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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금세 어두워지니, 시각에 어화원에는 이미 아무도 왕래하지 않았다. 여의가 쇄심을 데리고 가산의 연못을 돌아가려고 , 문득 ‘첨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물보라가 사방으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여의는 깜짝 놀랐다가 곧바로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안돼, 누가 물에 빠졌다!

 

겨울날 하늘은 어둑어둑했고, 눈앞에는 나뭇가지가 가산의 그림자와 서로 얽혀 시야를 거의 가리고 있었다. 여의는 소리를 듣고 마음 속으로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으나 서둘러 가산을 끼고 돌아 물가로 달려갔다. 연못에서는 첨벙거리는 물보라가 점차 작아지며 도움을 청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삼보는 깜짝 놀라서 급히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여의는 곧장 소리쳤다.
 "
무슨 사람 살리란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게냐!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구해야지!

 

삼보는 뼈에 사무치도록 차가운 물에도 아랑곳 않고 이를 악물고 돌연 속으로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물보라가 일어나는 곳을 향해 헤엄쳐 갔다. 오래지 않아 삼보가 물속에서 흠뻑 젖은 사람을 건져내 오니 사람은 여전히 기침을 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여의는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한숨 돌리고는 급히 쇄심을 불러 함께 그를 부축해서 바닥에 가지런히 눕혔다. 달빛이 어렴풋한 가운데 궁녀의 복색을 여자는 자못 지체가 있어 보였다. 예심이 등롱을 쳐들고 궁녀의 얼굴을 비춰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 말했다.
 "
소주, 연심이옵니다!

 

여의는 연심도 크게 놀란 표정인 것을 분명히 보고는 어떤 생각이 들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연심은 온몸에 물이 흥건했고 명치께가 아주 약하게 오르내리며 잠시 뭐라 말하려 하였으나 말하지 못했다. 여의는 눈짓하고는 쇄심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연심의 명치를 눌러 마신 물을 뱉아내게 했다.

 

삼보는 추위에 온몸을 덜덜 떨면서 몸을 돌려 곧장 말했다.
 "
소주, 소인이 가서 태의를 불러오겠사옵니다!"

 

여의가 외쳤다.
 "
허튼 소리!
여의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양성재다. 그곳에는 사람이 없으니 너는 서둘러 가서 화로에 불을 피우고 근처 행랑의 태감을 찾아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어라. 명심해라. 큰소리를 내서는 아니된다!"

 

삼보는 즉시 대답하고 걸음으로 달려갔다.

 

여의와 쇄심이 힘을 주어 누르자 연심의 입에서 상당한 양의 맑은 물이 나오며 눈을 뜨는 것이 보였고 눈동자도 천천히 움직였다. 연심은 멍하니 한참동안 눈을 뜨고 있다가 마침내 주저하며 말했다.
 "
한비......"

 

여의는 한숨을 쉬며 자기가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연심의 몸에 걸쳐주었다.
 "
말을 있으니 다행이구나." 여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다시 말했다.
 "
쇄심, 여기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불고 연심의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안되니 양성재로 보내거라."

 

쇄심은 대답하고는 연심을 반쯤 부축하고 반쯤은 끌어안고서 양성재로 갔다. 양성재는 본래 어화원 서남쪽에 있는 이층 누각으로, 평소에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고, 태감과 궁녀들이 청소하여 놀러 나온 비빈들이 잠시 머물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있어야 것은 갖춰져 있었다. 삼보는 벌써 화로 개에 불을 피워 놓고는 여의 일행이 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옷을 갈아입으러 물러 나왔다. 여의는 연심이 앉는 것을 보고 나서 말했다.
 
“쇄심, 너는 가서 깨끗한 궁녀 의상을 찾아서 연심이 갈아입도록 주거라. 절대 소리 내지 말거라.

 

쇄심이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

 

여의가 말했다.
 "
그래서, 너는 살지 않을 생각이냐?"

