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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가 총애 받는 형세가 이번의 일로 다시 전화위복이 된 후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여, 귀비의 총애와 대우에 비교해도 훨씬 대단했으나 여의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황제는 비록 사나흘에 한번 여의를 보러 올 뿐이었으나, 그 또한 가늘게 흐르는 물이 오래오래 흐르는 극진한 대우였다. 연희궁의 궁인이 궁궐의 긴 길을 걸어갈 때에도 가슴을 활짝 펴고 고개도 높이 치켜 들었으니, 이전의 눈썹과 눈을 낮게 내리깔던 모습이 아니었다.


여의는 궁인들의 이런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삼보, 아약, 그리고 예심에게 재차 삼차 당부하기를, 아랫사람들이 교만한 기색을 띠어서는 아니되며, 경망스럽게 굴어서도 안되고, 특히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며 함복궁과 분쟁을 일으켜서는 더더욱 아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당부하는 말이 많자, 다른 사람들이 어찌 하기도 전에 아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주께서 지금 이렇게 총애받으시는데 구태여 혜귀비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사옵니까? 게다가 궁중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지위와 세력을 가장 중하게 여기니 우리 눈치를 보아 공손하게 구는데, 배후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어찌 안답니까."

여의는 내무부에서 새로 보내온 겨울 옷감을 들춰보며 말했다.
"꿍꿍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겠느냐? 궁중의 사람들이 세력을 좇는데 너는 여전히 경망스러우니 그야말로 생각이 좁구나. 총애를 받건, 받지 못하건, 그들이 모를줄 아느냐? 네가 더 믿음직스러워져야 다른 사람도 비로소 네 밑바닥을 알지 못할테니 더더욱 함부로 굴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야."

예심이 여의에게 옷감을 펼쳐주며 웃었다.
"이 모피는 본래 배분된 것이 아니고 내무부에서 추가로 소주께 올린 것이옵니다."
예심은 모피를 아약의 손에 넘겨주고는 커다란 보따리를 풀며 말했다.
"여기에는 양털과 견사를 섞어 짠 나사(羅紗)천에 양가죽으로 옷깃을 두른 푸른 두루마기 두 벌과 장미빛 다람쥐 털로 안감을 대고 봉선화 무늬를 넣은 얇은 비단으로 만든 치마가 한 벌 있사온데, 이는 내무부에서 특별히 공경의 뜻으로 저희에게 보내온 것으로, 소주께서 받아도 되는 것인지 재차 삼차 물어보았사옵니다. 사실 내무부 사람들의 눈이 칼보다도 더 날카로우니 무엇이든 정말로 꼬치꼬치 따져야 하옵니다."

아약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탄복했지만 입에 가벼운 미소만 띠었다.
"황상께서 자주 오시니 소인도 참으로 기쁘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기쁠 수록 더욱 말소리와 얼굴빛에 드러내지 말아야 하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지. 됐다. 곧 새해가 다가오니 너희에게 보낸 옷을 모두 입어보거라. 보고 있어도 기쁘지 않겠느냐."

아약은 신나서 받아들었다. 이틀이 지나, 여의는 아약이 유난히 생기발랄하게 치장한 것을 보니, 안에는 푸른 나사천에 양가죽으로 옷깃을 덧댄 두루마기와 봉선화 무늬를 넣은 얇은 비단으로 된 치마를 입었고, 겉에는 장미빛 다람쥐 털을 댄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붉은 비단 조화와 구슬이 달린 머리 장식을 꽂았으니 온몸에 귀티가 흘러 궁중의 지위 낮은 소주에 뒤지지 않았다. 아약이 삼보와 함께 내무부에서 보내온 설맞이 물건들을 살피러 앞뜰에 나간 새를 틈타 여의는 예심에게 물었다.
"기억하기로 내무부에서 특별히 너와 아약의 물건도 보내주어 너희 한 명당 두 벌씩 가져야 마땅할 텐데, 어찌 아약 혼자 세 벌이나 입고 있는 것이냐? 나는 본래 날씨가 추우니 너도 어쨌든 그 청나사 두루마기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심은 감히 억울한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평소와 같이 웃으며 말했다.
"아약 언니가 반나절이나 고르고도 어느 것이나 모두 다 마음에 들어해서 제가 언니에게 주었사옵니다."

