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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고, 이따금씩 정원을 관통하는 바람소리가 마치 이름 모를 괴물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얼이 빠져 있었다. 거친 바람과 성난 파도와 같은 마음 속의 떨림이 솟구쳐, 여의는 비틀거리며 무의식 중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렀다.

 

강보 속의 아이는 사지는 비쩍 말랐지만 복부는 머리만큼 커다랐으며 청남색으로 기이하게 물들어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아이의 몸에 남녀의 특징이 모두 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놀라서 손을 덜덜 떨었고, 하마터면 본능적으로 아이를 밀쳐낼 뻔했다. 다행히 왕흠이 확실히 붙들고 있었지만, 왕흠도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팔에 안고 있는 아이를 어찌 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황후도 잠시나마 똑똑히 보고 깜짝 놀라서 낮게 비명을 질렀으니, 아름다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크게 놀라 두려워하며 황제 용포의 소매를 꽉 쥐었다. 여의는 자신의 안색도 황후와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것도 알지 못하고,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것만 느껴졌으니,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의는 황실에 속하게 된 지 오래였고 비록 후궁에서 자손을 낳고 기르는 일이 종종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청이 개국한지 백 년 동안 이와 같이 놀랍고 두려운 일은 없었다!

 

저 아이는 분명 다른 갓난아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발그레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이의 몸은 강보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몸이 다른 아이들과 그렇게 다르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허나 아이는 하필이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어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안에서는 여인이 혼절했다 깨어나서 지친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아기, 내 아기는?

 

황제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으니 마치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받은 듯 했고, 다 타버린 재같은 얼굴에는 한 쌍의 놀라고 두려우며 비통해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그 눈동자 속의 비통함은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 차가운 눈덮인 푸른 기와 사이에서 얼어붙은 서리를 만나 순식간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고 오직 살을 에는 듯한 공포와 혐오만이 남았다.

 

희망과 기대를 품은 여인의 목소리가 안에서 다시 들려왔다.
 
“어서 아이를 내게 보여다오......

 

정적만이 흐를 뿐, 그 누구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황후는 차갑고 단호하게 재빨리 반응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니, 틀어올린 머리 사이로 구슬로 술을 만들어 드리운 은봉황비녀에 스치는 차가운 별과 같은 반짝임이 짙은 남색에서 새카맣게 변하는 하늘을 가르고는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황후의 말투는 일말의 부드러움이나 주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단호했다.
 
“황상, 이것은 업장(孽障)[각주:1]이오니, 불길한 요물이옵니다. 절대로 남겨두어서는 아니되옵니다!

 

황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망연히 고개를 끄덕이니, 황후는 뒤이어 왕흠을 보고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너는 가서 안배하거라. 모든 사람들에게 매귀인이 낳은 것은 죽은 아이이고, 죽은 아이는 불길하니 즉시 그것을 묻어버려라!” 

황후는 ‘그것’이라고 말할 때 아무 감정 없이 냉정했으니, 마치 그 아이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은 짐승인 것처럼 언제든지 그 살아있는 생명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말했다.
 
“황상, 이 아이에게 다른 문제가 없고 그저 없을 게 더 있는 것이니...... 차라리 태의에게 그 중 여분을 제거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황제는 아이의 발그레하고 천진한 얼굴을 보고 잠시 동요했다. 황후는 즉시 고개를 돌려 여의의 얼굴을 보며 뺨을 때렸다. 때리는 손이 너무도 빨라서 반응할 틈도 없이 여의는 그대로 굳어 호되게 맞았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모든 마음의 고통보다 낫다는 생각만 들었다. 황후는 여의를 차갑게 바라보았으니, 그 두 눈은 마치 맑은 물과 차가운 얼음 속에 있는 한 쌍의 검은 자갈 같았지만 온몸을 떨게하는 뼛속까지 사무치는 차가운 한기가 있었다.
 
“한비, 자네가 무슨 일을 잘못하든 무슨 말을 잘못 하든 본궁은 자네를 탓하지 않을 걸세. 그러나 이 뺨 한 대는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야. 이 아이는 불길한 업장이자 요사스러운 태아다. 자네가 만약 또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이것이 흘러나가 황상의 명예와 대청의 길조를 손상시킬 것이니 본궁이 자네를 죽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야.

