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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보내고 곧 정월 대보름이 되니, 이는 건륭 원년의 길일이므로 하루 하루 모두 떠들썩하게 보내며 갖가지 놀이와 곡예, 춤과 노래가 어느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다. 이어지는 청음각의 희곡(戏曲)[각주:1]도 흐르는 물과 같이 궁궐 후원의 붉은 담장 아래에서, 먹빛 벽돌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궁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뜰의 정자와 누각의 옥난간 위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 때에야 비로소 궁중에서의 나날이, 황가의 부귀영화와 바깥의 사람들이 전해 듣던 겹겹이 쌓인 수놓은 비단과 황금빛과 푸른빛이 휘황찬란함 만이 아니라, 남송의 희곡과 가극에서 말하는 하늘 나라와 인간 세상의 흐르는 물과 떨어지는 꽃이 유유히 흐르는 것과 같이 평온하였다.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서 다음 날이 되어도 여전히 그 꽃더미와 비단 뭉치는 번성함이 다하지 않았고, 아직 절정에도 이르지 않았다. 


이월 초이틀 '용이 고개를 든다'[각주:2]는 날이 되자, 궁중에서는 지룡[각주:3]이 기어나오고, 날씨도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졌다. 경성의 초봄은 신록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모래바람의 건조하고 차가움을 먼저 몰고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꽃이 되고 잎이 되었다. 궁녀들은 봄여름철 짙은 푸른색과 연두색의 궁중 의상으로 갈아입으니 이는 노랗고 푸른 신선하고 아삭아삭한 잎처럼 물을 잔뜩 머금은 향기를 띠고 있었고, 더욱더 두드러지는 것은 온 궁궐의 비빈들이 아름답고 요염한 꽃송이, 아니 꽃술을 이루어 한 알 한 알 부드럽고 유연한 자태로 연약한 아름다움을 견주는 것이었다.


궁중의 일은 비록 여전히 황후가 주관하고 있었지만, 매 열흘, 스무날, 서른날 마다 중요한 일은 태후에게 고했다. 태후는 조금 깊이 알고 있는 듯, 내무부 총관의 대답을 기다리며 하나 하나 이치를 따지니, 황후는 도리어 평소에 비해 적잖이 조용하고 한적하여, 황제를 모실 때를 제외하면 아가소에 자주 거동했다. 


어느 날, 연희궁의 소주방에서는 어용허화고(鱼茸荷花糕)를 만들었다. 연어의 살을 가져다 곱게 갈아 잘 섞고 반죽하여 허화고를 만드니, 이는 갓난아이에게 먹일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의는 거기에다 예심에게 새로 만든 간식 두 종류를 함께 아가소에 가져가서 셋째 황자에게 주라 하고는 다시 말했다.

"설 전후로 순빈이 제일 자주 왔으니, 순빈의 마음에는 아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근심이 없지. 모두 늘상 왕래하며 지내니, 너는 음식을 많이 챙겨가서 아가소의 셋째 황자에게 보내주거라."

예심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이상한 게, 순빈마마의 셋째 황자는 포동포동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삼월인데도 빈틈없이 꽁꽁 싸매어놓았는데, 아가소에서 시중드는 유모들은 황후의 둘째 황자에게는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사옵니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셋째 황자의 나이가 가장 어리니,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당연하지. 너는 물건을 가지고 가서 셋째 황자의 유모에게 주고, 유모가 삼황자에게 먹이는 것을 보며 입맛에 맞는지 안 맞는지 보고 오거라."

예심이 대답하고 나갔다. 어화원에 이르러 돌로 쌓은 가산(假山)[각주:4] 위의 왕모람과 등나무, 두약과 구릿대를 보니, 봄비가 몇차례 내리고 나서 넝쿨도 푸르른 색을 띠며 초목이 싹을 틔우는 특유의 은은하고 맑은 향기를 내뿜었다. 예심이 넋을 놓고 바라고보고 있는데 불쑥 붉은 칠을 한 구름과 여의문을 새긴 음식함에 사람이 부딪히자, 예심은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누구인지 볼 생각도 하지 못한채 서둘러 함을 감싸고 열어보니 다행히도 간식은 흐트러지지도 엎질러지지도 않고 멀쩡했다. 예심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쳐다보니 대황자 영황이었다. 예심은 서둘러 표정을 감추고 문안 인사를 올렸다.
"대황자께서는 만복을 누리소서."