 

"이런 날을 하루 보내는 것은 죽어서 하루를 보내는 것만 못하니 저는 스스로 죽을 없다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는 뭐가 두렵습니까? 일찍 죽으면 일찍 환생하면 그만이지요!"

 

여의는 연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그래서 너는 신혼날 밤에 행랑채에서 비명을 지른 것이냐......"

 

연심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천을 아무렇게나 찢는 소리와 같아 우렁차면서도 질겁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
그렇습니다! 제가 그와 혼인하게 되어 대식을 날부터 인생은 끝났습니다. 대낮에는 황후의 곁에서 제일 귀여움을 받는 높은 궁녀이고, 부총관 태감의 대식이며, 보기에는 영광스러움이 끝이 없고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지요. 허나 밤이 되고 하늘이 일단 어두워지면 저는 두렵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짐승입니다! 달린 물건 하나 모자란 주제에 그것도 남자라고 강제로 금수와도 같은 짓을 했사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
그가 너를 때리느냐?"

 

연심은 눈물을 참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저를 때리냐고요? 어릴 때부터 맞지 않은 궁녀가 없으니 제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연심이 옷소매를 걷어 높이 말아 올리니 팔꿈치 아래로는 온전하여, 연심이 일하면서 구련 은팔찌와 취옥 팔찌를 손목을 드러내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팔꿈치 윗부분은 울긋불긋하게 멍이 들어있었고 개의 매우 깊은 잇자국이 있었으니, 마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는 잇자국은 속으로 파고들어 짙은 갈색의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물린 상처가 있었다. 피부가 온전한 곳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여의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왕흠이 이리도 너를 미워하는데 어찌 황후께 너를 달라고 했단 말이냐?

 

연심이 차갑게 웃자, 눈물이 얼음같은 차가운 빛을 내며 눈가에 맺혔다.
 
“여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낮에는 체면을 세워주고 밤에는 그의 학대를 견뎌낼 여인 말이옵니다.
연심은 “하하” 하고 냉소하며 올빼미같이 부르르 떨리는 소리를 냈다.
 
“여인을 사랑할 없으니 그저 깨물 뿐이지요. 그렇게 남자 구실을 방법이 없으니 몸을 조금도 남김없이 침으로 찌르는 것이옵니다. 자신의 없는 부분을 보상하려고 극력으로 남자 행세를 하려 하니, 생각할 있는 모든 물건을 동원하여 저를 찌릅니다. 제가 울면서 빌면 그는 더더욱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비마마, 마마께서는 이런 날들을 제가 어떻게 매일 매일 견뎌왔는지 아시옵니까?

 

여의는 가슴이 오싹오싹 내려앉았으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오직 비할 없이 혐오감이 들며 오장육부가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기어코 연심은 그런 나날을 살아오면서 발버둥치고 부침을 겪으면서도 기댈 곳이 없었다. 연심은 여의가 명치께를 가리는 것을 보고 문득 슬프고 처량한 웃음을 지었다.
 
“한비마마, 마마의 표정과 마마께서 혐오스러워하시는 것을 보니 마마께서는 제가 보내온 험한 나날을 추측해보고 계시는군요. 마마께 감사드립니다. 왜냐면 일찍이 황후마마께 말씀드려보았지만, 황후마마께서는 ‘아미타불’하고 염불을 외시고는, 제가 시집을 가서 남편이 좋든 나쁘든 순종하고 죽어도 집의 귀신이 되기를 바라셨사옵니다. 그래도 마마께서는 소인을 생각해주시는군요.

 

여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참으며 애써 피비린내 나는 장면과 연심을 함께 엮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마음 속에서는 더욱더 의문이 피어올랐다.
 
“황후가 분명히 알고 있느냐? 그런데도 너를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이냐?

 

연심은 두려움에 움츠러들며 눈에는 절망의 잿더미만이 남아 있었다.
 