여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주었다고? 그 푸른 나사 두루마기 두 벌은 같은 모양인데 다 가져서 뭐하려고?"

예심이 고개를 숙였다.
"겨울 옷은 아무래도 바꿔가며 입어야 하니까요."

여의는 고개를 돌려 창에 쳐진 햇빛 가림막 너머로 마침 아약이 밖에서 낭랑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어린 궁녀 몇몇의 머리를 찌르는 것을 보니 무슨 가지고 놀기 좋은 물건을 받은 것 같았다.

여의는 한층 더 불쾌해졌지만 얼굴에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며칠 전 내무부에서 보낸 푸른 비단에 진주를 단 양가죽 윗옷은 내가 입기 조금 꺼려지니 너는 가져와서 겉에 입은 긴 치마 안에 입거라. 좀 불편하겠지만 괜찮을 거다. 그리고 같이 있는 복숭아 색 부드러운 비단 치마는 곧 신년이니 입으면 꽤 산뜻하니 예쁠 것이야."

예심은 눈가가 조금 붉어지며 조용히 말했다.
"소인은 소주의 친정 시녀가 아니오니 소주께서는 이리 소인을 아끼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여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약의 성질이 항상 남을 이기려 하고 입이 거칠어서, 네가 아약과 함께 지내면 비록 너희 둘 모두 지위가 높은 시비이나, 아약은 음으로 양으로 반드시 너를 적잖이 억울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내게 어떤 원망도 품지 않으니 내가 너를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심은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지었다.
"그럼 소인, 소주의 상을 감사히 받자옵나이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다. 입어서 보기 좋으면 내가 기쁠 것이니 그게 가장 좋은 것이지."

이 날은 섣달 초여드렛날이니 황제는 황후의 궁에서 납팔죽(腊八粥)[각주:1]을 들고는 황후와 함께 난각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후는 내부무 장부를 들고 넘기며 말했다.
"이는 이번 달 후궁의 지출이온데 황상께서 한번 보시지요. 신첩도 설명드리겠사옵니다."

황제가 느릿느릿 몇 장을 넘기고는 찻물을 불며 미소지었다.
"황후가 엄격히 절약하니 후궁의 지출이 적지 않게 절약되었소. 이는 모두 황후의 공로요. 다만 곧 새해인데 짐은 비빈들의 옷차림이 산해관 입관 때의 무늬와 양식인 것을 보았소. 아무래도 너무 고풍스러운 나머지 좀 딱딱하오."

황후는 매우 겸허하고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황상의 말씀이 지극히 옳사옵니다. 다만 신첩이 생각하기에, 궁중에 비빈이 적지 않고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더해질 때가 있을 것이옵니다. 모두 젊은 여인들이니, 평소에 아름다움을 다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사옵니다. 황상께서 처음 대권을 잡으시면서 조정에서도 또한 은냥을 사용할 때가 많으니, 후궁에서 아낄 수 있는 것은 조금 아끼는 것도 작은 성의이옵니다. 황상께서 딱딱하다 여기신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신첩은 반대로, 대청의 선조들은 본래 말 위에서 강산을 얻으시어 칼 한 자루, 창 한 자루로 목숨을 거신 것이니, 후궁의 비빈들은 더욱 선조의 고난과 공덕을 잊어서는 아니되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만을 추구해서는 아니되고, 더욱이 선조께서 산해관 입관하실 때의 검소한 기풍을 잃어서는 아니된다 생각하옵니다."

