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여의는 연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비로소 연심의 세심하게 칠한 연지분 아래로 두 눈꺼풀이 살짝 부어 있는 것이 보였으니 울었던 것 같았다. 여의는 마음속으로 알아차렸다. 연심은 평소에 비록 좀 오만 방자했지만, 지금은 가련하여 자기도 모르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
 “
정말 고맙구나.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구나. 어서 돌아가 보아라. 비를 맞으면 좋지 않다.”


아약이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
 “
비 좀 맞으면 어떤가요. 이제 연심 언니와 우리는 같지 않은데요. 비 맞으면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어요.”


여의는 작은 소리로 꾸짖어 막았다.
 "
아약, 궁으로 돌아가자."


아약이 두어 걸음 걸어가다가 발을 멈추고 몸을 돌려 방글방글 웃으며 연심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태감은 사람을 아낄 줄 안다던데, 연심 언니가 오늘 차려입은 것을 보니 확실히 왕 공공이 몹시 귀여워하나 보군요. 옷 입은 것이나 치장한 것이나 모두 같지 않네요.”


아약은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
언니가 왕 공공에게 시집가서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네요. 아들딸을 낳아 기르는 고충도 없고 어미가 되는 우환거리도 없잖아요. 그건 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얻지 못하는 복이지요.”


연심은 화가 치밀어서 두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창백해진 얼굴에는 검붉게 핏발이 선 두 눈이 아약을 노려보고 있었으며, 분통이 터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고 괴로웠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음이 분명했다. 한참을 있다가 연심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으니, 그 말투는 차갑기가 얼음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
그 복이 그렇게 좋다 하니, 네가 꼭 어느 공공과 대식하여 백년해로하고 죽어서도 헤어지지 않길 바라.”


아약은 화가 나서 눈을 크게 떴다가 곧바로 참으며 미소지었다.
 “
내가 어디 언니와 비교할 수나 있나요. 기껏해야 우리 소주께서 보살펴주셔서 아무래도 어전 시위한테나 시집가게 되겠죠. 그러니 언니와 왕 공공이 자식도 없이 백년해로하는 것이나 보게 되겠지요.”


여의는 명치께에서 불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이 화가 나서 외쳤다.
 “
아약,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한 번만 더 방자하게 굴면 엄하게 벌할 것이다!”


연심은 눈에 눈물이 가득하여 이를 악물고 힘껏 참을 뿐이었다. 여의가 큰 소리로 꾸짖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차갑고 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뭘 엄히 벌한다는 것이냐. 궁중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조롱하고 다니다니, 당장 끌어내 때려죽여야지!”


여의가 목소리를 들으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뒤돌아보았더니, 혜귀비가 말심을 거느리고 긴 거리의 주홍색 담 모퉁이에서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차갑고 엄숙한 눈빛으로 여의를 노려보니, 마치 여의의 몸에 투명한 구멍 두 개를 뚫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여의는 서둘러 몸을 굽히며 말했다.
 "
귀비마마께서는 평안하소서."


아약도 황망함을 금하지 못하고 서둘러 따라 말했다.
 "
귀비마마께서는 평안하소서. 마마께서는 용서하소서."


혜귀비가 차갑게 웃고는 아약을 쳐다보지도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
용서? 누가 너더러 궁중에서 방자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라고 했느냐? 감히 종사문(螽斯)[각주:1] 아래에서 자식이 없다는 이런 말을 떠들어대다니, 참으로 대역무도하구나!”


여의는 즉시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급히 다른 비빈들이 한담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 종사문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궁중에 지어진 종사문은 종사의 번식력이 강한 것에서 의미를 가져온 것으로 황실의 자손이 번창하여 천자의 제위가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아약이 이곳에서자식도 없이같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 대역무도한 일이었으나, 더욱 두려운 것은 그동안 항상 자식이 생기기를 바라던 혜귀비의 귀에 거슬린 것이었다.


