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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의 이변은 순식간에 궁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옥연은 해란을 보았을 참지못하고 속닥거리며 물었다

 “어젯밤 황상께서 자네 처소에 오셨을 화가 많이 나셨든?

 

해란은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가귀인도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황상을 뵈올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는데 어디 감히 황상께서 어떤 표정이신지 보았겠어요?

 

옥연이 수상쩍게 웃었다.
 
“그럼 황상께서 자네와 이야기하면서 답답함을 푸셨는가? 자네도 괜찮은 셈이지. 연희궁에서 지내게 이래로 황상께서 한비를 보러 가시는 김에 몇번 자네를 보러 가시니.

 

해란의 얼굴빛은 겸손하고 조심스러웠으니, 지난번 굴욕을 당한 두려워하며 불안하여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형님은 아직도 저를 모르시나요? 말주변이 서툴고 모자라니 황상께서도 저와 이야기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죠. 그냥 평소와 같았을 뿐이에요.

 

옥연은 믿기지 않는 , 곱고 맑은 봉황같은 눈을 날아갈 치켜떴다.
 
“정말로 평소와 같았단 말이야?

 

해란의 안색을 보아하니 성실하고 정직하여 믿음이 갔다.
 
“정말이에요.

 

옥연은 조금 실망한 이귀인의 팔짱을 끼고 흥미가 떨어져서 가버렸다.

 

얼마 안있어, 해란은 여실히 여의에게 다가가 오늘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여의는 오로지 당나라 이소도 <춘산행려도> 비교하며 고개를 숙이고 단향목 수틀에 팽팽하게 당긴 비단에 똑같이 폭의 자수를 놓고 있을 뿐이었다.

 

해란이 말했다.
 
“바깥은 모두 시끌시끌해요. 모두 형님을 웃음거리로 삼고 싶어하는데 형님은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게 수나 놓을 수가 있어요?

 

여의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겨우 여의관[각주:1]에서 사람을 시켜 그림을 찾아와 수를 놓으며 마음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아무려면 밖에 뛰쳐나가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니?

 

해란이 그림을 꼼꼼히 보더니 말했다.
 
“이 채색화는 벼랑이 깎아지른 하고 돌층계는 널찍하게 굽이치네요. 나무 사이로는 회백색 등나무가 휘감고 있고 행인은 말을 채찍질하며 산을 오르고 있군요. 웅장하고 험준한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가니 나무덩쿨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결국에는 겹겹의 산에 강물마저 휘감아드니 사람은 길이 없는 같다 느끼네요."

 

여의는 손을 뻗어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그림도 그림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아래에 곁들여진 시다." 여의가 작은 소리로 읊었다.


 "
깎아지른 절벽에 걸린 돌층계는 겹겹이 빠져들고(苍崖悬磴迷层叠), 나무의 푸른 빛은 멀고 가까운 사이에 그늘이 짙어지네(树色阴浓远近间). 구름 빛과 안개 그림자는 모두 흔적 없는데(云光岚影都无迹), 고단하면 잠시 멈춰 어깨를 쉬어 준들 어떠하랴(倦顿何妨暂息肩). 눈이 침침하면 고개를 젖히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잠시 눈을 붙여도 좋으리(仰瞑渴饮聊伦逸), 언덕에 기대어 긴장을 풀어도 또한 편안하리(巨坡平掌心亦安)."

 

해란은 눈동자를 빛내며 뭔가 이해했다는 듯한 미소를 띠었다.
 
“큰 언덕에 기대어 긴장을 풀어도 또한 편안하리. 설마 형님, 벌써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거예요?

 

여의는 땀을 수놓고 손을 멈추고는 비단 실을 집어 그림 위의 짙푸른 녹색과 깊은 비취 색에 대어보며 하나하나 색을 골랐다. 해란이 웃으며 말했다.
 
“산봉우리 위에 있는 나무 그루에 그렇게나 많은 녹색을 쓰면 형님은 눈이 어지러울까 걱정되지 않으셔요?

 

여의는 안에서 피어나려 하는 복숭아 꽃을 가리켰다.
 