황제가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눈을 잠시 감으니, 차의 청량함이 각별히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짐이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보아하니 황후의 사려가 이미 이렇게 주도면밀했구려. 짐은 황후의 말이 마치 이 한 잔의 청차와 같아, 비록 입에 들어갈 때는 씁쓸하고 떫지만 돌이켜 음미하면 잔향이 있는 것 같소."

황후가 공손하고 정중하게 "예" 하고 대답했다.
"만일 황상께서 차맛이 너무 쓰고 떫다 여기신다면 신첩이 사람을 시켜 팔보차로 바꿔 올리겠나이다."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황후의 뜻을 짐은 모두 알고 있소. 허나 짐이 처음 후궁을 세우면서 잠저의 몇몇 사람들의 시중을 받으며 한때 후궁의 인원을 감축하였으나 짐도 차마 모질게 하지는 못했소. 게다가 그들은 모두 젊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을 좋아하니 분에 넘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오. 황후도 말했듯, 이제 곧 새해인데, 그들이 본래 두텁게 입은 옷은 구식 자수가 너무 무거운데다가, 마침 궁녀의 손에서 나온 이런 자수는 날렵하고 생생하지 않으니 지니고 있는 사람도 무겁고 답답해보이오. 본래 가볍고 선명한 옷감도 하나의 풍경이지."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황상의 말씀이 지극히 옳사옵니다. 허나 후궁에 뽑힌 비빈은 민간에서 첩실을 들이는 것과는 같지 않사옵니다. 단정하고 엄숙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겨야지, 만일 하나 하나가 치장하는 것만 알면 여우같은 짓만 하게 되지 않겠사옵니까? 요사스러운 것들은 하루 종일 황상께 치근덕거리는 것만 생각하고 황가의 체통은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황제가 마침 찻잔을 들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잔 뚜껑을 자기도 모르게 살짝 건드려 잔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난각 안은 본래 무척 고요했고, 겨울 햇살이 종이를 바른 창을 뚫고 따뜻하게 비추어 들어오니, 멀리 난각 밖에 서서 시중들고 있는 궁인들의 그림자가 아득했다. 청자 찻잔이 본래 얇고 낭랑해서, 이렇게 부딪히니 소리가 쟁쟁하게 귓가에 울렸다. 황후는 갑자기 두려워져 곧장 일어나 말했다.
"신첩이 실언했사옵니다. 황상께서는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황제는 잠시 잠잠하다가 황후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리 오랫동안 부부였는데 황후는 이리 할 필요 없소."

황후는 황제의 손에 의지하여 일어나니, 황제의 손끝에 하룻밤 지난 침수향의 향기가 느껴졌다. 황후의 마음에 문득 뭔가 떠오르며 그것이 연희궁의 향기임을 알아차렸다. 황후는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 속에 빽빽하게 스며드는 슬픔과 괴로움을 감추며 이전과 같이 미소로 황제를 대했다. 황제는 부부의 정을 생각하여 근래에는 자주 궁에 와서 자리를 같이 했지만, 랑화는 그런 부부의 정은 이미 점점 옅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날, 그런 꽉 붙잡지 못한 불안함과 공교로움이 겹겹이 몸을 내리눌러오니 랑화는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황후는 생각하다가 이윽고 평소와 같은 침착한 미소를 회복했다.
"신첩은 그저 황상을 생각한 것이옵니다. 이제 새해가 되면 각 궁이 모두 황상께서 많이 들러주시기를 바라오니, 특히 이귀인, 해상재, 그리고 완답응이 그러하옵니다."

황제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짐은 알고 있소, 혜귀비의 몸이 약해 짐이 자주 혜귀비를 보러 가니 황후가 질투하는 것이 아니오?"

황후가 방긋 웃으며 황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첩이 그런 사람이옵니까? 그저 육궁에 은혜가 골고루 돌아가기를 바랐을 뿐이옵니다."