 

얼굴의 상처가 피부 속 깊은 곳까지 잘름잘름 파고 들어 오래도록 아팠고, 얻어맞지 않은 쪽 얼굴은 오히려 기이하게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으니, 마치 처마 밑 고드름이 한 방울씩 물방울이 되어 뺨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처럼 솜털이 곤두서도록 차갑고 살을 에는 듯이 매섭게 추웠다. 여의는 저 아이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감히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그저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신첩이 실언 하였사옵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황후는 고개를 치켜들고 일어나라고 눈짓했다. 황제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힘을 다해 평온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황후의 뜻은......

 

황후는 살짝 몸을 숙이며 공손하고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매귀인이 불행히도 사산하여 황상의 후사를 이을 복이 없사오니, 청컨대 황상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매귀인의 앞날에 복이 있어 황가에 자손이 번창하고 제단의 향이 끊이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황후는 왕흠이 품에 안은 아이를 흘긋 보았다.
 
“죽은 아이인 이상, 잘 처리하거라. 왕흠,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된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본궁을 제외하면 황상과 한비, 그리고 너 뿐이다.

 

왕흠은 모골이 송연하여 곧바로 대답했다.
 
“예. 소인, 명심하겠사옵니다.

 

여의는 왕흠이 몸을 돌려 물러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깨달았다. 이 아이는 절대로 살 수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황제는 피곤하여 손사래를 쳤다.
 
“황후, 그대와 한비가 가서 매귀인을 잘 위로해주게. 짐은 피곤하구려.

 

황후는 황제가 지금, 아니면 이 이후로도 매귀인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고 만날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온유하게 타일러 말했다.
 
“황상께서 밤새 피로하셨으니 분명 고단하실 것이옵니다. 신첩의 궁으로 가시어 잠시 쉬시지요. 신첩이 인삼황기탕을 준비해두었사옵니다. 본래 신첩이 안정을 위해 마시려 남겨둔 것이었사온데, 황상께서는 어서 가셔서 드시고 마음을 진정시키시옵소서.

 

황제의 눈빛이 여의의 얼굴을 스치며 조금 미안해했다.
 
“그럼 우선 황후의 궁으로 가겠소.

 

여의는 오늘 밤 황제의 마음이 틀림없이 편치 않을 것이고 황후가 매사 태산처럼 안정되어 있으니, 황제가 황후의 처소로 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그리하여 여의는 몸을 숙이고 배웅했다.
 
“황상께서는 안심하고 쉬시옵소서. 신첩이 황후마마와 함께 매귀인을 잘 위로할 것이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황후는 여의를 흘끗 보고는 손을 뻗어 가볍게 여의의 뺨을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물었다.
 
“아픈가?

 

여의는 두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금 움츠러 들며 급히 말했다.
 
“황후마마의 보살핌에 감사드리옵니다. 방금은 신첩이 실언하였습니다.

 

황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 그런 상황에서 그 아이는 절대로 남겨두어서는 아니됐네. 만일 황상께서 한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 드신다면, 앞으로 매일 그 업장을 보면서 더욱더 우환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일단 일이 밖으로 전해지면 이 사내도 계집도 아닌 요사스러운 것이 황가에 어떤 치욕을 안겨주겠는가? 단칼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낫네.

 

여의는 가슴이 꽉 막힌 것이 마치 누군가 아주까리씨를 쑤셔넣은 것처럼 목구멍은 시큰거리고 부어올랐지만 말투는 애써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 신첩, 말씀 받잡사옵니다. 신첩이 어리석었사옵니다.

 

영화궁 침전에서는 울고불고 난리치는 소리가 점점 더 처참했으니, 매귀인이 초조하여 아이를 보겠다고 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애타고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황후는 탄식했다.
 
“가세. 매귀인을 어떻게 달랠지는 우리 일이군.

