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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의 연금은 햇살이 찬란하고 청명한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주홍색의 커다란 궁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뒤에서 단단히 닫히고 나서 쇠사슬이 겹겹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문이 다시 열릴 날이 언제일지는 여의 자신도 알지 못했다. 연희궁의 궁인들은 당황하며 눈물을 흘리며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었지만 누구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몰랐다. 해란은 후전에 있다가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달려와 말했다.
 “형님, 무슨 일이어요? 어째서 연희궁 대문을 잠그는 것이어요?”

 

여의는 정원 한가운데에 서있다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니, 쏟아지는 햇빛이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온 땅에 어른거리는 빛을 흩뿌려 놓았다. 그런 청량한 햇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구중궁궐의 유리 기와가 햇빛 아래에서 얼음과 눈처럼 새하얀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 빛은 그녀에게서 정말로 요원한 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의가 조용히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금족 되었을 뿐이야. 연희궁의 쪽문은 여전히 출입할 수 있으니, 너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해란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불안해하며 말했다.
 “형님, 이제야 겨우 조용해졌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지내게 되는 거죠?”

 

여의는 멀리 궁궐이 첩첩이 쌓여 있는 것을 바라보았으니, 유리 기와가 눈부시게 빛났고, 그 빛은 눈과 얼음 위에 내리쬐는 햇빛처럼 평온했다.
 “때로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반드시 힘든 것만은 아니다. 너는 안심하면 된다.”

 

금족의 세월은 쓸쓸하고 적막하여 견디기 어려웠으니, 출입이 금지되었고, 매일 볼 수 있는 것은 작고 네모 반듯한 푸른 하늘뿐이었다. 여의가 시간을 보내느라 하는 일은, 쇄심과 아약을 창고에 보내서 색색의 비단 실을 가져오게 하여 하나 하나 골라 정리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손이 꽤 많이 가는 일이었으니, 여러 가지 실을 종류별로 나누어 다양한 꽃즙을 끓인 물에 넣고 삶는 것이었다. 장미즙은 자주색에, 진달래는 진홍색에, 연꽃은 분홍색에 섞고, 비연초 꽃즙은 오래 끓이면 옅은 남색이 되고, 치자꽃은 옅은 살구빛을 띈 흰색이 되며, 향봉화(레몬밤)는 박하와 섞으면 청보라색이 되었으니, 모두 다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노란색으로 꽃술에 수를 놓아야 하는 명주실조차도 일일이 영몽초(레몬그라스)와 파홍화(사프란) 즙을 함께 끓여서 사용해서 신선한 기운을 띠었다. 게다가 녹색은 더욱 더 성가셨으니, 곽향, 벽려, 계피, 미질향(로즈마리), 백리향, 산도초 등의 향초를 넣고 향긋하며 짙고 선명한 녹색이 나올 때까지 끓여야 했다.

 

해란은 여의를 보러왔다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형님은 아직도 이런 걸 할 마음이 드는 거예요? 저는 그동안 밖에 나가서 온종일 왕흠이 조사했던 그 유언비어를 퍼뜨린 노비를 추궁했었는데, 하나 하나 모두 다 연희궁에서 들은 것이라고 했어요.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어쩌면 황상께서 금족만이 아니라 연희궁의 모든 사람에게 형을 가해 심문하려 하실지도 몰라요.”

 

여의는 빙그레 웃으며 녹송석(터키석) 비단 실을 해란에게 건넸다.
 “이 향을 자세히 맡아보거라. 내가 방지, 목근, 구릿대 이 세 가지 향초를 넣은 것인데, 봄이 벌써 온 것처럼 풀과 나무의 맑은 향이 나지 않니?”

 

해란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고는 여의가 말한 것처럼 가볍게 향을 맡았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여 말했다.
 “형님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시지만,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이 겨울이 지나가도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요.” 해란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황실의 명예를 훼손하는 그 소문을 형님이 퍼뜨린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되면 어떡하죠?”