여의는 황급히 몸을 굽히며 말했다.
 “
아약이 잠시 방자하여 경중을 모르고 실언을 하였으니 귀비마마께서는 용서해주시옵소서.”


아약은 대단히 놀라서 서둘러 무릎을 꿇고 말했다.
 “
귀비마마 용서해주시옵소서. 소인은 다른 뜻 없이 한 말이옵니다.”


연심은 귀비를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다른 뜻이 없어도 이런 박정한 말을 할 수 있다니, 소인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모든 것은 귀비마마께서 처분하여주시옵소서. 소인은 먼저 물러가겠사옵니다.”


말심이 한 가닥 비웃음과 혐오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
귀비마마께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종사문에 오시어 대청의 자손이 창성하기를 기원하시는데 너는 정녕 목숨이 필요 없나 보구나! 하물며 연심의 혼사는 황상과 황후께서 친히 윤허하신 것이니, 곧 사혼()이며 더없는 영광이다. 네가 뭔데 감히 이러쿵 저러쿵 제멋대로 지껄이고 비웃는 것이냐? 귀비마마께서 잠시 후 황후께 말씀 올리시면 황후께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약이 도움을 간청하는 눈빛으로 여의를 바라보자 여의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니, 그야말로 더 높은 지위에 있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아약은 손쓸 길이 없어서 그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부딪치며 말했다.
 “
소인, 연심 언니와 서로 알고 지내서 이렇게 농담한 것이옵니다. 용서해주시옵소서 마마!”


혜귀비는 잠시 침묵하다가 문 위의 편액을 가리키며 아약을 향해 말했다.
 “
대청의 역대 선조들께서 굽어보시니, 종사문은 궁중의 자손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가장 신성한 곳이다. 네가 감히 여기서 대역무도한 말을 입에 담다니, 본궁이 여기서 너를 처벌하여 역대 조상들께 바치지 않을 수 없다.”


푸른 바탕에 금칠한 편액에는 만·몽·한 세 종류의 문자로 나누어종사문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때 하늘은 어두워져 멀리서 검은 구름이 멀리 하늘가에서부터 밀려들어오고 있었으니, 오직 구름층의 갈라진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금실같은 밝은 빛이 편액의 금칠한 테두리 위에 떨어졌다. 그 눈부신 금빛은 사람의 눈을 매혹시키는 것이었다.


귀비가 눈짓하니 쌍희가 곧바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어린 태감 한 명을 손짓으로 불러 아약을 꽉 붙잡게 했다. 말심은 머리에서 은비녀 하나를 뽑아 다짜고짜 아약의 입을 찔러 대기 시작했다. 아약은 놀라서 얼굴에 핏기가 가시더니, 죽을 힘을 다해 피하며 계속해서 용서를 구했다. 말심이 몇 번 찔러도 피해버리자 화도 나고 증오심이 솟아서 자기도 모르게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여의는 서둘러 아약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
멈춰라! 아약이 잘못하긴 했으나 이렇게 찌를 수는 없다.”


혜귀비가 여의를 밀치며 경멸조로 말했다.
 “
본궁이 자네에게 노비를 엄히 가르치지 못한 죄를 아직 묻지 않았거늘, 네가 감히 저것을 감싸려 드는게냐!”


여의는 아약이 두어 번 피하려 했으나 피하지 못하고 입술을 찔려서 검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것을 보니, 보고있기에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여의가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
아약이 비록 잘못을 저질렀으나 귀비마마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제가 궁으로 돌아가 찬찬히 가르치겠습니다!”


혜귀비는 공들여 그린 눈썹에 엄하고 차가운 빛을 드러냈으니, 귀비의 아리땁고 온유한 얼굴과 무척 어울리지 않았다.
 “
네가 가르쳐봤자 제대로 못 가르치질 않는가. 본궁이 귀비의 자리에 있으니 자네 대신 아랫사람을 제대로 가르치겠다.”


