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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몸을 일으켜 동난각으로 갔다.

 "짐이 항상 보던 <춘추>를 가지고 오거라. 가서 책을 잠깐 볼 것이다. 그대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오면 다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여의가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예.
아약도 여의에게 뜨거운 물 한 대야를 따라주었다. 서난각의 등불이 환하여, 아약의 기쁨에 겨운 얼굴이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이니 마치 복숭아 꽃 같았다.

 

여의가 웃으며 아약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얼른 희희낙락한 얼굴을 감추거라. 황상께서 보시면 네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덤벙댄다고 생각하실 게야.

 

아약은 얼굴을 더듬으며 부끄러워했다.
 "
안 숨겨져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
그래, 그래. 하지만 기억하거라. 네 아비가 심혈을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전도유망할 것이고, 너도 좋은 앞날이 있을 것이다. 허나 자만하여 네 처지를 잊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이 눈여겨보게 될 것이야.

 

아약은 서둘러 대답하고 물러났다.

 

이날 밤, 황제는 여의의 처소에 머물며 다시 부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막내 태감이 침전 밖에서 야간 당직을 섰다. 아약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는 침전 안에서 모두 잠이 든 것을 보고 궁인들에게 등불 몇 개를 끄라 말하고는 자신도 쉬러 물러 나왔다.

 

아약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방안의 장식품을 둘러보니, 비록 궁녀가 머무는 곳이었으나 녹흔 등이 머무는 곳에 비하면 열 배는 더 좋으니, 이는 모두 자신의 지기 싫어하는 기질과 여의의 친정 시녀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아버지가 차츰차츰 승진하면 자신의 앞날도 조금은 희망이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약은 더더욱 득의양양해져서 방에 들어와 화장대의 구리거울 앞에 앉아 천천히 손을 씻고 장신구를 풀었다. 아약은 거울로 이부자리를 펴는데 열중한 쇄심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비록 너랑 내가 똑같이 소주를 모시는 궁녀지만, 오늘 황상께서 하신 말씀 너도 들었지? 앞으로 너랑 나는 더더욱 같지 않은 거야.

 

쇄심은 줄곧 아약과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요, 언니. 집안에 이렇게 큰 경사가 있다니요.

 

아약은 살구꽃 분첩을 조금 찍어다 꼼꼼히 얼굴에 문지르며 말했다.
 
“이 살구꽃 분첩은 정말 좋구나. 살구꽃 즙에 진주를 미세하게 갈아 넣은 거라 얼굴에 바르면 몸에도 좋지. 이건 우리 아버지가 특별히 밖에서 사람을 시켜 나한테 보내온 거라구.” 

아약은 눈가에 건방진 기색이 떠오르며 비스듬하게 쇄심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실은 아버지가 이렇게 모처럼 보내주시기는 해도, 평소 소주께서 나한테 상으로 내려주시는 물건도 적지 않지.

 

쇄심은 침상 위에 달린 술과 두루주머니를 정돈했다.
 
“소주께서는 당연히 언니를 아끼시죠.

 

아약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에 장식한 진주를 박아넣은 비단 꽃장식을 매만지며 팔에 기대어 말했다.
 
“소주께서 예뻐해 주시고 우리 아버지도 승승장구 하시니, 앞으로 넌 좀 눈치가 있어야겠다. 우리가 비록 같이 지내기는 하지만 엄연히 위아래가 있는 거야. 나는 팔기 출신이고 너는 이백 냥에 팔려왔잖니. 그러니까 앞으로 이 방을 꾸리는 건 바로 네 일이란 말이지.

 

쇄심은 다홍빛 술을 정리하던 손을 덜덜 떨다가 이윽고 말했다.
 
“알겠어요.

 

아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에 땀을 흘렸더니 찝찝해 죽겠구나. 넌 가서 내가 씻을 물 좀 길어와. 그리고 밤새 모기가 날 물어뜯지 않도록 쑥도 태워놓고.

 

이것은 본래 아래의 어린 시녀들이 하는 일이었다. 아약이 비록 평소에 좀 횡포를 부렸지만 이렇게 쇄심을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쇄심은 손이 축축해지며 쥐고 있던 향낭마저도 차갑고 습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날씨가 정말 더워서 손에서도 땀이 송송 솟아나는 것이었을지도. 쇄심은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오자 황제는 일찍 조정에 나갈 준비를 했고, 여의는 진작 황제가 일어나는 것을 시중들며 소복자에게 영황을 깨우고 상서방에 공부하러 갈 준비를 시키라고 일렀다. 황제가 막 나가려 할 때, 여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의 변발이 조금 흐트러졌사온데, 어차피 조회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신첩이 황상께 머리를 빗겨드리겠사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거울 앞에 앉아서 말했다.
 
“예전에 잠저에 있을 때는 그대가 꽤 자주 짐의 머리를 빗겨주었는데, 지금은 게을리하는구나.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부지런하려해도 황상께서 등극하신 이후로는 풍채가 조금도 흐트러진 적이 없으셨으니, 신첩이 생각하기에는 그저 그 머리가 신첩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지요.