“예. 황후마마께서는 저를 왕흠에게 시집보내려 하시며 황상께서 생각하시고 바라시는 것들을 알게 되기를 원하셨사옵니다. 만일 제가 이걸 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후마마께서 저를 구해주시기를 바란다면, 마마께서 기꺼이 그리하려 하시겠사옵니까? 황후마마는 절대로 저와 왕흠 사이가 끝장나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연심의 눈물은 절망으로 끝없이 흘러내렸으니, 마치 절벽 아래에 간신히 매달려 기어 올라갈 힘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사람과 같았다.
 
“왕흠과 황후마마께서는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만일 자진한다면 가족들이 연루될 것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정말이지 더이상은 못살겠습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지 않겠사옵니까?

 

여의는 심중의 화를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왕흠이 네가 죽기를 바라지 않고, 그깟 즐거움이 줄어들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면, 그는 네가 자진했든 발을 헛디뎠든 모두 너의 집안에 뒤집어 씌우고 모두 지옥에 떨어지게 것이다. 만일 맹수가 사람을 상하게 하여, 몸을 모두 먹어 치우고 나면 분명 가족을 잡아먹으려 것인데 너는 어찌해야 마땅할 같으냐?

 

연심의 눈이 살짝 빛났다.
 
“마마의 말씀은, 맹수를 죽여서 후환을 없애라는 것이옵니까? 허나 저는 일개 궁녀에 불과하니 무슨 방법이 있겠사옵니까?

 

여의는 연심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살길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리 생각할 것이다. 왕흠은 너를 괴롭히고 해할 아니라 후안무치하여, 네가 사람들이 알게 것을 수치스러워하여 감히 반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너는 순종하는 척하여라. 칼을 들어 짐승을 잡으려면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함정을 파고 독을 풀어 다른 사람을 손을 빌어 죽여야 하지. 이렇게 스스로를 깨끗하게 빼내어야 너도 연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비웃지 않는다.

 

연심은 조금 겁을 먹고 당혹해하며 말했다.
 
“한비마마께서는 소인이 그리 있다 생각하시옵니까?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죽음도 두렵지 않다면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다만 무슨 일이든 우선 인내해야 하니, 네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한다면 아무 일도 없다.

 

연심은 왕흠을 무척 두려워하는 듯하여, 한참을 망설이고도 말하지 못했다그렇게 망설이고 있으니, 쇄심이 깨끗한 벌을 품에 안고 들어왔다.
 
“소주, 연심 항아님이 오늘 입은 옷과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골라왔사옵니다. 항아님은 어서 갈아입으셔요.

 

여의는 연심을 흘긋 보고는 쇄심에게 눈짓으로 연심이 걸치고 있는 외투를 벗기게 했다. 여의는 몸을 돌려 나오면서 따뜻하게 말했다.
 
“머리도 벌써 거의 말랐으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든 이렇게 젖은 채로 다시 연못에 뛰어들든 좋을 대로 하거라.

 

여의가 걸음 걸어가 열린 문으로 나가려고 연심이 바닥에 꿇어 앉아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서늘한 쇳덩이같은 결연한 말투로 말했다.
 
“한비마마, 옷을 마련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소인, 갈아입고 나갈 것이옵니다.

 

여의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 쇄심이 뒤에서 문을 닫자 여의가 조용히 말했다.
 
“가서 이옥에게 빛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이옥이 두각을 나타낼 날이 미처 오기도 전에 음력 섣달의 어느 , 매귀인이 갑자기 조산했다. 여의가 똑똑히 기억하기를, 그것은 어느 깊은 밤이었다.