 

여의는 황후를 따라 문을 밀고 들어가니, 세밀하고 우아하며 수려하게 꾸며진 침전 안에는 금서(琴书)[각주:2]의 고요한 정취가 감돌았으니, 마치 그토록 야단스럽게 총애를 받은듯 예희는 자신의 우아하고 신선함으로 황제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전각 안에 가라앉아있는 백합 향기 아래에는 사라지지 않는 짙은 피비린내와 산모의 머리에서 풍기는 미끈거리고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땀에 흠뻑 절은 냄새가 있었다.

 

황후와 여의가 막 들어서자 매귀인이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고 궁인들의 부축을 애써 뿌리치며 침상에서 기듯이 내려와,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가득하여 황후의 발 아래에 엎드려 흐느끼며 말했다.
 
“황후마마, 저들이 신첩의 아이를 보지 못하게 하옵니다! 저들이 신첩을 막았사옵니다!” 

매귀인의 당황과 불안이 그녀의 수려하고 청초한 얼굴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황후마마, 말씀해주시옵소서. 아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옵니까?” 

황후의 짧은 침묵이 매귀인을 당황하게 했다.
 
“보기 싫게 생긴 것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중요한 것은 사지 멀쩡한 것이옵니다. 멀쩡한 거요. 황후마마, 아이가 뭔가 모자란 것은 아니지요?

 

어찌 모자람이 있었겠는가? 분명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황후는 두 손을 뻗어 매귀인을 부축하며 천천히 말했다.
 
“매귀인, 너무 애통해 말게.” 

황후가 여의에게 눈짓하니, 여의는 곧장 알아듣고는 말해야 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네. 황상께서 분부하시기를, 곧장 아이를...... 돌려보내라 하셨네.

 

매귀인이 온몸을 부르르 더니, 마치 천둥이 가차없이 그녀의 머리 위에 내리꽂힌 듯 놀라서 부들부들 떨기를 그치지 않았다. 매귀인은 맥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며 계속해서 크게 울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분명히 울음 소리를 들었는데 어찌 사산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매귀인, 자네가 잘못 들은 것이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쉬지 않았는데 어찌 울 수 있었겠는가?” 

황후는 매귀인을 연민하며 바라보다가 천천히 궁중의 여러 사람들을 보았다.
 
“너희는 그때 모두 매귀인 곁에 있었으니 말해주거라.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곧 기척이 없었지?

 

황후의 눈빛은 지난 날과 같이 온화했지만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감히 꿇어앉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예. 황후마마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귀인께서는 너무 상심치 마소서.

 

여의가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상심한다면 보화전의 사부에게 복을 빌게 하여 아이가 어서 극락에 오르게 하는 게 좋을게야.

 

매귀인의 눈물 고인 멍한 눈에 정신이 들었다.
 
“황후마마, 바라옵건대 어찌됐건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신첩에게 말씀해주시옵소서......

 

황후는 조금 멍해지더니 난감하다는 듯 여의를 흘긋 보자, 여의가 주저하며 말했다.
 
“아이는......

 

황후가 곧이어 말했다.
 
“공주였다네. 그러니 자네도 너무 상심하지 말게나. 한비의 말이 맞네. 보화전의 사부에게 청해 어린 공주가 극락왕생하도록 경을 읽게 해야지.” 

황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분부했다.
 
“얼마간 매귀인이 몸을 풀고 보양해야 하니, 돌아다니며 바람을 쐬는 것을 금하고 오직 보화전의 법사만이 편전에 들어 복을 빌고 경을 읊는 것을 허락하노라. 그 밖의 누구도 매귀인의 요양을 방해해서는 아니된다.

 

여의는 이 말을 듣고 황후가 매귀인을 연금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의는 어찌할 도리 없이 비통에 잠긴 매귀인을 바라보고는 황후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겨울밤, 입김은 얼어붙고, 여의는 멀리 침전에서 들려오는 가슴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마음속이 마치 달빛이 비추는 아득한 눈밭같이 조금 서늘해져왔으니, 처량하고 오싹하면서도 분명한 차가움이었다여의는 외투 속에서 손을 뻗어 끝없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눈꽃을 받았다. 이렇게 쓸쓸한 눈꽃송이가 매귀인의 무기력하고 비통한 울음소리와 함께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정원으로 떨어졌고, 겨울밤의 한기는 소리없이 뼈에 사무쳐왔다.

