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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잠시 조용히 정원에 아득하게 핀 홍매화를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암홍색 꽃술을 내어놓은 것이 마치 피비린내 나는 붉은 점이 수없이 많이 튀어 있는 것 같았다. 여의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안색을 살폈으나, 황제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어 마치 가을날의 맑고 깨끗한 호수 수면처럼, 해질녘 황금빛 따뜻한 햇살이 그 수면 위에 흩뿌려진 것처럼 따뜻한 기색을 띠며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황후는 여의의 손을 누르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혜귀비의 말이 조급한 감은 있지만, 신첩은 이 온 궁중에 어느 누구든 무슨 일이든 막론하고 대청의 국조(国祚, 나라의 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여의는 ‘목매어 죽는다’는 말에 생각이 이르자 온몸에 한기가 드는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황상, 매귀인의 아이는 완전히 사고였사옵고, 아이가 태어나서 이미 죽은 이상 그것은 더욱 다른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뿐더러, 대청의 국조에는 더더욱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사옵니다.”

 

혜귀비가 웃으며 말했다.
 “한비가 말은 참 쉽게 하는군. 황상께서는 한창 때이시니, 앞으로 아이도 많을 걸세. 아이는 황자든 공주든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것은 총명하고 온전하여 대청에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한비는 지금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만일 미천한 자의 재앙을 받아 이렇게 죽은 아이를 낳는다면 한비 자네는 어미로써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때가 되면 후회해도 늦는 것이야.”

 

여의는 혜귀비가 자신을 예로 드는 것을 들으니, 그 마음이 악독하여 속으로는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하늘이 비호하시니,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혜귀비께서 걱정하셔야겠다면 마마의 아이를 걱정하시지요.”

 

혜귀비는 잠시 노려보다가 아주 차갑게 말했다.
 “본궁이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태어날 본궁의 아이뿐만 아니라 당장 이귀인의 아이와 다른 사람의 아이일세. 한비 자네가 매귀인을 위해 사정하는 것은, 궁중에서 이런 재앙이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재앙이 생기면 자네와 매귀인이 함께 그 아이를 따라 죽음으로써 대청에 보답하겠다는 것인가?”

 

황제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됐다. 여기 서서도 이렇게 다툼을 그치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냐?”

 

여의와 혜귀비가 서로 마주보고는 하는 수없이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신첩이 주제 넘었사옵니다.”

 

황후가 조용히 말했다.
 “황상, 그렇다면 황상의 뜻은......”

 

황제는 얼굴을 찡그리며 황후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이귀인의 아이는 황후께서 많이 돌봐주시오. 매귀인은 일단 영화궁에서 나와 보화전 앞 우화각으로 보내고, 거기서 부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깨끗하게 마음을 가다듬게 하시오.”

 

혜귀비가 아직 따르지 못하고 말했다.
 “황상, 하지만 매귀인은 그런 아이를 낳았사온데......”

 

 “아이?”
황제는 가볍게 비웃었다.
 “매귀인의 자진을 허락할 지는 나중에 따지는 것이 좋겠다. 짐은 오히려 궁중에 과연 어떤 담대한 자가 있어서 감히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알고 싶구나. 짐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황제가 매우 근엄하게 말하자, 뭇사람들은 듣고 모두 숙연해졌다. 황제가 말했다.
 “혜귀비, 여기는 그대가 상관할 바 아니니 먼저 물러가거라.”

 

혜귀비가 나가기를 기다리며 황제가 뒷짐을 지고 정원에 서 있었으니, 주변에는 시중 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여의는 황제의 안색이 이렇게 변하고 방금의 그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조금 우울해졌다. 황제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그날 밤 여기서 그 아이를 본 것은, 짐, 황후, 한비 그리고 왕흠이지.”

 

황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 밖에 아이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날 밤 모두 궁 밖으로 내보냈으니, 분명 궁 안에서 뭐라 말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길게 탄식했다.
 “그대들은 모두 짐의 측근들이지.”