대황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응' 하고 한 마디 하고는 코를 훌쩍이며 쓱 문지르고는 예심의 앞에서 간식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은 무엇이냐?"

예심이 황급히 웃으며 말했다.
"대황자님, 이것은 연희궁에서 새로 만든 간식이옵고, 소인이 아가소의 셋째 황자께 보내러 가는 길이옵니다. 참, 오늘은 삼월 초사흘이니 어선방에서 각 궁에 모두 완두황(豌豆黄)[각주:5]을 보냈사온데, 대황자께서는 아가소에서 보지 못하셨사옵니까?"

대황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언짢은 표정과 조금 탐내는 눈빛으로 간식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것은 셋째 황자에게 보내는 것인데 내가 먹어도 되느냐?"
대황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셋째는 맛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있어서 먹어도 먹어도 다 먹지 못하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어."

예심은 조금 의심이 들었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생글생글 웃음을 띠었다.
"대황자께서는 이게 드시고 싶사옵니까? 소인이 대황자께 좀 드릴게요."

대황자가 조금 위축되어 예심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한 마마께서 셋째에게 주시는 간식인데 네가 이걸 내게 주면 한 마마께서 너를 벌하실까 겁나지 않느냐?"

예심이 미소지었다.
"한비마마께서는 항상 대황자를 아끼셨으니, 잠저에 있을 때에도 그러하셨사옵니다. 대황자께서 간식 두 개 드시는 데 무엇이 걱정이셔요."

예심은 상자를 열어서 부용고 두 조각을 대황자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대황자님 어서 드시어요."

대황자는 예심을 흘끗 보다가 곧장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는 다 먹자마자 다시 예심의 간식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었다.

예심은 자기도 모르게 의아해하며 미소지었다.
"대황자께서는 아직도 드시고 싶으신가요? 과자를 많이 먹으면 배가 불러지옵니다. 반 시진 뒤면 바로 점심을 드실 시간이니 황자께서는 수라를 드시고 다시 간식을 드시지요."

대황자는 속상하고 두려워하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옷자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그들은 언제나 내가 배불리 먹게 하지 않는다. 반 그릇을 먹으면 곧바로 밥과 반찬을 거두어가니 나는 항상 배가 고프다."

"그들? 그들이 누구이옵니까?"

대황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가까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보고 비로소 말을 꺼냈다.
"내 시중을 드는 유모들 말이다."

본래 어린 황자들이 문밖을 나서면 모두 일고여덟 명의 궁인들이 따라나왔다. 예심은 대황자를 뒤따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대황자님, 시중드는 사람들은요?"

대황자는 손가락을 잡아빼며 말했다.
"모두 나를 따라오는 것을 싫어하니 내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둔다."

예심은 더욱 이상하다 여겼지만 감히 더 묻지 않고 우유계란과자를 두 조각 꺼내어 대황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대황자님 몰래 숨겨서 드세요. 소인이 주었다고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소인 먼저 물러가보겠사옵니다."

대황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너도 내가 몰래 간식을 먹었다고 말하면 안된다. 안 그러면 나도 야단맞을거야."

예심은 가슴이 철렁하여 서둘러 웃으며 물었다.
"노비들도 감히 황자님을 호되게 야단치옵니까?"

대황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끄덕이니 겁먹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심은 더 묻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아가소로 갔다.

연희궁은 매우 고요하여, 아약은 궁인들을 데리고 조용조용히 봄철에 쓰는 구슬로 된 발을 바꿔 걸었다. 여의는 창 앞에 서서 내무부에서 새로 보내온 옥과 산호로 만든 꽃장식을 감상하다가 예심이 아뢰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네가 대황자를 보았을 때 대황자 곁에 따르는 시종들이 없었단 말이냐?"