 

매귀인이 갑작스럽게 딸을 잃자 온 궁이 놀라고 의아해했을 뿐아니라 태후마저도 상당히 마음 아파했다. 궁중의 인심이 뒤숭숭했고, 혜귀비 역시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매귀인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과분한 복을 누렸기 때문에 아이의 수명을 깎았다고 했다. 유언비어는 들끓었지만, 다행히 영화궁에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황후의 말이 있어서 매귀인은 겨우 소란을 피해 안심하고 휴양할 수 있었다. 매귀인의 상심이 이러했지만, 황제는 그녀를 살피고 위로하러 영화궁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았다. 태후는 황제에게 몇번이나 매귀인이 사산한 일을 묻고 싶었으나, 황제는 몇마디 두루뭉술한 말로 둘러댈 뿐이었다.

 

이날은 매귀인이 딸을 잃은지 보름이 지난 후였다. 여의는 황제와 함께 양심전 난각에서 한담을 나누었다. 황제는 한결같이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창밖을 향하고는, 아직 묵묵한 비통에 잠겨서 <왕생주(往生咒)>를 한 편 한 편 베껴써내려갔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의 황혼 또한 유달리 어두운 것 같았으니, 여의는 황제 앞에 있는 탁자에 술이 조금 남은 술병 하나와 잔 하나, 그리고 흰 초 몇개가 어슴푸레하게 차가운 불꽃을 피우며 타고 있었으며, 불꽃이 타오를 때마다 널름거리는 듯한 빛무리가 이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온몸에 금빛 구름을 수놓고 흰 여우 가죽을 댄 용포를 입고 있었으니, 그 용포는 본래 은백색 바탕에 눈처럼 새하얀 여우 가죽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금사로 용무늬를 수놓아 맑고 서늘한 기운이 적지 않은 것이었다. 황가에서는 항상 청아하고 부귀한 색조를 중히 여겨서, 황제 또한 이런 수수한 색은 자주 입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차려 입은 것은 그의 기분때문이었을 뿐이었다.

 

공기 중에는 차가운 술의 잔향이 남아있었고, 여의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조용히 황제를 위해 먹을 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께서 술을 드시고 싶으시다면 먼저 데워오게 하시지요. 차가운 술은 위를 많이 상하게 하옵니다. 아니면 다른 이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들지 않고 담담한 가운데 자못 슬픈 기색이 있는 어조로 말했다.
 
“스스로 술을 따르고 홀로 마시니 차가운 술이야 말로 맛이 있구나. 하물며 전각 안이 이리도 훈훈하니 다시 더운 술을 가져다 마신다 해도 흥취를 잃을 것이다.

 

여의는 조용히 먹을 다 갈고는 전각 안에 용연향이 옅어진 것을 알고는 이옥을 시켜 향로를 내가게 하고, 학무늬를 투각한 구리 화로 한 귀퉁이에 자단색 소합향을 조금 넣었다.

 

황제는 오로지 고개를 숙이고 필사에 몰두하며 물었다.
 
“어찌 용연향을 쓰지 않는 것이냐?

 

여의가 말했다.
 
“소합향은 기혈을 통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물리치고, 답답한 것을 풀며 담을 삭혀 주니, 겨울에 쓰는 것이 가장 좋지요.

 

황제는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기혈을 통하게 하여 더러운 것을 물리치고, 답답한 것을 풀며 담을 삭힌다? 짐은 그대의 호의라는 것을 알지만, 심장의 기가 뭉친 것을 어찌 한 줌의 소합향이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여의는 황제가 베껴쓴 <왕생주>를 하나 하나 가지런히 정리하며 따뜻하게 말했다.
 
“황상께서 보화전에 보내어 경을 읽고 죽은 이를 제도하게 하시려 이렇게나 많은 <왕생주>를 필사하시니, 신첩은 황상께서 아직 마음 속으로 그 아이를 신경쓰고 계심을 알겠사옵니다.” 

여의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황상께서 항상 연희궁에 신첩을 보러 오시는데, 영화궁과 연희궁은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에 있으니 황상께서는 어찌 매귀인에게 가셔서 위로해주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황제의 미간에는 어두운 하늘빛과 같은 슬픔이 어려 흩어지지 않았다.
 
