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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는 깜짝 놀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에서 금방 건져낸 같은 사람이 아약임을 알아보았다. 여의는 서둘러 소궁녀 몇몇을 불러다 아약을 부축하여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오게 했다. 녹흔이 마침 팔팔 끓인 물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급히 측백나무로 만든 욕조에 물을 붓자, 여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아약의 축축하게 젖은 옷을 벗기고 아약을 욕조 안으로 옮겨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

 

아약은 주위에서 뜨거운 물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신음을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여의가 곁에 있는 것을 보자 곧장 눈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며 여의를 불렀다.
 
“소주.

여의는 녹흔에게 피를 돌게 하고 추위를 쫓는 생강 저민 , 석창포, 황주[각주:1] 넣으라고 분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손을 속에 넣고 아약의 팔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여섯 시진을 꿇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더냐?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이야?

 

아약의 얼굴은 흥건하여 이미 빗물인지 눈물인지 없게 되어버렸고, 그저 울며 말할 뿐이었다.
 
“듣기로, 황상께서 황후마마의 처소에서 저녁 수라를 드시러 가시다가 소인이 그곳에서 가련하게 꿇어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황후마마께 말씀을 꺼내셨다고 하옵니다. 황후마마께서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어 소인을 돌려보내시었사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우선 울음을 그치거라. 어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라. 내가 다리에 약을 발라주마. 그렇게나 오래 꿇어 있었으니 분명 다리가 무척 아프겠구나.

여의는 몸을 일으켜 전각으로 돌아와 묵묵히 등불의 심을 빼내며 바깥에서 빗소리가 잦아들고 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쇄심이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의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찌 돌아왔느냐?

 

쇄심은 조금 곤란해하다가 잠시 지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혜귀비께서 소주께서 필사한 «불모경» 보시더니 소주께서 건성으로 베껴썼다며 성심을 다해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한숨 쉬었다.
 "
그러면 혜귀비는 어떻게 하라더냐?

 

쇄심은 숨죽였다.
 
“혜귀비께서 말씀하시길, 소주께서 새로 편을 쓰시고 내일 장춘궁에 문안 가기 전에 함복궁으로 보내라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조금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괜찮다. 내가 다시 편을 쓰면 일이다.

 

쇄심은 여의의 표정을 살피며 낮게 말했다.
 
“실은, 실은 혜귀비는 소주께서 쓰신 불경을 들춰 보지도 않았사오니, 소주께서 어떻게 쓰시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작심하고 소주를 괴롭히는 것이옵니다.

 

여의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건 예상한 일이 아니더냐? 혜귀비가 언제 불경이 필요한 적이 있었더냐? 다만 내가 힘들게 고생하고 명을 받아 동분서주하는 보고 싶을 뿐이다.

 

여의는 말을 마치자 더는 아무 말없이 몸을 일으켜 탁자 앞으로 가서는 붓을 들고 먹을 묻혀 차례대로 베껴 쓰기 시작했다.
 
“매귀인이 회임한 것으로 이미 적지 않게 화를 돋웠는데 나까지 이렇게 불순하게 군다면 혜귀비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것이다.

 

쇄심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귀비의 처사는 분명 지나쳤사옵니다.

 

여의는 실낱같이 가느다란 웃음기를 머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약이 분수를 모르니 혜귀비도 엄히 가르친 것이지. 아약은 스스로 분별없이 행동했으니 나도 무엇이 분수를 지키는 것인지 알도록 애를 가르쳐야 한다.

 

쇄심은 여의가 붓을 들어 즉시 써내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주, 불경을 쓰셔야 하는 아니옵니까? 어찌 다른 이의 시를 쓰시는 것인지요?

 

여의가 말했다.
 
“불경을 베끼는 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지.

여의가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마디 말하자 쇄심은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지었다.
 
“소인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사람이 마침 이야기하고 있을 삼보가 태의를 데리고 있었다. 아약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녹흔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비틀 걸어왔다. 여의가 말했다.
 