 

여의는 난각에 앉아 달빛이 창을 바른 명지를 뚫고 기와 위의 서리를 은백색으로 물들이고, 휘장의 은은한 그림자가 푸른 그물망 위로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난각 안에는 오직 구리 시계만이 반복해서 단조로운 소리를 내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황제는 마침 내무부에서 보내온 이름책을 열중해서 들여다보고 있었고, 여의는 다만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오색 비단실을 팽팽히 당겨 새하얀 비단 손수건 위에 영롱하게 산수와 , 나비를 수놓고 있었다. 난각 안은 무척 고요하여 양초 심지가 타닥거리는 희미한 소리와 매화 화로 안에서 홍라탄이 타는 낭랑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수놓기에 싫증난 여의는 몸을 일으켜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야 내무부에서 이름을 지어 올리는 것이 관례가 아니옵니까? 지금 매귀인이 해산할 때까지 남짓 남아,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는데 어찌 이름을 지으려 하시옵니까?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넘실거리는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태의가 말하기를 아무래도 황자일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공주도 좋지. 그리고 짐의 마음이 급한 것이 아니라 내무부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니, 짐이 등극한 이래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특별히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먼저 이름을 골라서 살펴보라 보낸 것이다.

 

여의가 말했다.
 
“내무부가 황상께서 기대하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사오니, 분명 좋은 이름을 지어 올렸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여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대가 한번 보아라.
황제가 하나 하나 읊었다.
 
“황자의 이름은 개를 지어와서, () 돌림에 () [각주:1] 써서 영희(永琋), 영성(永珹), 영각(永珏)이고, 공주의 봉호는 화녕(和宁) 화의(和宜) 가지를 지어왔구나. 그대가 보기에 어느 것이 좋은가?

 

여의는 웃으며 사양했다.
 
“이런 매귀인에게 물으셔야지 어찌 신첩에게 물으시옵니까?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머지않아 그대도 어미가 것인데, 우리 아이도 그대가 이름을 정하도록 해주겠다.

 

여의가 ‘치’ 하고 웃으니 틀어 올린 머리에서 은을 투각한 법랑 나비가 귀밑머리를 누르니 실처럼 가느다란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황상께서는 매귀인의 회임을 가지고 신첩을 놀리시는군요.

 

황제가 말했다.
 
“짐은 본래 매귀인의 뜻도 묻고 싶었다. 허나 매귀인의 몸이 계속 좋지 않아서 말만 하면 어지럽고 입가에는 수포가 가득하여 오래도록 나아지질 않는구나. 짐은 매귀인이 몸을 돌봐서 무사히 아이를 낳기 만을 바랄 뿐이다.

 

여의는 조금 수줍어하며 이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상께서 매귀인의 아이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크시니, 그렇다면 영희가 제일 좋겠습니다. 만일 공주라면, 화녕과 화의 모두 좋으니 따로 색다른 규명[각주:2] 지어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옵니다.

 

황제가 매우 기뻐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말을 들어야겠구나. 짐도 영희라는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든다.

 

구리 물시계에서 똑똑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지고, 잔에는 차에서 피어 오르는 김이 차츰 식으며 자욱한 열기가 흩어졌다. 여의는 황제의 품에 다정히 기대어 밖에서 바람이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를 휘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더욱더 편안하고 평온해졌다.

 

여의와 황제가 창가에 나란히 기대니, 겨울 밤의 별이 총총한 하늘은 유난히 맑고 고요했고, 차가운 별이 서늘한 옥과 같은 광채를 내뿜으며 아득한 은하수는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았다. 여의는 낮은 소리로 황제의 곁에서 웃으며 말했다.
 
“잠저에 있을 , 어느 해인가 황상께서 신첩을 데리고 북경 교외의 높은 탑에 가셨는데, 우리는 아주 늦게까지 남아서 함께 별을 보았었지요. 바로 이렇게, 감히 큰소리치지 못하고 천상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황제는 여의의 귓불에 입을 맞추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지금 궁중에 있으니 밖에 나가는 것도 마땅치 않구나. 허나, 짐이 그대에게 약속하건대, 앞으로 그대를 데리고 장강(長江) 남북을 두루 유람할 것이다.

 

여의는 섭섭해 하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강남의 연하고 부드러운 녹색과 비에 젖은 복숭아 꽃을 제일 좋아하시지요.

