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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영황이 이래로 여의는 점차 자신의 삶에서 차이를 맛보았다. 아이가 있으니 새로이 마음을 두고 의지할 곳이 생긴 것이었다. 이전에는 임금의 은혜가 오래 머물기만을 바랐다면, 이제는 오로지 영황에게 몰두하였고, 본래 조용했던 해란 역시 기꺼이 자주 와서 아이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영황은 매일 오경[각주:2] 일어나 공부하러 갔고, 여의도 항상 궁문 밖까지 영황을 배웅했다. 저녁 식사 시간 무렵에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 아래에서 영황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매일 저녁 식사 후의 시간은 모자가 가장 화목하게 보내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해란도 와서 함께 꽃모양을 본떠서 자수를 놓고, 때로는 여의 혼자 책을 들고 읽기도 했으며, 영황도 못다한 말이 있으면 여의의 무릎에서 뒹굴며 하루 동안 보고 들은 일을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여의에게 말했다. 아니면 태부[각주:3] 새로 가르쳐준 문장을 외우기도 하니, 줄곧 외지고 쓸쓸했던 궁중에 어린 아이 하나로 인해 즐거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영황으로 인해 황제가 연희궁에 오는 시간도 전보다 많아졌다. 이삼 일에 번씩은, 설령 여의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겸사겸사 영황의 공부를 상세히 물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총애를 받지 못하던 해란 역시 함께 영황을 부양하고 있기 때문에 귀인으로 진봉되었다.

 

여의는 비록 영황이 친자식은 아니지만, 어쩌면 이것이 이전에 태후가 말씀한 있는 ‘행복하고 뜻대로 이루어지는(美好如意) 것이 아닌가 줄곧 생각했다.

 

이와 같으니, 궁중의 사람들도 감히 여의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으니, 모두 여의가 까닭 없이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운수도 덩달아 펴진 것이었다. 서서히 후궁의 여러 사람들뿐만 아니라 함복궁도 각별히 정중하게 대했다. 비록 뒤에서는 혜귀비가 눈에서 불이 나도록 아이를 샘내어, 문턱이 닳도록 보화전에 달려가 불상 앞에서 아이를 점지해주십사 절했지만, 대놓고 여의 앞에서 지난 날처럼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다.

 

이날은 영황이 공부가 끝나고 조금 울적해하여, 이전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여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물어보기도 마땅치 않아, 저녁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영황을 데리고 어화원으로 갔다.

 

때는 한여름이라, 어화원에는 봉황죽이 울창하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넓고 트인 벽오동과 깊고 고요한 대숲에 높이 뻗은 대나무가 청량하고 고요하여 평온했다. 저녁 해가 서쪽으로 저물고 땅거미가 드리워지니, 북방의 봄은 느릿느릿 돌아가는 법이지만, 이미 보랏빛으로 곱게 화장하고 드리워져 있는 오동나무 또한 대부분 지기 시작하니, 무성한 위에 시들어 떨어진 남은 붉은 꽃잎들이 먼지가 되었다. 그런 울긋불긋한 번화함도 봄날의 한바탕 꿈에 불과하니, 최후에는 언제고 적막함이 가득하지 않겠는가? 여의는 반짝이는 별들이 점점이 하늘가에 떠오르는 것을 보니,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면서도 너무나도 멀어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처럼 아득해보였다. 손바닥에 있는 것은 오직 영황의 작디 작은 손이었다.

 

여의는 영황을 어화원 한복판으로 데려가서 맑고 시원한 속에 신선한 청록색 물방울이 맺힌 새로 연잎 아래에서 헤엄치는 붉은색 금붕어를 보니, 비취와도 같은 푸른 물결에서 금붕어가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의는 영황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손에 쥐어주고 자잘한 버드나무 잎을 연못에 담그어 흔들게 하니 금붕어들이 서로 앞다투어 장난치고 먹으려 들었다.

 

영황은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한바탕 놀고 나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여의는 따르는 이들에게 눈짓으로 물러가라 명하고는 웃으며 영황을 바라보았다.
 