“허 태의가 수고가 많네. 본궁을 위해 아가씨를 살펴봐주시게나.

 

태의는 대답하고는 아약의 맥을 짚어보다가 곧바로 말했다.
 
“비를 흠뻑 맞고 감기에 걸려서 지금 열이 조금 있으니 주의하여 몸조리해야 하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고열이 나서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옵니다. 소신이 좋은 처방을 써서 약을 보내드릴테니 소주께서는 궁인들에게 서둘러 약을 달이게 하시어 아가씨에게 먹이시면 좋아질 것이옵니다.

 

" 무릎의 상처는?

 

태의가 공손하게 말했다.
 
“외상일 뿐이오니, 약을 바르면 문제없을 것이옵니다.

태의는 말하면서 상자 안에서 가루약 포를 꺼냈다.
 
“약을 복용하고 외용 약을 바르면 금방 좋아질 것이옵니다.

 

여의는 고맙다 말하고 삼보에게 태의를 배웅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태의가 두고 약을 들고는 평온하고 잔잔한 말투로 말했다.
 
“바짓단을 걷어올리거라.

 

아약이 옷을 걷어 올리자 빨갛고 퍼런 무릎이 드러났다. 가장 심하게 다친 부분은 튀어나온 무릎 피부였으니 선홍색 혈흔이 배어 있었다. 여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아약에게 가루약을 발라주었다. 아약은 참지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소주, 소인은 정말 억울하옵니다!

 

여의는 천천히 상처에 가루약을 바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무엇이 억울하느냐?

 

아약이 울며 말했다.
 
“혜귀비가 이렇게 소인을 괴롭힌 것은 소주의 체면을 깎기 위한 것이에요. 소인이 억울한 것은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하지만 소주......

 

여의는 약병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네가 억울한 것은 자업자득이니 당연히 중요하지 않지. 당해도 싸구나!

 

아약은 믿을 없다는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목놓아 울면서 말했다.
 
“소주께서는 소인이 그랬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전부터 연심의 말본새가 방자하여 음으로 양으로 번이나 소주께 말대꾸를 하니, 소인은 연심을 넘기지 한지 이미 오래되었사옵니다. 연심이 어제는 영예롭게 혼인했지만 오늘은 학대를 당하니, 소인은 소주를 위해 기뻐하고 소주를 위해 복수하려고 비웃는 마디 것이옵니다!

 

명치께에서 들불이 번져 나가는 같았으니, 여의는 어두운 얼굴로 호통쳤다.
 
“내 앙갚음을 하려고 대신 구덩이를 파고 뛰어내린 것이냐? 궁중은 바깥과 같지 않다고 내가 번이나 가르치지 않았느냐. 네가 이렇게 교만 방자하고 제멋대로 굴어서 말끝마다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이곳은 후궁이니, 마디 말실수가 멀쩡한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너는 세치 혀로 명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냐!

 

아약은 전전긍긍하여 여의를 바라보며 슬피 흐느꼈다.
 
“소인이 잘못한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두 소주를 향한 충심이옵니다!

 

여의는 화가 치밀어 아무 말도 없었다. 쇄심이 황급히 말했다.
 
“아약 언니, 소주께서 언니를 위해 인정을 호소하시다가 귀비에게 여러 괴롭힘을 당하셔서, «불모경» 편을 베껴 쓰고도 모자라 다시 편을 쓰셔야 해요.

 

아약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소인은 인정할 없사옵니다. 잠저에 있을 소주와 귀비는 모두 측복진이었는데 지금은 어찌 사사건건 소주의 머리 위에서 짓밟으려 드는 것이옵니까? 소주께서도 맞서려 하지 않으시고 말이옵니다!

여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까지 붉어졌고, 손에 호갑이 자단목 탁자를 둔탁하게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여의는 분노하여 말했다.
 