예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황자님 혼자 가산 뒷편에서 뛰어나오셨는데 몸에 걸친 홑옷은 진흙과 먼지투성이였고 분명 아무도 뒤따르지 않았사옵니다."
예심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소인이 기억하기에 대황자의 옷깃에 기름 얼룩이 좀 묻어있었는데, 그때는 아직 점심 수라 전이었고 황자와 공주들의 아침 수라는 담백하고 기름기가 없었사옵니다. 이 기름 얼룩은 분명 하룻밤이 지난 것이옵니다."

여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니, 아가소의 유모들이 대황자를 전혀 잘 돌보지 않는구나."

예심이 말했다.
"소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계속 들었사온데, 아가소에서 대황자를 돌보는 시종들이 황후 소생의 둘째 황자를 돌보는 사람들에 비해 두 배나 많다고 하옵니다. 어쩌면 대황자가 미숙하고 짓궂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옵니다."

산호 꽃의 차가운 꽃잎이 손바닥에 배기며 땀으로 조금 미끄러워졌다. 여의가 말했다.
"대황자가 장난이 심한 것인지 시종들이 일부러 냉대하는 것인지는 자세히 조사해보면 알게 되겠지. 허나, 대황자가 간식을 먹고 야단맞을까 두려워했다고 하니 정말 시종들이 황자를 괴롭히는 것일수도 있겠구나. 오늘의 일은 우선 다른 이에게 말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하거라."

예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알겠사옵니다."

여의가 한숨을 쉬었다.
"대황자도 가련하구나. 여덟 살 밖에 안된 아이가 어미는 일찍 죽고 돌봐줄 사람은 없으니 어느 것도 온전한 것이 없구나."

예심이 웃어며 말했다.
"소주께서 걱정하시면 무엇하겠사옵니까? 지금 소주께서 황상의 총애를 얻으시니 조만간 복덩이 황자 아기씨를 얻으실텐데요."

여의의 탄식이 소리없이 터져나왔다.
"내가 황자를 얻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있었냐마는, 설령 공주라 하더라도 좋겠구나. 비록 황상께는 내가 여전히 총애받지만, 슬하에 아무래도 의지할 자식이 있어야지. 허나, 아무래도 기미가 없구나."

예심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소주께서는 너무 성급해 마시어요. 황상께서 자주 오시기만 한다면 어느 하늘에서 비가 내릴지는 모르는 것이옵니다."

여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재빨리 가까이 가서 예심의 입을 살짝 비틀었다.
"입이 이리 고약하니 뭐든 다 안다고 하는구나!"

예심이 웃으며 물러섰다.
"소주, 소주. 소인 다시 그런 말 안 할테니 이번만 봐주시어요."

여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늦었구나. 너는 소주방의 제비집이 푹 고아졌는지 보고, 충분히 고아졌으면 나와 함께 양심전에 제비집을 가지고 가자꾸나."

하늘이 어두침침해지니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토록 어두침침한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고 있으니 마치 그 진한 먹같은 색이 머잖아 방울져 떨어질 것 같았다.

양심전 앞에 다다르니 한 무리의 태감과 시위들이 줄지어 밖에 서 있었고, 왕흠이 여의의 가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맞이했다.
"소인 한비마마께 문안 올리옵니다. 마마께서는 만복을 누리소서."

여의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왕 공공은 어서 일어나시게."

왕흠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말했다.
"하늘을 보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사온데, 한비마마께서는 어찌 오셨사옵니까?"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 드리려 제비집을 고아왔으니 마침 따끈따끈하다네."

왕흠이 말했다.
"한비마마께서는 세심하시군요. 허나 지금 시각은...... 형편이 좋지 않사옵니다."
왕흠이 곁눈질을 하니, 여의가 왕흠의 시선이 가는 곳을 따라가다가 연심이 양심전 처마 밑에 서있는 것을 보고는 말뜻을 깨닫고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계시는가?"