“영황아, 기분이 나아졌느냐?

 

영황은 나뭇가지를 물에 넣고 휘저으며 장난쳤다.
 
“어머니, 소자 조금 괜찮아졌사옵니다.

 

여의는 연못가의 돌난간에 기대 앉아 영황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왕 기분이 나아졌으니, 마음 속에 담아둔 말을 어미에게 말해도 괜찮단다. 오늘은 어째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게야?

 

영황의 눈빛이 조금 움츠러 들었다가 자신의 신발 끝을 보며 비비적거렸다.
 
“어머니......

 

영황이 주저하듯 말을 하려다 마니, 여의가 부드럽게 말했다.
 
“돌아올 새로 지은 비단옷이 어딜 봐도 모두 깨끗했는데 오직 무릎 부분에만 흙먼지 자국이 묻어있더구나. 설마 태부께서 네게 무릎 꿇는 벌을 내리신 것이냐?

 

영황은 괴로워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오늘 영련이 상서방에 왔사옵니다.

 

여의는 마음 속으로 조금 놀랐지만 입가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째 황자가 이제 여섯 살이 되었는데 벌써 글을 배운단 말이냐?

 

영황이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도 오셨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영련은 이제 어리지 않으니 소자와 함께 책을 읽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오늘 상서방에 새로 태부 분이 오셨는데, 태부와 태부셨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새로 오신 태부께서는 모두 대학사이시니 우리에게 말씀 들으라 하셨사옵니다.

 

여의가 미소지었다.
 
“그건 일이로구나. 내일 어미도 너와 함께 가서 태부들을 만나보아야겠구나.

 

영황은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내버리며 불평했다.
 
“하지만 태부들은 소자에게 잘해주지 않으십니다! 영련은 분명 오늘 처음 공부하러 와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는데, 태부들이 뜻밖에 제게 상서방 밖에 시진을 꿇어앉아 있으라 벌하시니, 저를 가르치시던 태부도 감히 말리지 못했어요. 태부가 말하기를 다음 태자는......

 

여의는 곧바로 눈치챘다.
 
“태자가 어쨌단 말이냐?

 

영황은 실의에 빠져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무엇을 태자라 하는 것이옵니까? 태부가 태자라고 말하니 태부가 큰소리를 쳐서 말렸사옵니다.

 

여의는 이유 없이 가슴이 조여들었지만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미도 무엇을 태자라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아가, 태부의 말씀에는 대부분 깊은 뜻이 있으니, 너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묻지 말거라. 이야기는 하면 안되는 것이야. 말해보거라. 태부가 무어라 했니?

 

영황은 영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울며불며 하소연했다.
 
“진 태부가 말씀하시길, 다음 번에 영련이 말을 듣지 않으면 소자를 어두운 방에 가두어 열을 다스리게 하겠다고 했사옵니다. 

영황은 무척 두려워했다.
 
“소자, 열을 다스린다는게 뭔지 알고 있사옵니다. 작년에 소자가 감기에 걸렸을 , 어멈이 태의를 부르지도 않고 오히려 소자를 어두운 방에 가두고는 먹을 것도 주지 않았어요. 그때는 정말 너무 무서웠어요! 

영황은 여의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저는 다시는 열을 다스리고 싶지 않아요!

 

여의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고 두터운 구름이 여의의 심장을 짓누르는 같이 어찌할 바를 몰라 영황을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
 
“착하지. 어미와 친모는 모두 비빈의 신분이라 신분도 둘째 황자만큼 존귀하지 못하단다. 앞으로 상서방에서 공부하면서 억울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야. 

여의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잊지 말거라. 너는 아바마마의 아들이고 어미가 보살피고 있으니 태부들이 너를 괴롭히도록 두지 않을 것이야.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태부에게 그들이 이렇게 너를 벌하는 것을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냐고 말하거라.

 

영황은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어머니, 정말 그렇게 말해도 돼요?

 

여의는 격려하듯 영황을 껴안았다.
 
