 태후께서는 분명 마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만일 내가 생모의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금계는 당연히 성모황태후로 추봉되어야 한다. 태후는 당연히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황상께서는 더더욱 내가 신세를 떠벌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시어, 곧장 나를 폐하여 냉궁으로 보내실 것이다. 안심하거라. 내가 모험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여의는 고개를 젓고, 예심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며 오히려 웃었다.
"내가 이 궁중에 있으며 태산처럼 굳건한 어떠한 의지처도 없을진대, 당연히 걸음걸음 조심하며 절대 가벼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이다."

삼월 초닷새는 본래 여의의 생일이었다. 황제는 전날 밤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왕흠을 보내 함께 여의의 열아홉 살 생일을 보내겠다고 알렸다.

여의의 생일이 오자, 내무부는 벌써부터 분주해져서 연희궁을 새롭게 꾸미고 특별히 새로운 요리와 간식을 만들어 여의가 맛보게 했다. 황제는 일찍부터 사람을 불러 생일 축하 국수와 일체의 감상용 기물들을 상으로 내렸다.

아약은 여의를 모시고 처마 밑에 서서 태감들이 정원을 쓸고 새로운 화초로 바꾸어 올리는 것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황상의 마음에 역시 소주가 계신 것이옵니다. 소주의 생신을 황상께서 매번 생각하고 계시니 말이옵니다."


여의는 자신의 걱정거리를 생각하느라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넋을 놓고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하늘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황제가 비로소 왔다. 아직 예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먼저 여의를 가로막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희월이 몸이 불편하다고 이틀 밤이나 소란을 피워서 짐이 곁에 있어 주느라 그대를 기다리게 했다."

여의는 온순하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비의 몸이 좋지 않으니 황상께서 곁에 계시는 것은 당연하옵지요."

황제가 한숨쉬며 말했다.
"희월의 몸이 좋지 않은데 스스로 마음을 괴롭히면서 항상 짐에게 대황자를 부양하고 싶다고 하는 구나. 희월이 그 몸으로 여덟 아홉살이 되어 한창 개구질 대황자를 구태여 맡을 필요가 있겠나?"

여의는 가슴이 철렁하며 어떤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여의와 황제는 술 두 잔을 마셨다. 차려진 요리도 제철의 신선하고 소박한 것이니, 시금치 달걀탕(菠菜蛋清), 양송이 찜닭(口蘑炖鸡), 감국(甘菊)[각주:2] 볶음(清炒马兰头), 바삭바삭하게 튀긴 목련 꽃잎(炸酥玉兰花片), 채소탕(浓汤菜心), 구운 사슴고기(烤鹿脯), 가리비새우 회(瑶柱虾脍), 원앙 튀김(鸳鸯炸肚), 아스파라거스 돼지고기 볶음(芦笋小炒肉), 쌍백합 메추리찜(双百合炊鹌子), 그리고 맑은 흰 제비집(燕窝雪梨爽) 한 그릇과 냉이와 고기채를 얹은 가는 국수(荠菜肉丝煨的银丝面)가 있었다.


황제는 국수를 두 입 먹고는 칭찬하여 말했다.
"지금 나는 제철 냉이의 향이 참으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구나. 그대는 이것을 어디에서 구해왔는가? 어선방에도 아직 올리지 않은 것을."

여의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신선한 것이 먹고 싶은데 어디 어선방을 기다릴 수 있겠사옵니까? 이것은 신첩이 꼭두새벽부터 친정 사람을 시켜 성 밖에서 캐오게 한 것이옵니다. 아침에 보내왔을 때 여전히 이슬이 맺혀있었다고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게도 그대가 마음을 썼구나."

여의가 방글방글 웃으며 황제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의 마음이 이 정도밖에 아니되겠사옵니까? 황상께서 입맛에 맞아 잘 드시고, 달게 주무시고, 두루두루 화목하고 모두 뜻한대로 되는 것이 바로 좋은 것이지요."