“너는 매사 다툴 줄만 알고 나서려고만 하는구나! 매사 적당한 데서 그치고, 나아감이 있으면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거늘! 너는 분쟁을 벌일 생각 뿐이고 툭하면 남과 다투지 못해 안달이더니 한술 뜨는구나!

 

아약이 기가 죽어서 울기 시작하자 쇄심이 사람 사이가 거북한 것을 보고 생강탕을 들어 아약에게 주었다.
 
“언니 몸이 좋지 않으니 어서 생강탕을 마셔요.

 

아약이 쇄심의 손에서 그대로 마시려고 하자 여의는 더욱 불쾌해졌다.
 
“스스로 마시게 해라!

아약은 감히 더는 울지 못하고 입을 삐쭉 내밀고 스스로 탕그릇을 받아서 마셨다.

 

여의가 매섭게 말했다.
 
“약을 마시거든 얌전히 가서 자라.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 번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매사 함부로 위세를 부리고 다닌다면 나도 너를 지켜주지 못한다.

 

아약은 눈을 내리깔고 소리없이 훌쩍이며 밖으로 나갔다.

 

여의는 마음이 견딜 없이 심란하여 대모갑으로 붓대를 대고 자색 토끼털로 만든 붓을 집어 들고 불경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쇄심이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주께서도 시장하실 테니 저녁 수라를 들이라 하지요!

 

여의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
화가 나서 배가 터지겠구나. 필요 없다.

 

평생 가장 우울하고 답답한 밤이 바로 이날 밤이었다. 여의가 불경을 필사 하던 , 밤새 차가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를 들려왔으니, 드문드문 들려오는 파초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사람을 근심하게 하였으니, 밤은 어찌됐든 편히 잠들 없었다.

 

여의는 문득 답답해져서 어젯밤에 남겨둔 불모경 필사를 쇄심에게 넘겨주고 말했다.
 
“가보거라.

 

쇄심은 바깥에 비가 그친 것을 보고 먼저 영황을 상서방으로 배웅했다. 상서방을 돌아가면 바로 길이어서 쇄심은 일찍이 황제가 지난밤 매귀인의 처소에서 머문 것을 알고 일부러 돌아서 영화궁 바깥쪽으로 갔다. 과연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 아래 멀리서 태감들의 신발이 가볍고 경쾌하게 푸른 바닥 기와를 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리 궁등이 별처럼 밝게 빛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싼 샛노란 어가가 무수히 많은 의장을 거느리고 고요하고 적막한 궁궐 담장 사이 좁은 길을 따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예심은 고개를 숙이고 길을 걷고 있어서 황제의 곁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태감이 소리로 꾸짖었다.
 "
누구냐? 어가가 여기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냐?

 

예심이 놀라 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
소인 연희궁 궁녀 쇄심, 무심코 어가에 무례를 범하였사오니 황상께서는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황제는 온화하게 말했다.
 "
지금 시각이면 영황을 아가소에 보내고 것이냐?

 

예심이 말했다.
 "
. 소인 본래 영화궁 밖에서 황상을 마중하려 하였사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
무슨 일이냐?

 

쇄심이 고개를 숙이고 깍듯이 예를 갖추어 말했다.
 
“한비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오늘은 팔월 여드레라 소주께서 특별히 소인을 시키시어 이것을 황상께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흠이 쇄심의 손에서 받아다 손으로 황제에게 받들어 올렸다. 황제가 들춰보고는 옥판선지[각주:2] 작은 해서체로 줄에 시선이 멈췄다.
 
“팔월의 파도가 울부짖으며 밀려오니

  몇 장에 달하는 파도가 벼랑을 치고도 되돌아오는구나

  오래지 않아 조수가 바닷문으로 물러가니,

  떠날 말려 올라간 모래더미가 마치 눈더미 같구나.