 

여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왕흠이 몇이나 불렀더냐?”

 

 “열 명쯤 될 거예요.”

 

여의는 희미한 구름 그림자처럼 살짝 미소지었다.
 “열 몇이면 나를 사지로 보내기에 충분하구나. 허나 생각해 보거라. 왕흠을 사지로 몰아 넣으려면 몇명이면 충분할까?”

 

해란의 눈에 깊은 의혹이 떠올랐다.
 “형님의 생각은......”

 

여의는 창밖의 먹물처럼 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게 무슨 생각이 있겠니? 맞다, 그동안 누가 황상을 모셨더냐?” 해란이 말했다.
 “궁중이 뜬소문으로 혼란스러워서 황상께서도 좀처럼 황후를 부르지 않으셨고, 대부분은 가귀인과 혜귀비가 모셨지요. 이제 이귀인이 회임하여 궁중의 비빈들이 모두 이귀인을 자주 살피러 다니고 있고, 듣자하니 혜귀비도 부지런히 가보았다고 해요.”

 

여의가 말했다.
 “궁중의 어멈들이 자주 말하기를, 회임약을 마시고 나서 회임한 사람의 기운을 듬뿍 받으면 좋다고 하더구나. 혜귀비는 자식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분명 갈 것이야.”

 

해란은 눈앞의 감겨있는 실타래를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혜귀비는 매일 일부러 경양궁을 지나서 우리 연희궁에 오는데, 매번 한참을 서서 형님의 처량한 상황을 보며 고소해하고 있어요. 제가 봤을 땐, 혜귀비는 그저 남의 재앙을 보고 기뻐하는 것일 뿐이에요.”

 

여의는 빙긋이 웃으며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 눈치였다.
 “혜귀비가 즐거워한다면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 두어라. 귀비가 밖에서 감개무량해해도 안에 있는 나는 들리지 않고, 들린다 하더라도 바람부는 소리인 셈 치면 될 일이다.”

 

해란은 여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주 보고 있다가, 멀리서 웃음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것을 듣고 해란이 탄식하며 말했다.
 “연희궁은 금족되었고, 영화궁은 사람이 떠나 텅 비었고, 경양궁만 은총이 끊이지 않네요. 바람결에 궁중의 비빈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아마 우리가 있는 이 곳만이 이토록 고요해서 저 소리가 잘 들리는 거겠죠.”

 

여의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손으로는 천 가닥 만 가닥의 실을 끊임없이 움직이며 태연자약하게 쇄심에게 분부하여 말했다.
 “이 실들은 모두 삶아서 향을 입혀 놓은 것이니, 너는 내일 이걸 가져다 햇볕에 말리거라. 자주 뒤집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가지고 들어와서 삶거라. 여러 번 삶아야 비로소 내가 향기를 입힌 <백화춘의도>를 수놓을 수 있다.”

 

쇄심은 대답하고 나서 초 몇개를 더 밝혀 놓고는 마침 조용히 마주 서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인의 비명소리, 궁인들이 크게 꾸짖는 소리, 어렴풋한 태감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섞인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

 

해란이 곧바로 눈치챘다.
 “형님, 무슨 소리 못 들으셨어요?”

 

쇄심이 잠시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듣더니 갑자기 미소 지었다.
 “혜귀비 목소리인 것 같사옵니다.”

 

해란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서도 보러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여의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연금되었지만, 너는 아니다. 해란, 밖에 나가서 보고 오거라. 만일 우리 궁문 밖에서 혜귀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좋지 않을 것이야.”

 

해란이 급히 밖으로 나가서 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대문을 열라고 분부했다. 여의는 쇄심이 가져온 꽃가지가 뒤얽힌 문양의 흰색 다람쥐 털 외투를 걸치고는 서둘러 뒤따라갔다. 문 앞을 지키던 시위가 여의를 보고 다가와 서둘러 막으며 말했다.
 “한비마마, 황상께서 명하시기를 마마께서는 연희궁 대문을 나오실 수 없사옵니다.”