“너는 아바마마의 장자니라.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두어서는 아니된다. 유모든, 그게 누구든지 간에, 어미는 누구도 너를 업신여기게 두지 않을 것이야.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순빈이 깊은 수심에 잠겨서 뒤따라 오는 것을 발견하니, 순빈이 뒤에서 불렀다.

 "한비마마....."

 

여의는 순빈의 안색이 다른 날과 다른 것을 보고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주워 영황의 손에 쥐어주며 얌전히 놀고 있으라 당부했다. 순빈이 분주히 문안 인사를 올리고 다가와 여의의 손을 잡으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주룩 흘러내릴 같았다. 여의는 서둘러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인가?

 

순빈은 눈물 어린 흐릿한 눈으로 마침 물고기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영황을 보았다.
 
“듣자하니 대황자께서 오늘 상서방에서 무릎 꿇는 벌을 받았다면서요?

 

여의는 놀랍고 이상하여 순빈을 데리고 멀리 오동나무 아래로 가서 말했다.
“자네가 어찌 아는가?

 

“상서방의 소율자가 본래는 궁에서 일하던 아이이온데, 일찌감치 상서방으로 보내서 나중에 영장이 상서방에서 공부하게 되면 돌보게 하려고 했었어요. 방금 생각지도 못하게 정원에서 소율자를 마주쳤는데 일을 들었어요. 

순빈이 슬쩍 영황을 살펴보았다.
 
“대황자께서 억울해하시지요?

 

여의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모두 후궁이라서, 황후 소생의 존귀함에 비할 없는 것도 있지.

 

말이 순빈의 가슴 아픈 일을 떠오르게 하니, 순빈은 눈가가 조금 붉어지며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대황자께서도 이러하신데, 우리 영장은 앞으로......

 

여의는 급히 위로했다.
 
“황후가 영장을 아끼니, 영장을 돌보는 사람들은 가장 세심한 자들이지. 영황도 부러워하지 않겠나.

 

순빈은 감히 얼굴에 눈물을 보이지 못하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숙이고 여의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저는 바로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해요. 오늘 황상께서 아침 수라를 처소에서 드셨는데, 뜻밖에도 영장이 그렇게 총명하지 못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순빈은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 영장이 어째서 총명하지 않다는 거예요?

 

여의는 살짝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영황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영장이 기는 것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더군. 유모와 어멈들이 안지 않고 업기만 해서 한번도 바닥에 내려놓아 적이 없다고 . 이제 십사 개월이 되지 않았던가? 걸음마는 떼던가?

 

순빈의 눈에서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걸음마를 못하는 것이 유모들이 어디 부딪히기라도 할까 겁을 내서 그런 거였어요. 그러니 황상께서 보시기에 이렇게 영장이 걸음마도 느리고, 배우는 것도 느리니 총명하지 않다 하실 밖에요. 아이가 이렇게나 어린데 아바마마의 예쁨도 받지 못한다면 저는 어쩌면 좋아요?

 

희미한 별빛이 나뭇잎이 갈라진 사이로 바스락 바스락 떨리듯 몸에 희미한 빛무리로 떨어졌다. 여의가 말했다.
 
“아가소의 유모들이 아이들을 세심하게 돌본다고 자네가 자주 말했었지. 이제 보니, 세심함이 결국 아이를 망쳤구나.

 

순빈도 애가 탔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어떻게 감히 하겠어요. 황상 앞에서 마디라도 꺼냈다가는 황후의 고심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황후는 자기 둘째 황자와 셋째 공주에게는 이렇게 마음쓰지 않잖아요.

 

여의는 문득 어떤 의심이 들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순빈에게 먈할 수는 없는 것이니, 걱정과 근심을 더해줄 , 순빈이 어떻게 있는 것이 있겠는가? 여의가 타일러 말했다.
 
“황상께서는 그저 화가 나시어 그리 말씀하신 것이겠지. 다음 번에 다시 황상을 뵈면, 우리 대청은 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니 아이를 응석받이로 키울 수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황상을 자주 모시고 아가소에 가서 살펴보게. 황상께서 때때로 관심을 가져주시면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곘구나. 게다가, 아비와 아들 사이의 혈육의 정은 타고난 것이야. 많이 보시고, 영장도 그렇게나 사랑스러우니 황상께서도 어여삐 여기실 것일세.

