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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안에서 침수향의 향기가 짙게 퍼져 나와 코를 찌르니, 여의는 조금 놀랐지만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있어도 그 이야기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필사적으로 눌러 참고 있었다.
 “영련은 정궁 적출 소생이니 황상께서 태자로 세우시는 것도 인정과 도리에 맞는 일이지요.”

 

황제는 죽을 한 입 먹고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짐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가 적출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서출인 아이의 신분은 아무래도 같지 않았다. 설령 이제 황제가 되었다 해도, 한밤 중에 꿈에서 깨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억울하다. 개국 이래로 순치제부터, 강희제, 선제, 그리고 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출이었다. 짐은 정말로 짐의 아들은 그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는 귀한 신분의 당당한 적출 소생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짐이 어렸을 적에 가졌던 소망을 대신 이뤄주었으면 한다.”

 

여의는 황제가 감개무량하여 하는 말을 들으며 그 말 속에 담긴 망연자실함과 실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는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으니, 타고나기를 생각이 많았고, 어린 시절에 겪은 갖가지 서러움과 상실감은 설령 지금 아무리 천하를 다 가졌어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그렇게나 마음에 두고 그렇게나 집착하며, 그 당시 자신의 작고 작은 바람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의는 또 어떻게 황제의 마음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여의는 몸을 숙이고 황제의 무릎에 엎드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상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라면 반드시 하셔야지요. 그게 둘째 황자에게 좋은 일이고, 또 황상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황제는 새로 빗어 올린 여의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의, 짐은 그대가 첫째 황자를 아끼고 있고, 첫째 황자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네 친자식이 아니다. 철비의 지위도 황후와 비교할 수 없지. 셋째 황자도 비록 사랑스럽지만, 늘 미련하고 너무 응석받이로 자라서 나중에도 그냥 부귀하고 한가로운 종친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귀인의 아이는 공주도 좋고 황자도 좋고 짐은 모두 개의치 않으니, 이귀인 모자가 그저 평안하기만 하면 좋겠구나.”

 

여의는 나지막하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황제의 숨소리를 들으며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황제의 걱정에 감동했다.

 

황제는 여의의 귓가에 나지막히 말했다.
 “이게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짐과 그대 사이에는 아이가 아직 없지. 허나 짐은 짐이 수년간 바라온 소망을 어떻게 말해야 그대가 이해할 수 있을지 정말로 모르겠구나.”

 

여의는 황제의 손을 뒤집어 볼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황상, 신첩은 다 알고 있어요. 앞으로 신첩에게 황상의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일생 동안 부귀와 평안을 누리기만을 바랄 것이어요.”

 

황제의 눈에 낮은 파도와 같은 감동과 감격의 빛이 어렸으니, 마치 검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처럼 그렇게 반짝이는 빛의 그림자가 있었다.
 “여의, 이렇게 짐을 이해해줘서 고맙다. 이것이 그대에게 억울한 일임을 알고 있다. 하나 때로는 명분이 있어야 하니 그대를 억울하게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황상께서 태자를 세우시는 일을 황후께도 말씀하셨나요? 만약 황후께서 아신다면 분명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강희제께서 계실 때, 너무 빨리 황태자를 공표해서 다른 아들들이 적자의 자리를 뺏을 마음을 품게 되었지. 짐은 선제처럼 태자의 이름을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숨겨 둘 것이니, 짐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뭇 신하들이 자연히 이것에 따라 황태자를 세울 것이다. 이렇게 하면 태자가 교만해지는 것과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그러니, 짐은 황후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여의, 그대도 다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 꺼내지 말거라.”

 

여의는 황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상께서 말씀하신 것은 신첩이 모두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하나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 신첩 황상께 여쭙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왕흠은 이미 죽었고, 지금 황상을 모시는 사람은 편하게 쓸 만한 가요? 내무부에서 시중들 사람들을 다시 골라 보내게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황제는 간단한 요리를 곁들여 죽을 한 입 먹고는 말했다.
 “이옥은 매사 세심하고, 사람됨도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으니, 짐은 두어 달 지켜보다가 이옥에게 부총관태감 자리를 줄 생각이다.”