 

여의는 의중을 깨닫고 뒤이어 말했다.
 “신첩은 황상의 분부를 받들어 단 한 마디도 누설하지 않았사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물었다.
 “황후, 그날 왕흠이 아이를 처분하러 밖으로 나갈 때, 길에서 누군가를 마주치지는 않았겠지요?”

 

황후는 곁에 있는 사람만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영화궁 문을 나와서 목졸라 죽이고 곧바로 죽은 아이를 작은 관에 넣어 봉하고 화장하였사옵니다. 이 일은 신첩 곁의 연심이 함께 따라가 처리했기 때문에 절대 착오가 있을 수 없사옵니다.”

 

여의는 그 아이가 의심할 여지없이 반드시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아이를 왕흠이 목졸라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그녀는 가슴이 떨려오며 말할 수 없이 답답해져서 하마터면 거의 구토가 나올 뻔했다.

 

황제는 작게 “응”하고 대답하고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여의는 제멋대로 난폭하게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며 정원을 가득 채우는 스산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마치 역풍에 휩쓸려 헤어나지 못하고 떨어지는 마른 가지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여의는 궁에 돌아오자 조금 견디기 어려워졌다. 여의는 꽃을 몇 송이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붓을 내려놓았다. 겨울철에 사용하는 살구 홍단에 복(福)자를 흩뿌려 장식한 금비단 장막에는 희색이 넘쳤고, 오색찬란한 빛깔이 눈에 들어오자 찬란한 황금빛이 유난히 눈을 찌르는 듯했다. 쇄심은 발을 치고 차를 받쳐 가지고 들어오며 말했다.
 “소주, 영화궁 매귀인이 거처를 옮겨 가려 하옵니다.”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받아들고 말했다.
 “매귀인은 가엾게도 아이가 그렇게 됐으니 우화각으로 옮겨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좋겠지.”

여의는 차를 한 모금 마셔보더니 물었다.
 “어찌 말리화 차로 바꾼 것이냐?

 

쇄심이 웃으며 말했다.
 “말리화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어주지요. 소주께서 돌아오신 이래로 계속 표정이 굳어 계셔서 소인이 이것으로 바꾸었사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아약은? 어째서 아약이 보이지 않는 게야?”

 

쇄심이 말했다.
 “내무부 가죽 창고에 가서 겨울 옷 두 벌을 만들 좋은 가죽을 골라온다 하였는데, 한번 가면 이렇게 오래 걸리니 아무래도 고르는데 지체된 모양이어요. 소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약이 물건을 고르는 데는 세심한 편이지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렇구나. 아약이 좋은 물건을 본 적이 있어서 물건을 고르는 데 엄격하지. 보아하니 이제 아약의 성질이 좀 누그러져서 예전처럼 경솔하지 않아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쇄심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지난번 일은 아약 언니도 교훈을 얻은 셈이고 소주께서 가르치신 덕분이기도 하지요.”

 

여의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약이 알면 다행이겠구나.”

 

쇄심은 여의를 보고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소주께서는 어째서 또 기분이 좋지 않으신 것이옵니까?”

 

여의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탁자 위에서 이리저리 그어보며 스스로의 번잡한 마음을 다스렸다.
 “궁중에서 유언비어가 들끓으니 그 어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구나.”

 

 “궁중에는 지금껏 유언비어가 모자랐던 적이 없었는데 소주께서는 어찌 심란해하시는지요?”

 

구름같은 타래머리에 늘어뜨린 홍옥 술이 찰랑거리며 귓가를 스쳤으니, 흔들릴 때마다 가을비와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서늘했다.
 “만일 황상께서 가장 꺼리시는 유언비어가 오직 나, 황후, 그리고 왕흠 이 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황상께서 어찌 생각하실 것 같으냐?”

 

쇄심의 표정이 마치 희뿌연 찬 서리를 맞은 것처럼 변했다.
 “이 일을 상세히 조사하지 않는다면 황상께서 소주께 엄청난 의심을 품게 될까 두렵사옵니다. 황상의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소주의 앞날은 고생스러울 것이옵니다.”

 

여의가 걱정하여 말했다.
 “내가 어찌 이걸 몰랐을까? 그저 이 일을 황상께서 이미 조사하고 계시니 어서 진상이 드러나길 바랄 뿐이다.”