왕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황후마마께서 황상께 직접 만드신 완두황을 가져오셨사옵니다."

여의가 살짝 웃었다.
"황후마마께서는 법도에 엄격하시니, 황상을 모시고 말씀을 나누실 때에는 비빈들이 까닭없이 들어가서는 아니되지. 이리 하세. 공공이 안에 말을 전해주면 본궁이 물건을 두고 문안 올린 후에 바로 나올 것이고, 만일 마마께서 언짢아하시면 본궁이 알아서 감당하겠네."

왕흠이 몸을 굽히며 말했다.
"마마의 이 말씀이 계시니, 소인도 안심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사옵니다."

왕흠이 몸을 돌려 섬돌 위로 올라가자, 예심이 왕흠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왕흠 저 사람은 주의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했다.
"왕흠은 황후를 위해 일하니, 우리는 이를 헤아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너와 이옥은 일찍부터 아는 사이이니 자주 왕래할 수 있는 것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흠이 내려와 말했다.
"한비마마, 황상께서 말씀하시길 황후마마와 의논할 일이 있다 하시니, 마마께서는 물건을 소인에게 건네주시옵소서. 별도로, 황상께서 밤에 어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예심이 제비집을 왕흠의 손에 넘겨주는 것을 보며 조심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공공이 수고해주시게."

여의는 예심의 손에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돌아가다가 막 긴 거리에 다다랐을 때, 귀비가 가마에 앉아 담장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오고있는 것을 보고 법도에 따라 서둘러 옆으로 몸을 비껴 서서 마중하였다. 뚜벅거리는 태감들의 신발 소리와 돌바닥 위에서 삐걱삐걱 가볍게 울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가마를 멘 태감들의 발걸음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가지런하여, 눈을 돌리니 어느새 가까이 와있었다. 여의가 무릎을 굽혀 예를 올렸다.
"귀비마마, 만복을 누리시고 평안하소서."

비록 삼월 초의 날씨였지만, 혜귀비는 여전히 두 가지 색으로 금빛 꽃을 곳곳에 새겨넣은 일두주(一斗珠) 비단 저고리를 입었으니, 이 옷은 태어나지 않은 태중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돌돌 말린 털이 마치 진주알 같다 하여 '일두주'라 불린 것으로 몸에 걸치면 무척 가볍고 부드러우며 따뜻했다. 귀비는 여의를 보고 고개만 까딱이고는 말했다.
"며칠 못본 새에 안색이 더 좋아졌군."

여의가 말했다.
"귀비마마의 안색도 이전에 비해 혈색이 많이 좋아지셨사옵니다."

혜귀비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본궁은 아직 늙진 않았지만 몸이 피곤하다네. 외려 자네가 자주 황상을 모시느라 수고가 많아."

여의는 이 말에 가시가 있음을 알았지만, 혜귀비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저 웃었다.
"황상께서 오셔도 오로지 귀비를 염려하신답니다."

혜귀비는 마지못해 웃었다.
"본궁에게 무슨 염려할 것이 있나? 내 몸이 변변치 못할 뿐이니 그 또한 오랜 지병이지."

여의는 혜귀비가 항상 추위를 타고 몸이 약한 것을 알아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궁중의 태의가 바깥의 의원과 비할 수 없고 태의원 원판 제노 대인 또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의원이니, 귀비마마의 몸도 분명 쾌차할 것입니다."

혜귀비는 손난로를 들고 피곤해했다.
"나는 평소 어혈이 생기는 병에 불과했네. 한겨울에 몸조리를 잘하면 원래 괜찮았지. 오후에 어선방에서 보내온 완두황 두 조각을 먹은 것이 얹힐 줄 누가 알았겠나. 소화가 좀 안되는 것같아서 방금 어화원을 산책하며 소화시키고 왔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곧 비가 내릴 것 같으니 귀비마마께서는 찬바람 맞지 마시고 비는 더더욱 맞지 마시고 몸 상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혜귀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르는 시종들을 줄줄이 이끌고 떠났다.