황제는 웃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잡았던 황후의 손을 물리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짐은 해란을 보러 갈테니 황후는 쉬시오."

황후는 황제가 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두어 걸음 따라 가다가 어쩐지 모르게 마음에 시름이 가득하여 가볍지만 우울한 탄식이 입가에서 터져나왔다. 정월 초하루가 되니 그 날은 모든 궁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비빈들은 자녕궁에 가서 배알을 마치니, 태후가 화려하게 차려입고 몇몇 황자, 공주들의 재롱을 보니 각별히 즐거워 보였다. 태후는 대황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지만 삼황자는 특히 포동포동하게 컸는데, 어찌 대황자는 말라 보이느냐?"

대황자의 유모가 서둘러 말했다.
"대황자께서는 한달 전부터 입맛이 없고 노는 데만 열중하여,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눈밭에 가 계시니 풍한에 두 번이나 걸렸사옵니다."

태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자가 어리다 한들 주인인데, 너희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과실을 어찌하여 황자의 잘못이라 하느냐? 다음에 또다시 이런 말이 애가의 귀에 들린다면 즉시 끌어내어 장형을 내릴 것이다!"

그 유모는 서둘러 무안해하며 물러나왔다. 황후가 상황을 보고는 급히 이황자와 삼공주를 데리고 태후의 앞에서 함께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며 한참을 보내니, 태후의 심기가 비로소 풀어졌다. 비빈들이 물러가고 나서, 태후는 황제와 황후에게 가지 말고 남아 난각에 와서 이야기하자 하였다.

복가는 난각의 한 귀퉁이에 서서 곁에서 어린 궁녀가 향합을 넘겨주는 것을 받아 직접 구리에 은을 상감하고 말리화 문양을 새겨넣은 향로에 단향 한 수저를 더해 넣었다. 복가는 가느다란 연기가 층층이 비단 장막 사이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없이 물러나왔다.

태후는 황제에게 앉으라 명하고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최근 궁에서 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하는데, 황후가 모두 잘 대처하고 있소?"

황후가 평온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궁의 일은 소부(小婦) 비록 아직 손에 익지 않았지만 모든 일이 그런대로 괜찮사옵니다."

태후의 웃음기가 입가에서 살짝 굳어졌다.
"헌데 애가는 어째 황후가 대처하느라 바빠서 다소 챙기지 못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만? 그들이 함복궁에서 소란을 피우고 나서 또 양심전에서 법석을 떨었기 때문에 아무도 평안하지 않다던데."

황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첩이 나이가 어려 후궁의 일을 돌보는데 경험이 없어서......"

황제가 말했다.
"그대가 경험이 없어도 어마마마께서 경험이 있으시오."
황제는 미소를 띠며 태후를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후궁의 일에 수고를 끼쳐드리게 되었사옵니다.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어마마마께서 이끌어주시면 황후는 천성이 관대하고 너그러우며 어질고 지혜로우니 잘하게 될 것이옵니다."

태후가 말했다.
"애가는 몸과 마음을 보양하여 제 명을 다 누릴 생각이니 뭐든 내버려두고 관여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황후가 의지는 충분히 있으나 힘이 모자라는 것 같아보이는구려. 이 후궁에 모두 합해도 몇 사람 되지 않는데 황후가 아직 안정시키지 못한다 하니 정말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황후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깔아 아래만 바라보고 있으니, 오직 머리카락 사이에 드문드문 꽂은 몇송이 조화만이 보여서 마치 피지 않은 봄날의 꽃망울 같이 곱고 가냘픈 것이 조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마마마께 말씀 올리옵니다. 소부, 잘 알겠사옵니다."

태후는 손 안의 가남향나무에 금으로 목숨 수(寿) 자를 새겨넣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온 궁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궁인이 아니면 비빈들인데, 그들이 애가를 보러 오면 스스로 노비라고 칭하거나 신첩이라고 하오. 오직 황후와 황제만이 그리 칭하지 않고 애가의 앞에서 '소자', '소부'라 하니, 이는 자식이면서 또한 신하이기 때문이오.[각주:2] 그러니 황후, 애가가 황후를 아끼는 마음도 훨씬 더 크다오."