“저 분홍빛이 가득한 꽃봉오리를 보렴. 녹색 주렴에 비치니 더욱 어지러이 사람의 눈을 끌지 않니? 이왕 이렇게 이상,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스스로 판단력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해란도 말없이 구리 대야에 손을 담가 깨끗이 씻고 은바늘 하나를 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우도 바깥의 어지러운 꽃에 미혹되고 싶지 않으니 형님 곁에서 수나 놓아야겠어요.

 

비단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에 심취한 나날은 고요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마치 밝은 녹색, 청록색, 진한 청옥색, 담황색, 자주색, 청회색, 진분홍색 여러 색의 비단실이 어지러우면서도 천천히 은바늘의 바늘구멍을 가로질러, 새하얀 비단 위에 수놓이니, 점점 마음이 평온해져갔다.

 

여의의 생일 이후로 황제의 발걸음은 달이나 연희궁으로 향하지 않았다. 육궁의 녹두패가 관례에 따라 손가락 사이에서 뒤집어지며, 함복궁, 영화궁, 계상궁, 장춘궁, 종수궁, 경양궁, 황제가 가는 곳은 어디든 봄기운이 옮겨가는 같았다. 오직 연희궁만이, 설령 정원의 복숭아꽃이 송이 피어도 여위고 쌀쌀함에 붉게 떨다가 만개 하지도 못하고 아름다움이 본래의 색을 잃어, 점차 따뜻해지는 봄바람과 화창한 날씨에 피어 있어도 외롭고 수척하여 의지할 없이 가냘플 뿐이었다.

 

황제가 갑자기 연희궁을 냉대하니, 여의와 해란의 나날도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봄철에 응당 있어야 옷감을 보내오지 않은 것이었다. 여의와 해란은 지난해의 옷을 골라 입어야만 했다. 다행히 황후가 여전히 굽어 살펴 상으로 옷감을 조금 내려주어서 겨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의와 해란의 옷이 있어도 아랫사람들의 옷은 두루 살펴서 완비하지 못했으니 원성을 면하기 어려웠다. 슬슬 어선방에서 보내오는 음식도 신선한 이라고는 없게 되었다. 제철 요리는 없고 몇가지 주요리는 모두 한번 끓인 것을 다시 끓인 것이었으며, 오늘 보내온 것을 먹지 않으면 다음 날이면 기름진 국물이 너무 느끼해지고, 곁요리는 너무 오래되어 애초에 먹을 없는 것이었다. 여의는 황후에게 일일이 해결해달라 여쭐 없고, 이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어선방의 미움을 받을 없으니, 어쩔 없이 자신의 은자를 내어 소주방의 음식에 보탰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다시 슬며시 다달이 보내오는 은자도 줄어들었다. 아약이 세어보니 수가 맞지 않자, 내무부의 주사 태감 진립이 고함쳤다.

 "무슨 근거로 우리가 보낸 은자가 맞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오?"

 

진립은 나이는 많지 않지만 내무부에 오래 일했으니 곧바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희궁에 소주가 계시니, 본래 비용이 많이 듭니다. 연말에 여기 저기 것들이 모두 내무부가 스스로 주머니를 털어 보탠 은자란 말이오. 이제 봄이 됐는데 은자를 갚아야 하지 않겠소? 내가 계산해보았는데 이렇게 다달이 나눠 갚으면 연희궁이 빌려 금액은 내년 이맘때나 되어야 갚을 있소."

 

아약은 분노로 온몸을 덜덜 떨며 진립의 코에 삿대질을 하며 따졌다.
 
“연희궁이 언제 이게 필요하다 저게 필요하다 하며 내무부의 은자를 빌렸다는 것이냐? 차용증은 있는 것이냐? 비용이라고? 내가 보게 하나하나 꺼내놓아보거라!"

 

진립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노비에게 돈을 빌리고 떼어먹는 상전이 어디 있답니까? 여전히 부족한 것은 소주마마이신데 어찌 노비의 은자는 은자가 아니란 말이오? 밖에 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말하면 다들 비웃을거요.

 

아약은 진립이 목에 힘을 주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각에 들어가며 여의가 <춘산행려도> 고개를 파묻고 수를 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눈두덩까지 벌개지며 말했다.