여의는 아약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비록 연심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어 상처를 준 것에 화는 났지만, 아약의 입술에 난 상처는 안타까웠다. 마음 속으로는 점점 더 안타깝기가 이루 말할데 없었으나 그저 고개를 숙이고 말할 뿐이었다.
 “
마마, 저와 아약을 어찌 벌하셔도 감히 원망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궁녀를 때릴 수는 있으나 욕할 수 없고, 사람을 상하게 할 수는 있으나 얼굴은 상하게 할 수 없사옵니다. 아약은 여전히 궁에서 일을 해야 하오니, 상처가 있으면 어느 누구도 보기 좋지 않을 것이옵니다. 부디 귀비마마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옵소서.”


하늘에서는 낮고 무겁게 울리는 천둥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고 공기는 마치 아교처럼 끈끈해졌으니, 마치 누군가의 손이 가슴을 힘껏 때려 숨이 막힌 것 같았다. 귀비가 담담하게 웃으니 물기를 머금은 듯 빛나는 눈길은 으깬 얼음과도 같았다.
 “
아약은 체면이 필요 없고 너도 체면이 필요 없지만, 본궁은 필요하지. 말심, 너는 가서 황후마마께 고하거라. 아약은 말끝마다 불경하여 조상을 업신여기니, 종사문 아래에서 여섯 시진 동안 반성하고 시간이 다 되기 전에는 누구도 풀어줄 수 없다!”


말심이 의기양양하여 대답하자 귀비가 말했다.
 “
쌍희, 여기 남아서 아약을 지켜봐라. 본궁은 먼저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쌍희가 크고 우렁차게 대답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아약에게 말했다.
 “
소저, 이제 내가 모시겠소. 여섯 시진이면 우리 귀비마마께서도 이미 크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오.”


귀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한비에게는 《불모경(佛母)[각주:2] [각주:3] 백 편을 베껴 쓰는 벌을 내리니, 오늘 밤이 되기 전까지 다 쓰고 보화전에 보내서 불살라 사죄하도록 하라.”


여의는 예 하고 대답하고는 귀비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일어났다. 아약은 당황하여 무릎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여의의 다리를 끌어안고 말했다.
 “
소주, 소인을 구해주셔요. 소인을 제발 구해주셔요!”


그 길의 청석판 벽돌 위에는 모두 길상화문을 새겨놓았으니 어디인들 아프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여섯 시진을 꿇고 있으면 무릎 위에 형벌을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의는 화가 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여 마음 속에 만감이 교차했지만, 쌍희의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아 그저 아약의 손을 뿌리치며 무기력함에 분노하여 말했다.
 “
너는 지금 내게 구해달라 할 줄만 아는구나. 내가 네게 입조심하라 할 때에 너는 어찌 다른 사람을 웃음거리로 삼아 입을 놀리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후벼판 것이야! 너는 지금 나더러 누구에게 가서 청하라는 것이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어 귀비의 체면을 깎고, 연심의 상처에 모욕을 준것은 황후, 황상, 그리고 왕흠의 체면을 상하게 한 것이니 지금 어느 누가 너를 구할 수 있겠느냐! 여기서 꼼짝말고 얌전히 꿇고 있어라!”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감겨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전해져 오고, 기묘한 흙먼지 냄새가 바람 속에서 날려 흩어졌다. 비구름이 빽빽하게 모여들어 어두컴컴하게 하늘을 덮으니,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이 불 때마다 쏴아- 쏴아-하고 빽빽한 나뭇잎과 시들어가는 꽃을 떨구었다. 붉은 담장과 푸른 기와 아래에 떨어지니 희미하게 가느다란 음침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빗방울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하니 흙번지가 튀어올라 매캐하고 탁한 냄새가 났다. 여의는 보다못해 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쌍희에게 말했다.
 “
쌍희 공공, 아약이 여기 꿇고 있는 것은 그렇다 하나,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소. 여기 우산 두 개를 줄테니 하나는 자네가 쓰고 하나는 아약에게 주어 비를 맞아 몸이 상하지 않게 하시오.”