이것은 유우석[각주:3] «낭도사»[각주:4]이니, 마침 전당강[각주:5] 팔월 여드레 파도치는 장관을 묘사한 것이었다.

 

황제는 겨울 밤의 별처럼 빛나는 눈에 가닥 따뜻하고 맑은 미소를 띄었으니, 이는 그가 여의에게 자주 이야기한 전강의 세찬 파도를 그리는 시였다. 여의는 모두 기억하고 팔월 초여드레 새벽녘에 강물에 가득한 파도를 필사 하여 그에게 보낸 것이었다. 종이 아래에 «불모경» 편이 있었으니 황제가 온화하게 말했다.
 
“어찌 «불모경» 편이 있는 것이냐?

 

쇄심이 말했다.
 
“소주께서 말씀하시길, 전강(钱江) 물결이 비록 천군만마가 내달리는 것처럼 기세가 비할 없으나, 백성들이 다소 피해보는 것을 면하기 어려우니 항상 누군가 강물에 말려들어가지 않는지 항상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하셨사옵니다. 그래서 소주께서 부처의 어머니의 자비로움을 빌려 백성을 돌보시려 특별히 «불모경» 편을 필사하신 것이옵니다.

 

황제가 무척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짐이 받아두겠다. 왕흠, 한비가 베껴쓴 «불모경» 모두 양심전 불단에 바치고, 이번 달에는 따로 올릴 필요 없다.

 

왕흠이 대답하자 쇄심은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공손한 얼굴로 어가 행렬이 구불구불 이어져 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가닥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쇄심이 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여의는 이미 장춘궁에 문안 갔다 돌아와, 기다란 창가에 기대어 새로 보내온 국화 꽃봉오리를 고르고 있었다. 꽃봉오리들은 아직 피지 않아 옅은 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마치 옥이 한데 모여 있는 같았다. 여의가 송이씩 고르고 있으니 그윽한 향기가 손가락에서 은은하게 묻어나왔다.

 

쇄심이 웃으며 말했다.
 "
소주께서는 무엇을 하시느라 그리 바쁘시옵니까?

 

여의가 방긋 웃으니 담담하게 피어나는 국화 꽃봉오리 같았다.
 
“흰 국화 꽃봉오리를 골라 베개를 만들어서 영황에게 베게 하면 눈이 밝아지고 정신이 맑아질 것이야.

 

쇄심은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 여의 곁에 앉고는 함께 꽃을 골랐다.
 
“소주께서는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흥이 나셨사옵니까?

 

 “장춘궁에 문안드리고 돌아온 이래로 혜귀비가 내게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네가 일을 처리했다는 알았다.

 

쇄심이 눈썹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
. 황상께서 소주의 «불모경» 양심전 불당에 올리신 것을 소인이 귀비 앞에서 말했더니 귀비도 더는 말이 없었사옵니다. 비록 귀비께서 화는 냈지만, 그래도 소인에게 불경을 보화전에 가져가 태우게 했사옵니다.

 

여의는 예상했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좋다 하신 것을 귀비가 트집잡을 있겠느냐?

 

쇄심이 말했다.
 
“귀비가 일부러 소주를 괴롭힌 것을 황상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관대하게 처리하셨지요.

 

 “나는 그저 귀비가 깨닫기를 바랐을 , 일촉즉발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디로 적당한 선에서 끝낸 것이지.

여의는 세심히 고른 국화를 ()자를 수놓은 청금색 보드라운 베개에 넣으며 물었다.
 
“어젯밤에 아약은 어떻든? 열이 심하게 나더냐?

 

쇄심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허 태의가 처방한 약을 먹으니 초저녁에는 열이 심하게 나서 계속 물을 달라고 했었는데, 자정이 지나서는 많이 안정되었사옵니다.

 

여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근심스레 한숨을 쉬었다.
 
“쇄심, 내가 그동안 아약을 너무 오냐오냐 하지 않았더냐?