 

여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옥은 영리하고 충성스럽지만 나이가 많지 않으니, 경험을 많이 쌓게 해야 손을 놓고 중용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는 “응”하고 대답하고, 바깥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는 말했다.
 “밖에 게 누구냐?”

 

여의가 고개를 내밀어 보고는 말했다.
 “어선방에서 이귀인에게 신선한 생선과 새우를 보내왔사옵니다. 모두 일찍이 소주방에서 요리해오라 보내두었던 것이옵니다.”

 

황제가 말했다.
 “태의가 말하기를, 회임하면 생선과 새우를 많이 먹으라 했다. 짐이 기억하기로 그 때 매귀인도 즐겨 먹었었지. 짐이 어제 이귀인을 보러 갔는데, 이귀인이 요 며칠동안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밤에도 편히 자지 못한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도 알 수 없어서 짐이 무척 걱정이 된다.”

 

여의가 말했다.
 “태의가 이미 보고 갔사온데, 처음 회임한 사람은 틀림없이 그러할 것이라 하옵니다. 게다가 이귀인은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입가에 궤양이 생겼지만, 다행히 태의가 열을 내리고 시원하게 하는 약을 처방하였사옵니다. 신첩도 소주방에 분부하여 국화차와 녹두탕을 많이 만들라 하였으니, 이귀인이 먹고 나서 조금은 편해졌으면 좋겠사옵니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매귀인이 회임했을 때에도 심장에 열이 왕성하고 입가에 궤양이 있었으니, 짐이 지금 보니 이귀인도 마음 속에 두려움이 남아있나 보구나. 지금 황후는 한가한 몸이 아니니, 여의, 모든 것은 그대가 많이 돌봐줘야 되겠다.”

 

여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는 걱정마셔요. 이귀인이 연희궁에 와서 머물고 있으니 신첩도 마음이 놓이는 것이지요.”

 

황제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연히 마음이 놓이지. 매번 그대 전각에만 있는 침수향을 맡을 때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여의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것도 황상께서 허락하시어 신첩만 쓸 수 있는 것이지요.”

 

수라를 들고, 황제는 일어나 양심전으로 갔다. 여의는 태자의 일을 생각하다가 이귀인의 건강을 생각하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해란이 급히 다가와서 말했다.
 “형님, 제가 방금 이귀인 처소에 갔다 왔는데, 아무래도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형님이 빨리 가서 살펴보세요.”

 

여의는 서둘러 일어나며 한편으로는 태의를 불러오라 분부하고 곧바로 해란과 함께 동난각으로 갔다. 이귀인이 항상 추위를 탔기 때문에, 3월이 되었어도 이귀인의 전각 안에는 탄을 쓰는 화로와 난로가 모두 있었다. 여의가 해란을 데리고 들어가니 따뜻한 기운이 얼굴에 훅 밀려오며 저절로 땀이 송글송글 배어 나왔다.

 

이귀인은 꽃무늬를 짜 넣은 어두운 자주색 구름무늬 비단 이불을 두르고 힘없이 비스듬히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숨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답답하여 얼굴은 어두운 자줏빛이어서 그 비단 이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전각 안에는 단향이 타고 있었고, 화로 속에서는 불수감이 던져 넣어져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며 여러 가지 향기가 한데 엉겨 있었다. 향은 향기로웠지만 맡을 수록 혼탁하고 답답했다.

 

여의가 급히 분부했다.
 “안에 향이 너무 짙으니 창을 열어서 환기를 시키거라.”

 

이귀인이 이불을 끌어안고 침상 깊숙이 웅크리고 들어가 말했다.
 “한비마마, 창문 열지 마세요. 누가 저를 해치려 해요!”

 

여의는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아우님, 이곳은 연희궁일세. 그 누구도 감히 아우님을 해칠 수 없네!”
여의는 손을 뻗어 이귀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이귀인의 몸과 얼굴에서 열이 나고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여의는 급히 비단 손수건을 가져다 이귀인을 가볍게 닦아주고 따뜻하게 말했다.
 “걱정 말고 본궁에게 말해 보시게. 방금 악몽을 꾼 것인가?”