 

황제는 웃으며 여의의 볼을 꼬집었다.
 
“갈수록 농담도 할 줄 알고.

 

여의는 무소뿔로 만든 빗을 가져다가 황제의 땋은 머리를 풀고 조금씩 세심하게 빗어나갔다. 황제는 여의가 빗을 꽃을 담은 물에 담그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가 머리를 빗는 이 물은 무엇이지? 평범한 느릅나무 물이 아니냐?

 

여의가 말했다.


 "
느릅나무 물이 뭐가 좋사옵니까? 신첩은 그 향을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이 물에는 박하, 오정()[각주:1], 고삼, 당귀, 새박뿌리, 말린 생강, 쥐엄나무 열매, 천마, 오디 열매, 비자나무 열매, 호두, 측백나무 잎 등 각종 약재에 겨울철 매화 위에 쌓인 눈 녹인 물과 느릅나무 꽃물을 섞고, 말리화와 치자꽃으로 단아하고 우아한 향을 입혀서 평소 머리를 빗을 때 사용하면 피를 보양하고 신장을 따뜻하게 해서 머리카락이 검고 숱이 많아지게 되옵니다.

 

황제는 온화한 바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본래 그대가 사용하는 물건이 세심하고 정교하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세밀함이 모두 이 안에 있었구나.

 

여의는 황제의 변발을 땋고는, 머리 끄트머리에 달린 밝은 노란색 금사 술에 비취 팔보 장식을 잘 묶고 나서야 웃으며 말했다.
 
“여인의 생각이라야 겨우 이런 작은 것들에나 미칠 뿐이지요. 황상 흉중의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옵니다.

 

황제는 여의의 손에 들린 무소뿔 빗을 보았다.
 
“짐이 기억하기로, 이 빗은 그대가 수년 동안 사용해온 것이지. 아마도 그대가 혼인 전부터 사용한 것일 테지.

 

여의는 빗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신첩은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좋아하옵니다.

 

황제는 여의의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붉히며 웃으니 점점 더 생기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백년해로한다고 말하지. 짐이 매일 그대의 꽃물로 머리를 빗으면 머리가 하얗게 세기는 커녕 그대와 검은 머리로 해로하지 않겠는가?

 

정원에는 순백색 치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 흰 빛과 같은 겨우살이 연지분에는 쌓인 눈 위에 더해진 서리처럼 온통 찬 기운과 서늘한 향이 가득했다. 여의는 반은 웃는 듯 반은 화내는 듯 황제를 부드럽게 흘겨보았으니, 그 기쁨은 눈 속에서 살짝 글썽이는 눈물로 변했다.
 
“황상께서는 신첩을 놀리는 걸 좋아하시지요.

 

황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짐은 그대보다 일곱 살 많지만, 세월이 아무리 길다 해도 손잡고 천천히 함께 간다면 언젠가는 눈썹이 하얗게 세어 함께 늙는 날이 올 것이야.

 

여의는 코가 조금 시큰해지며 눈에서 뜨거운 기운이 더욱 세차게 밀려들어 왔다. 궁중의 여인들은 정원에 끝없이 피어있는 치자꽃처럼 많았으니, 앞서 핀 꽃이 채 시들기도 전에 다른 꽃봉오리가 기다리지 못하고 벌써 피어났다. 그들의 인생은 아직 이토록 많이 남았으니, 황제는 스물여섯이었고 자신도 이제 막 열아홉이 되었을 뿐이었다. 앞으로의 나날에 얼마나 많은 향기로운 꽃에 벌이 에워싸고 나비가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이 진심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음속에서 감동이 마치 구름이 물결치듯 일어나니, 여의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가 되면 신첩은 쪼글쪼글 늙어버릴 텐데 황상께서는 보기 싫다고 하시면 아니 되어요.

 

황제가 말했다.
 
“그대가 호호 할머니가 되는데 짐이라고 늙지 않겠느냐? 이것이야말로 진정 둘이 마주 보며 싫증 내지 않는 것이지.

 

여의는 황제의 어깨에 손을 뻗어 머리를 그의 목에 기대고 그의 맥이 뛰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니, 마치 묵직하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여의는 비로소 대답했다.
 
“황상께서 바라신다면 신첩은 항상 황상과 함께 걸어갈 것이옵니다. 얼마나 멀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 항상 함께할 것이어요.

 

황제는 웃으며 여의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문득 여의의 진주 나비 귀걸이를 물었다.
 
“말로만 하면 안 돼. 짐은 그대가 답으로 물건 하나를 주었으면 한다.

 

여의는 얼굴이 온통 새빨개지며 황제를 살짝 밀어냈다.
 
“무엇이요?