 

쇄심은 말뜻을 짐작하고 느릿느릿 말했다.
 
“아약 언니는 소주의 친정 시녀이니 소주께서 아끼시는 것은 당연하옵니다.

 

여의가 손끝으로 느릿느릿 국화를 문질러 비비자 상쾌한 향기가 나는 즙액이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 끝에 묻었다. 여의는 망설였다.
 
“아약도 혼인할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에는......

 

쇄심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아약 언니는 복도 많지요.

 

여의는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애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아니다. 아약 아이의 성격을 궁에서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니 말이다. 마침 한창 좋은 시절이니 궁에서 내보내 좋은 사람을 짝지어주는 낫겠구나.

여의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약은 아무래도 지난 동안 나를 따랐으니 혼사에 주의를 돌리면 벌받을 짓은 못하겠지. 어머니가 입궁하실 날을 기다렸다가, 어머니께 바깥에서 아약을 시집보낼 훌륭한 집안을 알아봐 주십사 부탁드려야겠다.

 

쇄심은 조금 의외였다.
 
“소주께서는 아약을 어전 시위에게 보내시려는 아니셨어요?

 

여의는 마음 속에서 걱정이 되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는 그리하려 했지. 궁중에서 일하는 시위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제일 좋으니, 이등 시위든 삼등 시위든 모두 앞으로 출세할 날이 있을 것이고 아이도 곁에 오래오래 두고 함께 있게 생각이었다. 허나 아이의 성격이 만일 궁중의 복잡한 관계에 엮인다면 필경 골칫거리가 것이야.

 

쇄심이 알아차리고 말했다.
 
“소주께서 여전히 아약 언니를 고려해 주시니, 만약 외직의 관원에게 출가 시키신다면 년은 밖에서 고생할지 모르나 결국에는 정실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부귀하지 않을 없을 것이어요.

 

여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의하는 눈빛으로 쇄심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맞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간에서 콰당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청옥색 옷을 입은 사람 그림자가 목조 배나무 꽃과 청록색 옥으로 장식한 망사를 찬장을 피해 곧장 달려와서 말했다.
 
“소주, 소주. 제발 소인을 내보내지 마세요. 소인은 출가하고 싶지 않아요. 소주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여의는 뜻밖에도 아약이 병중에 밖으로 나와 바깥에서 말을 들은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면 갈수록 버르장머리가 없구나!

 

아약은 눈물을 머금고 꿇어 앉아 슬프고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주, 용서해주세요. 소주의 말씀을 몰래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그저 몸이 조금 나아진 같아서 일어나 소주께 문안을 올리고 시중을 들려 했사옵니다.

아약은 본래 병중이었으니 얼굴빛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고 이마에는 바람을 막는 가는 띠를 매고 있었으니 초췌하기가 이를 없었다.

 

여의는 차마 견딜 없어서 말했다.
 
“우선 일어나거라. 나도 미련한 소리 마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언제 당장 너를 내보낸다고 했더냐. 괜찮은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야 것이야.

 

아약은 비처럼 쏟아지는 배꽃처럼 울었다.
 
“소인이 자금성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알고 있사옵니다. 만일 소주께서 정말로 소인을 내보내시려면 년만 남기시어 소주를 모시도록 해주세요. 소인,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쓸데없는 말참견으로 소주께 화를 불러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여의는 아약이 이토록 간절한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조금 가련하게 여겼다. 어쨌든, 열두 살이던 해부터 아약은 교만하고 방자했던 좌령 집안의 아가씨였던 자신이 황자 저택에서 총애를 듬뿍 받아 삼갈 모르던 측복진이 되기까지, 그리고 궁중에서 차츰 제약 받고 구속받는 비빈의 하나가 되기까지 자신의 곁에서 따르고 모셔온 것이었다. 아약의 횡포와 거만함은 암암리에 그렇게 가시 돋힌 언행과 날카롭게 맞서는 행동, 쉽게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은 자신의 예전 모습의 그림자를 띠고 있었다. 여의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생각해보니, 그렇다면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것들은 과연 이제 똑같이 교만한 아약인 것인가, 아니면 이전에 그렇게 분별없던 자신인 것인가?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마자 여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약의 잘못은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찌 아약을 책망할 있겠는가?