 "소주, 들어보세요. 내무부 사람이 이렇게나 우리를 못살게 굴다니요!"

 

여의는 고요하게 비단실을 고르며 말했다.

 "너희들이 고생하는구나. 은자가 모자라니, 중에 오래된 것을 가져다 팔아서 은자로 바꾸거라. 그래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우리가 고생해서 수를 많이 놓아 소복자를 불러 밖에 보내 은자로 바꿔오게 하고.

 

아약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궁중에 어디 은자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있사옵니까? 소인 생각에는 남의 눈치 보며 이렇게 곤란할 에야 소주께서 친정과 의논해보시는 ......"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여의의 표정이 벌써 어두워졌다.
 
“궁중의 난감한 일은 나만 알면 됐지, 어찌 친정 사람들에게 말해 걱정하게 하겠느냐? 게다가 오라나랍 씨가 예전만 못하여 친정도 여전히 내게 기대를 걸고 있는데, 내가 어찌 친정에 마음의 짐을 더할수 있겠느냐?

 

아약은 목이 메어 마디도 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했다.
 
“소인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혈육이시니......

 

여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친혈육이기 때문에 더더욱 내가 친정을 연루시킬 없는 것이야."

 

아약은 말없이 그저 화가 나는 것을 참을 뿐이었다. 여의는 은바늘을 손에 가득 식은땀이 흘러 끈적거리니, 아예 수틀을 밀쳐놓고 손을 씻으러 갔다.

 

때는 마침 황혼 무렵이라 뜰에는 저녁노을이 가득했고, 난각 안까지 비스듬히 기울어져 들어와 놓인 장막 위에 드리워지니 더욱 암담했다. 석양의 옅은 금홍색 빛깔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으니, 그런 따뜻한 색이 가지는 온기는 전혀 없고, 오히려 조금씩 서늘해지는 것이 마치 가을의 스산함으로 접어드는 같았다. 하늘을 나는 제비조차도 날개에 차가운 밤이슬을 맞은 낮게 날고 있었다. 여의는 까닭없이 어린 시절에 배웠던 수가 떠올랐다. 앞부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구절은 아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석양은 말이 없고 제비는 시름겨워 돌아오네(夕阳无语燕归愁), 동풍이 밤에 불어오니 가을처럼 서늘하구나(东风临夜冷于秋).[각주:2]

 

예심은 뜻밖에 마디 말없이 백사등롱 개를 수틀 옆에 놓고, 평온하게 시중들며 말했다.
 
“소주, 소인 방금 의상을 정리하며 옷감이 오래되고 도안이 유행에 지난 것을 찾았사옵니다. 헌데, 옷감이 무척 좋은 것이라서 우선 뜯어서 아랫사람들에게 봄옷을 만들게 하면 궁중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도 피할 있을 하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그것도 좋겠구나. 그런데 내가 따로 네게 시킨 일은 했느냐?"

 

예심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황자 처소는 소인이 유모들을 믿을 없다는 것을 알아서, 소주의 분부에 따라 며칠 거리를 두고 몰래 먹을 것을 보내고 사람을 피해 대황자께 드렸사옵니다."

 

 "그럼 됐다. 내가 보살필 있는 것도 이것뿐이구나." 


여의는 깨끗한 물로 손을 씻고 하는 없이 말했다.

 "내가 경솔하여 너희를 위험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구나."

 

예심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 궁에서 오르락 내리락 부침이 있는 것도 예삿일이지요. 다른사람들이 우리를 깔보면 사람들이 보는 눈이 없을 뿐인 것이옵니다."

 

여의는 고개를 젓고는 제법 감탄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아약도 유난히 이리 성질을 죽이지 못하니......"

 

사람이 마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 삼보가 발을 걷으며 들어와 말했다.

 "소주, 소인이 방금 밖에서 이옥을 마주쳤사온데, 이옥이 마침 어명을 전하러 간다 하니 뜻밖에 희한한 일이옵니다."

 

여의가 말했다.

 "뭐라 했느냐?

 

삼보가 말했다.