 

황제는 검지를 들어 ‘쉿’하고는 여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저 거울을 보거라. 짐과 그대가 한 쌍을 이루고, 그림자도 한 쌍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

 

여의가 거울을 바라보니 한 줄기에 가지런히 핀 한 쌍의 연꽃[각주:2]무늬를 연이어 금가루로 장식한 거울에 꽃과 잎이 말없이 은근한 정을 띠며 모두 짝을 이루고 있었다. 여의가 키득키득 웃었다.
 
“신첩 생각이 나면 당연히 황상께 드릴 것이어요.

 

황제는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된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이 조금씩 밝아져 오는 것을 보았다.
 
“황상, 어서 가보시어요. 늦지 마시고요.

 

마침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니, 밖에서 부르는 영황의 어린 목소리였다.
 
“어머니.

 

여의가 서둘러 문을 여니 마침 아약과 소복자가 한 명은 영황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영황의 책을 메고 있었다. 영황이 들어와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아바마마께 문후 여쭈옵니다. 어머니께 문안 올리옵니다.

 

여의는 얼른 영황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사랑스럽다는 듯 영황의 머리를 쓸어올려 정리해주었다.
 
“자고 일어나서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구나. 어미가 다시 빗겨주마.” 

말을 마치고 여의는 빗을 들고 영황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영황은 눈을 껌뻑거리며 계획에 성공했다는 듯 기뻐했다.
 
“어머니, 소자 일부러 머리를 헝클었사옵니다. 그래야 어머니께서 제 머리를 빗겨주시니까요.

 

황제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느새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네 어미의 손이 부드러우니 머리 빗기가 훨씬 편하지, 그렇지 않으냐?

 

영황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행복한 얼굴로 황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황제는 마음에서 사랑이 샘솟아 영황의 손을 이끌며 말했다.
 
“아비는 조정에 나가보아야 하느니라. 허나 아직 시간이 이르니 아비와 함께 나가자꾸나. 아비가 오늘은 먼저 너를 상서방에 데려다주고 네 사부를 만나보겠다. 어떠냐?

 

영황의 눈에는 한줄기 기쁜 빛이 스쳤다가 곧바로 침착하게 말했다.
 
“소자,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는 문을 나서기 전에 배웅 나온 여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이 그대에게 미리 말할 것이 있다. 매상재의 회임은 짐이 등극한 이래로 처음 회임한 것이니 짐이 무척 기쁘다. 그러니 매상재를 귀인으로 봉하려 한다.” 

황제는 여의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허나 짐은 그대가 회임하기를 더욱 바란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짐은 모두 좋겠구나.

 

여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감히 얼굴에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온 힘을 다해 자제하며 말했다.
 
“신첩, 황상을 배웅하옵니다.

 

영황은 황제의 손을 꼭 잡고 나가면서 내내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아바마마, 소자 <논어>는 이미 다 외웠사옵니다......
영황은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여의를 향해 눈을 찡긋하고는 황제와 함께 나갔다.

 

아약은 궁문 앞까지 배웅하고는 싱글벙글하며 재빨리 다시 들어왔다.
 
“대황자께서는 아주 총명하셔서 조금만 가르쳐주어도 금방 깨우치셔요. 황상께서 친히 상서방에 데려다주신다면 앞으로 대황자께서도 다시 설움을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의는 미소짓고 있다가 문득 시선이 아약에게 이르자 주저해 마지않았다. 아약은 여의가 조금 좋지 않은 눈빛으로 보는 것을 느끼고 불안함에 귀밑머리와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애써 미소지었다.
 
“소주, 어찌 소인을 이리 보시옵니까?

 

여의는 눈빛에 온화함이 사라지고 냉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리 차려입으니, 황상께서 새로 봉하신 수답응도 금세 따라잡겠구나. 허나 수답응의 오만불손한 기색도 너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야.

 

아약은 조금 머쓱하여 붉은 앵두꽃과 가지가 얽혀 빽빽하게 수놓아진 소매를 문질렀다. 그 소매의 무늬와 색은 분명 궁녀를 시켜 뜯어내고 바느질하기를 한참을 바삐 일해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꽃송이마다 옥색의 꽃술을 박아넣고 푸른 이파리 두 장을 곁들여 비취색과 분홍색 옷감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아약의 수놓은 신발은 가장자리마다 꽃봉오리를 수놓았으니, 궁녀의 신발에는 본래 수를 놓을 수 있지만 수수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아약은 혹시라도 누가 보지 못할까봐 남색과 분홍색의 꽃신에 연지색 꽃봉오리를 가득 붙이고 푸른 실 한 가닥에 같은 색의 비단 꽃을 덧붙인 데다가 작은 쪽빛 진주를 끼워 넣어 더욱더 눈부셨다.

 

여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궁에 들어올 때 궁녀는 몸단장을 소박하게 하고 말과 행동거지가 경망스러워서는 아니 된다고 배웠을 텐데. 더욱이 옷차림과 치장은 보석과 옥 세공품처럼 안에서부터 바깥까지 광채가 뚫고 나오는구나. 네가 입은 분홍색에 비취색 옷을 보아라. 채색 유리구슬같이 오직 겉면의 광채만 탐하면 무엇하겠느냐?