 

이귀인은 두려움에 침대 모서리에 웅크리고 허둥대며 바닥을 가리켰다.
 “뱀이 엄청 많았어요. 아주 아주 많은 뱀들이 저를 물려고 했어요!”

 

해란은 급히 은빛 장막 걸개에 걸려 있는 향주머니를 떼며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연희궁에는 뱀을 쫓는 향주머니를 많이 걸어 두었어요. 뱀이 냄새를 맡으면 도망가니 걱정 말고 지내면 돼요.”

 

해란은 이귀인을 바라보며 조금 걱정이 되어 말했다.
 “이귀인이 열이 조금 나는 것 같네. 너희는 가서 따뜻한 물을 가져와 이귀인께 드리거라.”
해란이 이귀인의 입가의 궤양을 살펴보니 어제보다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태의가 처방한 열을 내리고 화기를 내보내는 약을 이귀인께 달여 드렸느냐? 어찌 귀인의 입가가 더 심해진 것이야.”

 

이귀인을 모시는 환심이 말했다.
 “해귀인께 아뢰옵니다. 소주께서 어젯밤 저녁에 생선과 새우를 과하게 드셔서 이런 것이 생겼사옵니다. 그래서 입가의 궤양이 더 커진 것 같사옵니다. 소인도 말렸지만 소주께서 말씀하시길, 생선과 새우를 많이 먹으면 뱃속의 아기씨가 총명해지니 궤양이 생겨도 괜찮다 하셨사옵니다.”

 

해란은 하는 수 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됐다. 너희는 내 분부대로 평소 이귀인이 마시는 차를 모두 태아에게 이로운 국화차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침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허 태의가 당도했으니, 여의는 서둘러 허 태의에게 이귀인을 진맥하게 했다. 허 태의는 줄곧 고기를 저을 뿐이었다.
 “소주께서 연일 무서운 꿈을 꾸고 가위 눌리지 않으십니까?”

 

이귀인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경칩에 우연히 뱀을 본 이후로 한밤 중에 꿈에 나오고 항상 불안하다오.”

 

허 태의가 말뜻을 알아들었다.
 “일단 깨어나면 온몸에서 열이 나고, 힘이 빠지고 무기력하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편안하지 않고, 또 악몽 때문에 전신이 곱절로 떨리면서 배가 묵직하게 아픈 그런 증상이 있으십니까?”

 

이귀인의 눈에 한 가닥 밝은 빛이 어렸다.
 “태의의 말이 모두 맞습니다. 매일 밤마다 동이 틀 때까지 이렇게 불안하지만, 낮에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어째서 이런 것인가요?”

 

허 태의가 태연자약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주께서는 처음 회임하신데다가, 복중 태아가 3개월이 되었을 때 추위를 타서 심장 박동이 어지러워졌사옵니다. 낮에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마음을 달래줄 때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밤이 되어 꿈을 꾸면 되살아나는 것이옵지요. 오랫동안 이러하여 편히 주무시지 못했기 때문에 몸 안의 열이 올라와서 입가에 궤양이 생기게 된 것이옵니다. 소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탕약과 피부에 발라 궤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하겠사오니, 소주께서는 시간에 맞춰 약을 드시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해란은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나 이귀인이 복통이 있지 않은가?”

 

허 태의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처음 회임했을 때에는 확실히 살짝 복통이 있을 수 있사옵니다. 그것은 복중 태아가 천천히 자라면서 모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오니, 문제없사옵니다.”

 

여의가 서둘러 물었다.
 “이귀인의 몸에서 자꾸 열이 나는데, 괜찮은 것인가?”

 

허 태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임 중에 열이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옵니다. 소주께서 믿지 못하시겠거든 아무 때나 이귀인의 몸에 손을 대보십시오. 다른 소주들보다 분명 더 뜨거울 것이옵니다. 그래서 어떤 여인은 회임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풍한이 들어 열이 나는 줄 알고 탕약을 잘못 마셨다가 아이를 잃기도 하옵니다. 사실 의원에게 보이기만 하면 모두 무사한 것이옵니다.”