 "황상께서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는 모르겠사오나, 황태후께 여쭈어 선제께서 남기신 태비들께 상을 내리겠다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거의 아무 반응도 없다가 물었다.

 "조금 자세히 말해보거라. 어찌 것이냐?"

 

삼보는 뜻밖에 여의가 이리 흥미로워하니 더욱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황상께서 며칠 종묘에 가시어 조상들께 제를 올리시고 돌아오셔서는 무척 슬퍼하시며 태후께 여태껏 효도를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사옵니다. 태후께서 황상을 몇마디 위로하시니,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응당 천하로써 태후를 모시고 수강궁의 태비와 태빈들의 녹봉을 늘리시겠다 하셨사옵니다. 그밖에, 황상께서 선제의 사망한 비빈들을 추봉하여 함께 비빈릉으로 이장하고 선제와 함께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

 

여의는 지난 수십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돌이 불현듯 모래와 같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긴장이 풀렸다. 여의는 참지 못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선제께서 승하하시고 지하에서 가셨을 아무도 모시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아니되지. 비빈릉에 묻힌 사람이 너무 적은 것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야. 황상의 이런 효심을 황태후도 당연히 허락하지 않을 없는 것이고."

 

삼보가 웃으며 말했다.

 "소주께서 멀리 내다보시니, 태후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는 것이옵니다. 그래서 먼저 앞서간 선제의 돈숙황귀비를 태릉에 합장하고나서 예전에 죽은 원명원과 열하행궁에서 시중들던 몇몇 귀인, 상재, 답응 또는 선제를 모셨던 관여자를 함께 태빈으로 추봉하고 역시 태릉에 합장한다 하옵니다."

 

여의의 마음에 소리없이 기쁨이 떠오르니 눈이 스르르 녹아내려 엷게 눈물이 고였다. 예심이 서둘러 손수건을 내밀며 기회를 보아 말했다.

 "소주께서 꽃을 수놓으시느라 눈이 피로하실테니 어서 쉬셔요. 삼보, 너도 물러가봐."

 

삼보가 대답하고 물러가자 여의는 저도 모르게 기쁨에 겨운 눈물이 흘렀다.

 "황상께서 이리 하셨구나, 정말 이리 하셨어." 눈물은 뜨거웠고, 눈밑에서부터 손등으로 떨어지니 촉촉한 온기가 황제의 마음 씀씀이와 효심을 일깨웠다. 여의의 기쁨은 처연함과 위안이 한데 섞인 것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황제는 자신의 신세를 꺼리면서도 마음 속에는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의 생모를 염려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여의는 마음 속으로 알았으면서도 때에 이르니, 비록 신분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추봉함으로써 결국 황제의 가지 걱정거리를 덜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수년 동안 그의 마음이 점점 그녀의 마음이 되었다. 비록 여의가 총애를 생각하고 마음 편히 의지할 곳을 마련할 방법을 고려했다고 해도, 지금 순간만큼은 무척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예심은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안심하여 참지 못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소주, 황상께서 마마의 뜻을 이루어주셨어요. 황상께서도... 황상께서도 머지않아 오실 것이옵니다."

 

그렇지만 황제는 연희궁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 비록 평소 아침 알현 만날 시간이 있지만, 황제도 그저 담담하게 여의와 마디를 나누었고 다른 사람들과도 다르지 않았다. 여의는 비록 애가 탔지만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했다. 번이나 이옥을 불러 물어보았지만 아무리 총명한 이옥도 이유를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여의는 조급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마지못해 하루하루를 지낼 뿐이었다. 단지 어렴풋이 들리는 이야기로는, 황제가 새로 궁녀를 들여 답응으로 삼았으니, 이미 수답응으로 봉하여 이귀인의 경양궁에 머문다고 했다. 설령 그러하다 하더라도 매상재는 여전히 총애받았고, 비록 황제가 사람을 얻었다 해도 매상재가 받는 총애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일을 듣는 여의의 마음은 조금 속상함을 면할 없었다. 여의도 이제 아홉이라 좋을 한창 때이니, 남들은 '요염한 눈길에 기쁨이 깃들고 아리따움이 넘치는(喜入秋波娇欲溜) 때였지만, 자신은 오히려 ‘옥베개에 이른 추위가 서리니 낭군은 아시는지?(玉枕春寒郎知否?)[각주:3] 같았으니, 그저 속수무책으로 황제의 총애를 바라만 뿐이었다. 무미건조한 나날들 유일한 위안은 해란이었으니, 항상 와서 여의와 함께 있어주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같이 있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게다가 순빈도 있었으니, 비록 순빈은 총애는 많이 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황자가 있으니, 음으로 양으로 여의를 조금 도울 있었다.