 

아약은 얼굴이 새우처럼 빨개져서는 말을 하고 싶으나 감히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소인은 소주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산뜻하게 차려입은 것이옵니다.

 

여의는 거울을 마주하고 머리를 빗고는 쇄심이 풍성한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자 물총새 꽁지깃 몇 장으로 장식하고 다시 간소한 백옥 진주 비녀를 머리에 꽂고 나서 비로소 말했다.
 
“너는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냐, 아니면 네 아비의 공로가 너를 기쁘게 하기 때문인 것이냐? 너는 연희궁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궁녀이고, 쇄심과 같은 신분이니라. 허나 네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분은 옷차림에 기대어 얻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여의는 아약이 그저 옷자락을 비비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더욱이 황후는 궁중에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지금 비록 이전보다 여유가 좀 생겼다고는 해도 비빈들은 금 장식을 쓸 수 있지만, 궁녀가 눈에 띄게 치장한다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야.

 

아약은 여의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자 비로소 투덜거리며 말했다.
 
“소인도 소인과 다른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게다가 소주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니, 그래서.......

 

여의는 아약이 이리도 사리 분별을 못하는 것을 보고 어느새 성을 냈다.
 
“정월과 만수절(
寿)[각주:3] 외에는 궁녀는 붉은색 옷을 입을 수 없다. 네 옷과 신발을 보아라. 만일 바깥사람들이 본다면 반드시 곤장을 맞을 것이다. 곤장을 맞으면 아픈 것은 작은 일이지만 망신을 당하는 것은 큰일이니, 형을 집행하는 태감이 일말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옷을 헤치고 바지를 벗기면 수치스러워 죽을 것이야.

 

아약은 깜짝 놀라 서둘러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인은 그저 기뻐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사옵니다. 소주, 소인은.......

 

여의는 옥으로 된 잎과 금 매미가 달린 장식을 막 옷깃에 달다가 아약의 이런 꼴을 보고 어느새 답답해져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지금 입은 옷과 신발을 당장 벗어라! 설 명절이 오기 전까지 다시 입어서는 안 된다!

 

아약은 서둘러 대답하고 물러났다. 여의는 쇄심을 흘긋 보았다.
 
“저 아이가 이제 가문에 권세가 생기니 더욱 경망스럽구나. 너는 아약과 함께 지내고 있으니, 네가 좀 일깨워주거라.” 

여의는 쇄심이 그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저 성질에 내가 하는 말도 듣지 않는데 네가 하는 말인들 듣겠느냐? 네가 화풀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구나. 물러가 보아라.

 

쇄심이 방으로 돌아가자 아약은 중의[각주:4]만 입고는 화장대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옷은 아무렇게나 벗어서 침대 위에 던져 놓았으니, 마치 드문드문 구겨서 뭉그러진 꽃송이 같았다. 아약은 쇄심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급히 눈물을 닦고 울컥하여 말했다.
 
“쇄심, 솔직히 말해봐. 내가 이렇게 입은 게 분명히 예쁘지, 안 그래?

 

쇄심이 웃으며 말했다.
 
“예뻐요. 하지만.......

 

 “하지만 소주는 내가 너무 예쁘니까 소주의 위세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하시는 거지. 방금 내가 큰 황자님을 모시고 소주의 침전에 갔을 때 황상과 소주께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신 걸 보았다고. 나도 누구의 눈에 거슬릴 줄은 몰랐단 말야. 뜻밖에도 소주께서 나를 거슬려 하실 줄이야.” 

아약은 흐느껴 울면서 분개했다.
 
“분명히 내가 이렇게 치장하고 나갔을 때 너한테 물어봤잖아. 너도 내가 너무 주제넘었다고 보진 않았잖아.

 

쇄심은 적당히 웃어 보였다.
 
“그래요, 그래요. 내 생각엔 언니가 앞으로 황상께서 안 계실 때 이렇게 치장하면 탈이 없을 거예요.

 

아약은 그제야 기분이 좋아져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여의는 곁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금을 덧씌운 홍목[각주:5]상자를 열고 얇은 비단에 겹겹이 퇴수[각주:6]를 놓은 것을 한 겹 한 겹 펼쳐보니 지난날이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시집와 신혼 석 달을 막 채웠을 때였으니, 당연히 적당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없었다. 한가하여 그와 함께 책을 읽을 때, 곁에서 나는 묵향과 책 향기를 맡으며 한 땀 한 땀 가슴 가득한 동경과 행복을 수놓았다.

 

그때는 그녀가 막 자수를 배웠을 때여서 손재주가 서툴고 굼떴기 때문에, 앵두빛 매듭을 지은 손수건 위에 담청색 벚꽃을 진홍색 여지 몇알 옆에 흩어지도록 수놓았다. 어렴풋한 붉은색이 향기롭고 옅은 비취색이 농후했으니, 청앵과 홍력[각주:7]두 사람의 이름을 빗대어 서로 의지하고 포근히 안긴 모양이었다. 수를 잘 놓게 되었을 때에는, 그가 놀릴까 두려워 감히 내놓지 못하고 결국에는 상자 바닥 깊숙이 집어 넣어두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의 몸을 제외하면 이것 말고는 자신이 가진 것은 그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오로지 그 치졸한 진심만이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었고 이렇게 오래 남아있는 것이었다.