 

여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말게! 본궁은 자네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야. 본궁은 단지 여기서 지켜볼 뿐, 절대 궁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을 것이네.”

 

시위들은 눈에 보이게 한숨을 쉬고는 공손하게 한 켠에 섰다. 바깥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심상치 않고, 궁인들과 시위들의 발소리가 분주히 들려오니, 분명한 것은 방금 들린 소리 때문에 떠들썩한 것이었다. 수십 개의 등불이 연희궁 문 앞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고, 혜귀비는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연꽃처럼 고운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더해져 이전의 아름다운 용모를 잃었으니, 지극히 크게 놀란 것이 분명했다.

 

태감과 시위 여럿이 달라붙어서 복색이 화려한 태감 하나를 붙잡아 끌어냈으니, 그 자의 얼굴이 온통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혜귀비는 귀밑머리가 흐트러지고 구름같이 틀어 올린 머리가 헝클어졌으며, 백옥과 남홍색 여의 진주 비녀 몇개가 옆머리에 비스듬히 떨어져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꾸짖는 귀비의 성난 목소리는 그 속에 담긴 분노와 놀람과 두려움을 숨길 수 없었다.
 “저 무모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을 당장 황상께 끌고 가서 깨끗이 끝장을 내버려라!”

 

여의는 궁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숨을 죽이고 말했다.
 “이렇게 혼란하고 난잡스럽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시위가 말했다.
 “한비마마께 아뢰옵니다. 저 자는 황상을 모시는 부총관 태감 왕흠 공공이옵니다. 술에 취했는지 어쨌는지 방금 혜귀비께서 궁인들을 데리고 지나가시자 미친 듯이 달려들어 불손한 언행을 하고 귀비마마께 소란을 피웠사옵니다.”

 

해란이 이상히 여겨 말했다.
 “왕흠도 혜귀비를 모르지 않는데 어찌 귀비께 무례를 범한단 말이냐?”

 

시위가 말했다.
 “소인들은 명을 받잡아 연희궁을 지키고 있으니, 한 발자국도 떠날 수 없고 그저 지켜볼뿐이옵니다. 다만 왕 공공이 분명히 미친 것처럼 귀비마마를 보고는 두서없이 덮쳐들었사옵니다.”

 

여의는 혜귀비를 보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궁 한비가 귀비마마를 뵈옵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만복을 누리시옵소서.”

 

해란은 여의가 예를 올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따라서 예의를 지켰다.

 

혜귀비는 한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분개하며 말했다.
 “자넨가? 어찌 나온 것이냐?”

 

여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바깥이 시끌벅적 한 것을 들었는데 뜻밖에 귀비마마께서 여기 계시다고 하여 특별히 나와본 것이옵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별일 없으신 지요?”

 

혜귀비가 무척 화를 내며 말했다.
 “본궁에게 별일이 있던 말던 자네가 신경 쓸 것 없네.”

 

여의는 공손하게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관심가지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일이 제 궁문 앞에서 일어났으니 제가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혜귀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좋다! 좋아! 분명 본궁의 이 구경거리를 와서 보겠다는 것이지! 본궁도 알고 싶구나. 왕흠이 갑자기 연희궁 밖에서 본궁에게 무례한 짓을 하였으니, 누가 작정하고 지시한 것이냐!”

 

두 사람이 마침 팽팽하게 맞서고 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밝은 노랑 일색의 어가 행렬이 구불구불 이어지며 다가오니, 쌍희가 급히 나아와 절하며 말했다.
 “귀비께 아뢰옵니다. 황상께서 마침 경양궁에 계셔서 소인이 황상을 모시고 왔사옵니다.”

 

황제의 가마가 아직 완전히 멈추지도 않았는데 혜귀비는 이미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어 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황상, 황상,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주셔요. 신첩이 황상 곁에서 시중을 든 이래로 이런 치욕을 받아본 적이 없사옵니다. 황상!”