황제가 웃으며 여의를 끌어안았다.
"그대의 처소에 짐이 비록 매일매일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마음에 두고 있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 같다. 이 몇년 동안 그대의 성정도 많이 부드럽고 차분해져 짐에게 막 시집왔던 그 때 소란스럽고 호기롭던 것과는 비할 수가 없구나."

여의는 웃으며 고개를 드리워 황제의 어깨에 살포시 콩 기대었다가 바로 몸을 일으켜 예를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신첩의 생일이고, 신첩에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사온데, 황상께서는 귀중한 말씀으로 신첩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수 있으시온지요?"

황제는 웃으며 여의를 일으키며 말했다.
"짐과 그대는 여러 해 함께했으니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짐에게 말하거라."

여의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황제의 손을 따르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비록 신첩의 바람이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황상께서 이루어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황제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짐에게 그대를 황후로 세우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것은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짐에게 말해보라. 품계를 올려달라 하고 싶은 것이냐?"

여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신첩 어찌 감히 윗전을 생각지 않고 이리 제 마음대로 구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첩의 소원은 신첩과 무관하옵고, 황상과 관계가 있사옵니다."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호기심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음? 말해보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의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말이 입술과 이 사이로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선제께서 붕어하시며 남겨놓으신 온 궁의 비빈들에게 황상께서는 모두 품계를 더하여 모든 분들을 태비와 태빈으로 올리시고 수강궁 등지에서 보양하시게 하셨사옵니다. 신첩이 생각한 것은, 선제께서 젊으셨을 때 세상을 떠난 비빈들은 비록 지위는 조금 낮지만, 황상께서는 그들이 일찍이 선제를 모셨음을 생각하시고, 비록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지만, 황상께서 그들을 추봉하시고 그리하여 효심을 드러내시기를 청하옵나이다."

황제의 미간에 점점 내 천(川) 자가 새겨졌다.
"그대가 말하는 사람이......"

여의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선제께서 계실 때 열하행궁의 비빈이었던 이 씨 금계이옵니다."

황제는 대경실색하여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발칙하구나! 이 씨는 아무런 명분이 없고 선제께서 한때 발걸음하셨던 궁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추봉할 수 있단 말이냐!"

여의는 몸을 숙이고 간청했다.
"이 씨가 사직에 공로가 있음을 황상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허나, 대청에 공을 세운 사람이 강물의 물고기처럼 많으니, 일일이 기리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다만 청하옵건대, 황상께서 선제의 체면을 생각하셔서 설령 이 씨를 오직 태귀인으로 추봉하시더라도 선제의 비빈릉에 안장하시면 이 씨도 명예를 보전했다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도 냉담하여 어떠한 온기도 없었다.
"선제의 비빈을 마음대로 추봉한 것을 태후께서 아신다면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로지 태귀인이나 태빈으로 추봉하여 지위를 너무 높이지 마시고 그저 마음을 다하시옵소서. 또한 이 씨의 능묘가 열하에 있은지 한참 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비석 없이 쓸쓸하여 찬 연기만이 자욱하니 처량하기 그지없나이다."

침묵이 너무도 길고 오래되어 서로의 기나긴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시간조차 굳어져 흐르지 않는 듯, 보이지 않지만 켜켜이 엉겨붙으며 여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방울방울 맺히도록 압박해왔다. 여의는 바닥에 엎으려 감히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동안 이마에서 식은땀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니, 두터운 붉은 비단 융단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황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황제는 여의가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것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대의 생일이니 일찍 쉬거라. 짐은 뒷 전각에 해란을 보러 가겠다."
말을 마치고 황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문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여의는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것을 느끼며 마침내 무너져 황제가 떠나가는 훤칠한 뒷 모습을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외쳤다.
"황상......"

황제의 발이 문지방을 막 넘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어째서 짐에게 이런 소원을 꺼낸 것이냐?"

여의가 처량하게 말했다.
"신첩의 고모는 대역죄인이라 선제께서 용서하지 않으셨고 어떠한 명분도 허락받지 못했사옵니다. 그래서 신첩은 또다른 육친께서 일평생 소리 소문없이 받아야 할 것조차 모두 얻지 못한채로 고모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사옵니다."