 

여의는 생각하다가 상아에 꽃을 투각한 작은 상자를 가져와 봉하고는 삼보를 들어오라 불렀다.
 
“황상께서 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양심전으로 보내거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

 

삼보가 대답하고 물러갔다. 여의는 창가에 기대어 옥처럼 새하얀 치자꽃이 한 떨기 또 한 떨기 피어있는 것을 보고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니, 나뭇가지 끝에서 맴맴 울던 매미와 연못에 갓 피었던 연꽃처럼 이 여름도 다 지나가 버렸다. 매귀인은 회임으로 인하여 진봉하게 되었으니 한순간에 권세가 대단해졌다. 사람들은 모두 매귀인이 이렇게 총애를 받으니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황상께서도 반드시 이 아이를 더더욱 예뻐할 것이라 여겼다.

 

영화궁이 이리 소란스러웠으니 함복궁도 고요하지는 않았다. 혜귀비는 일념으로 건강을 돌보며 언제나 태의를 불러 진맥하게 하고는, 또 아들 낳는 수많은 민간요법을 물어보는 등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렇게 칠석을 보내고 나니 곧 백중날(中元)[각주:8]이었고, 곧 가을바람이 서늘해져 연꽃과 마름[각주:9] 잎에도 무성하면서도 쇠하기 시작하는 왕성한 향기가 났으니, 마치 여름 내내 최후의 열정을 모두 불살라버리려는 듯 모든 힘을 다해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중추절이 다가오니, 장춘궁도 연심의 혼사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비록 궁녀와 태감의 대식이었지만 황후가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매사 관여하니 궁인들은 궁녀도 이렇게 중시한다고 황후의 부덕과 은혜를 찬양해 마지않았다. 팔월 열닷새 명절이 지나가고 열엿새에 모든 사람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식은 궁인들에게 큰일이었으니, 이 바람이 한 번 불면 많은 쓸쓸한 궁인들도 은혜를 얻어 서로 위안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연심과 왕흠이 모두 궁중 일을 맡아보는 하인이었기 때문에 태감들이 거주하는 행랑방 중에 다른 태감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동쪽의 제일 넓은 방을 골라 신방으로 삼았다.

 

이날 해질 무렵, 비빈들은 황후를 따라 함께 장춘궁 밖에서 연심을 배웅했다. 황후는 특별히 연심을 붉은 옷으로 갈아입히고 화려하게 치장한 후 자상하고 온화하게 말했다.
 
“비록 네가 궁중으로 시집을 가지만, 그래도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어찌 붉은 옷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느냐?

 

황후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모든 사람은 감탄하며 황후의 은덕을 칭찬했다. 연심이 눈물을 머금고 바닥에 꿇어앉자, 왕흠도 곧장 뒤따라 무릎을 꿇으며 수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황후마마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소인, 반드시 연심을 아껴줄 것이옵니다.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야지. 비록 너희가 진정한 부부는 아니지만, 앞으로는 한평생 함께해야 하니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여 본궁과 황상의 성의를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야.

 

연심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황후의 옷자락을 꼭 잡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손을 놓지 않았다. 혜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연심은 과연 예를 아는구나. 민간에서 혼인할 때 이렇게 울면서 시집가면, 울면 울수록 친정이 번성한다 하니, 너는 응당 황후마마께서 번창하시도록 해야 할 것이야.”

 

황후는 허리를 굽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연심의 손을 밀쳐내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보거라. 너에 대한 본궁의 기대를 잊지 말거라.

 

소심이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연심 언니, 축하해요. 이제 왕 공공이 잘 돌봐줄 거예요.

 

왕흠은 재빨리 연심을 부축하여 걸음마다 뒤돌아보는 연심을 데리고 한 무리의 궁녀와 태감들에게 둘러싸여 물러나왔다.

 

여의는 장춘궁에서 출가하는 연심을 배웅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온통 불편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영황을 겨우 달래서 재워놓고는, 등불 아래에 앉아 턱을 괴고 납란 용약의 <음수사()>를 펼쳤다.

 

쇄심은 붉은 대추를 넣은 흰목이버섯 탕을 받쳐 들고 와서 말했다.
 
“황상께서 매일 아침에는 제비집을 밤에는 흰목이를 드시라 재삼 당부하셨사오니 소주께서는 어서 드시어요. 그렇지 않으면 황상께서 염려하실 것이옵니다.

 

여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우선 내려놓거라. 먼저 책 좀 보고 나서 마실 것이야.

 

쇄심은 촛불을 조금 멀리 옮겨놓았다.
 
“소주께서는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고 계시옵니까? 촛불에 눈썹을 그을리지 않게 조심하셔요.