 

황제의 맑고 환한 얼굴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짐이 말한 것을 그대는 모두 기억하는구려. 어릴 아바마마께서 부처를 찬미하는 시를 읊으신 것을 들었으니, 들이쉬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근심없이 살아가겠는가?[각주:3] 짐이 이리저리 생각해보건대, 바로 자연 속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풍경은 바로 강남에 있지. 그러므로 짐이 가고 싶은 곳에는 반드시 그대가 있어야 하네. 우리, 머지않아 강남에 가게 것이야.
황제는 말하며 여의가 방금 수놓은 자수를 들여다보았다.
 
“솜씨가 점점 좋아지는구나. 허나 그때 어째서 짐에게 그런 손수건을 보낸 것인가? 한눈에 보아도 그대가 자수를 배울 수놓은 것이더군.

 

여의의 미소는 마치 가지 끝에 처음 피어난 매화 같았으니, 눈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렇게 오래 전에 보낸 것을 황상께서는 이제서야 물으시옵니까. 솜씨가 좋지 않다 보시고 일찌감치 내버리신 것은 아니옵니까?

 

황제가 웃으며 여의의 코를 꼬집었다.
 
“그래. 솜씨가 엉망이라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지. 왜냐면 앞으로 그대의 자수 솜씨는 갈수록 좋아질 것이고, 다시는 그런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을테니까.

 

여의가 낮게 속삭였다.
 
“비록 매우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제일 처음의 마음이옵니다. 청앵, 홍력.

 

황제가 소리없이 미소 지으니 마치 맑은 서리를 맞은 밝은 달빛 같았고, 늦봄에 짙은 장미향이 바람에 실려 오듯 따뜻하고 가볍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같았다.

 

정원에는 한겨울의 맑은 달빛이 가득 차서 광활하면서도 맑고 투명했다. 이따금씩 산들바람이 불어와 조각 그림자를 흔드니, 흡사 호수 위에서 반짝이는 잔물결 같이, 수없이 많은 대나무 그림자같이 넘실거렸다. 여의가 창밖을 내다보니 붉고 하얀 매화가 송이송이 피어 있고 서늘한 향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그저 묵묵히 생각하기를, 이렇게 고요한 것도 좋은 시절일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 밖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으니, 낮게 들리는 사람 소리가 마치 빠르게 잔잔한 수면을 깨뜨리는 돌멩이 같았다.

 

여의는 조금 불쾌하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밖에 누구냐?

 

들어온 것은 대태감 왕흠이었으니,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의 이마에는 뜻밖에도 살짝 땀이 배어 있었다. 여의는 왕흠의 얼굴을 보자 연심의 몸에 상처가 떠올라 마음이 불편하여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왕흠은 다급하여 목소리마저 꼬부라졌다.
 
“황상, 영화궁에서 사람이 나와 말하기를 매귀인이 해산할 것이라 하옵니다!

 

황제는 뜻밖에 깜짝 놀라 표정마저 변했다.
 
“태의가 다음 달이 산달이라 하지 않았더냐?

 

왕흠이 급히 이어서 말했다.
 
“모시는 시종이 말하기를 저녁 수라를 때만 해도 괜찮아서 태후께서 내리신 붉은 대추 제비집 탕을 드셨사옵니다. 저녁 수라를 드시고 산책을 나가시려 했는데, 문을 나서자마자 담장에서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뛰어들어 매귀인께서 놀라 태기를 상하였사옵니다.

 

황제의 콧망울이 살짝 벌름거렸으니 화가 났음에 분명했다. 황제는 소리쳤다.
 
“터무니없구나! 시중 드는 이가 그렇게나 많은데 제대로 살피지 못하다니!

 

여의가 황급히 권하여 말했다.
 
“황상, 지금 화내실 때가 아니옵니다. 어서 매귀인을 보러 가시지요.

 

황제가 급히 몸을 일으키자, 여의는 해달가죽 외투를 황제에게 걸쳐주었다. 황제는 여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짐과 함께 가자.