쌍희가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한비마마, 소인은 피부가 거칠고 살이 두꺼워서 빗방울 좀 맞는 것은 두렵지 않사옵니다. 허나 아약은 이미 벌을 받고 있으니 이렇게 돌보실 필요 없사옵니다. 설마 어느 날 저 매번 사고만 치는 입이 그 목을 치게 될 거라고는 해도, 마마께서는 칼이 너무 빨리 떨어질까 걱정이십니까? 됐습니다. 마마께서도 돌아가보시지요. 소인들과 함께 계실 필요 없으십니다.”


쇄심이 조용히 말했다.
 “
소주, 돌아가시지요. 《불모경》 백 편을 다 쓰지 못하면 귀비께서 또 책망할 것이옵니다.”


어두침침한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니, 천둥이 기세등등하게 머리 위에서 몇번 내리치며 물기 먹은 바람이 엄습하니 치맛자락이 날개처럼 불어 날렸다. 여의는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창문을 뚫고 거세게 불어오는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세찬 빗물을 맞은 초목과 흙냄새를 휘몰아 거침없이 궁 안까지 헤치고 들어왔다. 웅웅거리는 바람이 창을 두드리며 울렸으니, 흰 면사포로 만든 겹사 법랑 등불 네 개가 하마터면 꺼질 뻔했다. 여의는 서둘러 책상 위에 이미 반 이상 베껴 쓴 《불모경》을 챙겼다. 쇄심은 급히 창문 고리를 하나하나 잘 걸어 잠그고 다가와 먹을 갈며 말했다.
 “
비가 오후부터 내렸는데 어째 조금도 그칠 기미가 안보일까요?”


쇄심은 여의가 눈썹을 드리우고 경전을 베껴쓰는데 전념한 것을 보고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
소인이 만두 두 개라도 쥐여주고 오려고 살짝 가서 아약을 보고 왔는데요. 쌍희가 우산을 받치고 궁문에 앉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지켜보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여의는 붓이 떨려 글자 하나를 비뚤게 쓰고는 할 수 없이 구겨서 던져버리며 말했다.
 “
그래도 싸다! 재차 삼차 입조심 하라고 그리 말했건만, 제 잘난 것만 믿고 들은 척도 않고 남을 함부로 헐뜯지 않았느냐.”


여의는 말하면 말할 수록 원망스러웠다.
 “
사사건건 자기를 내세우려 하고 남 앞에 나서려고 하는 재주가 이렇게 방해받지도 않고 가로막히지도 않으니, 마땅히 오래 오래 기억해야지!”


쇄심은 감히 더 말하지 못하고 그저 연적에 물을 더해 붓고 세심하게 먹을 갈 뿐이었다. 여의는 마음 속으로 걱정이 되고, 또 혜귀비의 분부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는 수 없이 정성을 다해 불경을 베껴쓰며 조금이라도 혜귀비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을까 걱정했다. 간신히 열 몇 편을 남겨두고 여의는 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주룩주룩 퍼붓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야말로 채찍으로 수백 수천 번 바닥을 휘둘러 때리는 듯, 무수히 많은 새하얀 물보라가 피어올랐다. 여의는 귀를 기울이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
다들 뇌우가 금방 그칠 거라 하던데, 이 비는 어째 갈 수록 더 많이 내리는 것인가?”


쇄심은 여의가 마음 속으로 아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른 아침에는 더웠지만 비가 내리니 추워졌사옵니다. 아약이 폭우 속에서 꿇고 있으니 돌아오면 어떨지 모르겠사옵니다.”


빗물이 처마끝 내림새기와를 때리니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울리는 소리에 놀라, 여의는 마음이 더욱 더 초조해졌다.