 

 

 

 

밤에 찾아온 우화각은 유난히 깊고 고요했다. 우화각은 본래 명나라 때 지어진 건물로 총 3층이었다. 불상과 경서를 모시는 1층을 제외하고 위의 두 층 모두 사람이 살 수 있었다. 다만 규모와 구조가 낡고 간소해서 동서 육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매귀인이 이곳으로 새로 옮겨오면서 시중드는 시녀도 크게 줄어들었고, 뒤쪽 보화전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불경 읽는 소리를 며칠 듣고 있으니 마음 속으로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 고달픈 신세, 한평생의 영화와 단꿈은 그 불운한 아이를 따라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녀도 멀쩡히 살아서 이곳에 갇혔는데, 어느 세월에야 벗어날 수 있을까?

 

매귀인은 불상 앞에 엎드려 창밖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목놓아 울다가 어느새 맑은 눈물을 떨구었다. 다만 이 생이 아득하여 더이상 헤쳐 나갈 길이 없을 것 같았다.

 

태후가 들어왔을 때에도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리어 복 상궁이 먼저 불렀다.
 “매귀인, 태후께서 보화전에 참배하러 오셨다가 우화각에 들리셨으니, 귀인께서는 차를 올려 태후를 모시십시오.”

 

밤에 참배하러 오느라 태후는 곁에 복가만을 대동하고 있었고, 따르는 궁인 몇몇은 모두 우화각 밖에 남겨져 있었다. 태후는 소박하면서도 청아함과 고귀함을 잃지 않는, 매우 귀한 남색 비단에 금실로 파초와 복(福)자, 사슴 무늬를 수놓은 장삼을 입고, 머리에는 목숨 수(壽)자와 여의(如意, 본래 등긁개였으나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장식물의 일종이 됨. 만주족 기인(旗人)들은 청혼용으로 사용함) 모양을 본딴 금장식을 꽂았으나 몇 개가 드문드문 있을 뿐이라 오히려 담백하고 점잖았다.

 

매귀인은 잠시 아무 반응도 없이 있다가 급히 몸을 일으켜 절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매우 정중하게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는 것을 막으며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하여 말했다.
 “뜻밖에 야심한 시각에 태후께서 어화각으로 납시실 줄 몰라 신첩이 나가 마중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태후가 손에 든 비취 염주를 천천히 돌리자, 푸른 빛이 촛불 아래에서 호수의 맑고 깨끗한 물결처럼 일렁였으니, 한눈에 보아도 최상급의 헌상품임을 알 수 있었다.

 

태후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계속 영화궁에 있어야 했다면 너를 보러 오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이제 우화각에서 지내는 것은 적응이 되었느냐?”

 

매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태후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그렇겠구나. 번화한 동서 육궁에 익숙해졌는데 어디 우화각처럼 외지고 궁한 곳에서 견딜 수나 있겠느냐? 허나 황제의 뜻도 옳다. 네가 계속 이렇게 상심하고 있으니 우화각에 머물면서 부처의 말씀과 범경을 듣고 있는 것도 좋은 것이다.”

 

매귀인은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그치지 않는 차가운 비처럼 눈물을 쏟았다.
 “태후, 궁중의 모든 사람들이 전하기를, 신첩이 낳은 아이가 죽은 아이가 아니라 업장이자 요사스러운 물건이라고 하옵니다. 신첩......신첩이 어찌 그런 아이를 낳았단 말씀이옵니까?”

 

태후가 길게 탄식했다.
 “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관에 넣고 봉하여 화장해버렸으니, 그것이 죽은 아이인지 업장인지 애가마저도 확증할 수 없는데 하물며 너는 어떻겠느냐. 네가 계속 마음에 담아둔다면 스스로를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매귀인이 달갑지 않아하며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그건 신첩의 아이란 말이옵니다! 신첩이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고생을 참고 견디며 낳은 아이인데 어찌 업장이란 말이옵니까?”