황후가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말했다.
"예."

태후가 살짝 눈을 감으니 마치 전각 안의 단향의 진한 향기를 맡는 것 같았다. 그 향기는 본래 가장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었으나, 황후의 가슴 속의 한 조각 심장은 마치 날개가 묶여 날아오르지 못하는 비둘기처럼 퍼덕거렸다. 마치 어릴 때 집안 사람들을 따라 불당에 참배하러 갔을 때, 수많은 꽃에 빼곡이 둘러싸여 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언제나 사람에게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지만, 그런 까닭에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참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크고 장엄한 불상 같았다. 황후는 항상 태후에게 방만한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이는 당시 궁을 옮기는 소란이 일어났을 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태후가 황제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만사에 무관심하게 자녕궁에서 편안히 지내는 구중궁궐의 노부인이 갑자기 이렇게 각성하고 날카로운 칼날 같이 한 마디 한 마디 그녀의 신경을 긁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아, 그녀는 실수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육궁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 자금성의 깊은 후원, 붉은 담장 안에 수십년 동안 스며들어 온 이 부인이야말로 진정한 육궁의 주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태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귀에 깊숙히 들어왔다.
"애가가 황후를 아끼지만, 그래도 가르침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소. 황후, 그대는 다급한 나머지 실수했소."

황후는 몸에 두려움이 엄습하여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니,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이는 겨울 중에서도 물방울이 얼음이 되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저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신첩 어마마마의 가르침을 공손히 받잡사옵니다."

"그대는 절약하고 검소하니 애가는 칭찬할 뿐, 지적할 것이 없소. 다만 황후, 그대가 엄격히 근검절약을 행하는 것은 옳으나, 후궁과 황상의 체면도 돌아봐야 하오. 강희제, 옹정제의 태평성세가 백년에 이르니, 국고는 넉넉하고 백성은 편안하여 맡은 바 일을 즐겨하오. 설을 맞아 외명부와 대신들이 알현할 때, 그들의 눈에 자금성에서 높이 군림하고 있는 비빈과 주인들이 그들만 못한 것을 입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아니되오. 신하와 백성들은 우리를 경외하고 숭배해야지, 조금이라도 얕보는 마음이 생겨서는 아니되오. 불당의 보살이 몸이 금으로 되어 있지 않고 자단목 좌대가 없다면 백성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절하겠소? 그들은 다만 초라해도 너무 초라하다고 말할 것이오."

황후는 온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태후가 계속해서 말했다.
"더군다나 황제 슬하에 저 몇 안되는 황자들 말이오. 황가를 위해 번성하여 자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만대에 걸쳐 이어져야 할 때에, 그대가 비빈들에게 막 입관했을 때의 여인들처럼 치장하게 하면 황제가 누구인들 보고싶어 하겠소? 여인의 생각이 자신을 단장하는데 머물지 않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을 감시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으니, 후궁 또한 안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오. 작은 일로 말미암아 큰 일을 그르치니, 황후, 그대는 참으로 너무 생각이 없구려!" 

황제는 태후의 어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평온한데 황후는 일찌감치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져있는 것을 보고 웃는 낯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마마마의 가르침이 옳사옵니다. 황후는 어마마마의 이 간곡한 타이름을 들었사오니 마땅히 다시 착오가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태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황후는 총명하고 품성이 고우니 조금만 가르쳐 주어도 금방 깨우칠 것이오. 허나 황후, 황후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오?" 

황후는 이미 생각할 기력도 없었다.
"어마마마의 가르침을 청하옵니다." 