“가까운 정이 오히려 두려운 것이니 어찌 서로를 위로해야 하겠느냐? 오히려 두 사람 다 상처받게 될 것이다.” 

황제는 조용해졌다.
 
“다행인 것은 아이가 어떤 모양이었는지 매귀인이 알지 못하니......

 

여의는 서둘러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분부하시기를, 일체 누설해서는 아니된다 하셨사옵니다. 그날 매귀인의 출산을 도운 태의와 산파들은 이미 모두 내보냈사옵니다. 다만 공......주의 몸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궁인은 모두 열하행궁으로 보내버리고 다시는 궁으로 돌아와 시중들지 못하게 하였사옵니다."

 

황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생각이 깊군. 이 일이 불길하여 짐도 감히 태후께 자세히 말씀을 못 드리고 있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궁에서 그 아이를 본 것은 황상, 황후, 신첩과 왕흠뿐이옵니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황제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마침 다시 붓을 들고 쓰려 하는데 밖에서 두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왕흠이 밖에서 말했다.
 
“황상, 영화궁 매귀인이 물건을 보내와 성상께서 살펴보시기를 청하옵니다. 황상께서는 살펴보시겠사옵니까?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짐이 보게 가져와라.

 

왕흠은 대답하며 문을 밀고 들어와서는 꾀꼬리가 다복다남을 노래하는 문양의 주칠 쟁반 위에 갓난아기 옷을 한 벌 내려놓았다. 황제는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왕흠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귀인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어린 공주를 위해 <왕생주>를 애써 필사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공주에게 입히려고 직접 만든 옷을 함께 태워서 공주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한번도 못입어보았지만 극락세계에서 입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려 한다 하옵니다.

 

황제의 표정에 슬프고 괴로운 기색이 스치자 여의가 말했다.
 
“황상, 매귀인이 딸을 그리는 마음이 절박하니 바람을 들어주시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다. 그대가 영화궁에 두고 소각하라고 매귀인에게 말해주게.

 

왕흠이 다시 말했다.
 
“매귀인이 말하기를, 그날 밤 해시 일 각은 보름 전에 공주가 태어난 시각이오니, 바라옵건대 황상께서 친히 영화궁에 납시어 매귀인과 함께 이 옷들을 태우시어 애도하는 뜻을 다하시옵소서.” 

왕흠은 몇걸음 다가가서 쟁반에 받친 옷을 들췄다.
 
“이 옷들은 모두 매귀인이 직접 만든 것이오니 황상께서는 이 바느질한 것을 보시옵소서. 분명 적지않은 수고를 들인 것이옵니다. 매귀인의 어머니된 마음이 가상하고도 한탄스럽사옵니다!” 

왕흠은 손 가는대로 옷을 뒤적이며 다남다복한 어린아이가 장난치며 노는 그림을 드러냈다. 황제의 눈이 조금 흔들리며 마음이 조금 약해졌지만, 눈길이 쟁반 아래 천진무구한 아이를 그린 도안에 닿자 어느새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기에는 살얼음이 옅게 얼어붙은 것 같이 한기가 층층이 서렸다.

 

황제가 물었다.
 
“이 쟁반은 어디서 난 것이냐?

 

왕흠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또 어디에서 왔겠사옵니까? 영화궁에서 옷과 함께 보내온 것이옵니다. 황상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옷을 보내온 소귀자가 아직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황제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스치며 그 옷들을 더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매귀인에게 말하거라. 매귀인이 아직 몸조리 중이라 짐이 살피러 가기 마땅치 않으니, 이런 일은 어미로서 힘을 다해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왕흠은 즉시 물러나왔다. 여의는 황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미소를 띠며 물었다.
 
“매귀인을 시중드는 궁인이 참으로 조심성이 없사옵니다. 매귀인은 무사히 황손을 낳고 기를 수 없는데도 저들은 저렇게 젖먹이가 노는 도안을 사용하다니. 매귀인이 보았다면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사옵니까?