 

황제의 어가가 멈추고 혜귀비의 이런 모습을 보니, 가엾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여 말했다.
 “이옥, 어서 혜귀비를 부축하거라.”

 

혜귀비가 여전히 목 놓아 울며 그치지 않으니,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것 같아, 황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알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대가 울고불고 하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찬찬히 말해보거라.”

 

여의는 해란을 이끌고 두 사람에게 문안을 올리며 말했다.
 “황상, 귀비마마께서 상심하셨고, 지금 왕흠은 여전히 입만 열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나이다. 신첩이 보기에, 무슨 일이든지 간에 바깥에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사오니, 우선 물을 뿌려 왕흠을 깨우고나서 다시 제대로 하문하시지요.”

 

황제는 며칠 동안 여의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 여의가 흰색 외투를 걸치고 바람 속에서 미소 지으며 서있는 것을 보니,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냘픈 모습에, 말에는 모두 일리가 있고 이치에 맞아서 그동안의 맺힌 마음이 차츰차츰 사라져갔다.
 “바깥은 바람이 많이 부니 그대는 바람길에 서있지 말거라.”

 

여의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신첩, 황상께서 살펴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다만 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고, 또 연희궁 문 밖에서 일어난 일이옵니다. 아무래도 바깥으로 퍼지지 않을 수 없으니, 황상과 귀비께서 물으실 것이 있으시다면 우선 연희궁으로 드시지요. 신첩이 사람들을 물릴 터이니, 황상과 귀비께서는 천천히 처분하시면 그만이옵니다.”

 

황제는 왕흠이 술 취한 것처럼 벌건 얼굴로 사람들에게 붙잡혀 바닥에 눌려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마땅치 않겠다고 생각하여 말했다.
 “그럼 그대의 연희궁을 잠시 빌리겠다.”

 

여의는 “예” 하고 대답하고는, 황제와 혜귀비가 안으로 들어가도록 옆으로 물러났고, 쇄심과 아약, 삼보는 황급히 깨끗이 정리하고 다시 차를 받쳐 내왔다.

 

황제는 정전에 앉아 살짝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아직 겨울인데 어찌하여 그대의 처소에는 화초의 향긋한 기운이 있는 것이냐? 향을 맡으니 매우 상쾌하구나.”

 

여의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첩이 한가로이 할 일이 없어서 꽃즙을 곁들여 본 것이온데, 황상께 웃음거리가 되었사옵니다.”

 

황제는 제법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짐은 그대를 금족했는데, 그대의 마음 씀씀이는 여전히 단아하군.”

 

여의는 살짝 미소 지었다.
 “신첩이 금족된 것은 황상께서 신첩의 결백을 밝혀주려 하셨기 때문이오니, 신첩은 그저 안심하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황제는 맑은 눈빛으로 칭찬하듯 여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군. 그대도 짐 곁에 앉아서 같이 듣자꾸나.”

 

여의는 미소를 지으며 사은하고 삼보에게 분부하여 말했다.
 “왕흠의 상태를 보니 취한 것 같구나. 너는 얼음물로 왕흠을 정신차리게 하고 즉시 데려와서 이야기하게 해라.”

 

일이 너무 갑자기 일어났고 귀비 또한 놀라서 소란을 피우니, 황제도 전각 안에 많은 사람을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귀비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 말심과 자신의 태감인 이옥만을 안에서 시중들게 했다.

 

귀비는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고 그제서야 참지 못하고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여 한 마디도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이윽고 말했다.
 “그대는 짐을 보자 마자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또 대체 무슨 억울함이 있는지 말하려 하지 않으니, 짐이 어떻게 그대를 도우라는 것이냐?”

 

혜귀비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말심이 견디지 못하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와 말했다.
 “방금 귀비마마께서 경양궁에서 이귀인을 보고 나오시다가, 한비마마께서 금족 당하신 것을 떠올리시고는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러서 살펴보고 자매 간의 정을 다하려 하셨사옵니다. 오늘 귀비마마께서 막 소화문을 지나 연희궁 앞 통로에 들어오셨을 때, 왕흠이 뒤쪽 창진문에서 들어와 다짜고짜 귀비마마께 달려들면서 저속한 말을 내뱉었사옵니다.”