 

다시 황제를 뵙게 때는 벌써 오월이 되어 있었으니, 여의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내리던 가랑비는 푸릇푸릇하여, 정원을 가득 채운 겨우살이 풀의 향이 빗속에서 은은하게 풍겼다. 여의는 한숨을 쉬었다. 손에 <춘산행려도> 이상 놓았고, 자신은 여전히 첩첩이 어우러진 속을 헤매이며 봄날은 결국 지나갔다.

 

명을 전하러 것은 황제를 모시는 이옥이었다. 이옥은 예를 올리고는 기쁨에 겨워 말했다.

 "황상의 어명을 전하옵니다. 한비마마께서는 속히 황후궁으로 오시어 어가를 뵈옵소서."

 

여의는 서둘러 일어나 말했다.

 " 시간에 이렇게 서둘러 본궁을 오라 하시니, 공공은 무슨 일인지 아시는가?

 

이옥이 황급히 말했다.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공공과 소인이 함께 나와 공공은 함복궁으로 가서 같은 명을 혜귀비 마마께 전하였사옵니다. 소주, 서두르십시오. 가마가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여의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는, 문을 나설 가랑비가 얼굴에 스치자 비로소 비가 벌써 서늘한 기운이 사라지고 달콤하고 촉촉한 꽃향기와 더위를 몰고오는 온기를 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춘궁에 다다르자 연심이 이미 발을 걷어올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여의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

 "한비마마 오셨사옵니까. 귀비마마께서도 방금 도착하셨사옵니다.

 

여의는 혜귀비와 황후가 황제의 좌우에 있으며 뭔가를 재잘재잘 이야기하며 무척 화목한 같은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일상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정경은 여의와 황제 사이에서는 매우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이었으니,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하나하나 만나보았다.

 

황제가 여의를 향해 손짓하며 자리에 앉게 하고는 말했다.

 "이리 급하게 오느라 비를 맞지는 않았지?"

 

여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혜귀비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황상께서 궁중에서 보신 피하는 도롱이는 신첩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사오니 황상께서 신첩에게 상으로 내려주시지요."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밖에서 구해온 것이고, 듣자하니 민간에서 비를 피하는 물건이라던데. 그것도 그대의 부친 고빈이 찾아온 물건이니 그가 이리도 편애할 줄은 누가 알았겠나. 결국 그대에게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잖나."

 

혜귀비는 앵두같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버지는 제일 편애하여 안중에는 오로지 황상 뿐이고 딸은 없답니다." 

혜귀비는 본래 앵두빛 비단에 은사로 옥잠화를 수놓은 겹옷을 입고 있었는데, 겉에는 옅은 분홍색 비파 무늬에 금을 흩뿌린 얇은 조끼를 덧입으니 유달리 요염함이 흘러 넘치는 같았다. 옷깃에는 백옥으로 달린 나비가 달려, 혜귀비가 찌푸렸다 웃었다 때마다 새하얀 구슬처럼 반짝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부친이 짐을 편애하니, 짐도 그대를 편애하는 것이지. 그대가 좋아하니 가져가거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돌아다녀서는 아니된다."

 

혜귀비가 함빡 미소를 지으며 사은하고 여의를 흘겨보며 득의양양한 태도로 향기로운 자두 알을 먹었다.

 

황제가 정색하고 말했다.

 "오늘 이리 급히 그대들을 황후의 궁으로 부른 것은 그대들과 의논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고 대답하자 황제가 다시 말했다.