 

여의는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그래, 본궁과 해란처럼 아이도 낳아 키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귀인을 돌보려 하니 부족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지. 이렇게 알려준 허 태의에게 감사해야겠네.”

 

이귀인이 급히 말했다.
 “한비마마께서 계시니, 소첩의 마음이 벌써 많이 편해졌사옵니다. 아마 계속 경양궁에 남아있었으면 정말로 무서웠을 거예요.”

 

해란이 이귀인의 손을 토닥였다.
 “며칠 전에 경양궁을 지나가며 안을 보니 벌써 새로 단장하고 있는 중이더군요. 아무래도 뱀과 벌레가 있을지 모르니 거기 있었으면 무서웠을 거예요. 단장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무사히 아이를 낳으면, 안심하고 돌아가서 경양궁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이귀인은 살짝 놀랐다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찌 정말로 그 궁의 주인이 될 수 있겠어요. 잠저에 있을 때부터 저는 황후마마를 모시던 일개 시녀일 뿐이었는 걸요. 황상을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굽어 살피신 것이지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안심하고 푹 자서 나중에 무탈하게 아이를 낳는 것뿐이에요.”

 

허 태의가 옆에서 처방을 쓰며 말했다.
 “이귀인께 아뢰옵니다. 귀인께서는 회임하신 몸이라 태기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소신이 너무 독한 약은 쓰지 못하옵니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안신탕이든 피부에 바르는 궤양 약이든 약성은 모두 아주 순한 것을 사용하여 귀인과 태아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였사옵니다. 효과는 조금 느릴 것이나 귀인께서는 절대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이귀인의 미소가 춘삼월 가지 끝에 흐드러진 벚꽃처럼 부드러웠다.
 “태의께서 나와 복중 태아를 중히 여겨 주니 내가 어찌 태의를 책망하겠습니까.”

 

이리하여, 여의와 해란은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이귀인과 한담을 나누었다. 이귀인이 몹시 친절하게 여의와 해란에게 아예 함께 점심을 들자고 권했다. 두 사람은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귀인이 회임 중이기 때문에 모든 요리는 어선방에서 보낸 신선한 재료로 연희궁 소주방에서 이귀인의 요리사가 요리한 것이라 입맛에도 맞고 안전했다. 이 날 보내온 점심 식사에는 오이등심구이(瓜烧里脊), 비파새우(琵琶大虾), 조개채(绣球干贝), 진주오리볶음(炒珍珠鸭), 저민생선우유탕(奶汁鱼片), 계화가지생선(桂花鱼条), 팔보계정(八宝鸡丁), 향유선호(香油膳糊), 홍소어골(红烧鱼骨), 선마채심(鲜蘑菜心), 옥순궐채(玉笋蕨菜), 사과외록근(砂锅煨鹿筋), 라한양하정(罗汉酿虾丁), 금퇴소어원산계탕(金腿烧鱼圆山鸡汤)이 있었다.

 

여의는 탁자 위에 갖가지 요리가 즐비한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아우님 입가의 궤양이 이래서 늦게 떨어지는 것이었군. 매번 이렇게나 많은 생선과 새우를 양껏 드시니 입이 상하는 것이 아닌가.”

 

이귀인이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한비마마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있사옵니다. 빈첩은 본래 생선과 새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을 때 항상 끊임없이 많이 드셔서 둘째 황자가 그렇게 총명하고 영리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순빈마마께서 회임하셨을 때는 비린 것을 싫어하여 적게 드셨기 때문에 셋째 황자가......”