 

귀비는 옷소매를 내밀며 울었다.
 “왕흠이 그야말로 귀신들린 것처럼 실성하여 신첩의 옷을 찢었사옵니다. 황상께서는 신첩의 소매를 보시옵소서. 저것이 잡아당겨서 다 튿어졌사옵니다.”

 

여의가 의아하게 여기며 말했다.
 “왕흠은 오늘 당직이 아니냐? 어찌 창진문에서 온 것이냐?”

 

이옥이 급히 몸을 굽히며 말했다.
 “예. 오늘 밤은 왕 공공이 당직이 아니어서 일찍 쉬러 돌아갔사옵니다.”

 

마침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삼보와 소복자가 반쯤 깬 왕흠을 끌고 들어왔다. 왕흠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으니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이 분명했고, 보아하니 아까 보다는 훨씬 정신을 차린 것 같았지만 얼굴은 온통 선홍색으로 벌개져 있었다.

 

여의가 코를 막으며 말했다.
 “왕흠은 결코 혜귀비를 모르지 않고 평소에도 예의를 갖춰왔는데, 이 중에 혹시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황제는 불쾌해 하며 흘끗 보고는 말했다.
 “저 꼴을 봐라. 마치 술을 잔뜩 퍼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것 같구나!”

 

이옥이 급히 다가가서 냄새를 맡고는 말했다.
 “황상, 이 냄새는 술냄새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달달한 것이 꿀물같은 향이옵니다!”

 

왕흠은 발버둥치며 일어나 황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고개를 돌려 말심이 자기 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입가에는 자기도 모르게 번들거리는 침을 한 줄기 흘리며 말심을 향해 달려들어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 했다.

 

말심은 대경실색하여 궁중 법도도 아랑곳 않고 혜귀비 뒤로 움츠러들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소주, 노비를 살려주시옵소서, 노비를 살려주시옵소서!”

 

황제는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이 노하여 호통쳤다.
 “왕흠, 무슨 미친 짓이냐!”

 

황제가 이 말을 내뱉자 이옥이 곧장 왕흠을 붙잡았지만, 왕흠의 힘이 너무 세고 끙끙거리며 발버둥치면서 벌겋게 불꽃이 튀는 눈으로 말심을 쳐다보았으니, 탐욕스럽게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여의가 마음이 조급하여 말했다.
 “삼보, 소복자, 어서 왕흠을 처마 밑으로 끌고 나가서 단단히 붙잡아라. 절대 들어오게 해서는 안된다.”

 

귀비는 놀라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하여 슬픔이 우러나왔다.
 “황상, 방금 왕흠 저 망할 노비가 이렇게 신첩을 보면서 달려들었사옵니다. 저것이......저것이......”

 

귀비는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의 눈에는 음울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처럼 번뜩였다. 이옥이 급히 말했다.
 “황상, 왕흠은 이 상태로는 물어도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옵니다. 왕흠은 오늘 당직이 아니어서 자기 방에 있었고, 소인이 기억하기로 왕흠의 대식인 연심도 당직이 아니옵니다. 생각건대 연심을 불러다 하문하시면 왕흠에게 대관절 무슨 일로 발광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콧방울은 살짝 벌어지고 이마의 핏대에서는 빠르게 맥박이 뛰고 있었으니, 황제는 온 힘을 다해 노기를 누르며 말했다.
 “너는 가서 연심을 불러오고, 사람을 시켜서 태의도 불러라. 저 망할 노비가 대체 무슨 병증이 도져서 이렇게 겁도 없이 날뛰는 것인지 봐야겠다!”

 

이옥이 몸을 숙이고 물러나왔다. 여의는 혜귀비의 손수건이 눈물로 젖은 것을 보고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귀비 형님, 화내지 마세요. 연심과 이옥의 처소가 바로 부근에 있으니 곧 도착할 거예요. 형님은 우선 눈물을 닦으세요.”