 

여의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이 황상을 모시겠사옵니다.

 

영화궁은 연희궁에서 제일 가까워서, 연희궁의 뒷문으로 나가서 인택문과 덕양문으로 길을 돌면 바로 영화궁이었다. 영화궁의 대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여인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으니, 그야말로 능지처참하는 것처럼 차마 들을 없는 소리였다.

 

황제는 여의의 손을 쥐고 곧장 밖으로 나갔으니, 손에는 옅은 식은땀이 배어 미끄러웠다. 여의는 자신의 손수건을 황제의 손에 쥐여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은 모두 이러하옵니다. 순빈이 해산할 때에도 대단히 고통스러워 했사옵니다.

 

황제는 조금 근심하여 말했다.
 
“어찌 매귀인의 비명이 유난히 처참하게 들리는 것인가?

 

사람이 급히 궁문으로 들어서니, 궁인들이 부지런히 들락날락하며 대야마다 뜨거운 물과 수건을 받쳐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사람을 붙잡고 말했다.
 
“매귀인은 어떠하냐? 태의는? 태의는 아직 것이냐?

 

사람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같았다.
 
“태의가 수두룩하게 왔고 산파도 왔사옵니다만 귀인의 배에는 아무런 징조도 없사옵니다.

 

황제가 급히 말했다.
 
“아무 기척도 없다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냐? 어서 가서 태의를 불러와라. 짐이 물을 것이 있다.

 

사람은 대답하고는 안으로 달려들어가 재빨리 태의 명을 이끌고 나왔으니, 마침 태의원 원판 제노였다. 제노가 미처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자 황제가 말했다.
 
“너마저도 여기 있었는데 매귀인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냐?

 

제노가 서둘러 말했다.


 "
황상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일찍 출산하는 것은 큰일이 아니옵니다. 다만...... 다만 태아가 내려오지 않으니 촉진제를 처방해야 하옵니다."

 

황제가 분부했다.

 "어서 가보거라! 매귀인의 태아를 보살펴야 한다. 짐이 크게 상을 내릴 것이야!"

 

제노가 서둘러 뒤쫓아 들어갔다. 얼마되지 않아 황후도 사람들을 데리고 당도했다. 황후가 급히 마디 묻고는 소심에게 분부했다.
 
“사람들을 많이 불러서 시중들게 하거라. 사람이 많은 걱정할 아니라 손이 모자랄 것을 걱정해야 한다.

 

소심이 즉시 안배하러 물러났다. 황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황상, 신첩이 듣기로 매귀인이 검은 고양이를 보고 놀랐다 하옵니다. 검은 고양이는 불운을 몰고 오니, 그리 길하지 않사옵니다. 매귀인이 무사히 아이를 낳도록 신첩이 이미 보화전의 법사에게 모자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경을 읽고 복을 빌라 청하였사옵니다.

 

황제가 옅게 한숨을 쉬고는 안심하여 말했다.
 
“황후가 현명하고 지혜롭구려. 고생이 많소.

 

황후는 단정하게 미소 지었다.
 
“신첩은 육궁의 주인이오니 모두 마땅히 해야 일이옵니다.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갈수록 참혹하여, 마치 무딘 칼로 가죽과 살을 도려내는 같았으니, 고요한 밤중에 듣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했다. 시중드는 궁인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비린내가 진동하는 피로 물든 대야를 받쳐들고 나왔다.

 

황제의 안색은 갈수록 좋지 않았으니,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황후는 곧장 황제의 팔을 붙잡으며 부드럽지만 단호함을 잃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황상, 산실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니 들어가시면 아니되옵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왕흠이 서둘러 권하여 말했다.
 