 

태후가 매귀인을 바라보니, 두 눈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비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업장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느냐? 황상조차도 다시 거론하고 싶어하지 않고, 궁중에서 관련된 어떤 유언비어가 떠도는 것을 바라지 않는데, 너는 또 구태여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느냐? 결국, 그건 이미 죽은 아이인 것이니라. 그리고 너는 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비록 살아있다고 해도 죽을 날이 머지 않을 것이야.”

 

매귀인은 온몸이 극심하게 떨리며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후......”

 

태후가 천천히 염주를 돌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애가가 듣자하니, 혜귀비가 황제에게 네가 스스로 목을 매어 네 아이를 따라가도록 허락하여 앞으로 다시는 후궁에 이런 불길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말씀 올렸다지. 황제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승낙하지 않았지만, 만일 어느 날 베갯머리에서 속살거리기라도 한다면 황제가 허락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되면 네가 직접 목매달아 죽으려 하지 않아도 황제가 네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매귀인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고개를 연신 젓더니, 무릎 걸음으로 태후에게 다가가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태후마마, 태후마마, 신첩은 정말로 죽을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그저 신첩이 출산한 이후로 황상께서 계속 신첩을 보러 오지 않으시기에 신첩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얄팍한 계책을 내어 황상을 오시게 한 것이옵니다. 그 궁녀들도 모두 신첩이 안배한 것이옵니다. 신첩은 죽고싶지 않사옵니다, 신첩은 죽고싶지 않사옵니다!”

 

태후는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애가는 당연히 네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날 너를 남부에서 꺼내 왔을 때, 네가 성질머리가 있고 또 오라나랍 부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일단 후궁에 데려다 놓으면 틀림없이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에게 애를 먹일 것을 알았지. 황후가 후궁의 분쟁에 마음을 쓰면, 후궁에서 애가의 말을 듣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비로소 쓸모가 있는 것이다. 네가 이토록 쉽게 죽어버리면 애가의 고심이 헛되었을 것이다.”

 

매귀인은 고개를 숙이고 귀기울여 듣다가 다시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신첩이 후궁에 들어온 이래로, 혜귀비는 온 힘을 다해 신첩을 배척하여 한비와 같은 패거리로 몰더니 이제는 신첩을 순장하려 하옵니다. 신첩이 우매하여 태후마마의 가르침을 청하오니, 신첩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태후가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은 하늘과 부처님뿐이니, 잘못된 길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니라. 애가는 네가 아이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것을 알지만, 아이는 이미 죽었고 너는 살아야 하니,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너는 당분간 마음 놓거라. 애가가 흠천감에 일러 운수가 나쁘니 궁중에 절대로 상 치를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고 해 둘 것이다. 허나 어떻게 우화각에서 나올지, 어떻게 애가가 당부한 것을 저버리지 않을지는 너 자신을 보아야 할 것이야."

 

매귀인이 엎드려 절하며 비통한 표정에 한 가닥 심각함이 떠올랐다.
 “신첩, 태후마마의 가르침을 받들겠나이다.”

 

태후는 복 상궁의 손에 부축을 받으며 한가롭게 걸어나가며 따뜻하지만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어떤 일은 애가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구나. 항상 네 복중 태아에게 아무 문제없고 건강하다 했었다. 그런데 어찌 태어난 아이가 그런 모양인 것인지, 참으로 가련하구나.”

 

매귀인이 바닥에 엎드리자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 기와의 차가움이 이마로 전해져 왔으니, 그 냉기가 곧장 머릿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전각 안에는 태후가 일년 내내 피우는 단향의 여운만이 남아, 향기는 깊고 부드러웠으며 자욱하게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의가 양심전으로 불려간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여의는 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약의 시중을 받으며 손을 깨끗이 씻고 있었는데, 황제를 모시는 이옥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한비마마, 황상께서 지의를 내리시기를, 즉시 양심전 난각에 다녀가시라 하시옵니다. 관련 없는 자는 데려오지 말라 하셨사옵니다.”