 

황제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짐은 저토록 튼튼한 아이를 잠시 보아도 곧바로 매귀인이 낳은 아이가 떠오른다. 저렇게 무서울 정도로 기형이라니 황후의 말처럼 죄악의 근원이자 요사스러운 태아구나. 하필이면 매귀인이 어리석고 무지하여 무심결에 저런 것을 골랐으나, 짐은 그 무서운 아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황제가 여의의 손을 잡으니, 얼굴빛이 마치 애처롭고 의지할 곳 없는 어린아이같았다.
 
“여의야, 말해보아라. 짐이 복이 없고 덕을 잃어서 매귀인이 이런 아이를 낳은 것이더냐? 아니 그러냐?

 

여의는 심장이 덜컥하여 서둘러 위로하여 말했다.
 
“어찌 그러겠사옵니까? 황상께서는 처음 제위에 오르셨으니 곧 하늘이 보우하시옵니다. 이 아이는 뜻밖의 사고였을 뿐이옵니다.

 

황제는 여의의 따뜻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짐이 처음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더욱 불안한 것이다. 매귀인의 아이는 짐이 등극하고 제일 처음 생긴 아이인데......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바람소리가 문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여의가 고개를 들자, 황후가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의젓하고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홀로 문앞에 들어와 서있었다.

 

황후는 단호하고 침착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와 확고하게 말했다.
 
“황상, 안심하세요. 이 아이는 뜻밖의 사고이옵니다. 모든 것은 매귀인의 덕행이 부족하여 황상의 성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황후는 황제의 곁으로 가서 몸을 숙여 황제의 손을 자신의 손아귀에 모으고 의심할 여지없이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황상께서는 벌써 여러 명의 황자와 황녀를 두셨고, 모두 총명하고 건강하옵니다. 오직 매귀인이 낳은 아이만이 다른 아이와 다른 점이 있으니, 이는 죄악의 근원이 매귀인에게 있는 것이지 황상께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옵니다. 황상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제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황후의 말은 그저 짐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오?

 

황후는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위로하는 말인지 아닌지, 황상께서는 아가소에 가시어 황자와 공주들을 보시면 아실 것이옵니다.

 

여의는 황후가 어린 황자와 공주들을 핑계로 황제의 실의를 풀어주고 딸을 잃은 고통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두려움을 위로하려는 것 외에도 이것이 황제를 위축된 감정으로부터 빨리 나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의는 조용히 예를 올리고 천천히 물러나왔다. 부드럽고 차분한 표정의 황후 곁에서 황제도 모처럼 조금 흐뭇한 표정이었다. 여의는 전각의 문을 닫고는 지금 이 순간의 실의와 망연자실함을 감췄다.

 

어쩌면, 황후는 결국 황후여서, 황제는 자신에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었는데 결국은 황후의 곁에서 위안을 얻은 것이었다. 여의는 바깥에 쉴새없이 차가운 비에 눈이 어지러이 섞여 내리는 것을 보며 진눈깨비와 한파 속의 자금성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빛을 잃은 것 같았다.

 

휘장을 친 가마 안에 한참을 앉아 있으니 여의의 걱정은 여전히 파도처럼 요동치며 안정되지 않았다. 오직 가마를 통해 전해지는 움직임만이 전해져왔으니,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 겹겹의 산으로 막혀있고 같은 자리를 끝없이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침 고민하던 중에 문득 어렴풋이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의는 발을 걷으며 불렀다.
 
“쇄심, 누가 우는지 가서 보거라.

 

쇄심은 대답하고는 뒤돌아서 복도를 통해 나가 살펴보고는 금새 다시 아뢰러 돌아왔다.
 
“소주께 아뢰옵니다. 영화궁의 소귀자가 쪽문 밑에 숨어서 울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으로 쇄심에게 우산을 펴게 하고 분부했다.
 
“아약, 너는 이들을 데리고 먼저 회궁하거라. 나는 혼자 걸어서 돌아가면 된다.

 

아약이 급히 말했다.
 
“그러면 저들을 돌아가게 하고 소인이 남아 소주를 모시겠사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그럴 필요없다. 너는 가서 내가 베껴둔 경문을 챙겨서 영화궁에서 지전을 태울 때를 기다렸다가 함께 태워서 매귀인과 아이에 대한 나의 성의를 보이거라.