"황후 슬하에 이미 공주 한 명과 황자 한 명이 있소. 허나 이로는 부족하지. 황후는 아직 젊고 중궁이니 후궁에 더 많은 적출 황손들을 낳고 잘 키워야 하오. 황후가 비빈들을 다스리는 것은 어떻게 하든 지나치지 않으나 한가지, 육궁을 평안하게 하여 황상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오. 나머지 일은 무슨 경천동지할 큰 일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오.

황제가 말했다.
"그럼 육궁의 일은......"


태후는 황제의 눈을 보며 조금 망설이다가 느릿느릿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태후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고요하기가 물과 같았으나, 황제는 그 눈빛이 강한 빛줄기 같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마음 속을 비추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황제는 태후의 뜻을 알아차리고 숙고하여 말했다.

"그럼 육궁의 일은 황후가 돌보고, 열흘마다 어마마마께 중요한 일을 여쭈면 어떻겠사옵니까?"

태후는 웃으며 옷섶에 달린 옥장식 술을 가지런히 했다.
"황상의 뜻이니 당연히 좋지요. 다만, 자녕궁은 고요한 것이 익숙하나, 황상은 애가를 한가하게 지내게 두지 않겠지요?"

황후는 곧장 알아듣고는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첩이 부족함이 많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태후가 웃었다.
"좋소. 그게 황제와 황후의 바람이라면 애가가 이 늙은 몸을 열심히 움직여야겠지요."
태후는 황후를 힐끗 보았다.
"황후가 그동안 행한 절약은 내무부에 일러 전처럼 하도록 하고 사치스럽게 낭비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비빈들이 평소 사용하는 것도 변함없이 하되, 옷과 장식 등의 차림새는 그들에게 말하여 상급의 물건을 예전대로 사용해도 되나 많이 써서는 아니된다 하시오. 한 계절에 한 번 사용하면 그만이오."

황후는 대답하고, 또 태후의 몇마디 분부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를 따라 물러나왔다.

복 상궁은 황후와 황제가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태후를 위해 물담배에 불을 붙이고 말했다.
"태후께서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신 것이 마침내 효과가 있사옵니다."

태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는 애가가 이렇게 다투어서는 아니된다 생각하느냐?"

복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태후께서 숙고하시어 주도면밀하게 살피시는데, 소인 감히 짐작할 수 없사옵니다."

태후는 까만 담뱃대를 들고 몇번 깊이 들이마셨다.
"애가가 이렇게 신경쓰지 않았다면, 자녕궁에 출근도장을 찍듯 문안 인사를 오는 것 외에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뒷방 퇴물이 되었을 것이다. 애가가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애가에게는 아직 유숙공주가 있으니, 애가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멀고 외진 준가르에 시집간 애가의 단숙공주처럼 되고, 애가는 말참견할 곳조차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황후의 친정인 부찰 씨는 본래 만주 팔대성씨 중 하나이고 황후 또한 지려하지 않으니, 일단 대세를 이루고 나면 어디 애가가 발붙일 곳이나 있겠느냐?"

복가가 감탄하여 말했다.
"평소 황후가 비록 자주 오기는 하나, 소인이 오늘 황후의 안색을 보고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탄복했나이다. 소인은 오늘 문안 온 비빈들을 냉정하게 관찰해보았사온데, 한비는 지난 날에 비해 의기양양해보이니, 황제께서 다시 총애하시는 것 같사옵니다."

태후가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우리가 사람을 쓰고 머리를 굴린 것이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느냐? 혜귀비는 다루기 좋고, 한비는 성질머리가 있지. 한비가 황상의 마음을 얻어야 황후에게 중궁의 권한으로 감시하고 있을 겨를이 없고, 우리는 비로소 손쓸 기회가 생길 것이야!"