 

여의는 손을 뻗어 아약을 불쌍히 여기며 일으켰다.
 
“바닥이 차다. 일어나거라.

 

아약은 애처롭게 울면서 애원했다.
 
“소주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소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여의는 그저 웃으며 말했다.
 
“궁녀가 출궁하는 나이가 스물 다섯이지. 네가 그렇게 있고 싶다면, 스물 다섯이 되거든 가거라.

 

아약의 눈에 줄기 밝은 빛이 스쳤다.
 
“참말이옵니까? 그럼 소인, 소주께 감사드리옵니다.

아약이 허둥대며 황급히 감사의 예를 올리려 하자 여의는 아약의 손을 잡아 말리며 온화하게 말했다.
 
“가보거라. 가서 몸조리 하거라.

 

아약은 보기 드물게 온화하고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 나왔다. 다만 돌아서는 순간, 아약은 미소를 거두고 암암리에 입술을 깨물었으니 입가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자금성의 서늘하고 상쾌한 가을 날씨는 그리 길지 않아 보였다. 가을 바람이 불어 무성한 잎으로 푸르던 가지가 누렇게 드러나고, 가차없이 잎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니, 영락없이 먼지와 재가 되어버렸다. 추운 겨울은 나날이 벌거숭이가 되어가는 갈라진 나뭇가지와 더불어 아무런 기별도 없이 침습해오고, 자금성은 길고 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는 건조하지만 옅은 한기가 항상 배어 있기 때문에, 맑은 물에서 기르는 꽃송이가 큼직한 수선화는 이승인지 저승인지 모를 황홀한 향으로 각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촉촉하면서도 녹진한 맛이 있었다. 안의 온도는 항상 바깥보다 따스하고 포근하여 마치 따뜻함이 가득한 봄날이 아직 가버리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따뜻함은 쉽게 쓸쓸해지는 것이었으니, 떠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쉬워하게 했다. 적막 속에서는 예상치 못한 겨울눈이 온유하게 느껴지고, 모나고 딱딱한 궁궐 담장의 청색 벽돌마저, 날개처럼 맹렬하게 말려 올라간 추녀마저도 평소의 생경함과 차가움이 꽤나 줄어들어서 내린 뒤의 흔치 않은 안온함과 평온함이 생겨났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매일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가야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여의는 그다지 밖을 나서지 않았다. 다만 영화궁이 그다지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암리에 듣고, 여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매귀인을 몇 차례 찾아갔다. 처음 회임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개월 동안 매귀인은 매사 유난히 크게 반응하여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 태후마저 놀라서 사나흘마다 제비집 탕을 내렸다. 개월이 지나자 매귀인은 조금씩 게을러졌고 입맛도 갈수록 좋아져서, 어선방뿐만 아니라 비빈들도 각자 소주방에서 요리를 만들어 보내 후궁들 간의 두터운 정을 과시하고 황제의 환심을 샀다. 태의는 매번 매귀인에게 생선과 새우, 조개류를 많이 먹어야 총명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고 당부했고, 매귀인도 기꺼이 말을 받아들여 끼니마다 반드시 어패류를 올리게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의는 적잖이 고생을 했다. 여의의 연희궁은 궁인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들이고 내보내는 통로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밖에서 신선한 생선과 새우를 창진문에서 소화문을 지나 영화궁으로 보내는 도중에 반드시 여의의 연희궁을 지나야 했으니, 한동안 생선과 새우의 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여의 또한 감히 여러 말을 없어서 그저 궁인들에게 향을 많이 피우게 하거나 수선화 등을 두어 냄새를 없앴다. 매귀인은 비록 입맛은 좋았지만 입가에는 몸에서 나는 때문에 수포가 생기고 이가 시큰시큰 시리기도 했으니, 황제는 마음이 아파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병을 가니, 태의들도 덩달아 왕래가 끊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북적거리고 왁자지껄했다.