여의는 혜귀비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말했다.
"그녀도 참으로 가련하구나. 저렇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몸에는 온갖 병과 고생이 넘치니."

아약이 입을 실쭉거렸다.
"그래야죠! 심보가 나쁘니 몸도 낫지 않는 거죠."

여의가 아약을 흘겨보니 아약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감히 떠들지 못했으며 예심과 함께 여의를 부축하여 돌아갔다.

혜귀비는 궁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두터운 옷을 갈아입으려 하지 않고 눈썹만 찌푸리며 말했다.
"입춘이라고 하는데 전각 안에 들어와도 춥고 침침한 것이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말심이 턱짓을 하니 몇몇 어린 태감들이 서둘러 화로를 받쳐들고 들어왔고, 말심은 뜨거운 차 한 잔들 가지고 들어오며 말했다.
"소주, 이것을 드셔보시어요. 보리와 진피를 볶은 것을 우린 차인데, 향을 맡고 나면 식욕이 생기고 소화가 될 것이옵니다. 제 태의가 소주께 올리라 특별히 당부한 것이옵니다."

혜귀비가 흘긋 보고는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무슨 천하고 하찮은 것을 만들어 온 것이냐? 지금 이걸로 본궁에게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냐."

말심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리와 진피가 비록 구하기 쉬운 물건이지만, 소주의 몸에 유익하다면 무엇인들 드시지 못하겠사옵니까? 소주의 몸이 온당하시기만 하다면 일찌감치 황자를 낳으실 것이니, 그러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되는 것이지요."

혜귀비가 차를 들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지금 나는 무엇이든 모자람이 없으니, 가문도 있고, 지위도 있고, 황상의 총애도 잠저에 있던 때에 비하면 훨씬 많고, 내 아버님 또한 조정에서 중용되고 있지."

말심은 조금 득의양양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듣자하니 황상께서 또 대인의 직위를 올리셨다 하옵니다. 또 궁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황상께서는 강산 전체를 주관하시고, 우리 대인은 황상을 위해 그 중 절반을 주관하신다고요."

혜귀비는 말심을 손바닥으로 때리는 시늉을 했지만, 얼굴의 미소는 더욱 짙었다.
"허튼 소리 말거라."

혜귀비는 말을 마치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단 한 가지 모자란 것은 내 배에 이 몇년 동안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혜귀비는 말하면서 얼굴에 근심어린 기색이 가득했다.
"은총으로 말하자면, 온 궁에서 가장 많이 받은 것이 바로 나인데. 하지만 아무리 해도 회임하지 못하니 무엇 때문이지 모르겠구나."

말심이 혜귀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소주도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어요. 마마의 어혈증은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요 몇년 동안 신경도 많이 쓰고 잘 보양하지도 못했으니, 이 병은 잘 몸조리하면 좋아질 것이옵니다."

혜귀비가 다급하여 말했다.
"잘 몸조리 하라니, 잘 몸조리 하라니. 내가 벌써 스물 여섯이다. 아무리 몸조리 한들 나이는 속일 수 없으니 어디 또 아이를 갖는단 말이냐!"

말심이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스럽게 말했다.
"소주, 만일 소주께서 서둘러 아이를 가지고 싶으시다면, 소인이 '초제(招弟)[각주:6]'라 하는 민간의 방법을 들은 것이 있사옵니다."

혜귀비가 궁금해하며 말했다.
"초제라, 그게 무엇이냐?"

"궐밖 민간의 귀한 가문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은 부인이 아이를 한명 데려와 기르는 것이옵니다. 데려다 기른 날이 길어지면 자기 뱃속에도 아이의 기운이 왕성해져서 자기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남자아이지요. 이렇게 회임하게 되면 단번에 아들을 얻는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초제라고 부르는 것이옵니다."