복가가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태후께서 태후의 분부를 이루어 낼 수 있는 흡족한 사람을 고르셨기 때문이지요!"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며 이미 화가 가득 치밀어 올랐지만 오는 내내 감히 터럭만큼도 드러낼 수 없었다. 침전에 이르러 대문을 닫고 나서 연심과 소심만을 곁에 남겨놓고나서야 비로소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제께서 세상을 떠난 후로 황태후는 줄곧 세상일을 묻지 않으셨는데, 이번 일은 너희가 보기에 누가 태후의 면전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 것 같으냐?"

연심이 욕하며 말했다.
"당연히 그 이득을 보고 잘난체 하는 사람이 그랬겠지요!"

소심이 예심을 흘끗 보았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한비가...... 하지만 태후께서는 항상 오라나랍 씨를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한비의 말을 들으려 하겠사옵니까?"

황후가 차갑게 웃었다.
"한비가 당연히 악감정이 제일 크지. 허나 다른 사람도 말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후궁이 좀 조용한 것 같다고 네가 웃어 넘긴 것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를 드러내고 느닷없이 뒤에서 너를 물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소심이 염려하여 말했다.
"그러면 마마께서는 어찌하실 계획이시옵니까?"

"계획이라?"
황후가 살짝 웃었다.
"태후가 궁중에서 그리 절약하지 말라 하시고, 그들이 보기 좋게 꾸미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시니 그런 건 모두 괜찮다. 그들이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은 그들 일이고, 본궁은 황후이고 중궁이다. 그들과 한가지로 요사스럽게 꾸밀 수는 없으니 자연히 그대로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연심이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렇사옵니다. 그들이 총애를 다투기를 좋아하면 할수록 마마의 침착함과 대범함이 드러나고, 사치스럽지 않으니, 그야말로 육궁의 주인의 풍채와 도량이옵니다."

황후는 '탁' 하고 병안에 꽂혀있던 매화 가지 하나를 꺾었다.
"황태후가 본궁에게 열흘에 한 번 여쭈라 한 것은 그리 하면 된다. 후궁에 그리 큰 일이 얼마나 되겠느냐? 황태후가 한담을 듣기를 좋아하니, 본궁이 느긋하게 들려주면 그만이다. 허나 한 가지, 황태후가 맞는 말을 한 것이 있다."

연심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옵니까?"

"본궁은 중궁인데 중궁이 오직 일남일녀만 있으니 너무 적은 것이다."
황후가 읊조리며 말했다.
"이황자가 우리 눈에는 금지옥엽의 어린 후계자이나, 다른 사람들이 일찍 죽기를 간절히 바랄까 두렵구나. 그러니 중궁의 아이가 자연히 많을 수록 더욱 믿음직하겠지."

소심은 비록 걱정이 되었지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중궁의 권한이 바깥으로 옮겨지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꼭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옵니다. 마마께 태자가 수중에 있다면 무엇이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옵니다."

황후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래. 본궁이 한가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잠시 그렇게 지내보자꾸나. 또 무슨 일이 생겨도, 그것은 본궁의 이 육궁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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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의전 발행 의사 있는 출판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웃음)







  1. [역자주] 납팔죽(腊八粥): 음력 12월 8일 부처님의 득도를 기리기 위하여 사원에서 끓여서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승려에게 나누어 주는 죽. 좁쌀, 찹쌀, 땅콩, 대추, 마름, 연밥, 밤, 살구씨 등으로 만들며, 후에 민간 풍속으로 이어짐. [본문으로]
  2. [역자주] 다른 드라마 등에서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황가의 자녀들이 황제, 황후, 황태후 앞에서 자신을 칭할 때 '자식이자 신하'라는 뜻인 '아천(儿臣, érchén)'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왕가에서도 왕자녀들이 왕, 왕비, 대비 등에게 자신을 칭할 때 민가와 마찬가지로 '소자', '소녀' 등으로 일컬었고 '아천'에 상응하는 말이 없기 때문에(=제가 못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위해 위와 같은 호칭으로 번역해왔지만, 이 대목에서는 '아천'의 단어 뜻을 풀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주석을 남깁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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