 

여의가 이 마지막 말을 듣고 마음이 내려 앉으며 조금 불편한 감정이 생겼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황상께서 이런 지의를 내리시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옥의 표정은 평소와 같지 않았고, 말을 전할 뿐이었다.
 “밖에 가마를 준비해두었사오니 마마께서는 납시시지요.”

 

여의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아약과 쇄심조차 대동하지 않고 이옥의 부축을 받으며 양심전으로 향했다. 의문(仪门,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 밖에 있는 가마에 오르려 하는 순간, 여의는 이옥이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왕흠이 황상 앞에서 한바탕 하소연을 했사온데, 소인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옵고 다만 황후마마께서도 와 계시옵니다.”

 

여의는 ‘왕흠’과 ‘황후’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침울해졌다.
 “그럼 어서 가세. 황상께서 기다리시게 하지 말구.”

 

여의는 전각에 들어서자마자, 전각 안의 분위기가 지난 날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제의 표정은 침울했고, 눈에는 어슴푸레하게 노기를 띄고 있었다. 황후 역시 평상 앞의 자단목 의자에 반쯤 걸터 앉아있었으니, 감히 황상과 같은 평상에 앉지 못했다. 그리고 왕흠은 의기소침하게 바닥에 꿇어 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여의는 급히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만복을 누리시옵소서. 황후마마께서는 평안하시옵소서.”

 

황제는 대강 턱을 치켜올리며 여의에게 일어나라고 눈짓했다. 여의는 서둘러 공손하게 한쪽에 섰고, 황제도 “앉거라”라고 하지 않은 채 왕흠을 향해 말할 뿐이었다.
 “네가 방금 짐에게 말한 것을 황후와 한비 앖에서 다시 말해보거라.”

 

왕흠이 급히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소인은 황상의 명을 받잡고 육궁에 소문이 나도는 일을 철저히 조사하다가, 매귀인이 낳은 아이가 한 몸에 남녀가 함께 있는 요사스러운 재앙이라는 소문이 확실히 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사옵니다. 갓난아기를 직접 본 것처럼 이렇게 상세한 내용인데다가, 노비들의 입이 가벼워서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번져 나가며 그 아이가 요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사옵니다.”

 

황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것들이 어쨌다는 것인지 말해라! 네가 알아낸 것만 말하란 말이다!”

 

왕흠은 놀라서 멍해졌다가 급히 말했다.
 “소인이 조사한 결과, 이런 소문이 퍼진 것은 동육궁이 서육궁보다 더 오래된 일이었사옵니다.”

 

황후는 뻔히 한숨을 쉬며 적잖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법랑 손난로의 은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신첩은 장춘궁에 거하고 있고 다행히 서육궁에는 소문이 덜 퍼졌다 하니, 신첩도 결백한 셈이로군요.”

 

왕흠은 소매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예. 소인이 아는 바로는, 소문이 난 곳은 주로 영화궁, 연희궁, 경양궁, 종수궁 일대에 모여 있었사옵니다.”

 

황후는 왕흠이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는 것을 보고 따뜻한 목소리로 서둘러 말했다.
 “동육궁 중에는 이 네 궁에만 비빈들이 거주하는 곳인데, 영화궁은 이 일이 일어난 곳이니 소문으로 혼란스러울 수 밖에. 다시 말해보거라. 이 말이 어디서 흘러나왔다고?”

 

왕흠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뚝뚝 떨어지는 땀이 전각 안의 소합향에 스며들어 참으로 고약한 냄새가 되었다. 여의는 숨죽이고 그저 왕흠이 말하는 것을 들을 뿐이었다.

 

황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의 면전에서 네가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 또 있느냐?”

 

왕흠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눈으로는 여의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궁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제일 먼저 소문이 흘러나온 곳은 연희궁이라 하옵니다.”

 

여의는 마치 얼음물 한 바가지가 곧장 끼얹어진 듯 정수리가 서늘해지며 오싹함을 느끼며 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살펴주시옵소서. 그 날 밤 영화궁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신첩 단 한 마디도 흘린 적이 없사옵니다. 연희궁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궁중에 헛소문을 퍼뜨릴 수 있겠사옵니까!”