 

이귀인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이것이 정말 순빈의 마음 속 걱정거리인 것이 분명했다. 셋째 황자는 응석받이로 자라서 걷는 것도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고 말을 배우는 것도 그러하여, 비록 동글동글하여 매우 귀엽게 생겼어도 확실히 첫째 황자와 둘째 황자만큼 총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로 황제는 순빈도 적잖이 냉대하여 순빈의 종수궁에도 자주 가지 않아서 완답응도 덩달아 총애를 받지 못했다. 듣기로, 본래 이귀인과 함께 경양궁에 살던 수답응도 종수궁으로 옮기면서 황제를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만약 태어난 것이 이런 아이라면 아들을 따라 어미가 귀해지기는커녕 평생 냉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너나할 것 없이 적잖이 우울해졌다. 의외로 이귀인은 입맛이 아주 좋아서 연거푸 많이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평화로운 며칠이 지나고, 황제는 영련의 병세가 마음에 걸려 장춘궁에 자주 들렀기 때문에 연희궁에는 다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여의는 황제가 걱정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귀인을 잘 돌보는 것만 신경 쓰고 황제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이날 밤, 영황은 공부를 마치고 여의의 방에 남아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여의는 본래 필체가 훌륭했는데, 영황의 글씨가 크게 진보한 것을 보고 마음이 뿌듯하여 영황이 글씨를 익히고 글을 읽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영황은 오늘 배운 것들을 여의가 듣도록 외우다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졌다.
 “어머니, 소자는 매일 상서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아바마마를 기쁘게 해드리려 아바마마께서 학업을 검사하러 오시는 날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바마마께서는 벌써 며칠이나 소자의 학업을 보러 오지 않으셨사옵니다.”

 

여의가 웃으며 영황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럼 너는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것이냐?”

 

영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아바마마께서 하문하시든 아니든 소자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하옵니다.”

 

여의가 자애롭게 웃었다.
 “그래야지. 남이 묻건 묻지 않건 너는 네 할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너 스스로를 위해 사는 것이고 너 스스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황은 마치 뭔가 알겠다는 듯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소자 알겠사옵니다.”

 

여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영황의 손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또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 지난 번에 아바마마께서 《사기》를 읽었는지 하문하시지 않았느냐? 그 때 이미 읽었다고 했지?”

 

영황이 말했다.
 “그럼요. 벌써 거의 다 배웠는 걸요.”

 

 “잘됐구나. 어미가 네게 아바마마의 시 한 수를 가르쳐주마. 열심히 읽고 외워 두었다가 네 아바마마를 뵈었을 때 들려 드리면 분명 기뻐하실 거다.”

 

영황이 곧장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빨리 가르쳐주세요.”

 

여의는 붓을 든 영황의 손을 잡고 글을 써내려 갔다.
 “노루가 달리는 황량한 들판을 장사가 좇으니, 피부색은 자줏빛이고 목소리는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자로다.(鹿走荒郊壮士追,蛙声紫色总男儿) 산을 뽑고 솥을 걸머지니 그 기세가 흉악하고, 칼을 물고 오추마(항우의 애마)를 부리며 뜻을 굽히지 않는구나.(拔山扛鼎兴何暴,齿剑辞骓志不移) 천하에 초나라를 칭송하는 이 없으리니, 장막 속에서 바라보며 탄식하며 걱정할 뿐이라.(天下不闻歌楚些,帐中唯见叹虞兮) 고향의 동지들은 결국 어디에 있는가? 천 년 동안 오강(乌江)은 슬픔을 씻을 길 없네.(故乡三户终何在?千载乌江不洗悲)①”

 

영황은 호기심이 들었다.
 “어머니, 이건 누구에 대한 시이옵니까?”

 

여의는 저도 모르게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바마마께서 «항우기(项羽纪)»를 읽고 나서 쓰신 시란다. 네 아바마마께서는 오강에서 자결한 영웅 항우의 말로에 감동하시어 이 시를 쓰신 것이지. 네가 «사기(史记)»를 읽고 다시 아바마마의 어시를 읽어본다면 아바마마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이야.”

 

영황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도 시를 베껴 썼다. 쓰기를 마치자 이윽고 말했다.
 “어머니, 소자가 어머니 곁에 오래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글을 쓸 줄 아신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사옵니다. 소자의 친어머니는 글을 몰랐어요.”

 

여의는 작게 ‘쉿’ 하더니, 짙푸른 색 여의문 비단 옷감을 집어 들고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재주가 있어도 한 번에 다 꺼내 놓는 것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재주가 어쩌면 어느 날 너의 비장의 무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것이니까. 만일 남들이 다 알게 해버리면 너의 모든 것이 간파 당하는 게 아니겠느냐?”