 

여의가 느릿느릿 읊기 시작했다.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와 흩날리는 꽃잎은 어디메뇨? 두꺼운 얼음, 쌓인 눈은 가혹하누나. 듬성한 한 그루 나무는 새벽녘에 더욱 소슬하니. 밝은 달은 내 마음을 알고 기쁨과 슬픔이 함께하는구나. 번잡함을 벗어던지고 버들잎처럼 가느다란 눈썹, 전생의 연분은 다시 이어지기 어렵나니. 서풍은 얼마나 한이 많아 불어도 흩어지지 않고 눈썹만 굽어지누나.” 여의는 감동이 복받쳐 올랐다.
 
“고관대작의 귀공자 답지 않게 납란용약이 뜻밖에도 부부의 정을 이리 중히 여기는구나. 녹색 저고리[각주:10]를 보며 죽은 아내를 애도하니, 슬픔이 끝이 없네.

 

쇄심이 흰목이버섯 탕을 뜨며 말했다.
 
“소주, 오늘은 연심이 출가한 경사로운 날인데, 이걸 보시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여의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귀비가 알게 된다면 분명 내가 연심을 저주한다 하겠지.

 

두 사람이 마침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약은 쑥에 불을 붙여서 구석에 두고 연기를 피우고나서는 커다란 경태람[각주:11] 항아리에 들어있던 얼음을 새로 갈았다. 아약은 망사 장막을 걷고 장막에 걸려있던 금사로 별꽃을 장식한 은제 구형 향로에 말리화와 자스민과 같은 향기 나는 꽃을 더해 넣어서 그 천연의 향이 이 비단 장막에 스며들게 했다. 꽃향기는 청아하고 온화하여 이 고요한 공간을 구불구불 에워쌌다. 별안간 고요한 밤중에 어디서 들여오는지 모를 높고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들려오니, 마치 누군가 가장 고통스러운 혹형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여의는 잠시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또다시 울부짖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처참하면서도 길게 이어지다가, 아주 빠르게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 빠져드는 것과 같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세 사람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약이 겁내며 말했다.
 
“저 소리, 태감 처소 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요.” 아약이 미심쩍어하며 말했다.
 
“태감 처소가 분명해요. 우리 연희궁이 제일 가깝잖아요.

 

쇄심은 조용히 촛불을 밝히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리는 마치......

 

아약의 눈이 커지며 은밀한 웃음기를 띠었다.
 
“연심!

 

다음 날 아침, 여의는 침전으로 비쳐 들어오는 금빛 햇살에 잠이 깨서는 까닭 없이 온몸에 식은땀이 살짝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음력 칠월 초가을이 되었지만, 아직 더위가 남아있었으니, 여의는 잠이 덜 깨서 누워 있으며 쇄심과 녹흔이 들어와 드리워진 대나무 발을 말아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새로 얼음을 받쳐 들고 들어와서는 낮은 침대 앞에 큰 경태람 항아리 안에서 하룻밤 동안 서서히 녹은 얼음을 새로 바꿔 갔다. 여의가 침대에 누워 있으니 몸에는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의 촘촘한 모양이 피부에 배겼다. 얇은 능[각주:12]에 수묵산수를 그린 부채를 부치며 작은 물방울이 그토록 커다란 얼음 조각에서 녹아 흐르며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상쾌한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돌연 어젯밤 적막을 깨고 들려온 슬프고 괴로워하는 두 번의 절규에 생각이 이르렀다. 그 소리는 마치 지극히 커다란 고통과 무기력함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여의는 조금 생각해보다가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의는 일어나서 몸치장을 할 때에도 조금 멍한 기색이 있었다. 쇄심은 여의의 머리를 빗겨주면서 말했다.
 
“어제 해 질 무렵에 노을이 가득하더니 오늘 떠오른 해도 붉고 뿌옇네요. 아무래도 조금 있다가 비가 내릴 것 같사옵니다. 비가 내리고 나면 좀 시원해질 것이어요.

 

여의가 말했다.
 
“장춘궁 문안이 끝나는 걸 기다렸다가 우산을 준비해두거라.

 

쇄심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 준비하고는 아약과 함께 여의를 모시고 장춘궁으로 갔다.

 

연심은 비록 새신부였지만 일찌감치 장춘궁으로 나와 시중들고 있었다. 뭇 사람들이 연심을 보니, 평범하고 수수한 궁녀의 의상을 입고 머리에만 색다른 비단 꽃을 꽂았으며, 기쁨이 넘치는 얼굴빛에 표정도 평소처럼 평안했다. 비빈들은 “축하하네”라고 몇 마디 인사를 건네고 각자 준비해온 상을 내렸다. 연심은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는 본분을 지키며 황후의 곁에 뒤따랐다.

 

황후는 미소를 띠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연심이 손목에 찬 새 옥 팔찌를 보고 말했다.
 
“네가 이리 치장한 것을 보니 왕흠이 네게 무척 잘해주는 모양이구나.