 

이 날, 여의와 해란, 록균은 서로 약속하고 매귀인을 보러 갔더니, 매귀인은 입을 가리고 훌쩍이며 울고 있었고 입가에는 커다란 물집 개가 잡혀서 박하 가루를 바르고 붓기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매귀인은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잠을 이루고 꿈만 꾸며,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심하여 자주 떨리는 증상이 있는지, 태의가 무능하여 유난히 그녀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나 하나 하소연했다. 한쪽에서 듣고 있던 태의 명이 이마에 흘러내린 식은땀을 황급히 닦으며 말했다.
 
“귀인의 여러 병증은 모두 용종을 잉태하여 생긴 것이오니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참외가 익어 절로 꼭지가 떨어지는 날이 오면 자연히 좋아질 것이옵니다.

 

록균은 아이를 낳아 길러본 사람이라 미소를 지으며 타일렀다.
 
“아이를 가지면 본래 온몸이 편치 않고, 자네는 아이가 아닌가. 방금 자네가 이리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렇게 불편한 것은 대부분 몸에 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라, 어쩌면 남자아이일지도 모르겠군.

 

매귀인은 비로소 화를 누그러뜨리고 기뻐하여 웃으며 말했다.
 
“순빈마마, 소첩을 속이시는 아니지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
다른 사람이 말하는 몰라도 순빈은 자기 소생의 황자를 기르고 있으니 틀리지 않을 것이야.

 

해란도 말했다.
 
“제가 기억하기로, 순빈 형님이 셋째 황자를 가졌을 때에도 계속 불편했는데, 결국 아주 튼튼한 아이가 태어났죠.

 

사람들이 매귀인을 안심시키고는 헤어졌다. 문을 나오며 순빈이 생각해보니 오늘은 초하루라, 여의와 해란에게 청하여 셋째 황자 영장을 보러 함께 아가소로 향했다. 여의는 마침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영황을 마중할 시간이라 구실을 대고 사양했다.

 

상서방으로 가는 길에 문득 어화원을 지나는 지름길로 향하니, 여름 날에는 연잎이 가득하고 개구리밥이 떼지어 자랐던 연못에는 잎맥만 남은 말라붙은 잎줄기가 꼿꼿이 서있어 쓸쓸하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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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먹고사니즘이 다망하여 티스토리가 인증을 다시 하라고 할 정도로 오랜만에 왔네요ㅠㅠ 항상 잊지 않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1권도 한 장만 남겨두고 있네요. 올해 반드시 1권을 끝내겠다고 결심했는데 다행히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계획을 말씀드리자면, 다음주 쯤 제30장을 올려서 1권을 마무리하고 1월 둘째 주부터 2권을 올릴 생각입니다. 내년 하반기 중에는 3권을 시작하고 싶은 작지만 커다란 바람도 있습니다ㅎㅎ





  

 

 

  1. [역자주] 황주(黄酒): 차조·찰수수·쌀 등으로 만든 빛이 누렇고 순도가 낮은 술. [본문으로]
  2. [역자주] 옥판선지(玉板宣紙): 선지의 하나. 폭이 좁고 두꺼우면서도 빛이 희고 결이 고운 고급 선지로,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데에 많이 쓴다. [본문으로]
  3. [역자주] 유우석 (刘禹锡): 중국 당나라의 시인. [본문으로]
  4. [역자주] 낭도사(浪淘沙): 모래를 씻기는 물결이라는 뜻. [본문으로]
  5. [역자주] 전당강(钱塘江): 안후이(安徽)성에서 발원하여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만으로 유입되는 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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