 

영황의 눈동자가 영민하게 굴렀다.
 “소자, 잘 알겠사옵니다.”
영황은 여의가 손에 든 비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늘이 어두워졌는데 옷을 바느질해서 무엇하시려고요.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눈이 상합니다.”

 

여의가 웃었다.
 “착한 아이구나. 너는 이제 가서 시를 외우거라. 날씨가 따뜻해져서 어미는 네게 얇은 옷을 지어주려 한다. 노비들은 솜씨가 조잡해서 바늘땀이 옷 뒷면에 남아버리니, 너무 거칠어서 네가 불편할 것이다. 어미가 신경 써서 직접 안감 사이에 바늘땀을 넣어 만들어야 네가 편하게 입을 수 있지.”

 

영황은 무척 감격하여 눈에 옅게 눈물이 어렸다.
 “어머니께서 소자에게 이리 잘해 주시니......”

 

여의의 미소 띈 얼굴에 따뜻하고 자애로운 빛이 감돌았다.
 “어미가 당연히 아들에게 잘 해줘야지, 아니 그러하냐? 착하지. 어서 가서 책 읽거라.”

 

영황은 한 쪽에 앉아 묵묵히 글을 읽었고, 여의는 바늘귀에 실을 꿰어 천천히 바느질을 했다. 촛불이 흔들리고 그물창에는 아름다운 복숭아 꽃가지와 잎그림자가 비추었으니, 그 밝게 빛나는 꽃과 그 무성한 잎사귀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모자 두 사람이 다정하게 마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크게 나더니 이귀인을 모시는 환심이 핏기 없는 얼굴로 달려 들어와 울며 말했다.
 “한비마마, 큰일났사옵니다, 큰일났사옵니다! 저희 귀인께서 피를 흘리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오며 바닥이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여의는 그 말을 듣고 목소리마저 변했다.
 “어째서 그리 된 것이야?”

 

환심이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덜덜 떨었으니, 벽에 기대고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저녁 식사를 들고 나서부터 복통이 시작되었는데, 소주께서는 회임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항상 복통이 조금씩 있었기 때문에 괜찮은 줄 알았사옵니다. 그런데 밤에 갑자기 심하게 복통을 앓으시더니 곧장 피가 많이 나기 시작했사옵니다.”

 

 “그럼 태의는? 부르러 갔느냐?”

 

환심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벌써 사람을 보냈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어서 가서 살펴보시옵소서.”

 

여의는 본능적으로 손에 든 물건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급히 나가다가, 영황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생각나서 고개를 돌리고 급히 말했다.
 “영황, 무슨 일이 생기든, 무슨 소리가 들리든, 너는 이귀인 처소로 와서는 아니된다. 알겠느냐?”

 

여의가 이귀인의 처소로 달려갔을 때, 방 안에는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귀인은 침상 안에 웅크린 채로 까무러쳐 있었다. 여의는 이귀인의 몸을 끌어안고 이귀인을 부르다가, 한 손에 이부자리 한 켠의 온기가 느껴지자 곧바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치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된 것처럼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여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이부자리에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은 온통 뜨겁고 비릿한 선혈로 뒤덮여 있었다.

 

주석:

①건륭제 어시(御詩) 《칠률독항우기(七律读项羽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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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짜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ㅠㅠ 이번 편 번역 거의 다 해놓고 건륭제 시 번역하기 싫어서(...) 좀 밀어두고 있던 사이에 구글에 블로그 신고 당하고 뭐 기타등등의 일이 있어서 잠시 방치하고 있었습니다ㅠㅠ 요즘 일정이 들쭉날쭉해서 다음편은 빠르면 2월 말, 늦으면 3월 2주 정도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개인 위생 챙기시고 건강 조심하세요!!

 

2. 제목을 최대한 한번에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번역하는게 원칙이었는데, 이번 제목은 잘 이해되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대충 "안좋은 쪽으로 변하다" 정도의 의미인 것 같은데 아시는 분 댓글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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