 "오늘 짐이 영황의 공부를 물었는데, 영황을 보니 조금 마른 했지만 새옷으로 갈아 입혀보니 활발해보였다. 짐이 글자를 쓰라고 명했더니 아이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 오로지 짐의 탁자 위에 있는 참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정신을 데다 팔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황후가 조금 두려워하여 서둘러 일어나 말했다.

 "황상께서는 부디 책망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영황이 나이가 어려 책을 읽고 글자를 연습할 한눈을 파는 일이 있어, 신첩 분명 사부에게 가르치고 단속하게 하였사오니 이런 일은 다시 없을 것이옵니다."

 

황제는 천천히 차를 모금 마시고 말했다.

 "짐도 본래는 아이가 어리면 반드시 노는 데만 정신이 팔릴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짐이 영황이 글씨를 연습할 소매를 들추는 것을 보니 팔뚝에 온통 상처가 나있더군. 물으니 그제서야 오늘 영황이 어화원에서 장난치다가 가산에 부딪혔다고 하더라." 

황제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오래지않아 고요해지며 말을 이었다.

 "허나 영황의 시중을 드는 열 몇 사람 중에 이를 알고 있는 자가 하나도 없더군."

 

혜귀비가 "어머나"하고 외치고는 뒤이어 말했다.

 " 노비들이 참으로 조심스럽지 못하옵니다. 영황에게 옷을 갈아입혀주면서 어찌 상처를 보지 못했단 말이옵니까? 너무 부주의한 아니면 옷이 본래 그들이 영황에게 갈아입혀 것이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

 

귀비가 말을 마치자 황후는 곧장 조용히 귀비를 흘겨보며 억지로 아직 귀비를 눈치채지 못한 여의만 쳐다보았다. 여의는 내색하지 않고 부용소를 집어 천천히 먹으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을 뿐이었다.

 "귀비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영황이 겉에 걸친 옷은 임시로 껴입은 것이고 안에 입은 옷은 사나흘이나 갈아입지 않아 기름 자국이 모두 시커멓게 눌어붙어있는 것을 짐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얼굴에 죄책감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모두 신첩이 챙기지 못한 탓이옵니다. 다들 영황은 어미 없는 아이라 하지만, 신첩은 각별히 영황을 아끼고 특별히 사람을 보내서 돌보게 하였사옵니다. 사람이 많아서 일손이 어지러워져 오히려 좋지 않을 것을 어찌 알았겠사옵니까. 황상께서는 안심하시옵소서. 나중에 신첩이 직접 아가소에 가서 노비들을 엄히 처벌하여 일벌백계 하겠나이다."

 

황제가 냉랭하게 말했다.

 " 노비들은 짐이 알아서 처분할 것이오. 그대도 마음쓰지 않은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들이 영황을 어미없는 아이라 업신여겼을 뿐이오. 그래서 짐이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는데, 영황에게 돌봐줄 있는 어미를 찾아주는 것이 좋겠소."

 

황후가 어리둥절해하며 미처 반응하지 못할 , 혜귀비가 벌써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황상, 신첩 슬하에 자식이 없어 오랫동안 적적하였사옵니다. 황상께서 신첩의 아이를 바라는 마음을 헤아리시어 영황을 신첩이 맡아 기르게 해주시옵소서. 신첩, 반드시 힘닿는대로 어미된 책임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돌보겠사옵니다."

 

황제는 여의를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한비도 같은 생각인가?"

 

여의가 잠시 이리저리 생각해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안심하신다면 신첩은 무척 기쁠 것이옵니다."

 

황후가 말했다.

 "귀비와 한비 모두 영황을 좋아하니 황상의 뜻은......"
황후는 차분하게 미소지어었다.
 
“사실 신첩이 어찌됐든 아이를 낳아 길러보았으니, 만일 황상께서 마음놓으실 있으시다면......

 

황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대들이 모두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짐이 알겠소. 허나 아이와 그대들의 마음이 맞아야 비로소 좋은 것이지. 짐이 이미 사람을 시켜 영황을 데려오라 하였으니 영황이 누구를 양모로 삼고 싶어하는지, 누구에게 짐의 대황자를 자식으로 삼는 복이 있을지, 영황이 스스로 정하게 하겠소."