 

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빈의 근심이 명주실 타래처럼 끝이 없이 길고 깊어서 스스로를 겹겹이 옭아맸다.
 
“영장에게 복이 있어서 만일 마마의 슬하에서 양육될 있다면 저도 영장을 자주 있었을 텐데요. 이제 보니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여의가 정색했다.
 
“이런 생각이 들어도 생각해서는 아니 되네. 지금 궁에서 지위는 높으나 자식이 없는 비빈은 혜귀비 뿐이니, 자네는 당연히 수긍하지 않을 것이야. 영황은 아무래도 아가소에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니 내게 보낸 것이지만, 영장에게는 절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네. 자네의 이런 생각을 혹여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라도 한다면, 황후뿐만 아니라 황상께서도 자네를 책망하실지도 몰라.

 

순빈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여의가 서둘러 말했다.
 
“어서 눈물을 닦고 돌아가보게. 누가 보고 험담할지 몰라.

 

순빈은 비단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형님께도 이제 아이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형님께 자주 와서 여쭐게요. 함께 방법을 생각해보아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마음 놓고, 내가 들어줄테니 이렇게 울기만 해서는 안되네.

 

순빈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처소로 돌아갔다. 여의는 순빈의 고독하고 앙상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순빈도 어미일 뿐이라, 자기 아이가 평안하기만을 바랐다. 허나 깊은 궁중에서 그것만은 얻을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자신은 어떠한가? 하루 아침에 자기 아이가 생겼지만, 이렇게 처량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려야하지 않던가?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여의는 손을 흔들어 영황을 불러서 함께 천천히 궁으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이따금씩 물고기가 수면 위로 튀어 올라 물보라가 일어났다. 연잎이 수면을 가득 덮고, 개구리밥이 떼지어 자라는 가운데, 분홍빛 수련 두세 송이가 일찍 봉오리를 틔우고 있었다. 백로 마리도 붉고 푸른 창포와 갈대 주변에서 서로 깃을 고르고 있엇다. 영황은 어느 것을 보든 기뻐하며, 웃고, 떠들고, 여의의 손을 끌면서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여의는 입으로는 대답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의 의심이 떨쳐지지 않고 빽빽한 명주실처럼 단단히 옥죄어 오는 같았다. 여의는 힘을 다해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반드시 어두워지고마는 하늘처럼, 맑은 물에 퍼져 나가는 먹물처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여의가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 가산 뒤편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너무나 가냘퍼서, 잘못 들으면 끊임없이 찌르찌르 우는 여름 벌레 소리로 여기기 좋았다. 여의는 침착하게 내색하지 않고, 조심성 없는 소리로 말했다.
 
“영황, 어서 돌아오너라. 귀뚜라미 잡으러 가산에 가면 아니 된다!

 

가산에서 들려오던 울음 소리가 즉시 멈추니, 여의는 영황에게 아무 소리 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궁녀처럼 보이는 여인이 가산 뒤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여의가 영황의 손을 놓자, 영황은 즉시 알아차리고 귀뚜라미를 잡으려는 것처럼 달려가다가 여인에게 부딪혔다. 궁녀가 고개를 들고 욕을 하려다가 여의가 영황 뒤에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는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한비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여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궁은 당연히 평안하지. 그런데 연심, 자네는 어찌 안색이 좋지 않은가? 

예심이 손에 풍등으로 연심 얼굴의 눈물자국을 비추었다.
 
“눈이 울어서 복숭아 같이 되었는데 어쩐 일이랍니까?

 

연심은 무의식 중에 얼굴을 만져보며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말했다.
 
“소인, 황후마마를 모시고 있사온데 무슨 좋은 일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고향 생각에 어쩌다 뿐이옵니다.

 

여의는 연심이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네가 황후마마를 모시려면 만사에 조심하여야 하니, 얼굴에 눈물 자국을 드러내서는 아니 것이다. 