 

황제가 곁에 있으니 혜귀비는 여의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보고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분개하며 비단 손수건을 받아 한쪽에 내던져 두었다.

 

말없이 기다리던 새, 여의가 아약에게 눈짓하여 차를 가져오게 하니, 귀비가 한 모금 마셔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간 차가운 것이, 무슨 고약한 맛이냐?”

 

여의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귀비마마께 아뢰옵니다. 이것은 박하벌꿀차로, 제 궁에서 마침 박하즙을 끓였기에 꿀을 넣어 녹차를 우렸습니다.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맺힌 것을 푸는데 제격입니다.”

 

아약의 차가 마침 황제의 손에 닿자 아약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황상께서는 맛보시옵소서. 만일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소인이 다른 것으로 다시 내오겠사옵니다.”

 

황제는 마침 화가 풀리지 않아 손에 잡히는 대로 받아 들며 말했다.
 “번거롭게 할 필요 없다. 한비의 마음 씀씀이이니 그냥 이걸 마시면 된다.”

황제의 손이 무심결에 아약의 손등을 스치자, 아약은 얼굴을 붉히며 급히 무릎을 꿇고 물러가겠다고 아뢰었다. 여의는 마침 혜귀비를 보고 있느라 잠시 알아차리지 못했다. 찻잔이 반쯤 비어 갈 무렵, 근처에서 문을 미는 소리만이 들렸으니, 이옥이 연심을 데리고 들어왔다.

 

연심은 들어오자 마자 허둥지둥하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상, 귀비마마, 한비마마, 왕흠이 발광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았사옵니까? 허나 황상과 여러 소주께서는 언짢아 마시고 이번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혜귀비가 아름다운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네가 이렇게 묻는 것은 왕흠이 어째서 저렇게 발광하는지 알기 때문이 아니냐?”

 

연심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낯뜨거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이옥이 이윽고 말했다.
 “황상, 태의도 벌써 도착하여 왕흠을 살펴보고 있사오니, 소인이 즉시 가서 태의를 들라 하겠사옵니다.”

 

황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이옥이 곧바로 문을 열고 태의를 들어오게 했다. 태의 또한 대경실색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황상, 소신이 왕 공공을 진맥해보았사온데, 왕 공공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아기소환(阿肌苏丸)을 과도하게 복용해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혜귀비는 아름다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의심스러워하며 말했다.
 “아기소환이 무엇이냐?”

 

태의는 놀라서 대답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다가, 황제와 혜귀비가 모두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하는 수 없이 염치 불고하고 아뢰었다.
 “이 물건은 궁 밖 민간에서 은밀히 사용하는 약이온데, 사상자(蛇床子, 뱀도랏이라고도 불리는 산형과의 두해살이풀. 높이는 30~70cm이며, 잎은 겹잎이다. 6~8월에 흰 꽃이 피고, 열매는 가시 같은 털이 있어 다른 물체에 잘 붙는다. 열매는 요통, 발기 불능, 낭습증 따위의 치료에 쓴다.)와 천궁(川芎,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60cm이며, 잎은 어긋나고 우상 복엽으로 톱니가 있다. 8~9월에 흰 꽃이 줄기 끝이나 가지 끝에 복산형 화서로 피고 열매는 여물지 않는다. 한방(漢方)에서는 그 뿌리가 혈액 순환을 도와주어 여자의 월경이 순조롭지 못한 데나 타박상, 두통 따위에 쓴다.), 음양각(淫羊藿,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의 잎. 팔다리를 놀리기가 거북하거나 발기 불능, 냉풍(冷風) 등에 약으로 쓴다.)으로 만들며......”

 

황제는 즉시 알아차리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검푸르게 변하며 이를 갈았다.
 “간도 크구나!”