여의는 마음 속을 가득 채운 근심을 삭이며 분부했다.
 “
여기 《불모경》은 금방 끝나니, 너는 기다렸다가 서둘러 함복궁에 보내어 알리거라. 그리고나서는 보화전에서 불태우고 결과를 알리거라.”


쇄심은 말로는 대답하면서도 여의가 분명히 아직 더 할 말이 있는 것을 알고 눈을 들어 여의를 바라보았다. 과연 여의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삼보를 들어오라 불렀다.
 “
아약이 꿇어 앉아있은 지 몇 시진이나 되었지?”


삼보가 서둘러 답했다.
 “
네 시진이 지나 곧 다섯 시진이 되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너는 태의원에 가서 내가 그다지 몸이 좋지 않다 하고 허 태의를 들라해라. 가서 풍을 다스리고 한기를 치료하여 내보내는 약도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삼보가 대답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여의는 다시 녹흔에게 말했다.
 “
가서 아주 뜨거운 물을 많이 가져오거라. 아약이 돌아오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게 해서 한기를 내보내야지. 그리고 두꺼운 이불 두 채도 뒤집어쓰고 있을 수 있게 아약의 방에 가져다두거라. , 생강탕도 미리 준비해두거라.”


녹흔이 여러 번 대답하자 쇄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소주께서는 아약을 여전히 아끼시는군요.”


여의는 고개를 저었다.
 “
아약은 나를 오랫동안 따랐으니 당연히 아끼지 않을 수 없지. 허나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너무 지나치구나.”


한참이 지나고, 여의는 《불모경》 백 편을 베낀 것을 쇄심의 손에 넘겨주었다.
 “
가보거라. 혜귀비에게 다녀오고나서는 네 할 일을 하거라.”


쇄심은 녹흔과 몇몇 어린 궁녀들에게 신신당부하고는 물러나와 밖으로 나갔다.


여의는 처마 밑에 서서 쇄심이 우산을 받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방의 축축하고 무거운 습기가 찬 기운을 머금고 옷에 스며드니, 마치 그녀의 몸이 함께 젖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늘이 어두침침하니 마치 깊은 밤과 같았고, 처마 밑 정원에는 수십 개의 등불이 빗속에 흔들리고 있었으니, 마치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도깨비불 같았다. 여의는 옷을 걸치고 서서, 쏟아져내리는 빗속에서 정원과 전각의 모퉁이가 점점 어두워지다가 흐릿한 실루엣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있었으니, 마음속에서는 끊임없는 근심과 망연자실함이 피어올랐다.


여의가 막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온몸이 흠뻑 젖은 사람 하나가 갑자기 궁문으로 뛰어들어서는 기진맥진하여 빗속에 엎어졌다.







  1. 종사문(螽斯门): 종사문은 서2장가의 남문으로, 남쪽을 향해 있으며 북쪽은 백자문(百子门)과 마주하고 있다. 종사는 여치·메뚜기의 일종으로, 번식력이 강하고 사이좋게 운다. 종사문의 전례와 고사는 《시경·주남·종사》에서 유래하며, 시경에서는 종사가 무리를 이루고 자손을 많이 낳으며 의좋게 지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황궁의 내정(内廷) 서육궁의 큰길로 난 문을 황실의 자손이 번창하고 천자의 제위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인 종사로 명명했다. [본문으로]
  2. 《불모경(佛母经)》: 《불모대공작명왕경(佛母大孔雀明王经)》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사저(莎底)라는 비구니가 땔나무를 베다가 검은 뱀에게 물려 위독해지자 아난(阿难)은 부처님에게 구해달라 간청하고, 부처님이 그에게 대공작 명왕신(大孔雀明王神)의 진언을 알려주고 그것을 외워서 사저를 구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역자주] 추가설명: '불모대공작명왕진언(佛母大孔雀明王眞言)'의 독송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공덕의 유형은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재앙과 환란을 제거하고 수명의 장수와 안락을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자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죄와 업장의 소멸로 인한 불법의 깨달음을 내포한다. [본문으로]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