연심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황후마마께서는 자네와 소심을 무척 아끼시니, 당연히 자네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는 것을 보시면 좋아하시지 않을 것이야.

 

연심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으나, 말을 듣더니 어째서인지 고개를 떨구고 옅은 그늘같은 암담함을 드러냈지만, 더욱 고집스럽게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당연히 저희를 아끼시옵지요. 어릴 때부터 따른 유모를 궁에서 내치는 그런 박정한 사람과 비교할 없사옵니다.

 

말은 여의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는데, 아약은 곧장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구 이야기야?

 

연심이 밝게 미소지었다.
 
“당연히 내가 말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아약, 너는 뭐가 그리 안달이니? 어쨌건 이야기는 아니니 네가 그렇게 신경쓸 필요 있니?

 

아약은 언제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냐는 비웃으며 말했다.
 
“난 당연히 신경 쓰지. 다만 연심 항아님에게 경사가 있을 같으니, 입으로 복을 쌓지는 못할지언정, 남의 웃음거리는 되지 말아야지. 어쨌든 절대 네게 야박하게 굴지 않을 좋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연심의 얼굴이 곧장 붉게 달아올랐으나, 점점 볼썽사납게 얼굴이 새파래지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약이 웃으며 말했다.
 
“나...... 나는 당연히 황후마마께서 혼사를 주선해주시는 그런 복은 없지요. 언니의 경사를 먼저 축하드려요.

 

연심은 난처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여 발을 동동 구르다가 곧장 멀리 달려가버렸다.

 

아약은 연심의 뒷모습을 보며 줄곧 냉소했다. 여의가 말했다.
 
“네가 계속 이렇게 비웃는데, 괴상하고 소름끼치는 밤올빼미 우는 소리도 이 비하지는 못하겠구나.

 

아약이 웃으며 허리 굽혀 절했다.
 
“소주, 소인, 연심을 비웃은 것이어요. 마마, 아세요? 오늘 아침에 소인이, 가을에 진상될 가죽 중에 좋은 것을 대황자님의 옷을 위해 남겨놓으라 분부하러 내무부 가죽 창고에 갔다가, 내무부 사람들이 옆에 있는 가죽 창고에서 모직물을 많이 골라 내오느라 분주한 것을 보고 말았지 뭐예요. 한여름에 무슨 모직 옷감을 찾나 이상해서 물어보니, 내무부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후마마께서 연심의 혼수를 준비하는 것이라잖아요.

 

여의가 말했다.
 
“연심이 벌서 스물네 살이니 본래는 출궁해야 하나, 공교롭게도 황후마마의 친정에서 태어난 시녀라 돌아갈 곳이 없는 게지. 기왕 그렇게 이상, 일평생 궁중에서 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시집을 가는 편이 낫지 않겠니. 황후께서 혼인을 주선해주시는 것도 연심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일테고.

 

아약이 웃으며 하고 침을 뱉으니 손에 등불이 따라서 유유히 밝게 흔들렸다.
 
“소주께서는 황후마마께서 연심을 누구에게 보내시는지 아직 모르시지요?

 

여의가 예심을 흘끗 보니 예심이 서둘러 영황을 달래서 데리고 멀찍이 갔다. 여의가 물었다.
 
“전에 듣기로 연심과 황상을 모시는 왕흠이 친하다던데. 황후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는 하지. 웃자고 하신 이야기이기는 하나, 왕흠이 남자가 아니고 태감이니, 어찌 왕흠과 짝지어주시겠느냐?

 

아약이 신이 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소주, 말씀도 마세요. 정말로 왕흠이랍니다. 벌써 내무부에서 혼수 준비도 마쳤고, 황상께서도 알고 계신다고 해요. 중추절만 지나면 바로 혼례라고요. 황후궁에서도 말하기를, 연심이 황후를 그리도 오래 모셨는데 반은 여자나 마찬가지인 사람한테 시집간다고요. 

 

여의는 한참이나 깜짝 놀랐다가 잠시 후에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와 말했다.
 