 

왕흠이 부리나케 말했다.
 “소인은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옵고, 특별히 소문을 퍼뜨린 궁인들을 데리고 왔사오니 황상께서는 자세히 살펴주시옵소서.”

 

황제가 차갑게 말했다.
 “기왕 조사했다하니, 그럼 들라 해라.”

 

왕흠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밖에서 그것을 듣고 사람들이 옷자락을 스치며 들어오니, 바닥의 비단 깔개가 무척 두꺼워서 발걸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옷자락과 깔개가 부딪히는 마찰음만이 귀를 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대략 너덧 명의 궁인들이 황제로부터 한 장(丈, 약 3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문안을 올리느라 한바탕 어지러워졌다.

 

왕흠은 궁인들 앞에서 평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되찾고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물으면 너희는 사실대로 대답하기만 하면 된다. 황상께서 앞에 계시니 착실하게 대답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뭇 사람들이 벌벌 떨며 “예”하고 대답하자 왕흠이 또 말했다.
 “너희는 궁중에서 제일 심하게 혀를 놀리는 것들이니 틈만 나면 허튼 소리를 지껄이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렷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너희가 거기서 매귀인에 관한 그 더러운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은 것이 언제냐?”

 

그 몇몇 궁인들은 겁을 먹고 서로를 몇번 쳐다보고는 여의도 옆에 있는 것을 보더니 점점 더 겁에 질렸고, 그 중 하나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소인, 소인들은 모두 잊어버렸사옵니다.”

 

여의는 몇몇 궁인들이 그녀를 한번 보고는 감히 더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더욱 더 가라앉았다. 여의는 바닥에 꿇어 앉아서 바닥에 깔려 있는 선홍색에 금사로 백화가 만발한 봄날의 정경을 그린 두터운 융단을 바라보았으니, 빽빽하게 수놓여진 모란은 향기를 머금고 있었고, 장미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으며, 연꽃은 맑고 향기롭고, 가을 국화는 서리를 맞았으며, 섣달 매화는 눈 속에서 꿋꿋이 피어 있었고, 수많은 나비와 까치가 그 사이를 희롱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번화하고 생생한 도안은 본래 봄날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지금 보니 오히려 너무 빽빽하고 촘촘하여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잊어버렸다고?”
왕흠이 차갑게 웃었다.
 “방금 모두 기억한 것을 이제 전부 잊어버렸다는 것이구나. 알겠다. 기억력이 나쁜 노비는 고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황제의 말투 역시 삼엄했다.
 “짐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게냐? 왕흠, 형을 가해라! 먼저 손가락을 몇 개 자르면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지.”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중 두 사람은 염치없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살려주시옵소서 황상, 목숨만 살려주시옵소서! 소인 모두 말하겠사옵니다. 전부 말하겠사옵니다. 소인 연희궁을 지날 때 제일 처음 들은 것이옵니다.”

 

황후가 추궁하여 물헜다.
 “제일 처음? 제일 처음이 언제냐?”

 

그 궁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매귀인이 출산하던 그날 밤이옵니다.”

 

황후는 표정이 살짝 변하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그 말은, 황상께서 신첩과 한비에게 당부하고 가시자마자 궁중에 소문이 자자했다는 말이냐?”

 

다른 궁인 몇이 급히 거들어 말했다.
 “맞사옵니다, 맞사옵니다. 황상, 소인이 어찌 감히 허튼 소리를 하겠사옵니까. 연희궁에서 제일 먼저 퍼져나왔사옵니다.”

 

소합향의 향기는 본래 맑고 고요하여 쾌적했으나, 이 때에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의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의젓하게 말했다.
 “황상께서는 밝게 살펴주시옵소서. 신첩의 입은 단 한 마디 단 한 글자도 누설한 적이 없사옵니다.”

 

황후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황상, 한비의 사람됨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다만......”
황후는 여의를 보고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간에 짐작하는 기색이 더해졌다.
 “한비, 자네 그날 밤에 놀라고 너무 피곤하여 잠시 누군가에게 말한 것을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순금에 은으로 복수무강(福壽無疆)을 새긴 커다란 향로 안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엷은 소합향의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라 빽빽하게 얽히며 끝없이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으니,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을 짜 놓은 듯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으며 주변을 둘러 싸고 들어와 도망칠 곳이 없었다.