 

이야기하고 있으니 시종이 영황을 데리고 들어왔다. 영황은 벌써 여덟 살이 되어, 키는 비록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조금 컸지만 도리어 여위었고, 얼굴 혈색도 조금 누렇게 떠서 아무래도 기운이 없어보였다. 여의는 영황이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없는 세상일을 아는 눈이 있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따뜻하게 손짓하여 영황에게 가까이 오라 하고는 모든 후비들을 가리키며 자애롭게 말했다.

 "영황, 여기는 너의 어마마마와 혜마마, 한마마시다. 아비에게 말해보거라. 너는 누구를 어미로 삼고 싶으냐?"

 

영황은 비빈들을 차례차례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바마마, 소자 어머니가 있사옵니다. 소자의 어머니는 부찰 제영이고 아바마마의 철비이옵니다."

 

황제는 어여삐 여겨 영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구나. 어미는 떠났고 누구도 너의 어미를 대신할 없지. 아비는 그저 너를 보살피고 어미처럼 너를 아껴줄 사람을 찾는 것이란다."

 

영황은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뻗어 배를 누르자 귀비가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영황을 안으려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영황, 이리 , 혜마마에게 오너라! 혜마마가 안아줄게.

 

여의도 미소를 지으며 부용소 조각을 들고는 말했다.

 "착하지. 먼저 간식을 조금 먹고나서 가보거라."

 

영황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부용소를 쥐고 여의의 품으로 달려들어 여의를 바라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귀비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지며 한없이 길을 잃은 맥이 빠졌다. 황후는 오히려 상냥한 얼굴로 웃음을 띠며 여의에게 말했다.

 "축하하네, 한비. 아들을 얻었군."

 

여의는 영황의 손을 잡고 부용소를 먹여주고는 급히 물을 마시다 사레들리지 않도록 하다가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아이를 신첩이 맡아 기르게 하여 안심하실 있다면 또한 신첩의 복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이 봄볕처럼 따사로왔다.

 "이런 모자의 인연은 전생에 덕을 쌓은 것이니 영황이 그대를 선택했다면 앞으로 그대는 영황의 어미인 것이다."

 

혜귀비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상, 영황은 그저 좋아하는 부용소를 보고 것이옵니다. 이번 것은 무르고 영황이 다시 선택하게 하시옵소서. 신첩도 과자를 들고 있을 것이옵니다."

 

황제의 눈빛이 마치 녹아 흐르는 봄의 냇물처럼 포근했다.

 "됐다. 그대의 몸이 그리 좋지 않으니 아이의 심한 장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그대는 항상 짐의 곁에 있어야 하니, 한비가 그대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한가하니 영황을 한비가 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의는 본래 동안 넘치도록 억울함을 당했지만 황제의 말을 들으니 마음 구석이 뭉클하여 마치 모든 것을 했다. 여의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따뜻하고 맑은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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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각주 2, 3에 시의 전문이 있었습니다만, 부득이하게 생략했습니다. 시 해석에 매달려있다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더라고요ㅠㅠ

2. 이쯤되면 아약과 여의는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서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거 아닌 가 싶습니다. 10년, 20년 지기여도 저 정도면 같이 안 놀지 않나요. 어서 그만 헤어지시죠.

3. 그동안 맥북으로 작업하느라 몰랐는데, 오랜만에 윈도우 PC에서 보니 맙소사 제가 진지200% 궁서체로 올리고 있었더군요. 맥에서는 꽤 괜찮은 세리프 체로 보였는데... 으아니 그동안 이 진지진지한 걸 어떻게 보신 거죠 ㄷㄷㄷ








  1. 여의관(如意馆): 청나라에서 황실에 그림을 바치는 기구. 이곳에서도 전국 각지의 회화 장인, 서예가, 자기 장인들을 모았으며, 여의관에 들게 되는 것도 실력을 인정받는 중요한 일이었다. [본문으로]
  2. 송대 오문영(吴文英)의 <완계사(浣溪沙)>에서 따옴. [본문으로]
  3. 송대 이기(李祁)의 <청옥안(青玉案)>에서 가져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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