 

아약은 몸을 돌려서 돌아갔다. 여의가 쇄심의 손을 잡고 느릿느릿 걸어서 길 모둥이를 돌았을때 과연 궁전 밖 외진 곳에서 소귀자가 쪽문 근처에 숨어서 방금 그 아기 옷을 품에 안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의가 말했다.
 
“너희 소주가 아직 산후 몸조리 중인데 너는 이렇게 울고있으니, 매귀인이 안다면 어찌 상심하지 않겠느냐?

 

소귀자가 여의를 보고 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문안을 올렸다.
 
“한비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소인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여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도 세심한 아이로구나. 만약 너희 궁에서 운다면 매귀인을 속상하게 할 것이니.

 

소귀자는 눈물을 닦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저희 소주께서 아기씨를 잃으신지 보름이 되었지만 황상께서는 단 한번도 살펴보러 오지 않으셨사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황상께서 소주가 사산한 아기씨를 불쾌하게 여기셔서 앞으로 더는 소주를 총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옵니다.

 

여의는 마음 속으로 가엾게 여겼다.
 
“그렇게 되었다면 매귀인도 그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으냐?

 

소귀자가 서둘러 말했다.
 
“소주께서는 그저 황상께서 다시 오지 않으실까 걱정하시옵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소인에게 명하여 갓난아이 옷을 보내시고 황상께서 지난날의 정을 늘 생각하시기를 바라신 것이옵니다.

 

여의는 그 옷들을 들춰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매귀인의 생각도 틀리지 않지. 허나 이 옷을 담은 쟁반은 매귀인이 직접 고른 것이냐?

 

소귀자가 이상히 여기며 말했다.
 
“아니옵니다. 소인이 이 옷을 받쳐들고 왔을 때, 왕 공공이 말씀하시길, 맨손으로 들면 모양이 나지 않는다 하며 소인에게 이 쟁반을 들려주었사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길, 어린 아이가 장난치는 도안이 있으니 황상께서 보시면 분명 매귀인을 생각해주실 것이라 했사옵니다.

 

 “왕흠이?” 

여의는 오래지않아 알아차리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안 되었으니, 그렇다면 됐다. 너는 어서 돌아가거라. 앞으로 너희 소주가 너를 시켜 황상께 물건을 보낼 때는 다시는 이런 문양을 사용해서는 아니된다.

 

소귀자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듯 했으나, 여의의 말투가 심각한 것을 보고 중요한 분부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사은하며 급히 돌아갔다.

 

쇄심은 여의에게 진눈깨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우산을 받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흠이 이토록 애를 쓴 것은 매귀인의 총애를 끊어내기 위한 것이옵니다! 일개 태감이 뜻밖에도 이렇게 악독하다니요.

 

여의는 쇄심의 따뜻한 손에 부축을 받으며 앞쪽을 향했다.
 
“네 말처럼 일개 태감이 어찌 자신을 위해 이렇게 악랄하겠느냐?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일 뿐이다.

 

쇄심은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주의 말씀은......

 

여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쪽은 줄곧 손을 쓰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왕흠은 절대로 남겨두어서는 안되겠구나.

 

쇄심은 낮은 목소리로 “예”하고 대답하고는 여의의 팔을 단단히 부축했다.
 
“눈 내리는 날에는 길이 미끄러우니 소주께서는 발밑을 조심하셔요.

 

여의는 마음이 가라앉아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발밑을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은 남이 엎어지는 것을 보고 있지만, 나중에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야.

 







  1. [역자주] 업장(孽障): 불도를 수행하여 착한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데 장애가 되는 삼장(번뇌장, 업장, 보장) 중 하나. 말, 동작 또는 마음으로 지은 악업에 의한 장애를 이른다. [본문으로]
  2. [역자주] 금서(琴书): 민간 예능의 일종으로 고사(故事)를 강독하고 노래할 때 양금(洋琴)을 반주로 사용함. 지방에 따라 ‘북경금서’, ‘산동금서’ ‘서주금서’ 등이 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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