 

여의는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께서 만일 신첩의 말씀을 믿어 주신다면 신첩은 감히 목숨을 걸고 아뢰옵건대, 그 누구에게도 한 마디도 한 적 없사옵니다.”

 

왕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것 참 이상하옵니다. 모두 한비마마의 연희궁에서 유언비어가 흘러나왔다고 하는데 한비마마께서는 한 마디도 누설한 적이 없으시다 하니, 설마 이 노비들이 모두 실성해서 어느 궁의 어느 후원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겠사옵니까? 혹은 황후마마 말씀처럼, 한비마마께서 자기도 모르게 말씀해 버리신 것이거나, 아니면 잠꼬대 중에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화가 나서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는 것이옵지요!”

 

여의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왕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입만 열면 본궁을 물고 늘어지는데, 대체 본궁에게 무슨 속셈이 있어서 반드시 매귀인을 해치고 매귀인의 명성을 훼손하려 한다는 것이냐? 게다가 황상과 황실의 명성도 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냐?”

 

왕흠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비마마,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소인도 그저 한 말씀 올린 것일 뿐이옵니다. 다만 한비마마께서는 줄곧 아이가 없으셔서 시샘 때문에 매귀인에게 분풀이를 하다 보면, 순간 발설해버리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옵니다.”

 

황제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자단목 책상을 거듭 내리칠 뿐이었으며, 황후는 급히 황제의 손을 받들고 조심스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황상께서 아무리 노하시더라도, 옥체를 보전하시고 절대로 상하게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 앞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고 늘어지기나 하니, 이게 무슨 꼴이냐!”

 

황후가 급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고정하시옵소서. 설령 증거들이 확고하고 모든 사람들이 한비를 지목하더라도, 신첩 역시 한비가 일부러 한 일이라고 믿지 않사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느릿느릿 말했다.
 “짐도 한비를 믿소. 다만 유언비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은 철저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소.”

 

황후가 재빨리 뒤이어 말했다.
 “황상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다만 한비는 황상을 오래 모셨으니 아무 공로가 없다 해도 고생은 했사옵니다. 황상께 청하옵건대 우선은 벌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신첩이 생각하기에, 기왕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면 한비가 거기에 말려 들어서는 아니되니, 황상께서는 우선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한비를 연희궁에서 출입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 뒤에 한비의 결백을 밝혀 주시지요.”

 

황제는 망설이고 있었으니, 전각 안에는 소합향의 향 연기가 자욱하게 흩날리며 퍼져 나갔고, 황제의 얼굴에도 엷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여의는 바닥에 꿇어 앉아있었고, 전각 안은 분명 봄처럼 따뜻했지만 그 공기는 마치 봄날의 밀랍이 엉기는 것처럼 견딜 수 없이 꽉 막혀 있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황제의 목소리는 마치 금붙이와 매끄러운 돌이 엷은 안개를 날카롭게 뚫는 것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 나왔다.
 “그럼, 황후의 말씀대로 하겠소.”

 

여의는 다리의 힘이 풀려 하마터면 서있지도 못할 뻔했으니, 실망한 눈으로 처절하게 황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그대를 한동안 금족하여 진상을 밝힐 것이다. 그대는 우선 안심하고 연희궁에 있거라.”

황제는 여의가 다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바깥의 이옥을 불렀다.
 “이옥, 한비를 부축하여 나가라.”

 

여의는 다리에서 무력하게 힘이 빠지고 마음이 천 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뒤돌아보니, 황제의 눈에는 예리하면서도 굳은 뜻이 서려 있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사람이 적은 곳에 가서야 여의는 이옥의 손을 빌렸으니,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는 것 같았으나, 매우 뜻밖에도 이옥의 얼굴을 스치는 눈길에는 깊은 단호함과 냉혹함이 서려있었다. 이옥이 뜻을 헤아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두 눈을 내리깔고 평소와 다름없는 온순함과 공손함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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