“황상, 바깥 바람이 차옵니다. 편전에 듭시어 기다리시지요.
황제는 낮게 “응”하고 대답하고는 여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편전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직 여의만이 알았다. 황제가 이토록 힘주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은 끔찍한 비명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난히 초조했다. 편전 안에 십여 개의 화로가 피워지고 온기가 봄처럼 따뜻했지만, 이따금씩 사람들이 드나들며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섞여 들어와서 추웠다 더웠다 반복했으니, 마음도 뒤따라 들썩이며 안절부절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가느다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고, 왕흠이 벌써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맞이하러 들어왔다.
 
“황상, 황상, 들어보시옵소서. 아기씨가 태어나셨사옵니다.

 

황제의 얼굴에는 긴장이 말끔히 사라지고 무한한 기쁨이 자리를 대신했다.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서 침전 안에서 나온 제노를 향해 말했다.
 
“어떠하냐? 황자더냐?

 

제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들지 못하자 황제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공주여도 괜찮다.

 

황후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어찌 울음소리가 이리 약한 것이온지요? 신첩의 영련이 태어났을 때는 울음소리가 무척 우렁찼사옵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침전 안에서 두려움에 날카롭게 지르는 소리가 들렸으니 아이 어미의 목소리였다.

 

황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분부했다.
 
“왕흠, 짐이 보게 가서 아이를 데려오너라.

 

왕흠은 서둘러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다. 그러나 왕흠은 포대기를 안고 처마 아래에 서서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황제는 곧바로 얼굴빛이 변했다.
 "
무슨 일이냐?"

 

왕흠의 얼굴빛이 새파래져서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말했다.
 "
황상, 매귀인이 혼절했사옵니다. 매귀인은......"

 

황제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
아이는? 어서 짐에게 보여라."

 

왕흠은 주저하며 황제 앞으로 데려오면서도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황후와 여의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어렴풋이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았다.

 

왕흠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상, 무엇을 보시든지 침착하시옵소서. 황상께서는 앞으로 자손이 번창하실 것이오니......

 

왕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는 벌써 손을 뻗어 강보를 들춰보았으니, 금박이 흩뿌려진 붉은 공단 포대기 속에서 유달리 사랑스러운 아이의 둥근 얼굴이 드러났다.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빼어난 아이가 아니더냐?
황제는 손을 뻗어 강보를 조금 들추자, 왕흠은 놀라서 벌벌 떨었다. 황제가 어느 곳에 눈길이 닿자 자리에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강보를 들추던 손을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즉시 거두어 들였다. 여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쳐다보았다가 너무 놀라 비틀거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강보 속의 아이는 사지는 삐쩍 말랐지만 복부는 머리만큼 커다랬으며 청남색으로 기이하게 물들어 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아이의 몸에 남녀의 특징이 모두 있다는 것이었다.

 






- - - - -

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드디어 1권이 끝났습니다 \('ㅂ')/ 

2. 드디어 올 것이 왔군요. 2권에선 (몇몇 사건이 더 있고 나서) 냉궁행이겠지요...ㅠㅠ






  1. [역자주] 한자의 부수 중 글자의 왼쪽에 오는 것을 변(邊)이라 하고 오른쪽에 오는 것을 방(旁)이라 한다. [본문으로]
  2. [역자주] 閨名: 규방에서 사용하는 이름. 즉, 여인의 이름. [본문으로]
  3. [역자주] 원문은 "一口气不来,往何处安身立命?" 무이선사 광록 제7권에 실린 말이라고 한다. 뜻은, 사람의 목숨은 들숨과 날숨 사이에 있으니,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생명은 끝나갈 것이고 그 뒤에는 육도(六道, 즉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의 육계(六界)를 말함)를 떠돌아다니겠지만, 생전의 선업과 악업에 감사하지 않고(?) 수양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방도가 없다. 인생은 무상하고 정토를 돌아갈 곳으로 여기며 선업을 갈고 닦아야 하며, ‘미타’라는 이름을 외면 서방정토로 왕생할 수 있는데, 이때 자신의 많은 겁과 윤회가 끝맺으며 능히 ‘근심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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