“멀쩡한 처자가 참으로 안타깝구나.

 

아약은 희색이 만면했다.
 
“뭐가 안타깝다고요! 궁의 태감들 중에서 왕흠 만큼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비위를 맞추지 못해 안달이던데요. 연심이 왕흠에게 시집가면 연심만 이득이지요!

 

여의는 불쾌한 눈으로 아약을 흘긋 보았다.
 
“됐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거라! 궁녀들이 대식을 하는 것도 가련한데, 연심은 딱하게 되었으니, 너도 대놓고 비웃지 말거라.

 

아약이 마지못해 대답하면서 얼굴이 반쯤 붉어져 쭈뼛쭈뼛 여의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소주, 나중에 마마께서도 소인을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내주실 건가요?

 

여의는 웃으며 손을 뻗어 아약의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말거라. 작년에 아버지도 지방 관리가 돼서 네가 줄곧 잘됐다 하지 않았더냐. 때가 되면 어찌 너를 성대하게 차려서 시집보내지 않겠니?

 

아약은 반쯤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소인이 어떤 좋은 집을 골라 갈지는 모두 소주의 은혜에 달렸사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궁 사람들이 어떤지 우리도 모르지만, 어전 시위를 골라서 점차 출세하는 것도 괜찮지.

 

아약이 기쁨을 금하지 못하고 여의의 곁에 한참을 달라붙어 있었다. 마침 예심이 영황을 데리고 오자, 아약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소주께서 오늘 기분이 좋으시니, 너도 어서 와서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내달라고 부탁드려! 그리고 너희 가문을 드높여서 네가 이백 냥짜리 노비 출신이라는 숨겨야지!

 

여의가 손바닥으로 아약의 입을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꾸짖자, 아약이 웃으며 피했다.
 
“소인과 예심이 이렇게 친해서 농담한 뿐이에요!

 

예심이 차분하게 말했다.
 
“소인은 아약 언니처럼 좋은 출신이 아니오니, 그저 평생 소주를 모시며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약이 불만이 있다는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은혜를 앞에 두고 위선 떨지 말라고!

 

예심은 영황의 옷의 먼지를 깨끗하게 털며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위선 떠는 아녜요. 아약 언니가 좋은 집에 시집가면 아무도 소주를 모실 사람이 없는데, 저는 팔려왔을 이미 고향이 어디인지 잊었으니 평생 소주 곁에 남아 모시기 좋지요.

 

여의는 머리카락 옆에 늘어뜨려진 서늘한 순금 장식을 만지며 웃었다.
 
“네게 이런 마음이 있는 것도 당연히 좋지만, 젊은 처자가 시집을 가면 안되지. 설사 시위나 태의처럼, 가까운 곳에 시집 가더라도 괜찮을 것이야.

 

예심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의는 예심과 아약의 손에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앞쪽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보였다. 수십 개의 등롱이 검붉고 노란 별빛처럼 흐릿하게 빛나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여의가 고갯짓을 하자, 예심이 곧바로 앞으로 달려갔다가 잠시 돌아와서 말했다.


 "소주, 영화궁에 일이 났사옵니다. 황상께서 서둘러 가고 계시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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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혜갚은 역자(웃음)가 되려고 일찍 올려보았습니다 ;)

2. 진 히로인 해 상재가 해 귀인이 되셨군요. 축하축하.

3. 아약 오늘 어그로 폭발이네요. 





  1. [역자주] 원제인 '山雨'는 '산에 비가 내리려 하니, 온 누각에 바람이 몰아치네(山雨欲来风满楼)'를 의미하는 말로, 사건이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살벌한 분위기 또는 그 조짐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역자주] 五更,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눴을 때 다섯 째 부분. 지금의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 [본문으로]
  3. [역자주] 태부(太傅): 옛날의 벼슬 이름. 천자를 보좌하는 직분으로 ‘삼공(三公)’의 하나. 또는 태자(太子)의 보좌역. 주나라에는 태사, 태부, 태보, 서한에는 대사마, 대사도, 대사공, 동한에는 태위, 사도, 사공이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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