 

혜귀비는 황제가 알아들은 것처럼 빨리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점차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수치심에 얼굴이 온통 새빨개지며 벌떡 일어나 연심을 발로 걷어차며 원한에 가득 차서 말했다.
 “왕흠이 이런 뻔뻔스러운 물건을 먹는 것은 당연히 너희 둘이 한통속이기 때문이겠지. 황후께서는 좋은 마음으로 너희에게 대식을 내리셨는데, 너는 감히 이토록 염치도 모르고 후궁에서 음탕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연심은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여,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 여의가 급히 눈짓으로 태의와 말심에게 나가라는 뜻을 보이고는 따뜻하게 말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할 말이 있으면 말해보거라.”

 

연심은 이옥을 흘끗 보고는 난처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말했다.
 “여기 남아있는 이옥은 입도 귀도 없으니, 연희궁 정전을 떠나면 이 일은 들은 적도 없는 것이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안심하고 네 사정을 말하면 된다.”

 

연심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며 말했다.
 “황상, 황후마마께서는 본래 소인이 평생 의지할 곳을 찾길 바라는 좋은 마음으로 소인에게 혼인을 허락하시며 왕흠과 대식을 하게 하셨사옵니다. 소인도 혼인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온데, 본래 왕흠은 사람의 탈을 쓴 개였으니 하물며 짐승만도 못하옵니다. 왕흠은 본래 거세한 태감이지만 마음은 멀쩡한 남자 행세를 하고 싶어하여, 소인의 몸을 제멋대로 다루며 함부로 욕을 해대고도 또 이런 이상하고 음탕한 짓거리를 하여,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도록 소인을 해하였사옵니다!”

 

황제가 가볍게 기침하자 이옥이 즉시 뜻을 알아차렸다.
 “소인이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왕흠의 처소를 수색하겠사옵니다.”

이옥은 말을 마치고 총총 물러갔다.

 

귀비가 혐오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왕흠이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하는데 너는 어찌 황후마마께 고하여 처리해달라 하지 않았느냐?”

 

연심이 슬피 울며 말했다.
 “소인이 비록 궁인이기는 하오나 체면을 중히 여기옵니다. 이런 일을 어찌 남에게 말할 낯이 있겠으며, 더욱이 황후마마의 은혜를 저버리고 감히 마마의 귀를 더럽힐 수는 없었사옵니다. 게다가 왕흠이 말하기를, 소인이 감히 한 마디라도 토로하려 한다면 반드시 소인을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연심은 말하면서 옷을 벗고는 몸을 기울여 어깨와 등을 드러냈으니, 위에는 온통 잇자국과 손톱으로 할퀸 자국으로 덮여 있었고, 피부 속 깊은 곳까지 들짐승에게 긁힌 듯 온통 상처투성이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여의가 급히 자신의 외투를 가져다가 연심에게 덮어주니, 연심은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소인은 낮에는 황후마마의 시중을 들고, 밤에는 왕흠에게 이런 괴롭힘을 당해야 했사옵니다. 이렇게 때리고 욕하는 건 그렇다 쳐도, 나중에는 왕흠이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더러운 약을 구해다가 오랫동안 복용하면 사내에게 어떤 효력이 있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는, 매번 이 약을 먹고 툭하면 소인을 쉴 틈 없이 괴롭혔사옵니다.”

연심은 비통한 마음에 체면도 차리지 않고 왕흠에게 시집간 이래로 겪은 고초를 낱낱이 이야기했다.

 

뭇 사람들은 들으면 들을 수록 놀라고 두려워 탄식을 금치 못했다. 향 하나가 탈 시간이 흐르고, 이옥은 소태감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옥이 한쪽에 공손하게 서자, 소태감이 황양목 상자 하나들 받쳐들고 이옥의 곁에 섰다.

 

황제는 들으면 들을 수록 화가 나서, 미간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또 왜 그런 것이냐?”