 

연심은 멍한 표정으로 조금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재빨리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홍복을 받자와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황후가 무척 기뻐했다.
 
“그렇다면 잘됐구나. 본궁의 성의를 헛되이 하지 말거라.” 황후는 소심을 불러 순금과 은으로 만든 한 쌍의 수()() 비녀를 비단갑에서 꺼냈다.
 
“소주들이 모두 네게 적잖은 선물을 보냈는데, 본궁은 너의 주인이니 너를 박대하면 안 되지. 이 비녀 한 쌍을 네게 주마. 왕흠과 네가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고 복을 누리며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연심은 몸을 흠칫 떨었으니, 마치 무척 기뻐하는 듯 보였고, 서둘러 몸을 굽혀 감사했다.

 

모든 사람들은 인사를 올리고 나서 함께 물러 나왔다. 이귀인이 담뿍 웃음 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자애로우시니 아랫사람들에게도 정말 잘해주시는군요.

 

가귀인도 말했다.
 
“연심은 궁녀에 불과해서 혼사를 내려준다 해도 꼭 좋은 집안에 시집가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왕흠에게 시집가서 한평생의 영화를 누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요.

 

순빈은 조금 안타까운 기색을 띠었다.
 
“아깝네. 왕흠은 태감인데 연심은.......

 

가귀인이 하찮게 여기며 말했다.
 
“태감은 그 덜렁거리는 물건 하나가 모자라지만, 모자란다 해도 뭐가 두렵겠습니까? 연심이 궁 밖으로 시집가면 잠깐은 그런대로 지내겠지만, 가난한 부부에게는 근심 걱정이 가득하다지요. 그러니 궁중의 영화를 지키는 것만 못하지 않겠어요?

 

순빈은 겸연쩍어하자 수답응이 가까이에서 직접 듣고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건 가귀인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네요. 우리는 생각할래야 감히 생각할 수 없지요.

 

매귀인은 천천히 걷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형님들 설마 어젯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신 건가요?

 

이귀인이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매귀인도 들은 것이오?

 

매귀인이 한 가닥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잘못 들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어렴풋이 태감 처소 쪽에서 여인의 비명이 두어 번 들리긴 했는데.

 

이귀인이 황급히 뒤이어 말했다.
 
“저도 들었어요. 허나, 제가 있는 경인궁은 아우님의 영화궁 뒤편에 있어서 그렇게 또렷이 들리지 않았죠. 바람 부는 소리인 줄 알았지요.

 

매귀인이 웃으며 손수건을 휘두르자, 뭇 사람들이 모두 온 정신을 다해 귀를 기울였니, 더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영화궁은 한비마마의 연희궁 뒤편이니, 이치대로라면 연희궁이 태감 처소에서 제일 가깝지요. 한비마마라면 또렷이 들으셨을 겁니다.

 

아약이 흥분하여 재빨리 말했다.
 
“확실히.......

 

여의가 곧바로 말을 잘랐다.
 
“확실히 우리는 일찍 잠들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네.

 

이귀인은 조금 골이 났다.
 
“그때는 그렇게 늦은 시각도 아니었는데 한비마마께서는 그저 말씀하시기 싫으신 것이지요.” 

이귀인은 아약을 훑어보았다.
 
“아약, 너는 한비마마를 시중드느라 분명 늦게 잠들었겠지. 너는 들었느냐?

 

아약은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란이 말했다.
 
“형님들, 함부로 추측하지 마세요. 설령 무슨 기척이 있었다고 해도, 태감의 비명소리도 여인의 비명소리와 그리 다르지 않아요.

 

매귀인이 웃으며 말했다.
 
“태감은 태감이고 여인은 여인인데, 그 정도는 구분이 되지 않나. 다들 생각해봐요. 태감 처소에 여인이 몇이나 있겠어요? 혹시......

 

순빈이 서둘러 염불을 외고는 한숨 쉬었다.
 
“허튼소리 말게. 이건 황후마마께서 내린 막대한 은혜일세. 우리가 이리 짐작하지만, 황후마마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걸세.

 

가귀인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벌써 장춘궁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설령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우리가 이야기도 못 한답니까? 저는 자초지종이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연심이 무엇 때문에 소리를 질렀을까요?” 

가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웃으니 소곤거리는 한 마리 생쥐 같았다.
 
“설사 남자는 본 적이 없고 태감을 보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좋아할 건 아니지요?

 

매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귓가를 문질렀다.
 
“아미타불. 무슨 우는 소리였는지, 밤중에 듣자니 괴이하고 소름 끼치더이다! 마치 가혹한 형벌을 받는 것 같더군요! 용종이 놀라서 제 복중에서 두 번이나 발을 차니, 하마터면 태의를 부를 뻔했네요.

 

이귀인이 곧장 맞장구쳤다.
 
“매귀인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에요. 얼마나 처참하고 처량하던지요. 저는 올빼미가 우는 줄 알았지 뭐예요.

 

가귀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했다.
 
“태감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연심이 내키지 않는대도 저 꼴이 날 수 있겠나?