혜귀비가 화를 내며 말했다.
"여기는 후궁이니 이곳은 고사하고 설령 잠저에 있을 때라도 어찌 아이를 안아보고 길러볼 수 있겠느냐? 참으로 말하면 말할 수록 동떨어진 이야기로구나."

말심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옵니다. 이 실마리가 바로 이 궁중에 있사옵니다. 소주, 찬찬히 생각해보시어요. 황후 소생의 대공주와 철비 소생의 둘째 공주 모두 복이 없는 아이라서 태어나서 오래지않아 요절했사옵니다. 둘째 황자와 셋째 공주는 황후가 진주처럼 기르고 있고, 셋째 황자는 순빈이 애지중지하는 자식이옵지요. 허나 아이가 한 명 더 있으니, 어미도 없고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우니 소주께서 데려다 초제로 삼으시기 딱 좋사옵니다!"

혜귀비의 눈이 반짝이며 기뻐하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것이 대황자이냐? 그건 참으로 합당한 일이구나. 다만 그 아이는 경솔하고 조심성이 없어서 영리한 아이 같지는 않던데."

말심이 웃으며 말했다.
"영리하지 않으면 가장 좋지요. 아무튼지간에 우리가 대황자의 왕성한 기운을 받아서, 대황자를 데려다 잠시 기르는 동안 소주께서 소주의 아이를 가지기를 기다렸다가, 돌보지 못하겠다 하고 다시 아가소로 돌려보내면 그만인 것이옵니다."

혜귀비는 기뻤지만 여전히 망설였다.
"다만 황상께서 그리 하려 하실지 아닐지 알 수 없으니......"

"그리 하려 하시든 아니든, 황가의 법도에 본래 비천한 생모에게서 태어난 황자와 공주를 지위가 높은 비빈들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는 선례가 있사옵니다. 강희제의 양비는 신자고 출신이라, 양비의 여덟째 황자를 신분이 높은 혜비에게 보내 기르게 하지 않았사옵니까? 게다가 대황자의 생모가 없으니 더더욱 이치에 맞는 일이지요."
말심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며 혐오하며 말했다.
"소주께서는 아직 모르시옵니까? 오늘 소인이 어화원을 지나다가 한비를 모시는 예심과 대황자가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사오니, 소주께서는 서둘러 황상께 부탁드리시어요. 어쩌면 한비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만약 한비에게 기선을 빼앗기면 한비가 득의하지 않겠사옵니까?"

혜귀비는 재빨리 깨닫고는 냉소를 지으며 손바닥 위의 비취 꾸러미를 튕기며 말했다.
"나는 한비가 오늘 어째 내 몸상태에 관심을 갖나 했더니, 보아하니 좋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황상께 부탁드릴테니 기다리거라. 설령 초제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한비가 마음 먹은대로 하게 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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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 기다리셨지요. 삼월은 잔인한 달(...)이라 여러 가지 몰려오는 일들을 해치우느라 늦었습니다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달아주시는 댓글들 답은 못 달아도 다 감사히 잘 보고 있답니다 :) 





  1. [역자주] 희곡(戏曲): 곤곡(昆曲), 경극(京劇) 등의 각종 지방극(地方劇)을 포함한 중국의 전통적인 희곡. [본문으로]
  2. [역자주] '용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머리를 든다'고 하는 날로서 당나라 때 명절로 제정되었으며, 조정에서는 연회를 베풀어 군신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고, 일반 백성에게는 곡물과 백과(百果)의 씨를 내리었는데 농업 장려의 의의가 있는 연중행사였다. [본문으로]
  3. [역자주] 지렁이 [본문으로]
  4. [역자주] 가산(假山): 돌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 석가산이라고도 함. [본문으로]
  5. [역자주] 완두황(豌豆黄): 중국 북경의 전통 먹거리이며, 음력 3월 초사흗날에 꼭 먹는 음식이다. 완두콩, 식소다, 설탕, 물을 넣고 끓인 후 냉장고에 넣고 4시간쯤 지난 후에 먹는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다. [본문으로]
  6. [역자주] 동생을 부른다는 뜻.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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