 

연심은 울다가 하마터면 목이 메일 뻔했다.
 “오늘 왕흠이 당직이 아니어서 집에 돌아오자 마자 저것을 마시기 시작했사옵니다. 소인이 방에 막 돌아왔을 때 창 밖에서 왕흠의 저런 모습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사옵니다. 소인은 잠시도 돌아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당직을 서러 장춘궁으로 다시 갈 수도 없어서 근처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왕흠이 저 더러운 물건을 먹은 후에는 노비를 찾으려 사방을 헤집고 다니니, 아마도 약성이 발작을 일으켜 발광한 것처럼 뛰쳐나갔고, 소인은 그제서야 몰래 방으로 돌아갔던 것이었사옵니다.”

 

혜귀비는 분노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황제의 무릎 아래에 꿇어 앉아 비 오듯 눈물을 쏟았다.
 “황상, 황상, 반드시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왕흠이 감히 궁 안에서 저렇게 음란한 물건을 먹고 신첩에게 돌진했으니 그야말로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하옵니다!”

 

이옥은 이 말을 듣고는 비로소 소태감의 손에 있는 황양목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황상, 소인이 명을 받들어 왕흠의 방을 수색해보니 곧바로 이 더러운 물건이 든 상자를 찾았사온데, 소인은 참으로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것이옵니다. 소인이 감히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바로 가져왔으니 황상께 살펴보시길 청하옵니다.” 말을 마치고 이옥은 상자를 받쳐들고 황제 곁으로 다가가 황제 한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상자를 열었다.

 

황제가 슬쩍 보니, 얼굴 근육이 자기도 모르게 경련을 일으키고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 황제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분노를 드러냈다. 이옥은 즉시 상자를 덮고 시의 적절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왕흠은 대식을 하사 받은 이후로 소인들 앞에서 자기가 사내로서 당당한 풍모가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사옵니다. 이제 보니 저런 불결한 물건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사옵니다!”

 

황제의 악문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은 얼음처럼 날카로웠다.
 “온 궁의 태감들을 신형사로 불러서 왕흠의 손발 근육을 끊는 것을 보게 하고, 다시 ‘첨가관(贴加官)’을 행하여 어떤 분별없는 놈이 감히 또 후궁을 더럽히는지 똑똑히 보게 해라!”

 

이른바 ‘첨가관’은 형을 집행하는 사람이 뽕나무 껍질로 만든 질긴 종이로 형을 받는 사람의 얼굴을 덮고 나서, 입에 불에 달군 칼을 물고 물을 뿜어 종이를 적셔서 얼굴에 달라붙게 하고 또 두 번째 장을 같은 방법으로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곱 장을 쌓으면 형을 받는 사람은 산 채로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일곱 장의 종이가 한데 겹쳐진 것을 떼어내면, 굴곡이 뚜렷하게 남아서 마치 연극 무대의 도가관(跳加官, 중국 전통극에서 시작이나 공연 중에 추가로 공연하는 춤. 연기자가 웃음 띤 가면을 쓰고 붉은 두루마기와 검은 헝겊신을 착용하고 손에 ‘天官赐福(복을 관장하는 천관신이 복을 내리다)’ 따위의 문구가 적힌 족자를 무대 아래 관중에게 펼쳐 보이며 축복과 축하를 나타냄) 가면처럼 형을 받는 사람이 죽어가는 공포스러운 형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여의는 차분하고 진중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약간의 혐오와 역겨운 기색을 띠고 있었지만, 연심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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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 오랜만에 올립니다 ㅠㅠ 본업이 활자 다루는 일이다보니 일일 할당량이 다 차면 글자를 보기가 힘들다는 핑계를 조심스럽게 던져봅ㄴ...읍읍

2. 새 에디터에서 각주 기능이 사라져서 나름 궁리하다가 글자색을 흐리게 바꿔봤습니다. 읽고 싶은 분들은 읽으시고, 독서 흐름을 각주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스루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혹시 읽는데 불편하시면 댓글 달아주세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

3. 진도를 너무 못 나가서 ㅠㅠ 가능하면 6월 중에 몇 장 더 올려볼까 계획은 하고 있습니다. 장담은 못드리지만요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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