 

순빈이 듣고 참지 못해 말했다.
 
“가귀인은 조선 출신이니 모를 것일세. 명조 때에는 환관이 횡포하게 굴어서 차마 볼 수 없는 더러운 짓이 많았다네."

 

수답응이 갑자기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사람들을 가까이 불렀다.
 
“아니 그렇사옵니까! 명조의 대 태감 위충현은 황제의 유모 각 씨와 대식하여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단으로 농락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궁녀 몇 명을 데리고 놀다가 죽게 했다고 하죠.

 

가귀인이 깜짝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다.
 
“여기도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수답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돈이 좀 있는 태감들은 밖에서 기녀를 첩으로 들였는데, 하나를 들이면 하나가 능욕당해 죽었다 합니다. 기녀도 견디지 못하는데 보통 사람은 어떻겠어요!

 

여의는 차마 들을 수가 없어 즉시 발걸음을 조금 재촉하며 해란과 함께 방향을 바꿔 모퉁이를 돌아 긴 거리로 들어섰으니 더는 그들과 한담을 나누지 않았다. 여의가 마침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비마마, 기다려주시옵소서!”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연심이 손수건 한 장을 받쳐 들고 서둘러 뒤쫓아 와 말했다.
 
“한비마마, 마마의 손수건이 장춘궁에 떨어져 있었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 소인을 시켜 마마께 가져다드리라 하셨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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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장부터 예심을 쇄심으로 바꿨습니다. 이제 쇄심이라고 불러주세요 :)

2. 오래 기다리셨죠ㅠㅠ 시간이 어쩜 이리 빨리 가는지... 여의전 본방사수 팡인으로 살다가 요즘은 못 보고 있습니다. 황썅력 너무 강해요. (드라마를 못보니 소설 번역으로 돌아왔습........)
2-1. 소설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드라마는 이미 다들 한바탕 하고 가셨네요. 남은 잠저 멤버는 이제 완빈과 유비 정도인듯요. 막강 황썅력과 위 씨 때문에 최근 드라마를 안 봐서 록균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곧 황후 마마께서 머리를 자르실텐데...... 마마, 빨리 잘라요.

3. 다음 장은 이번 장 절반 분량이라 금방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른 1권 끝내야죠. 드라마는 다음주면 끝날텐데요.

3-1. 주석이 많이 붙는 글이 되면 역자는 괴롭습니다.

3-2. 본문에 시가 나오면 역자는 괴롭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여기 나온 납란 용약의 시를 어떻게든 직접 번역 안하려고 누가 번역한 게 있나 논문까지 뒤졌지만 결국.... ㅇ<-< 저자는 왜 이렇게 안 알려진 시만 쓰는거죠?





  1. [역자주]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본문으로]
  2. [역자주] 并蒂莲花, 화목한 부부를 상징 [본문으로]
  3. [역자주] 황제의 탄신일. [본문으로]
  4. [역자주] 중의 (中衣): 겉옷 안에 입던 옷. 또는 속바지. [본문으로]
  5. [역자주] 홍목(红木): 마호가니. [본문으로]
  6. [역자주] 퇴수(堆绣): 각종 색깔의 비단을 오려 붙이고 속에 양털이나 솜을 넣어 입체감이 나게 만드는 수공. [본문으로]
  7. [역자주] 많이들 아시다시피, 홍력(弘历, hong(2)li(4))과 붉은 여지(红荔, hong(2)li(4))는 발음이 같습니다. :) 청앵은 푸른 앵두나무꽃/벚꽃이라는 뜻이죠. [본문으로]
  8. [역자주] 중원절. 음력 칠월 보름. 승려들이 재(齋)를 설(設)하여 부처를 공양하는 날로, 큰 명절을 삼았다. [본문으로]
  9. [역자주] 마름: 마름과의 한해살이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줄기는 물속에서 가늘고 길게 자라 물 위로 나오며 깃털 모양의 물뿌리가 있다. 잎은 줄기 꼭대기에 뭉쳐나고 삼각형이며, 잎자루에 공기가 들어 있는 불룩한 부낭(浮囊)이 있어서 물 위에 뜬다. [본문으로]
  10. 녹의(綠衣): <녹의>는 <시경>에 실린 유명한 도망시(悼亡诗,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남편이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매우 깊은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죽은 아내의 유물을 직접 보고 슬픔에 잠겨서 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린다. 옷을 보면 실을 잣는 것이 떠오르고, 죽은 아내가 집안의 일을 잘 보살폈음을 떠올리며 애석해한다. [본문으로]
  11. [역자주] 경태람(景泰蓝): 동기(銅器) 표면에 무늬를 내고 파란을 발라서 불에 구워낸 공예품. 명대 경태(景泰) 연간에 베이징에서 대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蓝色’(푸른색)을 띠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음. [본문으로]
  12. [역자주] 능(绫): 무늬가 있는 얇은 비단. 고운 생사(生絲)로 짠 윤이 나는 고급 문직(紋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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