황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순간, 황제는 갑자기 눈가가 조금 서늘해지는 것을 느껴서, 눈가에 반짝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도 보일 수 없는 양, 아주 미세한 것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는 손을 뻗으며 막 발견한 자신의 손끝에 맺힌 한 방울 눈물이 부드럽고 하얀 달빛 아래에서 마치 고요하고 차가운 이슬같다고 생각했다.

예심은 황제가 나가는 것을 보고 당황하며 들어와 말했다.
"소주, 소주, 황상께서 어찌 가시는 것이옵니까?"

아약도 발을 걷으며 넋이 나간 것처럼 뛰어들어오며 말했다.
"소주, 오늘은 마마의 생신이온데 황상께서 어찌 후전으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황상께서는......"

여의는 낙심하여 손을 흔들었다.
"말하지 말거라. 여기는 정돈할 필요없으니 물러가보거라."

아약은 여의가 예심만 남겨놓고 자신은 내보내는 것을 보고 조금 울컥하여 발을 내리고 물러났다.

예심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소주, 말씀 올리신 것이옵니까?"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털어놓았다.
"해야할 말, 하지 말아야할 말, 모두 다 해버렸다."

"마마, 이건......"
예심은 감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네가 실수했다고 말할 줄 알았다. 허나 누군가의 아드님이신 황상께서도 수많은 일들을 비록 말씀하지는 않으시지만 결국은 생모를 늘 그리워하시고 아들 된 도리를 다하고 싶으실 것이다. 오늘 황상께 벌 받을 각오를 하고 나도 이런 생각을 말씀 드려야 했다. 황상께서 만일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또한 황상 자신의 바람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니까."

예심이 급히 말했다.
"허나 오늘은 마마의 생신이옵니다. 황상께서 연회도 마치지 않고 가버리신 것은 분명 크게 화가 나신 것이옵니다. 마마, 그야말로 허사이옵니다!"

방금 불붙인 한 쌍의 붉은 초가 하나는 타오르고 하나는 가물거리며 위태롭게 일렁이며 빛나니 마치 언제라도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창살이 열린 틈으로 바람이 곧장 들이치며 전각 안으로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의 축축함을 몰고 들어와 손쉽게 적동 촛대 위에서 밝게 타오르던 촛불을 꺼버렸다.

어둠은 밤처럼 차갑고 소리없이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여의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끝없는 고독과 암흑이 그녀의 입을 막아, 여의는 뜨거운 눈물만 머금을 뿐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예심이 서둘러 말했다.
"소주께서는 기다리시옵소서. 소인이 가서 초를 가져오겠나이다."

여의는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 떨어지는대로 내버려두며 조용히 말했다.
"필요없다. 너는 나가보거라. 혼자 조용히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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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니 뭐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르겠네요. 살풀이라도 해야 하는지 자꾸 주변에 골때리는 일이 생겨서 '이것만 마무리하고 해야지' 하고는 하나 마무리하면 뻗고, 또 다른 거 치우면 뻗고 하다보니 한달이 그냥 지나가버렸네요;;; 그래도 골칫거리에 머리 싸매고 있는 것보다 즐거운 여의전 번역을 먼저 해버리는 게 더 낫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ㅎㅎ 이번 편 많이 많이 궁금하셨을텐데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 오늘 여의의 생일상에 올라온 음식 이름을 찾다가 중웹에서 지금까지 등장한 음식 이미지들을 정리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누구였더라가) 열심히 깐 호두부터 예심이 영황에게 준 간식, 오늘 줄줄이 올라온 음식들까지 다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옮겨와보겠습니다. :) 다른 건 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목련꽃잎 튀김은 저게 과연 무슨 맛이 있을까 싶네요 ㅎㅎ





  1. [역자주] 팔보첨락 (八宝甜酪):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 달콤한 젤리나 잼의 일종. [본문으로]
  2. [역자주] 감국 甘菊: 다년생 초본 식물로 그 잎은 마란두(马兰头), 마채(马菜), 어추채(鱼鳅菜) 계아장(鸡儿肠) 등이라 부르며 식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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